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익'의 현대사 - '극우의 공기'가 가득한 일본을 파헤치다 질문의 책 26
야스다 고이치 지음, 이재우 옮김 / 오월의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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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익의 현대사>를 집어든 이유는, 그들이 진짜 누구인지 정말로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들이라고 하면 당연 이웃나라의 혐오자들을 지칭하지만 거기엔 대한민국이 우익들도 포함된다. 양국의 우익은 긴밀한 협조체제 아래 수십년간 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적으로 상대해 왔다. 비슷한 지점이 많을 거라 생각했고,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한국과 일본 우익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역시 '천황'의 존재다. 일본 우익의 뿌리는 황국사상, 즉 천황을 신으로 섬기고, 그의 친정(직접 통치)을 요구하는, 천황 중심의 국가주의 사상이다. 그들은 천황을 신으로 여기기 때문에 종전 후 인간임을 선언한 천황의 발표에 큰 충격을 받았다. 본질적으로 우익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력이다. 전통의 가치를 중시하고 영원히 유지하려는 속성은 어느 나라의 보수주의자도 비슷할테지만 그 전통 안에 '신'이(국왕이 아니다) 존재함으로 인해 일본의 우익은 극단적 색채를 띄게 된다. 카미카제가 지켜온, 결코 패배하지 않는 신의 나라. 이들은 믿음은 정치적이라기보단 종교적이었다.


종전 후 이들은 미군정의 탄압을 받았고 거의 궤멸 직전까지 갔다.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요인 암살, 공공 기관 파괴, 쿠데타를 획책하는 이들이 큰 위협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극적인 반전은 전세계에 불어닥친 공산주의의 광풍이 이끌었다. 미군정은 일본이 공산화되는 것을 우려해 견제 집단으로 우익을 이용했고 이 때 수 많은 우익들이 원수처럼 여기던 미국과 손을 잡았다. 일본의 정치권과(자민당) 우익 집단은 분쟁을 폭력으로 분쇄하려 계획했고 이를 행할 집단으로 야쿠자를 주목했다. 이들은 정치권의 요구에 조응해 우익의 한 축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알게되면 대한민국의 군사독재정권이 왜 일본의 우익과 가깝게 지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북한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정권과 일본 우익은 긴밀하게 협력했다. 과거사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더 큰 적에 맞서기 위해 잠시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그러나 민주화로 인해 독재가 무너지자 일본의 우익은 '동지'를 잃어버렸다. 그동안 미뤄놨던 과거사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양국의 관계는 현재 상황에 이르게 된다.


최근에 한국을 집요하게 모략하는 혐한주의는 그러나 이 우익의 뿌리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듯 보인다. 이른바 넷우익으로 불리는 이 집단은(한국의 일베) 우익이 신성화하는 천황마저 비하하고 선전차를 몰고 시끄럽게 선동하는 행동 우익들도 차마 들어줄 수 없는 극한의 원색적 혐오를 분출한다. 그들은 종전의 우익과는 확실히 다른 결을 지녔다. 작가조차 기존의 우익과 이들을 연결하는 고리를 명확하게 밝히진 못한다. 다만 정치권이 이 혐오주의자들을 은근히 비호하고 이용하는 상황을 보여줄 뿐이다.


나는 이들이 어떤 가치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핵심 넷우익과 동조자 사이에 차이는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혐오는 정치가 아니라 일종의 유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분노를 배설할 분출구를 찾는 것이다. 퇴근 후 맥주를 한 잔 들이키며 물고, 뜯고, 즐기고. 이들의 주 활동 무대가 익명성과 편리함이 보장되는 인터넷이라는 사실이 이런 추측을 뒷받침한다(물론 최근의 극우들은 인터넷을 떠나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이 그들의 정치 집단화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유희의 한 방식인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일본 우익의 역사를 아주 간략하게 소개했지만 이 책은 훨씬 복잡한 역사를 소개한다. 우익도, 우익이라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색깔을 보인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세계 평화과 이웃 국가와의 공존, 인종, 소수자 차별 철폐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자들이 있을 정도다. 모든 걸 하나의 개념으로 압축하는 건 쉽지만 대단히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특히 이 우익들에 긴밀하게 대응해야하는 한국의 입장에선 더 그렇다. 우리는 그들을 훨씬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의미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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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VS 80의 사회 - 상위 20퍼센트는 어떻게 불평등을 유지하는가
리처드 리브스 지음, 김승진 옮김 / 민음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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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은 자산, 교육, 조세 제도에서부터 양육, 건강, 일자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격차를 만들어낸다. 당연히 불평등은 고착될 수 밖에 없는데 서로 비슷한 계층끼리 어울리고, 결합하고,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사회의 불평등이 인생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기에 계급 추락을 막기위한 각종 제도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그 제도를 창안하고, 실행하고, 유지할 지적, 금전적 능력이 충분한 사람들이다.


이런 불평등의 원인을 대부분 상위 1%의 슈퍼리치들에게서 찾지만 이 책의 저자는 상위 20%, 이른바 중상류층의 책임으로 돌린다. 슬라보예 지젝이 '봉급 부르주아'라고 지칭한 잘 나가는 중산층 말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성과급이 잘 나오는 대기업 맞벌이 부부, 연소득이 1.5억에서 2억 정도 되는(하이닉스에 다니는 지인은 최근 4년간 총 4억원의 저축을 했다고 한다. 내외는 사내 커플이고 역사상 최고의 반도체 호황을 같이 누렸다.), 서울시내에 대출을 낀 6~8억원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쯤 되겠다.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에 민감하고 사회에 만연한 불의에 열을 올리지만 조세 상승에 격렬한 거부감을 느끼고 아파트 가격을 잡으려는 정부 정책을 증오하는 모순을 보인다. 이러한 모순이 발생하는 이유는 스스로 평가하는 계급과 객관적 계급 사이에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스스로 힘없는 근로자(서민), 높게 쳐도 중산층 정도로 생각하지만 2018년 기준으로 상위 10%가 훌쩍넘는 고소득자다(물론 자산을 기준으로 하면 다른 해석이 나올 수도 있다).


미디어나 정치권에서도 이 엘리트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유권자 층이 두터운데다 투표율도 높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은 격차의 원인을 저소득층의 게으름과 능력에서 찾고 진보주의자는 상위 1%의 탐욕에서 찾는다. 이 영리한 계급은 어디서도 선한 사람들로 남는다.


입시 시장에서 세단을 타고 달리는 금수저 리그를 해체하고, 저소득층 자녀의 급식 문제를 해결하고, 격차가 폭발하는 부동산 시장을 메꾸고 싶다면 우리의 월급에 부과되는 특별세와 늘어나는 소득세율을 감당할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돌아보면 중산층의 지지없는 사회변혁은 사실상 불가했다. 아니, 중산층의 맹렬한 지지만이 유일한 변혁의 열쇠였다.


이 책이 제기하는 다양한 문제들이 한국의 상황과는 다소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희생의 주역을 정의하는 방식에 대해선 적극 공감한다. 문제는 1%가 아니라 20%다. 희생은 그들의 몫이 아니라 우리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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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와 소음 - 미래는 어떻게 당신 손에 잡히는가
네이트 실버 지음, 이경식 옮김 / 더퀘스트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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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빅데이터를 제대로 활용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통계적 이론을 정리해 놓은 책도 아니다. '예측' 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면 이 책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수 많은 사례들 속에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이 엄청나게 두꺼운 책을 딱 두 단어로 요약하면 '베이즈 주의'와 '불확실성'이다. 저자는 불확실성을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예측하는 사람의 기본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예측은 수 많은 변수에 영향을 받는다. 꼼꼼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변수의 현재값을 측정하고 모르는 변수의 값을 추정하여 정교한 시뮬레이션을 돌릴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 지 조차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측은 아무리 정교해도 현재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넘어설 수는 없다. 따라서 모든 예측은 확률로 기술될 뿐이다. 예기치 않은 변수가 등장하거나 측정한 변수의 값이 바뀌었을 때 발생 확률은 다시 계산된다. 이것이 바로 베이즈 통계학의 기본이다.


베이즈 통계학의 가장 아름다운 점은 설령 두 사람의 예측이 완전히 반대에 위치하더라도 새롭게 발생하는 사건(데이터)에 의해 동일한 결과로 수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예측의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데이터가 아무리 쏟아져도 초기에 가졌던 인지적 편향을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간의 뇌는 본능적으로 부조화를 기피한다. 초기 예측은 편향으로 똘똘 뭉쳐 있는데, 문제는 자신의 판단과 어긋나는 정보를 기피하려는 우리 뇌의 특성에 의해 이 편향이 더욱 강화되기 때문이다.


베이즈 예측의 기본은 사전확률을 정한 뒤 새로운 정보가 추가됐을 때의 확률을 구해 사후확률을 계산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성 친구가 바람을 필 확률을 예측한다고 가정해보자.


(1) 사전확률

- 이성친구가 바람을 피울 확률의 초기 추정치(x): 15%

(2) 새로운 사건 발생: 수수께기의 이성과 같이 술을 마시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 이성친구가 바람을 피운다는 조건 하에 다른 이성친구와 술을 마실 확률(y): 95%

- 이성친구가 바람을 피우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다른 이성친구와 술을 마실 확률(z): 10%

(3) 사후확률

- 이성친구가 다른 이성친구와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조건 하에 수정된 바람을 피울 확률

xy/{xy+z(1-x)} = 0.62637363 = 약 63%


혹자는 위 계산 과정에서 사용된 추정치들이 모두 주관적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특히 무엇인가가 발생하기도 전에 그것의 발생 확률을 미리 정해둬야 한다는(사전확률 추정) 가정은(그 예측 결과를 알고 싶은건데 그 예측을 예측해 보라니?) 대단히 주관적이고, 어딘가 우스꽝스러워 보일 것이다. 맞다. 베이즈 주의는 모든 추정이 100% 객관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실제로 초기 추정치에 따라 사후확률은 굉장히 탄력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통계학이 유용한 이유는 새롭게 등장하는 사건에 따라 끊임없이 예측값이 변화한다는 점이다.


매 시간, 아니 매분 매초 마다 바뀌는 예측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이렇게 묻는 사람들은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 세상엔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한번 내려진 예측은, 인간이 무슨 행동을 하든 기어이 실현되고 마는가? 예측은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변화야 말로 예측의 본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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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신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0
손보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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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경찰대를 졸업한 수재다. 경찰청에서 3년을 근무한 뒤 민간 조사원이 됐다. 실력이 좋았고 고객은 탄탄했다. 그는 매일 정해진 루틴을 따른다. 그가 이 루틴을 깨는 경우는 한계치에 이르렀을 때다. 이른바 '포화'라고 부르는 단계에 다다르면 그는 모든 일을 중단하고 휴가를 떠난다.


그런데 그가 휴가를 떠나는 날 VIP 고객으로부터 의뢰를 하나 받는다. 그는 한번도 자신의 원칙을 어겨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아무리 중요한 고객의 부탁이라도 딱 잘라 거절할 수 있을만큼 고객층도 탄탄하다. 하지만 의뢰인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그는 7년 동안 단 한 번도 취소해본 적 없는 휴가를 미루고 프랑스로 출국한다.


여자는 프랑스로 입양을 간 동양인이다. 거기서 대학을 졸업했고 뉴욕의 전시 에이전시를 거쳐 지금은 예술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는 프랑스인도 미국인도 동양인도 아니었다. 그녀의 친구는 끊임없이 타오르는 담배 연기 뿐이다.


어느날 그녀에게 고등학교 동창의 편지가 도착한다. 동창은 그녀와 같은 동양인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녀를 미워했다. 따돌렸다. 동창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편지는 그의 어머니가 보냈다. 그녀에게 남긴 유서와 유품이 있으니 프랑스로 와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그녀는 의아했지만 프랑스로 가보기로 결심한다. 대학 졸업 이후 영원히 떠나버린 나라. 나쁜 기억의 고향으로.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건은 사실 우연에 불과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삶은 우연과 우연이 주고 받는 상호작용의 결과다. 당신과 함께 하는 그 혹은 그녀는 당신과 어떠한 운명으로도 얽혀 있지 않다. 당신은 인연을 맺기까지 연계된 수 많은 우연을 보고 감탄할 지도 모른다. 그토록 많은 우연의 결과라면, 그토록 희박한 확률의 결과라면,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건 결과론적인 얘기일 뿐이다. 인간은 단 한 번의 삶을 살기에 현재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연은 운명으로 가장된다. 돌이켜볼 수록, 되짚어볼 수록, 우연은 운명처럼 보인다. 완전한 착각이다.


<우연의 신>은 재료만 잔뜩 꺼내 놓고 채 끝내지 못한 요리 같다. 우연을 계기로 맺어진 두 남녀의 관계가 흥미진진하게 흘러가는 듯 싶지만 어느덧 탄산이 빠진 맥주처럼 거품이 사그라든다. 추리와 멜로가 교묘하게 맛을 이룬 케이크를 기대했지만 씹고 삼키는 동안 둘 중 어느 맛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


급작스럽게 끝나는 이야기는 우연을 운명으로 가장하지 않기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 엔딩은 없다. 완결은 없다. 인생은 끊임없이 얽히고 설키는 우연의 연속일 뿐이니까. 우연히 만난 두 남녀는 역시 우연에 따라 허무하게 헤어질 수 있다. 그리고 두 남녀는 '포화'에 이른 남자가 떠난 휴가지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다. 그걸 운명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우연은 우연일 뿐이다. 우연의 사전엔 운명이라는 단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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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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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김영하에 거는 기대도 달랐다. TV로 접한 작가는 생각했던 것보다 소양의 깊이가 깊었다. 엄청난 독서량은 말할 것도 없고,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새겨둘만한 점이 많았다. 이야기에 거는 기대가 컸고, 들려오는 소문도 그에 합당한 듯 보였다.


<살인자의 기억법>으로 김영하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는 멈추지않고 쓰는 작가이며 이 책은 수많은 작품중에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김영하는 이 책을 쓰는 게 그 어떤 작품보다도 어렵다고 고백하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여럿 있다. 이 소설은 살인자의 내레이션만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사건은 기억속에서 전진하는데 문제는 이 화자가 치매를 앓는 노인이라는 점이다. 기억은 분절되고 점점 흐릿해진다. 작가는 이 안개 속을 깜빡이는 노인의 기억에만 의지한채 헤쳐나가야 한다. 모든 것이 불명확하고,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단서는 토막난 시체가 뿌리는 핏자국처럼 점점이 흩어져 있다.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답답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소설가가 작품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물이 탄생하는 순간 작가는 뒤로 물러나 화자의 말을 받아쓰는 필사가로 전락한다. 자유는 없다. 1인칭 시점은 작가를 똑같이 알츠하이머를 앓는 노인으로 전락시킨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소재가 전율을 일으키는 소설이다. 치매를 앓는 연쇄살인범의 주변에 새로운 연쇄살인이 발생한다. 주인공은 그 살인을 경계한다. 자신의 가족과 너무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매는 가까운 기억부터 차례대로 사라지는 질병이다. 치매 노인의 기억은 최근에 발생한 그 사건들이, 과연 본인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확증해줄 수 있을까?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치매와 연쇄살인의 조합이 이토록 파괴적인 미스테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하지 못했다. 물론 김영하가 이 미스테리를 효과적으로 풀어냈는가는 별도의 문제다. 이 부분을 상세히 말하는 건 읽는 맛을 심각하게 떨어뜨릴 수 있어 조심스럽다. 단 하나의 단어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깜빡이는 노인의 기억은 채 200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 짧은 악몽은 불행일수도, 다행일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은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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