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쏠의 세계와 저의 세계는 달라요. 그걸 가끔 느낄 수 있어요.
쏠에게 제 몸을 넘겨주면요. 그럼 세계는 눈앞에 있는 게 아니라, 피부에 닿아요. 풍경은 바람 같아요. 복도 냄새 같고요. 덩어리로 뭉쳐졌다 펼쳐졌다 해요. 만약 쏠의 눈으로 이제프 선생님을 보면.. 먼지랑 흙 냄새가 날 거예요. 시원한 바람이 불 거고요. 음, 그리고 약간 달콤한 냄새도요." - P294

"......이제프 선생님?"
아이의 멍한 눈빛이 돌아왔을 때, 잔뜩 잠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정확하게 불렀을 때 이제프는 심장이 내려앉을 뻔했다. 아직 태린을 잃지 않았다. 태린은 여전히 이제프를 기억했다. 이 아이는 여기에 있다.
그 사실이 왜 그렇게도 안심이 되고, 동시에 가슴이 무너지는지.
이제프는 팔을 벌려 아이를 안아주었다. 그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태린을 감싼 팔을 통해 흐느낌이 전해졌다. 이제프의 옷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태린은 울고 있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아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아이는 앞으로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 P312

때때로 죽음의 위협을 마주할 때마다 이제프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빛나는 눈빛을 생각했다.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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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사라지는 게 아니야? 너희와 합쳐지면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잖아. 내가 나라고 정의하던 개체, 세상을 주관적으로 감각하던 하나의 의식, 그런 것들이 사라지잖아.‘
합쳐진 이후에도 너는 여전히 존재할 거야. 네가 아닌 우리로서
‘나는 너희가 아니야. 나는 그냥 나야. 단수야.‘
우리가 보기에 너희는 단수체가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해? 나는 이렇게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몸을 가졌고, 이 몸은 온전히 나의 자유의지에 의해 움직여. 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여. 나는 여러 존재가 아니야. 하나의 몸으로 세상을 주관적으로 감각하는 단 하나의 개체야.‘
너희는 이미 수많은 개체의 총합. 하나의 개체로는 너희를 설명할 수 없어. 네 안에는 다른 생물들이 잔뜩 살고 있어. - P182

그 존재들은 너와 같이 살 뿐만 아니라, 너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어. 의식이야말로 주관적 감각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야.
혼란스러웠다. 그들이 규정하는 의식과 태린이 규정하는 의식은 너무 달랐다. 태린의 생애에서 ‘자아‘란 흔들린 적 없는 굳건한 개념이었다. 미생물이나 기생충 같은 것들이 인간에게 붙어산다고 해도 그것들이 의식을 갖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것들은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 태린에게 붙어 있고, 때로 영향을 미칠수는 있지만, 영혼과는 구분되는 외부의 존재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 생각마저 읽어버린 것처럼, 그것들이 다시 속삭였다.
잘 생각해봐. 네가 정말로 하나의 존재인지...... - P183

"그렇게 변해버린 것이 싫지 않으세요?"
"좋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인간일 때와 같아."
스벤이 자신의 변해버린 팔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불행할 때도 있다. 하지만 태어난 이상살아가야 한다. 이 삶도 마찬가지다. 난 이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가야 해." - P227

<그 의식은 너희의 머리 안에 있는 뭉치, 우리를 닮은 연결망의 뭉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
<인간의 뇌가 너희를 닮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의식이 뇌에서시작되는 건 맞아.>
<우린 그 뭉치를 세세히 조사했어. 인간에 대해 학습할 때, 늪에 던져진 인간을 소화할 때, 그리고 인간의 언어를 배울 때 말이야. 그리고 결론을 내렸어. 자아란 착각이야. 주관적 세계가존재한다는 착각. 너희는 단 한 번의 개체 중심적 삶만을 경험해보아서 그게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고 착각하는 거야. 우리를 봐.
우리는 개체가 아니야. 그럼에도 우리는 생각하고 세상을 감각하고 의식을 느껴. 의식이 단 하나의 구분된 개체에 깃들 이유는없어. 우리랑 결합한 상태에서도 너희는 여전히 의식을 지닐 수있어.>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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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자는 매료와 증오를 동시에 품고 나아가는 직업입니다.
무언가를 끔찍하게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불태워버리고 싶을 만큼 증오해야 합니다. 그걸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파견자가 될수 있을 겁니다." - P41

지상은 하늘을 향해 열린 곳이었다. 바람이 불고 빛이 쏟아지고물이 순환하며, 태양과 달이 함께 타원을 그리면서 계절을 바꾸는 곳. 이끼들이 땅에 몸을 납작 붙여 자라고 그 위로는 키 큰나무들이 밀림의 지붕을 이루는 곳.
지표면이라는 터전 위에서 인간은 발 닿는 곳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가로지르며, 때로는 하늘을 날아서. 그때 지구는 지구본처럼 작지만 꽉 찬 행성이었고, 사람들은 지구를 ‘우리 행성‘이라고 불렀다. 하늘을 바라보면 시선 끝에서 끝까지 별들이 펼쳐져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먼 천체들에 닿고싶어했다. 우리의 행성을 발판 삼아 다른 존재들의 행성으로 나아가고 싶어했다. - P45

[시험이 시작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1부 시험이 바로 시작되었다.
파견자의 역할과 임무 전반에 대한 보편적인 문제들, 지하도시 행정 구조의 특징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아카데미 기초 과정에서 세뇌당하다시피 배워온 것들이었으므로 어렵지 않았다. - P48

태린은 파견자 선언문의 전문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외웠고, 행정조직과 파견 조직의 구조를 스크린에 그려넣었으며, 스타도하드의 네 가지 요소와 파견 본부의 역사, 지하 도시의 설립과정과 행정 구조에 대해서는 구술로 대답했다. - P49

그래, 이제는 모든 걸 함께 잊어버리자. - P53

"광증은 아니야."
"광증이 아니면요?"
"난 발현자들을 많이 봐왔어. 범람체에 의한 광증은 확실히 달라. 그건 자아가 해체되는 과정이야.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또 누구인지 잊어버리지. 자신의 몸과 정신을 스스로의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결국은 과거와 현재를, 자전적 서사를 잃어버리는 거야. 환각이나 환청도 일부 증상이긴 하지만 넌 그 경우와 달라."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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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까지 나는 왜 내 자신감이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 했을까? 내 온갖 문제의 근원이 나라는 존재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썩 꺼지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됐음을 왜 몰랐을까? 세상이 나에게 더 큰 일을 기대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왜 작은 일에 만족했을까? - P405

맥스가 나의 이미지를 사랑할 뿐, 진정한 나를 사랑하려고 노력할 의도조차 없음을 깨닫는 데 넉 달이 걸렸어. - P423

이름이 불리자 셀리아는 무대로 올라와 여느 때처럼 우아하고 진심어린 모습으로 트로피를 받았어. 그런데 마이크를 막 벗어나려다 말고 몇 마디 덧붙였어.
"오늘밤 TV에 키스하고픈 유혹을 느끼는 분이 있다면, 이가 깨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엄마, 왜 울어?" 코너가 내게 물었어.
나는 얼굴에 손을 대보고서야 눈물이 흐른 줄 알았어. - P426

"내가 그 사람과 결혼했던 건 그가 너를 잊도록 도와줬기 때문이었어. 너를 사랑하는 걸 멈춰서가 아니야." - P433

<부띠옹트렝>의 그 소녀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어. 심지어 그녀를 창조한 사람의 마음까지도. 나 역시 그녀를 사랑했어. 하지만 나는 그 소녀가 아니었어. 그 점을 맥스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알 수없었어. - P424

내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 떠나보내고 어퍼이스트 사이드의 크고 아름다운 집에서 혼자 쓸쓸히 살고 있어.
결말을 쓸 때, 모니크, 내가 이 아파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실히 드러내 줘. 막대한 재산에 관심이 없다는 것도, 사람들이 나를 전설이라 생각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도, 수백만 사람들의찬사로도 차가운 내 마음을 녹일 수 없었다는 것도 확실히 드러내 줘.
결말을 쓸 때, 모니크, 내가 그리워한 건 사람들이라고 전해. 내가 잘못했다는 것도 내가 걸핏하면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도 다.
결말을 쓸 때, 모니크,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건 가족뿐임을 독자가 확실히 이해하게 해. 그 가족을 찾았다는 것도, 결국엔 그 가족을 잃고 상심했다는 것도 독자가 확실히 알게 해.
필요하다면 구체적으로 설명하도록 해.
에블린 휴고는 사람들이 그 이름을 잊어도 상관하지 않는다고 전해. 에블린 휴고라는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을 잊어도 상관하지 않는다고 전해.
에블린 휴고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전하면 더 좋아. 그녀는 내가 그들을 위해 만들어낸 인물이야.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도록 창조한 인물에 불과해. 내가 아주 오랫동안 사랑이 뭔지 잘 몰랐다고 전해. 하지만 이젠 잘 알기에 그들의 사랑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전해. - P504

표면 아래를 살짝만 들추면, 모든 사람의 애정 생활이 독창적이고 흥미로우며 미묘하다. 어느 하나 쉽사리 정의하기 어렵다. - P536

"나는 이번 생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얻으려고 치열하게 싸워야 했습니다. 내 뒤에 오는 사람들이좀 더 안전하고 좀 더 쉽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남기고 갈 수있다면. 음,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온 가치가 있겠죠." - P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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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내가 원하는 것들을 손에 넣으려고 내 몸을 이용했다는 거야. 게다가 그녀를 위해서도 그 짓을 멈추지 않았다는 거야. 그게 나의 비극이었어. 가진 게 몸뚱이뿐이었을 때도 이용했고, 다른 옵션이 있을 때도 이용했어. 심지어 사랑하는 여자를 아프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이용했지. 게다가 나는 그런 일에 그녀를 연루시켰어. 그녀의 뜻과 상관없이 내 선택을 인정해야 할 상황으로 몰았으니까. 셀리아가 발끈해서 내 곁을 떠났을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피 말리는 시간을 견뎠던 거야. 나는 매일같이 그녀에게 작은 상처를 안겼어. 그러고서는 그 상처가 너무 악화되어 치유할 수 없게 되자 깜짝 놀랐던 거지."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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