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을 접은 민들레를 자세히 바라봤다. 처음 알았다. 누가 가꾸어 주지 않아도 잘 피어나고, 잎이고 꽃이고 힘차게 사방으로 쭉 뻗어 피는 이 꽃이 해가 지면 꽃잎을 접고 봉오리가 되어 쉬어 간다는 것을. 다음날 떠오른 아침 해가 뜨겁게 땅을 데우면,
민들레는 노란 꽃을 다시 활짝 펴고 세상에 뿌릴 하얀 씨를 만들며 열심히 살아남을 준비를 했다. 밤이 되면 지고, 낮이 되면 피어나는 것은 나팔꽃뿐인 줄 알았건만, 봄이면 길가에서 쉽게 만났던 민들레도 그렇게 매일 피고 지는 꽃이었다.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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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이라고 믿는 사람의 눈에만 삼촌으로 보이는 사진을 영정으로 쓸 수는 없었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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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왔다가 가고, 들락날락거리고, 악수를 나누고, 먹고 마시며 죽은 남자를 보고, 정말 멋진 시신이라고, 드디어 끝나서 행복해 보이지 않느냐고, 누가 그를 관에 눕혔느냐고 말한다. 또 일기예보와 옥수수의 수분 함량에 대해서, 우유 할당량과 다음 총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나는 킨셀라 아저씨의 무릎 위에서 점점 무거워지는 것만 같다. - P60

마당을 비추는 커다란 달이 진입로를 지나 저멀리 거리까지 우리가 갈 길을 분필처럼 표시해 준다.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 P70

오늘 밤은 모든 것이 이상하다. 항상 거기에 있던 바다로 걸어가서, 그것을 보고 그것을 느끼고 어둠 속에서 그것을 두려워하고, 아저씨가 바다에서 발견되는 말들에 대해서, 누구를 믿으면 안 되는지 알아내려고 사람을 믿는 자기 부인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를,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어쩌면 나에게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는 계속 걷다가 절벽과 암벽이 튀어나와 바다와 만나는 곳에 도착한다. 이제 앞으로 갈 수 없으니 돌아가야 한다. 어쩌면 여기까지 온 것은 돌아가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납작하고 하얀 조개껍데기가 모래밭으로 밀려 올라와 여기저기서 반짝인다. 나는 허리를 굽혀 조개껍데기를 줍는다. - P73

"우리처럼 나이 많은 가짜 부모랑 여기서 영영 살 수는 없잖아."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불을 빤히 보면서 울지 않으려고 애쓴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고, 그래서 지금울음을 참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떠오른다. - P79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차가 떠나고 나서 엄마가 말한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내가 말한다.
"말해."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묻고 있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배웠고, 충분히 자랐다. 입을 다물기 딱 좋은 기회다. - P96

자갈 진입로에서 자동차가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나는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나는 선 자세에서 곧장 출발하여 진입로를 달려 내려간다. 심장이 가슴속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 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마음속을 스친다. - P96

나는 손을 놓으면 물에 빠지기라도 할 것처럼 아저씨를 꼭 붙든 채 아주머니가 목구멍 속으로 흐느끼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는 소리를 듣는다. 꼭 한 명이 아니라 두 명 때문에 우는 것 같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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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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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천 년 전에도, 천 년 후에도 우리는 음식을 위해 살인을 할 거고 눈물을 흘리며 주린 배를 채울 거다."
벨몽은 커다란 눈으로 저 멀리 몽골 초원에 쌓여 있는 코의 무덤을 응시하고 있었다. - P500

"롭상, 내 동포들에게 전해다오. 원수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고. 내 죽음 이외에 다른 죽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 P517

총알이 관통한 상처가 이곳이 현실이라는 걸 알려 주었다. 고통이 안도감을 주다니 아이러니했다. - P539

운명은 바꿀 수 있어요. 벨몽이 이런 말을 했을 거예요. 운명이란 뽑을수 없을 만큼 깊숙이 박힌 거대한 뿌리라고. 그 뿌리가 바로 당신이에요. 당신이 바뀌면 뿌리가 바뀌는 거예요. 운명을 바꾸고 싶으면 당신이 바뀌면 돼요. - P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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