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은 다정하구나."
"맞아요. 엄마가 그랬어요. 마이클은 너무 다정해. 한국 할머니처럼."
"정말?"
"근데 너무 다정하면 안 된대요."
마이클이 잠시 기남을 보다 말을 이었다.
"너무 다정한 건 나쁜 거래요."
따뜻한 통증이 기남의 등과 배에 퍼져나갔다. 기남은 마이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클은 자신을 몰랐고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몰랐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애가 오히려 자신보다 자신을 더 많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건 무슨 이유였을까. 부끄러워도 돼요. 기남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말. 기남은 그 말을 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 P3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도 이모에게서 배웠다. 내가 재밌다, 무섭다, 행복하다, 예쁘다, 나쁘다 같은 언어를 쓰기 시작하기 전에, 그런 관념을 형성한 바탕에는 이모의 세계관과 해석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모가 예쁘다고 말하는 것들의 특징을 내 안에서 관념적으로 구성했고, 이모가 나쁘다고 하는 것들의 특징 또한 그렇게 했다. 그리하여 내가 무섭고 싫고 밉다는 말을 하게 됐을 때, 그 말에는 이모의 삶을 통과한 세계관과 해석이 들어 있었다.
이모는 왜 그렇게 싫은게 많아? 왜 다 못마땅하게 여기는 거야? 왜 그렇게 불평을 해? 좋은 면을 보는 게 그렇게 어려워? 이모가 감정적으로 인색한 사람이란 거 알아? 때로는 마음속으로,
때로는 이모 앞에서 소리 내어 그렇게 말했으면서도 때때로 나는 내 안에서 내가 그토록 견디기 힘들어했던 이모의 모습을 본다. - P225

나는 이모가 그 정도로 화를 낸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집에 돌아와 아빠 책장에서 국어사전을 꺼내 ‘개가‘라는 말을 찾아봤다. 오촌 아저씨는 이모가 ‘개가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고. 개가의 사전적 정의는 이러했다.
출가한 여자가 이별 또는 망부로 인하여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일, 나는 출가와 망부라는 단어까지 찾아보고 나서야 개가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모 인생의 큰 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건 그순간부터였다. - P223

이모는 어려서부터 내가 모든 할 수 있고 모든 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이모는 그 말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는것처럼 얘기했다. 그 말이 얼마나 큰 부담으로 다가왔는지 이모는 끝까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모가 내게서 봤던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것이 내게는 무엇보다도 큰 공포였다는 사실을 이모는 종종 ‘내가 너라면.…‘이라고 말을 꺼내고는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 목소리에는 옅은 분노와 함께 어떤 질투가 담겨 있었다. - P2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두는 것. 모른 척하는 것.
그게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었던 거야.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결정적으로 힘이 되어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방식이기도 했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야. 다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들쑤셔봤자 문제만 더 커질 뿐이라고. - P150

내가 일하던 레스토랑은 호텔 맨 꼭대기 층에 있었어. 일을 마치고 복도로 나와서 서울의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날들이 떠올라. 그럴 때면 내가 아직 스물두 해밖에 살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어. 벌써 백 년은 산 것 같은데, 이미 너무 오래 산 것처럼 지쳐버렸는데 아직도 스물둘이래. 밤하늘 아래의 불빛들이 반짝이면서 너는 앞으로도 살아야 해, 살아가야 해, 하고 낮게 합창하는 것 같았어. 더 알고 싶은 것도, 더 해보고 싶은 것도 없는데, 이젠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데 그런데도 살아야 한다고 자꾸만 누가 내 등을 떠미는 것 같았지. - P1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녀는 그런 상황에 체념한 채로, 그 모든 일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고통스러웠지만 살아졌고, 그녀는 살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살아진다. 그러다보면 사라진다. 고통이, 견디는 시간이 사라진다. 어느 순간 그녀는 더이상 겉돌지 않았고, 그들의 세계에 나름대로 진입했다. 모든 건 변하고 사람들은 변덕스러우니까. 그러나 그후에도 그녀는 잠들지 못하거나 질이 낮은 잠을 끊어 자며 아침을 맞았다. 가끔씩 스스로에게 벌을 주듯 폭음을 하고는 환한 대낮에 사무실에서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했다. - P108

오랜만에 펜을 들어 너에게 편지를 써.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
네 나이 때는 하루에 꼭 한 쪽이나 두 쪽의 일기를 써야 잠들 수있었어.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 길이가 점점 줄어들었고 요즘에는 그날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어떤 손님을 만났는지 같은 내용을 짧게 메모하는 수준이야. 오늘이 어제와 다르고 또 내일도 다를 거라는 근거를 적어두는 거지. 기록하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같은 날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한꺼번에 사라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있거든. - P1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날 차 안에서 다희에게 한 이야기들을 오래도록 밖으로 나가기를 바랐던 것처럼 그녀 안에서 아우성치며 그녀를 밀어붙였다. 이미 정리한 시간이기에 그녀는 정제된 언어로 이야기했지만, 몸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땀이 났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머리가 아팠고, 때로는 그때처럼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그렇게 매일 두 시간 남짓 달리는 차 안에서 서로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동안 그녀와 다희는 선후배도, 친구도, 애인도, 우연히 지나치는 사람도 아니었다. 둘은 차에서 내려 일터로 가면 동료가 되었다가, 다시 차에 올라타면 서로의 이야기에 몰두하는 알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 P1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