도시는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 - 불평등과 고립을 넘어서는 연결망의 힘
에릭 클라이넨버그 지음, 서종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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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의 물리적 특성이 인간의 행동과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개념은 매우 흥미롭다. 이런 사례들을 쭉 훑고 있으면 역시 물질이 우선, 관념이 나중이라는 철 지난 유물론이 맞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물론 이런 생각은 영화 <매트릭스>를 보자마자 다시 뒤집히긴 하지만.


언젠가 신도시의 도시 계획이 어떻게 인간을 살찌게 만드는지 읽은 적이 있다. 이는 추정과 주장이 혼합된 선언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사실이었다. 현대의 도시 구조는 상업 지구와 주거 지구가 명확히 나뉘어 있다. 대형 마트는 도시 외곽에 위치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반드시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이런 마트에 매일 가는 건 어려워 사람들은 대량으로 물건을 구매한다. 1+1 상품은 이득으로 느껴지지만 사실은 불필요한 상품 1개를 추가로 얻어온 것이다. 이 상품은 냉장고 안에서 썩거나 당신의 몸으로 들어가 뱃살 축적의 주역이 된다.


아파트 단지 곳곳에 정육점과 채소 가게, 작은 마트가 있다면 사람들은 필요한 게 있을때 마다 걸어 나가 소량만 사 올 것이다. 휘발유를 쓸 일도, 그걸로 공기를 더럽힐 일도, 운동 부족의 될 일도 없다. 옆집, 윗집, 아랫집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얼굴을 익히는 건 덤이다. 현대의 도시 구조는 에너지를 엄청나게 소비하고, 인간을 돼지로 만들고, 파편화시킨다.


도시의 구조를 바꿔 얻을 수 있는 변화는 이밖에도 많다. 동네에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 공원, 도서관, 체육관 등을 만들면 범죄율과 주민 간 갈등을 줄일 수 있다. 주차 문제나 층간 소음으로 시비가 붙어 심심찮게 칼부림이 나는 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 이웃이 매일 체육관에서 인사를 나누고, 공원에서 개를 산책시키며 새로운 사료에 대한 정보를 나눈 사람이라면 그의 뱃속에 칼을 찔러 넣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일까?


파편화된 인간은 서로를 더 쉽게 증오한다. 증오는 소통을 방해하고 부족한 소통이 증오를 고착화시키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하지만 경계가 없는 곳에 서로 모이게 되면, 비록 살가운 대화나 친밀한 감정이 오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관계에는 극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그는 매너 없는 미친 또라이가 아니라 멀쩡하게 생긴 이웃인 것이다.


폭압을 일삼는 독재국가가 정보과 국경을 살벌하게 통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들은 외부인을 적으로, 뿔이난 도깨비로 정의함으로써 내국인의 마음에 분노의 씨앗을 심는다. 그 분노는 주민들을 결속시키는 열쇠가 된다. 그런데 외부 사람들이 하나둘 왔다 갔다 하며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고 삶을 공유하면 자기 생각이 편견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계층 간 갈등, 빈부 격차로 인한 민주주의의 위기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도시가 빈자와 부자의 도시로 양분화되면 끝끝내 서로의 삶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부자 도시 사람들은 막대한 세금을 들여 가난한 도시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들의 삶에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공감할 기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책 매우 지루하고, 그저 사례를 나열하는데 그치고 있음에도 주장하는 바가 그렇게 공허하지 않은 이유는 사람들에게 행동의 변화를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책은 사람들에게 도서관에 가라거나 공원으로 나오라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도서관에 가고, 공원에 나갈 수 있도록 도시의 구조를 바꾸자는 것이다. 이는 도시 설계를 담당하는 몇몇 입안자들의 생각만 바꿔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단지 내에 텃밭이 있고 세대마다 일정한 공간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자기 땅을 가꾸며 이웃과 만나고, 그 땅에서 난 것들을 서로 나누지 않을까? 이웃들과 친하게 지내세요, 만나면 인사를 나누세요 라는 포스터를 붙이는 것보다는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이 책이 아쉬운 점은 이러한 변화가 그 변화를 이끌 공공 혹은 민간 사업자에게 어떠한 이득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한 정량적 고찰이 미비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금싸라기 땅에 왜 상업용 빌딩 대신 도서관을 지어야 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왜 아파트 한 동을 더 짓는 대신 텃밭을 만들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답을 줘야 한다. 입법으로 강제할 수도 있지만 입법자들의 표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과 밀접한 이해관계를 이루는 법이다. 공공의 이익, 민주주의의 발전 같은 추상적 개념으로는 인간을 바꿀 수 없다. 자본주의 세상에선 선을 추구하는 사람이 더 교활해야 한다.


새로운 기술이 갖는 가능성을 고찰하지 않는 점도 많이 아쉽다. 최근에 20~30대가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의 교류 사례를 본 적이 있는데, 이들은 익명의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 혼자 먹거나 쓰기엔 양이 많은 음식물과 물건을 나누고 있었다. 교류를 나눌 물리적 공간이 없음에도 이러한 활동은 활발하게, 자발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새로운 도시 정책을 입안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은 효과가 크지만 그만큼 느리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들은 이러한 제약을 뛰어넘는 잠재력을 지닌다. 아주 작은 물리적 변화만으로도(예컨대 현관 앞에 거주민들만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공용 락커룸을 비치하는 것) 이러한 활동을 증폭시킬 수 있을 것이다.


도시를 바꾸는 일은 다학제적 협업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특정 행동을, 자연스럽게 유도해내는 일은 오랜 시간 어포던스를(affordance) 연구해온 UX 디자이너보다 잘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건축법도 모르고, 어떻게 집을 지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UX 디자이너, 건축가, 엔지니어, 공무원, 입법 전문가 등이 거대한 콜래보레이션을 이루기 위해선 이들의 노력이 시장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 주도의 프로젝트 도시가 한두 개 진행될 뿐 전국으로 확산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쉽게 말해 이렇게 지어진 도시의 집값이 다른 곳 보다 훨씬 비싸고, 그 프로젝트에 참여한 주체가 더 많은 돈을 벌고, 그래서 이게 장사가 된다는 판단이 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혹자는 이런 생각을 대단히 속물적이라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불어 사는 세상, 좋은 세상 같은 공허한 캠페인으론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행동을 바꿀 수는 없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인간의 행동은 더 쉽고, 더 편하고,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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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징비록 (패브릭 양장 에디션) - 국보 132호 오리지널 표지 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류성룡 지음, 김문정 옮김 / 더스토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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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고르라면 일제강점기와 임진왜란이 아닐까 싶다. 공교롭게 둘 모두 왜의 소행인데,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질투와 야욕은 실로 역사적 뿌리가 깊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는 책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건 역시 <난중일기>다. 성웅 이순신이 왜란 당시 쓴 일기로 고위 공직자의 삶과 업무를 이보다 더 자세히 알려주는 책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은, 솔직히 재미가 없다는 데 대부분 동의를 할 것이다. <난중일기>는 일기보다는 일지에 가까운 책이다. 문장은 단순하다. 지나치게 단순하다. 이순신은 한자어의 선택에 있어서도 문학도보다는 공학도에 가까운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책을 읽어보면 확실히 감정과 소회가 배제된 차가운 책이라는 걸 느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징비록>이 있다. 이순신을 수군통제사로 전격 발탁한 서애 류성룡의 역작.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이 책은 말 그대로 한탄과 후회, 분노와 일갈로 가득하다. 류성룡은 당시 조정의 넘버 2인 좌의정에 있었지만 이순신은커녕 자신의 좌천도 막지 못했다. 낙선한 정치인만큼 비루한 존재가 없는 법인데, 류성룡은 결코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전장을 누비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 나간다. <징비록>은 그 과정에서 겪은 울분과 분노를 그대로 쏟아낸다.


그래서 이 책은 무척 재미있다. 이 정도 흡입력을 갖춘 비문학 도서는 독서 인생을 통털어도 손에 꼽을 정도다. 특히 당시의 조정, 요즘 말로 하면 청와대 내부에서 어떤 말과 결정이 오갔는지를 확인하는 건, 어떤 말로도 그 흥분을 표현할 길이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은 당시 이순신의 천거와 좌천, 활약과 명성에 관해 엄청난 이야기가 있었을텐데 이상할 정도로 기록이 적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본인이 직접 천거한 인물인 탓에 그에 대한 평가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칭찬이 과하면 자찬이 되고, 비판이 과하면 이상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사적 측면에서의 기록들이 부족한 것은 많이 아쉽다. 이는 문관의 한계로 볼 수도 있지만, 전문 영역이 아닌 것에 이러쿵저러쿵 언급하지 않는 겸손함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둘 모두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 고안한 군사 전술을 딱 한 번 논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군사 전문가의 책을 읽고 자신의 방법이 언급되는 것을 보고 매우 뿌듯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내게는 이게 전형적인 아마추어의 기쁨으로 보였다.


역사를 공부하는 내내 임진왜란의 승리는 늘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역사책은 단순히 이순신의 활약으로 퉁치고 마는데, 그게 실제로 어떤 전술, 전략적 효과를 가졌던 걸까? 왜는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고 개전 두 달 만에 평양성까지 함락했음에도 손바닥만한 땅 한 조각 얻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설령 100만 대군이 몰려왔다 해도 한 나라로 치면 많은 수가 아니다. 요즘으로 치면 수원시의 인구 정도인데, 이만한 인원으로 전 국토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파죽지세로 평양까지 몰려왔지만 그만큼 전선은 길어졌다. 후방을 완전히 점령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전쟁은 빠르게 끝나야 했다. 본토와 후방에서 올라오는 보급이 원활했다면 장기전도 가능했겠지만 '이 길목을 이순신이 차단' 한 것이다. 육로 보급은 운반 자체도 힘들고 습격을 막기 위해 상당한 병력까지 투입돼야 한다. 운송 병력을 더 투입하면 안전하게 보급은 가능하겠지만 그 인원이 먹고 쓰는 물자로 인해 효율은 상당히 떨어진다.


그래서 수로는 중요했다. 아니, 치명적이었다. 수군을 무시하면 이순신은 병력을 상륙시켜 후방의 육군과 합세해 왜군을 상하로 압박할 수도 있었다. 왜군의 빠른 진군이 가능했던 것은 군대가 강했던 이유도 있지만 대부분이 싸움도 하기 전에 도망을 쳤기 때문이다. 믿을만한 장수가 있다면 흩어진 군대와 국민은 쉽게 뭉쳤다.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개전 초기의 허무한 패배들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고위 관리들의 무능력이 큰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관리들은 전쟁이 나자마자 도망쳐 숨었다. 말을 버리고 평민의 옷을 훔쳐 입은 뒤 험한 산길을 걸어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말단 병사들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 명망 높은 장수들도 별 게 없었다. 조선의 장수들은 대부분 북방의 여진족을 상대로 실전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었다. 거친 북쪽의 오랑캐를 상대하던 내가 고작 왜놈들을 못 이기겠느냐는 자만이 왜군을 과소평가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신립은 좁은 산길에서 왜군을 맞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현재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는 이유로 드넓은 평야에 진을 친다. 아마 태어나서 조총의 위력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의 마지막 희망은 그렇게 충주에서 사라져 버린다. 신립은 패배한 장수답게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대장군다운 기개를 떨친 그에게 박수를 보내야 할까?


이러한 사실들은 위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준다. 훌륭한 전략과 완벽한 전술은 두번째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건 국민이 믿을 수 있는 능력 있는 리더다. 선조는 왜군이 온다는 소문을 듣기 무섭게 피난을 갔다. 자식들은 전장으로 뛰어 들어가 군대를 모집하고 포로로 잡혔음에도 말이다. <징비록>을 보면 당시 땅에 떨어진 왕명의 하찮음을 읽을 수 있다. 국민의 마음 한편에는 조선이나 왜나 그놈이 그놈이라는 생각이 들만했다. 누가 점령을 하든, 우리의 삶은 그대로일 것이다라는. 이런 나라에선 어떤 국민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힘을 쓰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순신의 존재는 우리 민족의 큰 복이 아니었나 싶다. 이순신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우수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우대했다고 한다. 말단 병졸이라도 누구나 장군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 그럼에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했다는 것을 보면 상벌에 대한 아주 명백한 기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양반이, 그것도 삼도의 수군을 통제하는 최고위 장군이 평민의 의견을 귀담아듣는 건 같은 양반들이 보기에 우매하고, 상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그 파격들이 결국 그를 두 번이나 백의종군하게 만든 이유가 아니었을까?


<징비록>에는 배우고, 또 배울 것들로 가득하다. 연말을 이 책과 함께하면 새로운 다짐과 깨달음이 당신의 새해를 밝게 비출 것이다. 아무튼 우리 세대의 삶은 위기가 아닌 적이 없고, 늘 패배의 공포로 가득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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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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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할 사람은 다음 두 가지 사례로 구분된다. 아래 이야기를 읽고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은 읽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일말의 위화감도 느끼지 못한다면, 절대적 믿음을 갖고 일독해 보길 권한다.


A는 인공지능 스타트업의 CTO로 재직 중인 30대 청년이다. 평소 스마트한 일처리로 명망이 높고, 유쾌한 성격 탓에 조직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없어서는 안 될 직원으로 여겨졌다. 그의 회사엔 3명의 인도인 직원이 있다. 어느 날 그들과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인도인 중 하나가 '청국장'을 먹자고 했다. 그러자 A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한국인 다 됐네.' 하며 웃었다.


B는 자기계발서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는 장애로 걷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게 됐다. 평소처럼 멋진 강연을 마친 뒤 그는 청중을 향해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희망을 가지세요.'


자, 어떤가? 당신은 이 책을 읽어야 겠는가? 그러지 않아도 되겠는가?


차별의 가장 큰 특징은 당하는 사람만 존재하고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별을 부르짖는 사람들에겐 너무 예민하다거나, 피해의식이라거나, 자격지심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는다. 차별을 인지시키는 건 늘 어렵고 고된 일이다. 어쩌다 그 일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결국엔 다수의 가해자들이 그 사실을 '수용해 주는 것'으로 마무리 될 때가 많다. 그게 차별이라면 OK, 내가 받아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종 차별금지법은 다수의 인내와 관용이 베푼 일종의 '시혜'로 여겨진다. 차별은 명백히 존재하고, 그것의 피해가 발생하며, 마땅히 사라져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당하는 쪽은 그 철폐를 구걸해야만 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우리의 일상에는 차별이 만발해 있다. 일분이 아까운 출근길, 버스 한 대가 휠체어에 탄 사람을 태우기 위해 5분 동안 정차한다면 사람들은 기함을 일으킬 것이다. 저 사람 하나 태우자고 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겪는다면 그게 정말로 '합리적'인 법인지 묻는 사람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하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라는 전제에 동의한다면, 행복의 조건을 1초만에 버스에 뛰어오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휠체어에 타고 올라야 하는 사람에게 맞춰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스스로를 세심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누구나 차별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지치고 짜증을 낸다. 그럴때면 존 롤스의 정의관에 입각하여 세상을 다시 한 번 돌아보기 바란다. 당신, 아니 당신의 자식이 장차 어떻게 태어날지 모르는 어둠의 장막 뒤에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정상인' 혹은 '주류인'으로 태어날 걸 확신하고 기울어진 세상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모두를 위한 평편한 세상을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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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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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은 삶의 잔인함과 인간의 비열함을 가장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작가다. 그런데도 표현은 은은하고 절제되어 있다. 바로 이 점이 김애란의 소설을 현실과 절묘하게 포개어 주는 묘수인데, 나는 그녀의 소설보다 더 정확하게, 삶의 민낯을 드러내는 이야기를 본 적이 없다.


<바깥은 여름>은 단편선이고 7개의 소설이 담겨 있다. <침묵의 미래>를 제외하면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이다. 그런데 그건 <침묵의 미래>가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다른 소설들과 확연히 다른 결을 지녔기 때문이다. 마치 탁란을 해놓은 뻐꾸기 알같이, <침묵의 미래>는 같이 선 소설 중에 가장 과잉되어 있다. 차분히 가라앉은 말투 속에 배어 나오는 심리의 절묘함은 확실히 다른 소설들에서 두드러지고, 그것이 김애란을 여타 작가와 구별해주는 징표가 아닐까 싶다.


그녀의 소설은 언뜻 보면 모두 지루하다. 우리가 익숙히 경험하는 현실을 너무 리얼하게 구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매일 보던 풍경에선 뭔가 특별한 것이 발견되지 않는 법 아닌가. 그러나 인물들의 발걸음을 차분히 관조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가슴이 내려앉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김애란의 소설은 마지막 한 페이지를 위해 전체를 인내하는 소설이다. 한 여름을 버틴 얼음이 겨울에 와서 녹는 기분. 두 번, 세 번 같은 페이지를 연달아 읽을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뜨겁게 즐기기 위해 독자는 인내를 배워야 한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었고 거기서 대상을 받은 것이 바로 <침묵의 미래>였다. 그래서 나에겐 어떤 편견이 깃들었었나 보다. 혹시 나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김애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줬으면 한다. 우리 같은 사람이 읽지 않는다고 잊힐 소설가는 아니지만, 이런 작가는 더 많은 사람이 만나볼 가치가 있다.


장편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김애란은 단편이 더 어울리는 작가 같다. 마지막 한 페이지를 위해 책 한 권을 인내하는 건 조금 심하지 않은가? 물론 <파이 이야기> 같은 소설도 있기는 하지만. 혹시 이것도 또 하나의 편견일지 모른다. 그 편견을 깨기 위해 다음엔 그녀의 장편을, 아니 김애란의 모든 소설을 읽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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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
마크 해던 지음, 유은영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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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주인공은 열다섯 살 자폐 소년 크리스토퍼다. 그는 서번트증후군을 의심케 할 정도로 수학에 탁월하다. 최근엔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웃집 마당에서 그 집주인이 아끼던 푸들이 쇠고랑에 찔려 죽은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크리스토퍼가 개의 죽음을 추적하는 미스터리와 이 소년에게 닥친 고난의 가정사가 두 축을 이룬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본 사람이라면 자폐아가 얼마나 유쾌한 코미디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잘 알 것이다. 검프가 보여주는 순진함, 솔직함이 때로는 복잡한 인간사를 꿰뚫는 촌철살인의 유머가 되듯, 크리스토퍼의 행동에도 동일한 원리가 내재되어 있다.


이 소설의 화자가 자폐아로 설정된 이유는 명확하다. 인간의 복잡한 감정, 그러니까 체면, 인사치레, 행동을 변명하는 각종 수사 같은 걸 이해하지 못하는 소년이기에 그는 사태의 본질을 가장 명확히 바라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는 각종 문제에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힌트가 된다. 예컨대 크리스토퍼의 아빠가 자신의 아내(크리스토퍼의 엄마)를 미워하는 이유는 그녀가 자식을 돌보는 일에 소홀했기 때문에, 그래서 엄마가 될 자격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러한 사실을 발설한다. 어떤 장소에서든, 누가 있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내면의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설정이 주는 효과는 더 명백하다. 크리스토퍼는 어른들의 만류와 아빠의 강한 반대에서 불구하고 끝까지 강아지 살해범을 찾아나선다. 그 과정에서 오랫동안 감춰졌던 진실들이 밝혀지고 아주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기로에 선다. 자폐아가 보호자의 도움 없이 살던 동네를 떠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 용감한 소년은 최초이자, 최후가 될 수도 있는 발걸음을 내딛는다.


유쾌한 문체와 독창적 구성이 돋보이는 이 소설은 영국의 유명 영화사 워킹타이틀이 만드는 로맨틱 코미디 같기도 하고, 벌어지는 소동의 결로 보면 미국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을 떠올리게 하는데, 주인공이 내면의 성장을 이루고 풍지박산 났던 가족이 재결합한다는 면에서 그렇다. 두 부류의 영화를 감명 깊게 본 사람이라면 이 소설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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