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영이 가진 장점들의 상당수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몇 가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타인의 상처에 대해 깊이 공감했고, 상처의 조건에 대한 직관을 지니고 있었다.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었다. - P59

당신은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급히 유인물을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희영도 그렇게 했다. 그렇게 접어서라도 그 사람의 몸을 가려주고 싶어서. 맨 앞쪽에서는 미군 범죄를 규탄하는 발언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의 누이였습니다!
그때 당신과 희영의 뒤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범죄는 모국에서! 그러자 누군가 조금 작은 소리로 따라 외쳤다. 강간은 미국에서!
당신과 희영은 서로의 얼굴을 봤다. 몇몇이 그 구호를 산발적으로 외치는 동안 당신은 몸을 돌려 누군지 모를 사람들에게 말했다. 구호 중단하세요. 구호 중단하세요. 그러나 당신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한국어로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당신은 인파 속에서 허우적대면서 말했다. 구호 중단하세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희영은 이야기했다. 그 구호보다도, 주변에서 옅게 퍼지던 웃음소리가 더 기억에 남는다고 강간이라는 말이 집회에 활기를 주던 그 순간을 잊을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당신은 얼음장 같은 희영의 손을 잡고 인파를 빠져나왔다. - P70

글쓰는 일이 쉬웠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도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앗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 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 P75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 P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러자고, 같이 가자고 답했다. 그녀와의 동행이 설레면서도 불편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연기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어린 학생들을 보는 것과는 다르게 바라봐주기를 바랐다. 그녀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 어려움이 섞인 마음을 감추려고 나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 P25

같은 시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책상에 앉아서 논문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는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낼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이해했다. 터놓고 얘기하면서 내가 괴로웠다. 내가 상처 입었다, 라고 말할 자격조차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렇지만 상처받았다는 사실은사실 그대로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 P27

나는 아직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말을. - P33

그대로라는 말이 거짓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대로라고 말하는것은 그 많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예전의 당신이 존재한다고, 그 사실이 내 눈에 보인다고 서로에게 일러주는 일에 가까웠다. - P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들은 점점 초조해진다. 이제 아기를 맞이하는 집은 승리의기색이 바랬다. 내시 부인이 또다시 아이를 가졌을 때, 남편은 조그만 야구글러브를 사 와서 아내의 부풀어 오른 배에 대며 아들로 태어나라고 종용한다. 앤이 세상에 나왔을 때 그들이 마땅히 느꼈을 실의를 상상해보라. 아이에게는 가족 중 누군가의 이름을 대충 붙여준다. 예쁜 이름을 위해 따로 ‘e‘를 추가하는 식의 번거로운 수고는 사서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바비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 신의 가호에 경배를! 앤을 낳고 낙담한 지 3년 후, 부부가 최후의 정기를 발휘한 건지 마침내 바비가 태어난다. 바비는 아빠의 이름을 물려받았다(로버트의 애칭이 바비임-옮긴이). 사내아이는 맹목적인 사랑을 받고, 어린 소녀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별 볼일 없는 존재인지 문득 깨닫는다. 특히 앤이 그랬다. 아무도셋째 딸을 원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이제 와서야 약간의 관심을 받게되었다. - P30

"놈들이 아이를 붙잡았다니 무슨 말씀이신지요?"
"놈들이든, 한 놈이든 뭐든 간에요. 짐승 같은 놈들이 그랬단 말입니다. 아이들을 잡아 죽이는 정신병자죠. 우리 가족이 자고 있는 동안, 기자님이 취재를 하려고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동안 살해할 아이를 찾아다니는 놈이 있다는 겁니다. 기자님도 나도, 어린 내털리가 그저 단순히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요."
그는 남아 있던 주스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입을 훔쳤다. 좀 과하게 포장한 감은 있지만, 그의 대답은 훌륭했다. 이런 일은 흔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얼마나 많이 보는지와 같은 질문에 청산유수처럼 대답한다. 얼마 전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스물두 살 딸의 어머니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녀는 내가 전날 밤에 우연히 보았던 법정 드라마의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답변으로 내놓았다. 말로는 그가 참 안됐다고 하고 싶지요. 하지만 지금은 누구라도 안됐다고 생각할 일이 다시 있을지 걱정이 돼요. - P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는 고마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나 때문에 가진 돈을 다 썼으니, 기니 여사가 아니었으면 내가 어디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난 내가 어디 있을지 알고 있었다. 시골에 있는 대형 주립 병원에 있겠지. 이 개인 병원 바로 옆에 있는 병원에.
기니 여사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그녀가 유럽행 티켓이나 크루즈 왕복표를 줬다 해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내가 어디 있든—배의 갑판이든 파리나 방콕의 거리 카페— 나 자신의 시큼한 공기 속에서 속을 태우며 벨 자 밑에 앉아 있을 테니까. - P245

강 위로 둥글고 푸른 하늘이 열렸고, 강에는 배가 많이 떠다녔다.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곧 엄마와 동생이 손으로 양쪽 문을 잡았다. 뜨겁게 달궈진 다리 위를 지날 때 타이어에서윙 소리가 났다. 물, 배, 푸른 하늘, 갈매기 떼는 비현실적인 엽서를 떠오르게 했고, 우리는 강을 건넜다.
나는 회색의 호사스러운 좌석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벨 자의 공기가 내 주변을 메워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 P246

물론 우리 대학의 저명한 여자 시인은 여자랑 살았다. 뚱뚱하고 머리를 치켜 깎은 고전 전공 학자였다.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많이 낳을 거라고 말하자 시인은 끔찍한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그러고는 쏘아붙였다.
"하지만 커리어는 어쩌고?"
머리가 아팠다. 왜 수상한 늙은 여자들이 내게 관심을 퍼부을까? 그 유명한 시인, 필로메나 기니, 제이 시, <크리스천 사이언티스트> 여자 상사 모두 마찬가지였다. 다들 날 옆에 두려 했다. 보살피고 영향을 주어서 자기를 닮게 만들려고 했다. - P291

"우리, 떠나온 곳에서 시작하는 거야. 이 모든 게 나쁜 꿈이었던 것처럼 행동하자꾸나."
나쁜 꿈.
벨 자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죽은 아기처럼 텅 비고 멈춰버린 사람에게 세상은 그 자체가 나쁜 꿈인 것을.
나쁜 꿈.
난 모든 걸 기억했다.
해부용 시신, 도린, 무화과 이야기, 마르코의 다이아몬드, 광장에서 만난 해병, 닥터 고든 병원의 사시 간호사, 깨진 체온계, 두 종류의 콩 요리를 가져다준 흑인, 인슐린 투약으로 9킬로그램이 늘어버린 체중, 하늘과 바다 사이에 회색 두개골처럼 튀어나온 바위. - P315

어쩌면, 망각은 친절한 눈처럼 그것들을 무감각하게 하고 덮어버리리라.
하지만 그것들은 나의 일부였다. 그것들은 나의 풍경이었다. - P316

"어떤 남자분이 찾아왔는데요!"
흰 캡을 쓴 간호사가 웃는 얼굴을 문틈으로 내밀었다. 순간적으로 내가 대학에 돌아왔다고 착각했다. 흰 전나무 가구, 나무와 언덕 위로 펼쳐진 하얀 풍경, 휑한 마당 정경.
‘어떤 남자가 찾아왔어!‘
기숙사 당번인 선배가 전화로 그렇게 말했다.
브리지 게임을 하고 소문에 대해 떠들고 공부하는, 내가 돌아갈 대학의 여학생들과 벨사이즈의 우리와 무엇이 다를까?
그 여학생들 역시 어떤 종류의 벨 자 밑에 앉아 있는 것을. - P3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탁이에요. 시하를 사랑하고 싶어요. 진정한 사랑을요. 진짜를 느끼고 싶어요. 진짜 시하를 만나고 싶어요. 한순간이라도 좋아요. 제 뇌를 꺼내서 산산이 분해해 버린다 해도 상관없어요. 시하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세계의 끝을 건너고 싶어 하는 아이구나. 알아. 관계는 늘 아득하지. —도 한때는 영원히 —을 이해할 방법이 있을 거라 오해하고 있었지."
빛은 쓸쓸히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존재는 하나의 세계니까. 네 안에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구겨지고 찌그러져.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버려. 영원히, 마주하는 순간 망가져 버리는 거야. 너도 그도." - P2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