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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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친구는 세계 여행 중 외계인을 만나 그가 가진 우주여행자유이용권을 얻는다. 그 대가로 외계인은 남자 친구의 외모와 기억을 갖고 지구에서 살기로 한다. 어쩌면 평생토록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망설임 없이 떠난 건 남자 친구의 삶을 구성하는 지구의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사귄 여자 친구에겐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흠... 눈 앞에 무궁무진한 모험의 기회가 열렸는데, 타고난 방랑가인 남자 친구가 이 기회를 놓칠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외계인은 도대체 뭘까? 2만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평화를 유지한 종족에게만 주어진다는 우주여행자유이용권을 망설임 없이 양도하고, 슈퍼스타, 전문직, 재벌 2세도 아닌 썩어 문들어질 만큼 평범한 남자의 기억과 몸을 가졌으니! 이유는 간단했다.


그 외계인이 떠난 남자 친구의 여자 친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한아. 이것이 바로 <지구에서 한아뿐>의 줄거리다.


정세랑의 여타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엔 SF의 무거움이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더군다나 이 소설은 작가의 초기작. 고민은 뒤로, 무게는 아래로, 오로지 찰랑이는 이야기만이 옅은 청량감과 함께 달려 나간다. 역시 정세랑의 소설은 생각이 많을 때 읽어야 제맛이다. 아무 고민 없이 시간을 달래줄 애서가의 묘약. 나는 그녀의 소설을 이렇게 부르고 싶다.


나는 인간이, 나이를 먹으면서 잃는 첫 번째 능력이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사랑은 삶의 찌든 때 앞에서 가장 무력하다. 사람들이 사랑을 대단하다고 치켜세우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초라함이 금세 드러나버리기 때문이다.


지구의 수십억 생명체 중 오로지 한아만을, 오로지 한 인간을,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로 수만 광년의 공간을 가로지른 외계인의 마음은 그래서 숭고하고, 그래서 비현실적이다. 이 소설은 SF라기보다는 판타지다. '제발 그랬으면!!!' 하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을 이야기한다. 불가능을 꿈꾸는 게 이야기의 의무긴 하니까.


행성 전체가 '너 하나를 사랑한다'는 말에 심쿵했다면 <지구에서 한아뿐>은 늦은 봄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핑크를 더할 것이다. 나처럼 낡아빠진 인간에겐 바짓단을 스치는 미풍조차 안 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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