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왜란과 호란 사이 - 한국사에서 비극이 반복되는 이유
정명섭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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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과 호란 사이에 고작 38년의 시간차가 있었다는 건 놀라운 사실이다. 10살에 왜란을 맞아 17세에 드디어 전쟁의 끝을 맛본 사람은 50살이 채 되지 않아 다시 호란을 맞아야 했다.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가장 끔찍했던 두 전쟁을 한 인생으로 맞은 것이다. 어떤 느낌이었을까? 워낙 악몽 같던 시절이라 정작 본인은 느끼지 못했을지 모른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 달리느라 그런 걸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을지도 모르고.


두 전쟁엔 리더의 무능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선조와 인조는 전쟁이 났다는 말을 듣기 무섭게 도망가기 바빴다. 텅 빈 한양을 보며 백성들은 통곡했다. 왕이시여 왜 백성을 버리나이까. 겁이 많은 두 임금은 깊숙이 숨어 나오길 꺼렸고 분조를(위기시에 임시 조정을 만드는 것. 주로 세자가 이끌었다) 구성해 백성과 군사를 독려하게 했다. 역사엔 광해군으로 추락한 엉터리 왕이 왜란 당시에는 오히려 선조보다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명나라는 그런 선조를 은근히 꾸짖고 탓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조선에 그다지 유용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이 무능한 임금의 권력욕은 커져만 갔기 때문이다.


선조와 인조는 권력욕이 많았다. 사실 욕심보다는 집착이라는 말이 맞을 것 같은데, 확실히 두 사람은 옥좌를 뺏길까봐 두려워했다. 웃기지 않은가? 그 위에 누구도 없는 왕이다. 모든 권력을 쥔 사람에게 어떻게 권력을 뺏어올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조선의 역사를 보면 왕권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다. 정도전과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며 신하가 다스리는 국가라는 이념을 내세웠다. 왕은 명예와 상징을 갖고 실권은 신하가 쥐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조선의 왕들은 역대로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본사의 허락 없이 계열사의 사장이 될 수는 없는 법. 명나라는 존재하는 내내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했다. 재가를 볼모로 원군을 요청하는가 하면 조선에 주둔한 명나라 군사의 보급을 강요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막대한 국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두 사람의 정통성 문제는 안 그래도 취약한 권력에 불을 붙이는 기름이 된다. 선조는 조선 최초로 적자가 아닌 왕이었다. 여염집의 말을 그대로 쓴다면 서자가 유산을 물려받은 건데, 적장자의 권위만을 인정하던 당시의 세태 속에서 그 무시가 오죽했겠는가. 선조는 늘 이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자기보다 인기를 얻는 장수나 신하가 있으면 시기하고 미워하다 죽이기까지 했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까지 미워해 광해군을 폐세자 하고 뒤늦게 얻은 적자 영창대군을 새롭게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웃긴 건 그럴수록 명에 대한 사대는 심해졌다는 것이다. 스스로 권위를 세울 힘이 없으니 외부의 큰 세력을 통해 그 권위를 인정받을 수밖에 없다. 너희가 뭐라고 하든 나는 대국의 황제가 인정한 사람이다. 믿을 구석은 이거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는 이때를 계기로 관념적이었던 사대가 실질적이며, 동시에 맹목적으로 변했다고 지적한다.


인조는 이보다 더한 경우였다. 애초에 왕이 될 수 없던 사람이 몇몇 사대부들과 반정을 일으켜 권력을 차지한 사람이다. 말이 반정이지(정의를 되돌린다) 엄연한 쿠데타다. 신하의 입장에선 자신이 세운 왕이니 자기가 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 신하들을 계속 곁에 두려면 부정부패를 눈감아 줄 수밖에 없다. 나라의 곳간은 비고 백성의 고혈은 쭉쭉 뽑혀나간다. 그나마 인물이 남아있던(류성룡, 이항복, 이순신, 곽재우 기타 등등!) 왜란 때와는 달리 호란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팔도의 군사들은 남한산성 근처에 주둔하며 몸을 사렸다. 그들은 어쩌면 인조가 전쟁통에 그냥 죽어버리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왜란 때와는 달리 별다른 의병 활동도 없었던 것을 보면 백성들의 마음은 한결같았던 것 같다. 여진의 왕이든 조선의 왕이든 그놈이 그 놈이다.


정통성을 상실한 권력은 늘 이렇다. 이것은 비단 조선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둘러보자. 해방 직후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국민의 지지를 받던 김구를 암살했다. 부정선거와 부패는 끝 모르게 이어졌고 결국 4.19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희망은 잠깐.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진 군사독재는 그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참극을 낳았다. 권력을 찬탈한 사람들은 그 대가로 뭔가를 버려야 했다. 국민의 자유, 국민의 안전, 민족의 통일.


2020년은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게 된 지 34년이 되는 해다. 누가 나에게, 이제는 우리도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통의 권력을 가졌다 라고 자신에 차 외친다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조선이 겪은 비극은 현대에도 만만치 않다. 수백 년 전의 악몽이 똑같이 되풀이되는 걸 보면 이걸 숙명이라고 봐야 하나, 결국은 아무도 극복할 수 없는 흉터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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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탕 (1, 2권 합본 리커버 에디션) - 김영탁 장편소설
김영탁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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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탕을 끓이기 위해 미래에서 온 남자가 있다. 이름은 이우환. 고아였고, 부모의 존재는 전혀 모른다. 성년이 되어 고아원을 떠나올 때 원장이 딱 두 개의 이름만을 알려줬다. 이순희, 유강희. 우환의 부모였다.


이우환은 성인이 된 직후부터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까지 한 식당의 주방 보조를 했다. 배경은 2060년쯤의 부산이다. 세상은 대규모 해일로 초토화 되었고 부자들은 살기 위해 높은 곳으로 이사 갔다. 가난한 사람들만이 바닷물이 빠진 소금 땅 위에 집을 짓고 산다. 해일은 두 번, 세 번 살만해지면 다시 돌아왔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모든 걸 잃었다. 그리고 소금 땅 위에 다시 집을 지었다.


가축은 사라진지 오래라 미래엔 쥐의 유전자를 조작한 괴물을 먹고 산다. 그걸로 곰탕 비슷한 걸 끓여 팔지만 아무리 해도 예전의 그 맛이 나지는 않는다. 우환의 가게 주인은 한때 부산에서 가장 유명했던 곰탕집의 국물 맛을 떠올린다. 죽기 전에 그걸 한 번 재현해 보고 싶다. 주인이 아련한 옛 기억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긴다. 어느 순간 우한의 모습이 그 추억과 겹쳐진다.


잦은 해일 이후 바닷물은 저 멀리까지 빠진 상태였고 그 한가운데에 정체불명의 씽크홀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걸 블루홀이라 불렀는데, 누가, 언제부터 그 구멍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통로라는 걸 알아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사실이 알려지자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 힘 있는 자들의 부탁을 받아 과거로 향하기 시작한다. 주인은 우환에게 곰탕을 끓이는 법을 배운 뒤 재료를 사 가지고 돌아오면 식당 하나를 내 주기로 약속한다. 시간 여행에는 엄청난 위험이 따른다.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반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우환은 주인의 부탁을 받아들인다. 그는 이렇게 살다 죽나 거기로 가다 죽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도착한 과거에서 시간이 꿈틀거린다. 주방 보조에 불과했던 이우환에게 미래를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사건들이 차례로 도착한다. 그 중에는 이순희, 유강희와의 만남도 포함되어 있다. 우환은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진지도 모른 채 두 사람의 사랑을 막으려 한다. 그 사랑의 결과가 고아 이우환이라는 불행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린 부모의 삶에 엉켜버린 나이 든 자식의 시간. 끈질기게 방해를 해보지만 세상 일은 과거나 미래나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철든 자식은 매일 새벽 어린 부모에게 곰탕을 내놓는다. 그들이 국밥 한 그릇을 맛있게 비우는 걸 바라본다. 우환의 마음에 알 수 없는 따뜻함이 몰려온다. 철없는 두 아이들은 우환의 젊은 부모,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곰탕 수업은 끝났고 아롱사태와 양지머리도 구해놨다. 이제 다시 가족 하나 남지 않은 미래로 돌아갈 시간이다. 우환의 흔들리는 마음이 새로운 톱니바퀴를 돌린다. 세 사람의 시간은 대격변을 향해 나아간다.


<곰탕>은 시간 여행이라는 진부한 이야기를 소재로 삼지만 풀어내는 방식은 범상을 넘어선다. 제목답게 한국적인 맛을 추가해, 볼품없고 작은 개인이 거대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50년 전통의 원조 곰탕집처럼 푹 삶아 고아낸다. 별거 아닌 이야기에 깊은 맛을 추가했다. 읽는 내내 '새롭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카카오 페이지에서 연재한 탓인지 기승전결이 1회분에 맞춰 움직일뿐 큰 이야기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답답함은 단점이다. 600페이지가 넘어가는 소설은 곁가지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한데 꼬아 거대한 줄거리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2부가 넘어가는 시점부턴 확실히 이야기에 속도가 붙는다. 지루함이 느껴질 때면 이 말을 기억하며 인내하기 바란다. 실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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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
노승대 지음 / 불광출판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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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종교엔 이야기가 많다. 역사가 깊다는 건 사람과 호흡한 시간이 길다는 거고, 자연스레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교리로 포섭할 필요가 많았다는 거다. 하지만 옛날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복잡한 교리를 전달하기엔 그림과 이야기만 한 게 없었을 것이다. 보수적 성향으론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로마 가톨릭도 2,000년이 넘는 시간을 구르며 성인, 천사, 구마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여 갔다. 하물며 만신이 기본인 불교는 오죽했겠는가. 이 책은 한국의 사찰이 담고 있는 이야기의 보고를 열어젖힌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관용이란 참 고마운 개념이다. 순혈주의의 독재 아래선 꽃피지 못할 것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뻗어나가며 이야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아마 염라대왕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지옥의 왕으로 알고 있는 이 자는 사실 '야마'라고 불리는 힌두교의 신이다. 중국의 도교는 이 신을 사후 세계의 시왕(十王) 중 하나로 포섭했고 도교 이후 민간의 큰 지지를 받은 불교가 이를 공유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남의 것이라고 배척하고 잘라냈다면 염라대왕과 아홉 판관들이 다스리는 지옥의 이야기는 영원히 암흑 속에 묻혔을 것이다.


불교의 관용은 다른 종교의 신에만 머무는 게 아니다. 꽃, 새, 거북이, 게, 용, 수달 등 현실과 상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을 아우른다. 그래서 불교의 벽화와 사찰은 흥미롭다. 처마 밑에 금돼지 한 마리가 숨어있는가 하면 수달이 서까래를 오르고 야차와 도깨비가 동서남북을 노려보기도 한다. 마치 숨바꼭질하듯 은은히 가려져 있지만 그 존재의 이유와 유래는 흥미롭고 유구하다.


혹자는 이런 게 종교냐고 물을 수도 있다. 체계는 뒤죽박죽 모순 투성이에 복을 바라는 사람들의 염원을 이것저것 기워 붙인 누더기.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우주를 관통하는 절대적 진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신은 고작 인간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존재하는가? 그래서 종교는 딱딱하고 엄격할 수 밖에 없다. 무엇이 옮고 그른지를 명명백백하게 밝히는 것이 절대적 진리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 말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러나 종교는 결국 인간이 만든 문화에 불과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는 세상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자신은 없지만, 종교가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종교는 신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다. 인위적 체계에 불가한 문화에 정통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애꿎은 신이 동원될 뿐. 동일한 신의 이름으로 저마다 다른 진리를 펼치는 인간의 세계를 보면 신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다면 차라리 모두를 정답으로 만드는 게 이 세상에 더 이롭다. 종교의 첫 번째 의무는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사찰이 품고 있는 복잡한 이야기들은 우리의 욕망이 얼마나 다양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에게 삶은 그 자체가 숙제였던 게 분명하다. 삶을 극복하는 그 날까지 행복은 최대로, 고통은 최저로 채우고 싶은 욕망. 종교의 교리는 고매한 진리를 논하고, 이 모든 욕망이 부질없음을 탓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희망을 받아들인다. 그 어떤 높은 생각도 인간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이 책은 사찰을 중심으로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한다. 서로 다른 사찰의 모습에서 유래를 끌어내고 그 의미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시대의 바람과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왜 사찰에 게가 등장할까? 저 창틀에 숨은 다람쥐는 무슨 의미일까? 처마를 들고 있는 저 짐승은 누구인가? 작은 돌 하나도 의미없이 놓인 것이 없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저절로 귀가 모인다. 몰랐던 게 이렇게 많았나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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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다른 나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9
임현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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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다른 나>는 이야기와 현실이 오묘하게 뒤섞인 세계를 허구라는 틀(소설)로 엮어낸다. 액자 안에 액자 안에 액자가 들어간 듯한 느낌인데, 액자와 그림의 경계는 너무나 모호해 이것이 액자를 그린 그림인 건지 그림을 그려 액자 안에 담은 건지 도저히 구분을 할 수 없다.


이 소설은 두 개의 이야기가 뱀처럼 똬리를 튼다. 홀 수장은 아내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로 남편의 심한 건망증을 고백조로 풀어낸다. 아내가 묘사하는 남편의 증상은 심한 치매를 연상케 한다. 남편은 한 번도 기른 적 없는 개가 없어졌다며 소란을 피운다. 보다 못한 아내가 개를 한 마리 사와 집에 두지만 남편은  강아지냐며 아내를 몰아세운다. 참다못한 아내가 남편의 행동을 거론하며 그가 앓는 건망증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뒤이은 남편의 반박은 아내를 기절시킬 정도로 충격적이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건 남편이 자기가 아니라 아내다. 남편은 소설책 한 권을 던지며 아내에게 소리친다. 당신이 믿는 건 전부 이 소설의 이야기라고. 건망증을 앓는 남편은 어디에도 없고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은 전부 허구에 불과하다고. 남편은 땅에 떨어진 약들을 주우며 아내에게 먹을 것을 종용한다. 아내는 이 모든 상황에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짝수 장은 소설가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로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에 자신과 똑 닮은 사진을 '남편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올린 여자를 추적해 나가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소설가는 여자를 만나는 순간 그녀에게서 '이상'을 느끼고 도망치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자기밖에 없다고 자각한다. 그는 듣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소설로 옮긴다.


<당신과 다른 나>는 두 개의 이야기가 평행선을 이루다 어느 순간 교차해 나무뿌리처럼 얽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짝수 장의 여자가 홀수 장의 아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홀수 장의 아내가 심한 망상을 앓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망상에 시달리는 건 오히려 남편이 아닐까? 짝수 장에 등장하는 소설가가 사실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은 채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홀수 장의 남편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셔터 아일랜드>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짝수 장에서 보인 여자의 행동이 남편의 망상을 치료하기 위한 롤 플레이라는 가설을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입자의 위치를 오로지 확률로만 기술할 수 있는 양자 역학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확률이 100%인 단 하나의 진실을 찾고자 하지만 그건 그저 습관일 뿐이다. 현실은 완전히 뒤얽힌 이야기 그 자체, 그러니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말해질 수 있는 모든 이야기의 총합일지도 모른다. 진실은 애초에 그렇게 깔끔하고 명확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이 불편한 사람은 진실이라는 단어를 '현실'이나 '세계'로 대체해도 좋다.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위안이 된다면. 그렇게 해서 당신의 세계가 여전히 단 하나의 진실 위에 세워진 굳건한 성이라고 믿을 수 있다면.


이 소설은 최근에 읽은 그 어떤 소설보다도 복잡하고 어지럽다. 읽고 나면 '이게 뭐야?'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깊숙이 파고들면 두통이 몰려오고, 어느 순간 그 행동이 갖는 의미를 자문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단 하나의 진실을 찾는 건 무의미하고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 미로는 출구가 여러 곳이다. 어느 곳으로 나갈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나는 이야기를 단순한 허구가 아닌 '또 다른 진실'의 위상으로 승격시킨 포스트 모더니즘 소설가들을 사랑한다. 위대한 보르헤스, 이탈로 칼비노, 그리고 폴 오스터. 그들의 향수를 느끼게 해 준다면 그 어떤 이야기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이 소설은 골칫덩이에 불과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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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드릴게요 (동네책방 에디션) - 정세랑 소설집 한국SF작가선 5
정세랑 지음 / 아작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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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의 소설은 무자극 저당도의 사탕 같은 맛이다. 세계를 리셋 하고 싶고, 달리는 기차를 세워 반대로 끌고 가려 하는데, 총 든 테러리스트의 모습은 없다. 조곤조곤, 말랑하게 세계는 변혁을 꿈꾼다.


미래에서 날아온 거대 지렁이들이 지구인과 문명을 모조리 파괴하여 분변토로 뒤덮인 비옥한 땅으로 만드는 이야기는 얼핏 보면 끔찍하다. 수십 미터에 이르는 지렁이다. 생각만 해도 역겨운데 사람과 건물까지 먹어치운다. 크툴루 신화에 기반한 괴기 소설에나 나올법한 이 동물은, 그러나 정세랑의 손을 거치며 파스텔톤의 카툰 렌더링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첫 맛은 심심하지만, 먹어도 질리지 않고, 또 찾게 되는 집밥의 맛이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들은 소화가 잘 된다. 이 단편선은 SF 장르를 표방하지만 하드코어 SF와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다. 차라리 사고 실험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 같다. 이런 세계 라면 어떨까?라는 기발한 생각이 그대로 이야기로 풀어져 나온다. 정통 SF 애호가라면 이런 소설들에 SF라는 푯말을 다는 게 대단히 불쾌할 순 있겠지만, '장르' 소설에 반응하는 독자들을 잡기 위한 애교쯤으로 봐주자. 너무 센 것만 씹으면 이가 아픈 법이니, 가끔은 부드럽고 따뜻한 죽으로 이를 달래자.


정세랑이 다작을 할 수 있는 것도 다 이런 이유 같다. 문장에 큰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고민의 깊이가 얕다는 게 아니라 일단 전진을 하고 보는 것이다. 한번 가보지 뭐,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느낌, 아, 이 정돈 나도 쓰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써 본 사람은 안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를 만났을 때 단단하게 굳어버리는 어깨와 두 손의 마비를.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듯 문장들이 나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정세랑은 요가의 고수 같다. 유연하고, 부드럽고, 기묘하다. 겨드랑이 사이로 얼굴을 내밀어 나를 올려다보는 기분이다.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싶을 때, 지금까지 나는 하루키의 소설을 골라왔다. 이러니 저리니 말이 많아도 그 남자는 확실한 스트레이트가 있으니까. 이제는 그 목록에 정세랑이라는 이름을 하나 더 추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랜만에 영혼을 공유할 작가를 만나 기쁘다. 부디 오래오래, 많이 많이 써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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