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는 자기에게 몽규가 어떤 존재인가를 되짚다가 자기가 누구인지 또렷이 알게 될 것이다. 닮은 두 존재가 나란히 서 있을 때 오히려 각자가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서사적 흐름은 동주가 몽규에게 느끼는 삼정의 굴곡을 따라 곡선을 그린다. 북간도 용정에서 광명중학을 다니던 때의 윤동주가 송몽규의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함께 듣는 시점(1935년 1월 1일 전후로 추정되는)에서 본론이 시작될 때, 역사적 현실과 예술의 가치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차는 아직 잠재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다. 그러다가 연희전문학교에 함께 진학해 친구들과 문예지를 만들 무렵(1938년 이후) 둘의 입장 차이는 표면화되어 충돌이 벌어진다. 둘의 갈등은 이를테면,
‘산문적 인간‘과 ‘시적 인간‘의 갈등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몽규의 관심은 메시지의 효율적 전달을 통한 행동에의 촉구에 있고, 동주의 관심은 문학을 통한 인간 내면의 표현과 더 깊은 차원의 소통 가능성에 있다. 전자에게 후자는 나약해 보이고 후자에게 전자는 편협해 보인다.
여기까지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저 둘의 갈등은, 일제강점기를 물론이요. 어쩌면 지금까지도 진행 중인, 오래된 예술 논쟁의 소박한 판본처럼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 영화가 하에 김여지는 것은1942년 ) 시절을 다루면서다. 위에것이 없다고 말한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