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는 가난한 나라를 돕는가 - 국제원조를 둘러싼 정치와 외교적 진실을 낱낱이 파헤치다
캐럴 랭커스터 지음, 유지훈 옮김 / 시공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대한민국’에는 구호를 받는 나라, 원조 수혜국이라는 딱지가 늘 붙어 다녔다. 불과 10년 남짓 전까지의 일이다. IMF로부터 긴급 구제자금에다 이웃 일본으로부터 구속성 원조를 받으며 국제사회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던 치욕스러움이 바로 어제의 일이란 이야기다. 그러나 이제 교역과 국민총생산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국제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의 부담, 즉 지금의 성장에 이르기까지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원조를 이젠 돌려줘야 하는 대열에 합류하여야 하지 않겠냐는 보이지 않는 압박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웃 일본은 공여국의 대열에 선 이런 한국을 자신들의 집중적이고 선진적인 원조를 통하여 성공적인 발전과 사회 안정을 이룩시킨 모델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무슨 망발이냐고 하기에는 60,70년대 일본의 원조가 한국경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에 냉전시대, 자본주의체제의 최전선으로서의 지역적 위치로 인하여 자신들의 국익과 위상의 유지를 위해 미국 또한 한국의 주요 공여(供與)국이었음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들 원조는 과연 순수하게 한국의 경제발전을 지원하자는 의도였을까? 그네들이 한국에 제공한 원조의 본질이란 그런 연민과 선의의 인도적 정신과는 결코 무관하였음을 이 저술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원조대국이라 할 수 있는 덴마크,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5개 국가의 대외원조 역사와 그네들의 원조정책, 원조를 위한 정치, 사회적 조직에 대한 분석과 통찰을 통한 본질의 규명이 있으며, 이로부터 21세기 행성 지구에서의 원조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미래 제안과 구상이 있다. 중점적으로 소개되고 분석되는 이들 5개국의 해외원조의 목적은 분명 그 출발의 가치나 정책적 방향에서 많은 차이점들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인구 500 만 명에 불과한 유럽의 소국인 덴마크가 GNP 1%의 공여순위 1위 국가라는 아주 낯선 이해처럼, 의외의 사실을 목격하게 되기도 한다.  

원조란 “수혜국 국민의 형편을 개선할 요량으로 정부가 다른 독립 정부나, NGO 혹은 세계은행과 UNDP 등 국제기구에 공적 재원을 이전하는 자발적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정의에서 보듯이 원조의 표면적 행위에는 공여국의 목적은 설명되고 있지 않다. 다만 빈국이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가의 전후 복구, 불안정한 사회의 안정을 지원하는 등 수혜국의 형편을 나아지도록 돕기 위한 행위라고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 대외원조가 실제 수혜국들의 형편을 개선시켰는가에 대해서는 사실 어떠한 확신도 없다는 것이 이 저술의 주요 결론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는 바로 공여국들의 원조 목적을 보면 그 결과를 예상하는 것이 어렵지않다. 

공여율은 세계 20위권에 머물지만 공여금액은 단연 최고의 규모인 미국의 원조 목적은‘외교’에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대외원조의 목적을 영리나 개발과 같은 목적으로 명료하게 구분하는 것에는 그 속성상 한계가 있지만, 1990년대 구소련이 붕괴하기까지 냉전체제에서 자기진영의 확보를 위한 세력의 다짐을 위한 원조였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의 경우는 오직‘영리’목적의 원조로 원자재의 확보나 수출증진을 위한 구속성 원조와 같이 돈벌이를 위한 것이었으며, 보건이나 교육 등 진정한 원조에는 거의 배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최근에 와서 국제사회의 질책과 압력에 따라 이와 같은 구속성 원조라는 야박한 인심을 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나 근본적 변화는 없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원조와 깊은 인연을 맺는 두 국가의 원조의 성격에서와 같이 이들이 한국경제의 성장과 안정에 기여했다는 주장에는 많은 위선과 기만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한국의 대일 교역이 적자를 면치 못하는 근저에는 일본의 물품을 사들이는 것으로 한정된다던가, 일본 기업의 제품이나 기계장치에 의한 산업건설에만 지출되도록 하는 바로 이러한 일본의 구속성 원조에 연유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프랑스의 원조는 그네들의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지역의 식민지국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에 종속시키고, 외교 시장에서 자신들의 리더십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독일의 경우, 전후 복구를 위한 마셜플랜의 주요 수혜국으로서의 세계사회에 대한 보상의 성격으로 출발하여 동독과의 냉전시대 경쟁에서의 외교적 우위를 확보키 위한 정략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들 강대국의 대외원조는 표면상으로는 가난한 나라를 돕는다는 것이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자국의 외교적, 경제적 이익을 위한 구실 이상이 아니었음을 이해케 된다.

반면에 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원조정책을 덴마크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들의 공여 프로그램은 빈곤퇴치를 강조하는 순수한 개발원조로서 그네들의‘인도적 개방주의’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그대로 인류사회를 위해 실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조는 정치조건을 수반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치 하에 빈국들의 국가능력,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개발의 장려, 인권의 신장, 보건위생 등 뚜렷하게 빈곤에 집중하고 있으며, 원조금액의 25%라는 엄청난 규모를‘무상원조’에 할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원조의 본래적 정의와 같이 수헤국과 국민의 형편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주는‘세계의 사회적 양심’을 실천하고 있는 유일하다시피 한 국가라는 점이다.

이 저술은 이처럼 주요 원조대국의 원조목적에 대한 다각적인 고찰은 물론 원조방법과 원조를 위한 조직에 대한 형태를 검토하고 있어, 그네들의 시행착오와 정치적 현실에 입각한 다양한 시스템들을 통해 새롭게 원조국가의 대열에 참여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유용한 기반정보를 얻을 수 있기도 하다. 이러한 대외원조 시스템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으로 여겨지는 것이 있는데, 바로 원조국으로서의 국민적 공감대의 형성과 지속가능한 체제를 위한 사회 환경의 측면이다. 내부의 평등과 사회 정의의 강조, 그리고 국가가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에 적절한 도덕적이고 정치적으로 성숙한 역량을 지녀야 한다는 것으로, 청소년 교육 등 원조에 대한 대중홍보는 물론 국민과 의회의 참여 속에서 이루어지는 투명성 등에 대한 조언은 각별히 유념해야 할 요인이라 할 것이다. 넓게 공유된 사회적 합의는 쉬이 단절되지 않으며, 부패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국제 원조에 대한 한 층 깊어지고 진지해 진 안목을 지니게 된다. NGO를 비롯한 기타 민간 구호기관은 물론, 대외 원조정책의 기획과 조직에 관여하는 정부관계자들이 꼭 참조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얼굴에 흩날리는 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4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좀 독특하다. 수사관, 탐정 한 명 등장하지 않은 범죄 추리소설이니 말이다. 주룩주룩 내리는 일본의 장맛비는 정말 기분이 나쁘다. 그 후덥지근한 기운이란...새벽 세시, 죽은 남편으로 애를 끓이는 꿈속에 들려오는 벨소리, 지극히 비상식적인 시간에 울리는 전화. 그리곤 아침 댓바람부터 친구‘요코’의 행방을 묻는 그녀의 애인인‘나루세’가 야쿠자를 동행하고 무작정 집안으로 쳐들어온다. 허락도 없이 온 집안을 뒤집어 놓는다. 요코가 나루세의 모기업 비자금 1억엔을 갖고 사라졌다는 것. 가장 친한 친구이니 의심 대상순위 1번이란다.

끌려간 곳은 야쿠자 일파의 회장실, 일주일을 줄 터이니 요코와 사라진 돈의 행방을 찾아내라는 것, 이제 ‘무라노 미로’라는 여인은 친구 덕택에 목숨을 건 친구 찾기에 돌입하게 된다.  무고하게 처해진 위기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여성 이상의 모습을 발견키 어렵지만 추진력은 가히 여느 수사관을 능가한다.

작품은 당연 사라진 요코에 맞추어지고, 여기서 작가‘기리노 나쓰오’식 음울하며, 엽기적이고, 음탕한 소재들이 하나씩 그 얼굴을 드러낸다. 본디지 룩을 입고 페티쉬 이벤트를 연출하는 등 선정성으로 저널계의 시선을 모은 르포라이터인 요코의 삶의 궤적을 밟아 나갈수록 친구의 낯설기만 한 진실을 발견케 된다. 1억엔의 행방을 찾느라 혈안이 된 나루세와 요코를 찾으려는 미로의 연합전선은 불신과 신뢰를 오가며 어렵사리 전개 된다. 요코의 사무실에서 허드렛일을 도와주는‘유카리’, 그녀의 연인인 듯한‘후지무라’, 요코와 각별한 사이로 보이는 SM쇼를 통해 죽음의 문학을 실현하는‘가와조에’, 어디선가 본 듯한 무희(舞姬) 등 모두 요코의 잠적과 관련이 있어 보이지만, 아무런 실마리도 연결 할 수가 없다.  

소설은 요코의 마지막 행적을 따라 정통 저널리스트로서의 야망을 향해 독일의 도시로 치닫고, 네오나치(neo-nazi)파벌간의 암살사건의 현장에 있었음이 드러나지만, 인종차별의 체험기였던 당초 르포의 목적이 바뀌었음이 밝혀진다. 자신의 입지를 키워나가던 야심적 르포라이터의 잠적과 비자금 도난 사건을 둘러싼 단순한 추적이 네오나치즘, SM쇼, 나루세의 전부인과 요코와의 감정대립까지 얽히며, 무수한 복선을 만들어 낸다. 약속된 일주일이란 기간 내에 요코의 행방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만 한다. 추적의 매듭을 풀어 줄 수 있을 것이라 짐작되던 인물은 자살이 추정되는 주검으로 발견되고, 미궁으로 빠지지만 의외의 명쾌한 단서가 포착되고 사건은 완벽하게 마무리 되는듯하다.

기리노 나쓰오가 누구인가!‘반전의 여왕’답게, 불과 책장을 몇 장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죽은 자가 남긴 의미심장한 메시지부터 주어진 단서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욕망의 끈적거림이 묻어나는 세상에서 어둠과 죽음은 어디에서 시작되겠는가? 아시아적 상상을 넘어서는 탁월한 작품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 동양적 특수성을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의 추구까지, 그리고 가히 논리적 정교함과 치밀한 구성에 있어서는 어떠한 극찬도 아깝지 않을 정도에 이른다.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에 까지 장치된 세밀함을 발견하면 아!~하는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작품이‘무라노 미로’라는 여탐정을 탄생시키는 시리즈의 첫 편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기리노 나쓰오를 영리한 언어의 야수(野獸)’라 했던가? 어둠의 세계가 정말 우아하게 마음껏 뛰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눈앞에 달린 술(장식으로 다는 여러 가닥의 실)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달리는 말처럼, 딱딱하게 얼어버린 채로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감시원의 눈길을 의식하며 걸을 수밖에 없는 두려움이 일상화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고문과 감금,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공포의 세계, 독재자‘차우세스쿠’의 사익을 위해서만 작동되던 1970,80년대의 경찰국가 루마니아 전체주의정권의 스케치이다. 사실 우리의 70년대 전후시기와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어서 소설 속 네 명의 청춘을 온통 빼앗아버린 살풍경(殺風景)한 모습이 낯설지만은 않다.

개인의 내면적 사유의 자유까지 간섭하고 통제하려는 사회, 권력이 지시하는 것에 순응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향인 전체주의사회는 거짓과 불신을 조장한다. 거리와 상점, 식당, 학교 어디든 감시원의 귀와 눈초리가 사람들을 침묵하게 한다. 소설은 이런 암흑의 세계에서 상처입고 헐떡이는 젊은이들의 불안한 초상을 중심으로 작가 특유의 응축된 시적언어로 처연하면서도 강직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품 초반‘네모’로 표현되는 대학 기숙사의 방처럼 소설의 언어와 문장은 메마르고 건조하며 지극히 짧게 완성되지만, 그 어떤 장황한 묘사보다 독창적이고 풍부한 의미를 내재하고 있어 여운과 감동이 소실되지 않고 지속되는 특유의 풍요로운 감정적 느낌을 갖게 한다. 바로 네모는 공간의 형태이기도 하지만 그대로 그 공간에 있는 여자 대학생들의 감성이기도 하며, 각박한 사회성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더구나 네모의 벽장 속에서 목을 매단 채 발견되는‘롤라’의 공책에 쓰인 “...라고 롤라는 썼다.”라는 진술들은 그야말로 시로 승화된 소설 아닌가 할 정도의 백미(白眉)들이다.

개인의 짐을 넣어둔 사적 장소인 트렁크조차도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 “나라 안에는 똑같은 트렁크 열쇠가 수없이 많았다. 모든 열쇠가 거짓이었다.”는 문장처럼 이상의 너절한 수식과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불법 수색과 압류, 사적자치의 불인정, 국가권력의 위선과 기만, 공포가 모두 내장되어있다. 또한, “옷 속에 그림자만 들어 있는 것 같은, 하루 일과에 지친 남자가 보인다.”라는 한 문장에서 비참한 노동자, 민중들의 희망이라곤 기대하거나 찾을 수 없는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듯이, 문장들은 고밀도로 단단하게 짜여있어 그 풍부한 의미를 음미하느라 쉬이 책장을 넘기지 못한다.

롤라의 의심쩍은 죽음이 인연이 되어 모인 여대생‘나’와 남학생‘쿠르트’,‘에드가’그리고‘게오르크’는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와 시를 얘기하고, 노래를 부른다. 이들의 시와 노래는 부조리하고 불온한 세상에 대한 불안한 감정이 흐른다. 이는 전체주의에 기탁하여 민중의 피를 빨아대는 개새끼들과 개의 형상을 한 감시원, 비밀경찰의 음험한 시선을 모은다. 졸업 후 국가에 의해 배정된 지역과 공장으로 뿔뿔이 흩어지지만 이들의 목숨을 노리는 주구(走狗), 경감 프엘레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은 은밀한 고발과 감시만이 설쳐대고 신뢰라고는 한 조각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의 집단에 불과하다.

서로의 상황을 주고받기 위한 편지 속에는 머리카락 한 올을 넣고, 손톱가위는 심문, 수색은 신발, 미행은 감기 걸렸다...생명에 위협을 느끼면 쉼표하나로 약속한다. 그러나 이들의 편지에는 어김없이 이 단어들과 문장이 들어있고, 호칭 뒤의 쉼표는 지나치게 두꺼워지기만 하며, 수시로 가해지는 심문과 수색, 그리고 고문은 죽음의 휘파람 소리를 점점 가까이 들리게 한다. 전체주의에 순응하지 않거나 작은 조짐이라도 있으면 그 사람은 도시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영혼이 사라진“도시의 정신병자들은 절대 죽지 않아. 쓰러지면 그들이 서있던 그 자리, 아스팔트에서 똑같은 사람이 솟아”오르듯이 인간의 본원적 정신을 빼앗을 수는 없는 것.

침묵 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죄책감을 죽지 못해 사는 자신들의 가족과 이웃, 사람들로 정당화하지만, 그렇다고 파괴된 도덕성까지, 정의까지 모른 채하기에는 너무 젊기만 하다. 사악한 권력은 끝내 청춘의 목숨을 하나씩 앗아가고, 떠날 수 있는 자는 독일로, 헝가리로 도피한다. 발령 받은 곳에 자신의 짐을 풀 수 없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안에는 불안감에 날이 고추선 흉흉한 자의식인‘마음 짐승’만이 도사리는 곳, 독재자의 확인되지 않은 병에 대한 소문은 모두에게 쾌재를 부르게 하는 곳, “바늘귀에 꿰인 실처럼” 굴욕이 이어지는 곳, 오로지 불신만이 깊게 드리워진 세상이 젊음과 자유를, 인간의 존엄을 누른다. 전체주의의 무참함과 옥죄는 공포의 긴장이 젊은이들의 절망적인 시선에 불안하게 흔들리며 소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잔혹하고 뼈아픈 우리 인간사회의 기록이다. 다시금 헤르타 뮐러의 시적 감수성이 농축된 언어를 통해 음울한 이 시대의 초상을 우아하게 읽어냈다. 이 같은 역사의 오류, 인류의 어리석음이 반복되지 않기를 희망하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블루 노트북
제임스 A. 레바인 지음, 홍성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자기 권익을 보호할 능력이 없는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적착취의 만행이 그 잘난 이성으로 무장된 인간사회에서 근절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읽는 내내 무참함과 분노가 짐승처럼 마음을 어지럽힌다. 돈이라는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면서 거래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은 존재치 않는 세상이다. 인간에게서‘존엄성’이라는 단어는 수식적인 그럴듯한 의미만으로 사용되고, 정신의 숭고함은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인 효율지상의 물신주의의 단면을 어린 소녀의 고귀한 영혼의 외침 속에서 고통스럽게 들여다보게 된다.

아홉 살 어린 소녀가 애비의 손에 붙들려 천진난만한 불안과 호기심속에 대도시 뭄바이로 이끌려가는 여정부터 그 심산(心酸)함이 가슴을 억누른다. 자신을 포주에게 넘기고 돈뭉치를 건네받으며“기뻐하면서도 자신을 혐오하는 듯한 표정”의 아비를 바라보는 아이‘바툭’의 망연한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고, 포주의 손에 끌려가면서,“아빠, 날 데려가줘요, 제발.”하는 그 간절한 절규가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듯하다.

더러움이 켜켜이 쌓여만 가는 쇠창살이 쳐진 화장실만한 작은 방을“황금으로 만들어진 자궁”이라고, 그 속성을 버리지 않은 채 화려한 공간으로 상상하는 소녀의 삶을 견뎌내려는 안간힘에서 참았던 내 인내도 무참히 무너져 내린다. 아동의 노동과 성을 착취하는 공공연한 장소가 되어버린 고아원의 수심(獸心)만 무성한 인간사회의 더러운 거래가 적나라하다. 창녀가 된 어린 아이들이 출산한 유아는 또 다른 생산물이 되어 거래되고 착취의 도구로 이용된다. 어디에도 이성으로서의 인간의 사유는 작동하지 않는다.

소설은 사창가에 팔려간 아홉 살,‘바툭’이 열다섯 소녀가 되기까지 6년간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의지이자 결연한 자존의 출구로서 쓰인 비밀 글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바툭은“뭄바이 커먼가(街)에서 몸을 파는 매춘부다.”손님에게 최상의 서비스, 소위‘맛있는 케이크를 만들어주기(성적 향응)’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 자신의 휴식시간을 조금 더 얻어 내는 지혜임을 깨달을 정도로 적응하고, 그래서“넌 그중 제일 맞잇는 케이크야”라고 포주에게 환대를 받는 창녀로 성장하지만, 진정한 자신의 삶의 가닥이 완전히 끊어진 듯한 상실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손님을 받고 난후 잠간의 휴식시간이면 숨겨둔 파란공책(Blue Notebook)에 이야기를 쓰며, 자신을 투영하는 유일한 즐거움이 어느 순간부터는 글을 쓰는 중간 중간에 손님을 받는 것이라고 내면의 질서를 승화시켜 나간다. 또한 고향 마을 강가에 나가 강물의 소리와 물위의 아른거리는 햇빛에 매혹 되곤 했던 시절의 기억은 세상에 홀로 있지 않다는 위로가 되 주었듯이, 험한 커먼가 역시 자신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강물이라 위안하기도 한다. 이처럼 어린 소녀를 포위하고 있는 온통 사악하고 잔인한 환경을 버텨내기 위해선 반복되는 엄청난 감정들과의 싸움을 이겨내야 했을 것이다.

대부호의 자식을 위한 노리개로 팔려가‘히타’라는 하녀에게 안겨 봇물같은 눈물을 흘리며, “그녀에게 강물 내음이”, “내 고향 내음이” 났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열다섯 소녀에게서 그 북받치는 감정의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외로움과 고통을 발견하게 된다. 부도덕과 정의를 논의할 공간이 없는 가진 자들의 파탄된 정신세계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은 물론 고통에 대한 공감이란 인식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착취, 학대, 폭력, 그리고 살해에 이르기까지 보호 받지 못하는 취약계층의 삶이 다시금 인간사회의 추악한 현실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고깃덩어리를 달라고 애원하는 늙은 개 같은 표정”을 한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이 소설을 외면치 않고 마지막 까지 읽어내는 것은 정말 힘겨운 작업이 된다. 비록 사랑에 대한 이해로 맺는 어린 소녀 바툭의“은빛 눈동자를 지닌 표범”이야기는 그녀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마지막의 간절함이 되어 울리지만, 세계의 어디에선가 신음하는 아이들의 처참한 모습이 환영이 되어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까지 잠재우지는 못한다. 우리 인간사회의 주변부에서 자행되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폭력의 주체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 아닐까? 물질이 정신을 압도하는 세상에 경쟁적으로 몰입하는 바로 우리들 말이다. 아이들만이라도 제발 이러한 세계에서 구원해 낼 수 있는 세계, 그 아이들이 바로‘나’자신으로서 이해 될 수 있는 가치와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세계 말이다. 자신의 영혼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써내려간 어린 창녀의 처연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이 가슴을 더욱 시리게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0-08-30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부턴가 이러한 종류의 수기, 소설, 보고서 등 모든 글을 끝까지 읽질 못하게 되었어요. 그 시기는 제가 아동후원을 시작하던 때와 맞아떨어지고, 아동성범죄 예방에 대해 공부를 하던 때와도 일치합니다.
너무 아픕니다. 이런 사실들.

필리아 2010-08-30 13:08   좋아요 0 | URL
네, 읽다가 덮기를 몇번씩 반복해야 했지요...
 
메모리 북
하워드 엥겔 지음, 박현주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정신의학자이자 신경전문의인‘올리버 색스’의 대중적 유명저작이 된『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등장 할 법한 인물로서‘의미기억’은 잃지 않았으나, 단기성 기억력은 취약하기 그지없고, 글자를 쓸 수는 있으나 읽지는 못하는‘실독증’이란 독특한 신경생리학적 이상자의 재활의 기록이자,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의 추리 소설이다. 특히 작가인 ‘하워드 엥겔’이 바로 이‘실서증(失書症)없는 실독증(失讀症)’의 투병중에 집필한 분투와 노고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숭고한 인간 의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후두부가 함몰되어 2개월 남짓 코마상태에서 깨어난 사립탐정,‘베니 쿠퍼맨’의 재활 무용담(?)이라 할까? 단기기억상실로 인해 자신의 두개골이 왜 깨지게 되었는지, 어떤 사건에 연루되긴 한 것인지, 그리고 왜 갑자기 모든 글자를 읽을 수 없게 되었는지 알 수 없게 된 자신이 당혹스럽기만 하다. 동료 경찰의 병문안에서 토론토의 한 대학 쓰레기장에서‘매컬파인’이라는 여자와 나란히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는 경황을 듣게 된다.

사고력, 언어구사력 등 인지능력은 온전하지만 읽기능력과 단기기억 상실로 인해 기억을 보전하고, 다시 불러내기가 수월치 않다. 재활치료센타의 쿠퍼맨은 무력감에 시달리지만, 사라져버린 기억들에 시동을 걸 수 있는 메모리 북의 기입과 글자모양을 시각화하여 읽기능력을 복원키 위해 노력한다.
과연 기억의 저 너머로 사라진 사건의 진실을 규명해 낼 수 있을까? “진실로 향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 왜곡된 형상을 이용하는 법을 배워”나가는 사립탐정의 인간한계의 극복을 위한 노력이 버겁기만 해 보인다. 불쑥 떠오르는 알 수 없는 이름,‘로즈’를 단서로 연인인‘애나’의 도움과 고향 친구들의 우정으로 조각난 기억들을 맞추어 나간다. 이처럼 암흑에 묻힌 사건의 근원에 다가가는 전형적인 추리의 진전도 정교한 논리성을 요구하지만, 이에 못지않은 유머러스한 표현들에서 한 줄의 문장을 읽기 위해 엄청난 수고와 시간을 소요하는 무기력을 극복하고 한 편의 완성도 높은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작가의 노력에 절로 경외감을 갖게 되기도 한다.

‘로즈’는 자신이 버려진 채 발견된 대학의 학생이며, 고향 친구인 ‘스텔라 세코’의 딸임을 알게 되고, 바로 이 소녀가 자신의 의뢰인이었음을 짐작한다. 여기서‘스텔라’라는 인물을 묘사하게 되는데 “젖떼기도 전에 벌써 캐리어를 구축하기 시작한 여자”라는 문장처럼 인물성격에 더 이상의 너저분한 설명을 요구하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처리해버리며,  또한 사건을 수사중인 형사,‘사이크스’의 무례하고 거친 말을 점잖게 눙치면서“사적인 대화를 할 때 언제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언사를 했다.”고 자신과 사이크스의 성격을 한 문장에 담아낼 정도로 세련된 문장미를 뽐내기도 한다.

역시 본질은 추리소설이듯이 의심이 가는 다양한 용의자들이 선상에 오르는데, ‘스티브 메입스베리’라는 로즈가 다니던 대학의 교수 실종 사실이 더해지면서 대학과 교수들의 성향으로 시선을 모으고, 마약 밀거래라는 범죄성이 결부되기에 이른다. 치료병동에 앉아 실독증의 탐정이 좁혀가는 추리의 진전을 따라가는 재미가 기묘한 아이러니를 불러일으킨다. 지성(知性)의 정상층에 있는 교수들과 뇌손상 환자인 탐정과의 두뇌싸움이니 볼만 한 게임이지 않은가! 실종된 스티브 교수의 적극적 지원자였던‘파커 샘슨’교수, 쿠퍼맨에게 대학을 쑤시고 다니지 말라는 경고의 편지를 보낸‘네스빗’교수, 신분을 바꿔가며 쿠퍼맨을 찾아왔던 묘령의 여학생, ‘로즈’의 상황을 은폐하기만 하는‘스텔라’등 복선과 함정을 여기저기에 묻어두고 독자의 심리를 지배한다.

허나 오늘의 세상이 만들어내는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물질과 소비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욕구, 바로 이기적이기만 한 탐욕 아니겠는가. 거대한 이윤을 제공하는 마약 중개와 유통의 사슬은 범죄라는 은밀한 속성으로 조직의 견고성에 손상을 가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다. 헉! 가장 살갑고 가까운 사람이 숨통을 조여 오는 것인 모양이다. 반전조차도 결코 격하거나 급하지 않고, 부드러운 잔물결이 흐르는 듯한 구성에서 절묘한 쾌락을 끌어낸다. 인간 의식의 경이로움을 동반한 수고의 이 작품에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감동을 느끼는 것은 물론,‘경험의 진실’에 입각한 추리소설이라는 면에서 그 작품적 가치는 고귀하다고까지 할 수 있지 않을까싶다...신경학과 추리문학이 융합된 귀한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