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2018년 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원래 한 시간 일찍 출근해서 글을 쓰는 습관이 있어요. 그런데 그맘때쯤 회사를 옮겼더니 출퇴근 시간이 처음으로 1시간 이내로 단축됐습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 회사를 가면 무려 2시간 30분이나 여유가 생긴 거예요. 그 시간을 모두 글쓰기로 보내는 건 어려웠습니다. 집중력이 떨어지거든요. 뭔가 다른 일을 '추가'하면 좋을 것 같았는데, 오래지 않아 해야 할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게임 프로그래밍을 시작했습니다.


게임? 네, 게임이요.


이런 말을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들이 많지만, 게임은 그렇게 단순한 미디어가 아닙니다. 애들이나 하는 유치한 놀이가 아니고, 중독을 일으키는 유해 매체는 더더욱 아니에요. 게임은 이야기, 음악, 미술, 디자인, 수학, 엔지니어링 등으로 구성된 종합 예술입니다. 수용자의 반응을 제대로 예상하지 못하면 실행조차 불가하기 때문에, 만들기 전에 온갖 것들을 고민해야 하는 복잡한 창조 행위이기도 하죠. 저는 20세기의 예술이 영화였다면, 21세기의 예술은 단연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게임에 대한 철학이 확고하다고 게임 프로그래밍을 그냥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3-4개월 동안 유튜브 강의를 보며 똑같은 코드를 따라 짜기만 했습니다. 책도 두어권 사봤어요. 그런데 그렇게 효과적이진 않더라고요. 지나고 나면 기억이 잘 안 났습니다.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도 모르는 채 그냥 외우기만 하는 거니까요. 저는 확실히 실습을 통해 이론을 구성해나가는 스타일인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강의에 나온 게임들을 내 입맛에 맞게 바꾸기 시작했어요. 그러기 위해선 강의에 나오지 않는 것들을 찾아봐야 했고, 돌이켜보면 그때부터가 진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생생한데, 원하는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쩔쩔매다 일주일만에 완성한 날이었어요. 그 순간 이제 내가 원하는 게임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치 진구 구장 외야로 날아가는 야구공을 보며 '소설가가 돼야겠다'라고 생각한 하루키처럼요.


그렇게 해서 '고양이를 줍자'라는 게임이 탄생했습니다.



iOS: https://url.kr/qv9TXt

Google Play: http://bitly.kr/jkIMQ5c7w


제작기간 1년 6개월. 이렇게 간단한 게임을 이토록 오래 만든 이유는 이 게임에 쓰인 모든 코드가 무에서 창조됐기 때문이에요. 어떠한 기능이든 새로운 코드 한 줄을 짜넣기 위해선 처음부터 배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느릴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결국 끝냈습니다.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재미'에요. 단언컨대 '고양이를 줍자'는 그거 빼고는 꽤 잘 만든 게임입니다. 처음이니까 뭐. 새 게임이 나오면 이 자리를 빌려 또 소개드릴게요. 이렇게 또 하나, 하나 축적해 가면서. 저는 제 길을 갑니다. 그럼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위해 Cheers!


*p.s - 제발 게임 좀 다운 받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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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와 같은 말
임현 지음 / 현대문학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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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와 같은 말>이라는 제목으로 이 소설의 줄거리를 예상하기란 불가능하다. 임현의 소설들은 모두가 그렇다. 한국 문학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이야기들. 이야기를 전복하려는 특이한 실험. 그래서 읽기가 어렵고, 읽어도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경우가 부지기 수다. 임현의 소설엔 도전이 필요하다.


그의 소설을 특징하는 단어들을 나열하자면 양자역학, 포스트모던, 다중 시점, 메타 소설, 현실과 소설의 뒤섞임,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의 위협이다. 이중 양자역학과 포스트모던, 다중 시점은 독해를 어렵게, 메타 소설, 현실과 소설의 뒤섞임은 서사에 흥미를 더하는,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의 위협은 그의 소설 특유의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임현의 소설은 이 세 가지의 삼위일체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단 하나의 인생을 경험하기에 '그때 그렇게 했다면' 하는 것은 상상으로 그치고 만다. 그러나 소설은 그 경우의 수들을 동시에 기술할 수 있다. 원자의 위치가 확률로만 분포하다 관측을 통해 하나의 위치로 확정되듯 우리의 선택으로 붕괴된 다른 사건들을 임현의 소설은 길어올린다. 그의 소설은 여러 시간과 시점이 혼재해 있어 이것이 누가 한 말인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가상인지 구별이 어렵다. 그래서 금방 피로해진다.


이 피로를 상쇄하는 것이 서사의 흥미다. 메타 소설이란 소설 쓰기에 대한 소설을 의미한다. 소설이란 결국 소설가가 여기저기서 듣고 경험한 것들에 이야기라는 가면을 씌워 만든 것이다. 훌륭한 소설은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건 바로 내 이야기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이 병적으로 발전하면 작가가 자신의 인생을 훔쳐보고 있다는 생각도 가능하다. 임현은 이 지점까지 이야기를 몰고 나간다. 그것은 소설 속의 소설가와 소설 속의 독자의 대결로 그려지지만 어느 순간 이 모든 이야기를 써낸 임현과 그것을 읽고 있는 우리 사이의 문제로 발전한다.


솔직히 말해 임현의 소설은 전혀 유쾌하지 않다. 그의 소설엔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물때처럼 묘한 불안이 서성인다. 책장을 넘기는 손끝을 타고 검은 불안이 피부 위로 옮겨간다. 이 불안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닦아낼 수가 없는데 애초에 그 불안의 원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은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나 결국 존재하지 않게 된 것들을 사실 옆에 은근슬쩍 끼워 넣어 진짜와 가짜를 마구 뒤섞는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외치지만 머릿속은 온통 코끼리로 가득해진다.


읽기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려는 사람이라면 최대한 임현을 멀리하는 게 좋다. 그러나 나는 임현의 가장 탁월한 점이 바로 이 불안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왁!' 하는 요란함 없이도 사람을 쪼아내는 공포. 임현의 소설은 강바닥의 이끼처럼 착 가라앉는다.


그리고 음지에 사는 생물들은 이끼를 참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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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장소에서 언더그라운드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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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95년 도쿄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살포해 수많은 시민을 죽인 '오움진리교' 테러 사건에 대한 인터뷰집이다. 전편이라고 볼 수 있는 <언더그라운드>에서 하루키가 초점을 맞춘 대상이 '피해자'였다면 이 책의 시선은 '가해자'에게 향해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사이비 종교 따위에 빠진 멍청한 놈들, 싹 잡아 가두면 그만이지 무슨 관심이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의 선과 악은 생각보다 뚜렷하지 않다. 역사상 손꼽히는 악행들은 대부분 선한 의지에서 발현됐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위안부, 인체 실험, 민간인 대학살을 저지르면서도 '대동아공영권' 따위를 굳게 믿은 일본인이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리라 믿는다. 우리나라라고 크게 다를 거 있는가? 대한민국의 군사 독재자들은 모두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일어섰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조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자신들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이비 종교의 신자들을 어딘가 머리 한구석이 고장난 바보라고 간주하면 상황의 해결은 요원해진다. 오히려 그들은 하루하루를 생각 없이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진지하고 섬세할 확률이 높다. 퇴근 후 맥주 한 캔과 함께하는 야구 중계, 스펙터클한 불륜의 수목드라마로는 세상에 넘쳐나는 부조리와 악행으로부터 눈을 돌리기에 충분치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좀 더 진지한 세상, 자신을 괴롭히는 그 부조리에 대해 함께 논할 사람들을 찾게 된다. 괴로움을 토로해도 별난 사람 취급하지 않는 곳,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서로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곳. 사이비 종교는 신도들을 일방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하지 않는다. 교주의 바보 같은 언행이 눈과 귀에 들어와도 수십만의 신도들이 변함없이 강한 믿음을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그곳으로부터 이 세상에선 절대 느낄 수 없는 뭔가를 확실히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개 심신의 안정, 강력한 유대, 삶의 방향성 등이다.


그런 걸 얻기 위해 많은 재산과 삶을 갖다 바치는 게 정상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겐 이렇게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건강을 얻기 위해 필라테스나 헬스, 고액의 PT를 받는 건 어떤가? 인생을 허투루 살지 않기 위해, 혹은 갑자기 찾아온 허무를 채우기 위해 수십만 원짜리 독서 클럽에 가입하는 건? 수백, 수천만 원도 아끼지 않는 덕질은 어떤가? 스타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종교를 초월한다.


단순 비교는 불가하다. 이들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위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는다. 자기계발, 자기만족의 영역을 종교와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 다시 한번 물을 수밖에 없다. 위법 행위가 없는 한 사이비 종교는 모두 옳은 것인가?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사이비 종교를 막을 이유도 없는 것인가? 피해의 기준은 뭘까? 적극적 포교? 그렇다면 독서 클럽에 가입하라고 권유하는 건 포교일까 아닐까? 필라테스가 정말 좋다며 할인권을 건네는 행위는 포교와 어떻게 다를까? 질문을 던질수록 많은 사이비 종교에 사이비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게 애매해진다. 오움진리교도 지하철 테러를 저지르기 전까진 당국의 주목을 받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순수한 요가 단체로 생각했고, 지금도 남아있는 신자들은 여전히 그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심지어 사린 가스 테러를 오움진리교가 벌인 일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도 많다. 왜냐하면 그들 주변엔 정말로, 그런 일을 저지를 리 없는 순수한(그들의 기준에 따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정상적이고 올바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겐 끔찍한 살인 행위가 벌어졌음에도 여전히 그 종교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신도들에게 몸서리를 친다. 하지만 그 정상인들에게 목사나 신부, 스님의 비위 사실을 알려주면 뭐라고 할까?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신을, 나쁜 말과 행동이 아닌 그 종교에 내포한 선한 교리를 믿는 거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의 악행은 결국 죽은 뒤에 벌을 받을 거라고 말하며 현세의 자신은 계속해서 교회를, 성당을, 절을 다닐 것이다. 나는 이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쁜 종교 지도자가 있다고 해서 그 종교 자체가 악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면 회사에 비유해 보자. 상사가 싫다고 모두 회사를 관두는 건 아니다. 회사의 부조리를 인지했다고 모두 정의의 투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감내하고 그것을 상쇄시킬 것들을 여전히 그 환경 내에서 찾으려는 속성이 있다. 자기들끼리 모여 상사의 뒷담화를 하면서, 익명 게시판에 신랄한 비판을 하면서 말이다.


삼성 그룹에 다니는 사람에게 이건희같은 파렴치한 성매매자 밑에서 어떻게 일을 할 수 있냐고 물으면 정말 어이없어할 것이다. 그 회사의 전부가 이건희는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엔 그들이 피땀 흘려 일궈 놓은 성과들이 있다. 설령 최고 의사결정권자들이 비리를 저질렀어도, 그들이 만든 128단 6세대 V낸드는 진실하다. 그 노력을 초개같이 내던지고 새 출발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누가 자신의 인생 일부를 그렇게 쉽게 떼어낼 수 있단 말인가?


사이비 종교의 교인들도 하나같이 교주의 말에 세뇌된 로보트가 아니다. 그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비판과 생각이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가 만든 좋은 말씀과 교세 확장에 자부심과 보람을 느낀다. 요즘 들어 교주가 덜떨어진 행동을 자주 하지만 중요한 건 아니다. 이곳엔 이미 좋았던 시절에 쌓아놓은 좋은 말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벼룩이 있다고 집 전체를 태우진 않는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다시 나아가면 된다. 우리가 지금껏 그래 왔듯이.


다른 기회가 있었다면, 우리 사회가 그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을 만큼 다양하고 정의로웠다면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의 불의에 맞서 싸우는 사회 활동가가 됐을지도 모른다. 현세는 끝이야. 이 세상은 희망이 없어.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타락은 멈추지 않아. 현실이 패배에 침몰된 순간 인간은 내세의 낙원을 꿈꾼다.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기보단 죽음 뒤에 찾아올 영생을 위해 기도한다.


나는 사이비 종교가 일부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의 일탈 행위가 아니라 인간 세상의 보편적 사회 현상이라고 믿는다. 어떤 사회에 사이비 종교가 만연한다면, 그 사회가 사람들의 삶에 의미를 제공하는데 완전히 실패했다는 의미다.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는 한 그들이 잘못된 믿음에 빠지는 걸 뿌리 뽑을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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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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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친구는 세계 여행 중 외계인을 만나 그가 가진 우주여행자유이용권을 얻는다. 그 대가로 외계인은 남자 친구의 외모와 기억을 갖고 지구에서 살기로 한다. 어쩌면 평생토록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망설임 없이 떠난 건 남자 친구의 삶을 구성하는 지구의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사귄 여자 친구에겐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흠... 눈 앞에 무궁무진한 모험의 기회가 열렸는데, 타고난 방랑가인 남자 친구가 이 기회를 놓칠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외계인은 도대체 뭘까? 2만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평화를 유지한 종족에게만 주어진다는 우주여행자유이용권을 망설임 없이 양도하고, 슈퍼스타, 전문직, 재벌 2세도 아닌 썩어 문들어질 만큼 평범한 남자의 기억과 몸을 가졌으니! 이유는 간단했다.


그 외계인이 떠난 남자 친구의 여자 친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한아. 이것이 바로 <지구에서 한아뿐>의 줄거리다.


정세랑의 여타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엔 SF의 무거움이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더군다나 이 소설은 작가의 초기작. 고민은 뒤로, 무게는 아래로, 오로지 찰랑이는 이야기만이 옅은 청량감과 함께 달려 나간다. 역시 정세랑의 소설은 생각이 많을 때 읽어야 제맛이다. 아무 고민 없이 시간을 달래줄 애서가의 묘약. 나는 그녀의 소설을 이렇게 부르고 싶다.


나는 인간이, 나이를 먹으면서 잃는 첫 번째 능력이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사랑은 삶의 찌든 때 앞에서 가장 무력하다. 사람들이 사랑을 대단하다고 치켜세우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초라함이 금세 드러나버리기 때문이다.


지구의 수십억 생명체 중 오로지 한아만을, 오로지 한 인간을,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로 수만 광년의 공간을 가로지른 외계인의 마음은 그래서 숭고하고, 그래서 비현실적이다. 이 소설은 SF라기보다는 판타지다. '제발 그랬으면!!!' 하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을 이야기한다. 불가능을 꿈꾸는 게 이야기의 의무긴 하니까.


행성 전체가 '너 하나를 사랑한다'는 말에 심쿵했다면 <지구에서 한아뿐>은 늦은 봄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핑크를 더할 것이다. 나처럼 낡아빠진 인간에겐 바짓단을 스치는 미풍조차 안 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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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과 전체 - 정식 한국어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지음, 유영미 옮김, 김재영 감수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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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스웨덴 한림원은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에게 '양자역학을 창시'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여했다. 그의 나이, 갓 30살을 넘긴 때였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그는 누구와 만나 무슨 대화를 나누고 어디에 가 뭘 하며 지낼까?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부분과 전체>는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주기에 가장 적합한 책이다. 제목만 보면 양자역학의 심오한 원리가 골치 아프게 전개되는 물리학 서적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굳이 따지자면 이 책은 일기에 가깝다. 어린 시절 자신을 사로잡았던 철학적 의문에 대한 사색부터, 스승과 제자, 동료들과 나눴던 대화를 재구성해 놓았다. 범접할 수 없는 대 물리학자의 일상을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부분과 전체>를 읽으며 훌륭한 생각이 탄생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역시 '환경'이라는 고루한 사실을 깨우쳤다. 하이젠베르크의 주변에 동일한 철학적 의문을 공유하고 토론할 친구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는 아마 쓸데없는 걱정만 일삼는 무쓸모한 아이로 자랐을 것이다. 훌륭한 업적을 만드는 원동력은 단언컨대 의문을 떠올리는 능력이다. 어떤 주제에 대한 성실한 탐구도, 지독한 몰두도 애초에 의문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생각은 정해진 공부에 몰두하다 벼락처럼 현시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의문과 그것을 풀어내려는 노력에 의해 탄생한다. 선현의 지식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의문이 없이는 새로운 것이 탄생하지 않는다.


독일이란 나라의 특징인지 아니면 그의 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주변엔 비슷한 의문을 갖고 심오한 토론을 즐기는 친구들이 즐비했다. 그의 생각에 동조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때로는 치열하게, 반대 의견을 내놓으며 설전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렇게 생각을 주고받는 와중에 서로는 자기도 모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성장이 토론의 주제와 질을 높이는 선순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위대한 지식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다양한 지식의 추구다. 하이젠베르크는 물리학자이기 전에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고 아인슈타인은 바이올린을 즐겨 연주했다. 그들은 물리학만 아는 바보가 아니라 음악, 철학, 정치 기타 등등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조금만 심오한 얘기를 나눌라치면 '이과라서 죄송합니다.' 같은 말을 하는 동료는 주변에 없었다. 그들에게 뭔가에 대해 토론할 자격이 있다는 것은 문과냐 이과냐가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생각할 힘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됐다. 이는 자연 과학과 철학이 오랫동안 하나의 뿌리로 여겨지던 서구 세계의 지적 전통 때문이었을 것이다(안타깝게도 이런 전통은 일본에 흘러들어 가 이과와 문과로 나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 사회는 여전히 그 폐해에 시달리고 있다.).


나는 하이젠베르크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보다 그가 자신의 의문을 얼마든지 논할 수 있는 친구를 가졌다는 사실이 부럽다. 의문을 가지면 건방지다는 질책을 들어야 하는 사회에 살았다면 그는 결코 오늘날과 같은 업적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온 몸을 괴롭히는 외로운 밤. 그 고독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 그 밤을 같이 지켜줬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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