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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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의 문장들이 죄다 농담처럼 느껴지는건 [농담하는 카메라] 때문도 아니고, 그의 문장들이 죄다 맛깔나게 느껴지는건 [칼과 황홀] 때문도 아니리라. 그의 문장들이 시종일관 스펙타클하고 긴장감 넘치게 읽히는 건 역시 [도망자 이치도] 때문도 아니고, [왕을 찾아서]때문도 아니리라. 그의 문장들은 그의 작품집, 또는 장편 소설, 산문집의 제목들처럼 농담처럼 재미있고, 음식처럼 맛깔나고, 추격전처럼 숨가쁘고, 뒷골목 건달들의 권력싸움처럼 피비린내난다. 서두를 이렇게 들어가고 보니, 맞다. 이 책 [위풍당당] 은 딱, 성석제 작가만이 쓸 수 있는, 성석제 작가만의, 성석제 작가의 작품세계에 화려한 전반기를 집대성한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 작품을, 성석제 작가의 독자를 위한 액기스 모음이라고 느낀 것은 나만은 아닐것이다!! 


 이야기는 경관이 수려한 강가에서 시작된다. 천 리 길이의 강이 만들어낸 최고의 승경으로 손꼽힌다는 지천벽의 용소를 터전삼아 살아가는 한 가족. 영필과 여산, 그리고 소희와 이령, 새미와 준호 남매와 스님 한분, 그리고 용석이까지 끼워줘야 하겠지?

 이 가족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드라마를 찍고 난 뒤 버려진 세트장이다. 조선시대인지 어디인지, 초가삼간에 아궁이까지 달린 집들이 모여있는 하나의 작은 마을. 하지만, 모든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을, 죽어있는 마을. 

 그리고 이 가족들 또한, 피를 나눈 진짜 가족은 아니다. 

아픈 과거를 잊고 강으로, 산으로 모여든 이들. 아주 우연히 한명이 다른 한명을 만나고, 그 한명이 또 다른 한명을 만나 옹기종기 플라스틱 마을에 모였다. 마치 드라마나 연극처럼, 가족이 아니지만 가족인 것 처럼 그렇게 모여들게 되었다. 각자 큰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역시 각자 중요한 능력 - 어찌보면 누군가는 쓰잘데기 없다고 할만한, 음식은 귀신같이 알아챈다던가, 오토바이가 있다던가 등등 - 을 하나씩 갖고 있기도 하다. 

 

 이런 묘한 공동체에 사건이 벌어지는데, 성석제 작가의 작품속에서 사건의 발단은 대부분 여자때문에 일어난다. 게다가, 엄청 예쁜. 남자들이 훅~ 홀리는, 아니 수컷을 훅~!! 가게 하는 아름다운 미녀, 새미. 아니, 여자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구나. 성석제 작가의 작품속에서 사건의 발단은 대부분 여자에 홀린 멍청한 남자때문에 일어난다. 이렇게 강마을에 살던 평범한 작은 공동체는, 역시 근처 산속 별장에서 합숙중이던 소박한 정묵이네 조폭 일가와 엮이게 된다. 


 이야기는 크게 두 공동체의 대결로 압축된다.  이 두 공동체 모두 '가족' 과 닮아있다.

영필과 소희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라면, 여산과 이령은 아빠와 엄마. 용석이는 삼촌같고, 새미와 준호는 말썽쟁이 자식들이다. 스님은 증조할아버지쯤? 3대가 모여사는 대가족이다. 조폭들 또한 서로를 '형님, 아우' 라고 부르곤 한다. 알 카포네의 갱단은 스스로를 '패밀리' 라고 불렀고, 역시 그 태생이 갱과 같은 조폭들 또한 스스로를 가족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영필과 여산을 필두로 한 강마을 가족은 서로가 서로의 유익을 위해 모였기보다는 어쩔 수없는 상황에 의해 서로가 서로에게 얹혀있는 형태이다. 혈연들과의 관계속에서는 정말이지, 고통밖에는 없었던 상황. 영필도, 여산도, 이령도, 새미와 준호도...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처절한 고통뿐이었다. 그들에게 혈연적인 '가족' 은 고통의 근원,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구속이었다. 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족을 떠나야만 했다. 그렇게 자신의 혈연들을 떠나서 도피해온 공간. 그 순간 그 공간은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거듭나게 된다. 플라스틱 일색인 강마을이 그들에게는 그 어떤 낙원보다 따뜻하고 아늑했을터다. 

 정묵의 조직은 '폭력'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필연적으로 폭력에 폭력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역시 폭력을 전제로 한 단체가 필요하다. 뭉치는건 폭력을 행사하기에도, 폭력에 대응하기에도 유리하다. 때문에 서로가 '필요' 하다. 이 두 공동체 모두 생존을 위해 뭉쳐진 '가족' 들이지만 이 두 가족의 성격과 끈끈함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 둘의 본질적인 차이는 피비린내나는 대결을 통해 낱낱히 드러나게 된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 이름은 스스로에게 독자성을 부여한다. '나' 는 '나'. 라는 자각. 스스로를 자각함과 동시에 인간은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함께 살아갈 동반자를 갈구한다. 가족을 이루고, 집단을 이루어 사회를 구성한다. 영필을 비롯한 강마을 가족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가족' 에서부터 버림받은, 혹은 그것들을 버릴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이다. 정묵의 폭력배 조직도 다르지 않다. 그들 역시 여러 이유에서 자신들의 '가족' 에서, '사회' 에서 버림받았다. 치열하고 피비린내나는 대결을 벌이는 이 두 집단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빛은 시종일관 따스하다. 비록 엄청난 고통을 겪게되는 여산과 정묵이지만, 이 둘은 살기위해 아둥바둥거릴 뿐이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살기위해 투쟁한다. 


 어디에서 읽었더라...가족은 가장 큰 선물이자, 가장 큰 짐이라고 했다. 

영필과 여산의 강마을 가족과, 정묵의 폭력배 조직. 영필과 여산의 강마을 가족은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백혈구들처럼 정묵의 조직의 공격 앞에서 점점 더 끈끈하고 강해진다. 그렇다면 정묵의 조직은 어찌될까? 어차피 정묵의 조직은 배신과 하극상이 넘실대는 곳이다. 아마 정묵은 보스의 위신을 잃고 오른팔인 명철에게 '작업' 당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필요에 의해 아빠가 되고, 큰아빠가 되어주었을 뿐이니까.

 영필과 여산은 조폭들과의 싸움으로 인해 진짜 남편과 진짜 아빠로 거듭나고, 정묵의 조직원들은 영필과 여사의 가족들과의 싸움으로 인해 아빠인척, 큰아빠인 척 하던 밑천이 거덜난다. 

가장으로써 가족들을 지키려고 아둥바둥 거리는 영필과 여산을 바라보는 소희, 이령과 새미, 준호 역시 진짜 아내와 진짜 엄마, 진짜 자식들로 거듭나게 된다. 사랑이라는 건 참으로 신기하다. 조금이라도 받으면, 조금이라도 더해서 돌려주고 싶어진다. 진짜 가족이란, 그렇다. 그게 받은 사람에게 돌려주건,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내리사랑으로 돌려주건. 받아봐야 줄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조폭들과의 싸움으로 인해, 서로에게 사랑을 주고 받는다. 


영필과 여산의 가족들은 앞으로 어떤 일들을 겪게 될까?? 어쩌면 작품 말미에 등장한 조폭보다 더 무서운 4대강 전도사들이 쳐들어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필과 여산의 가족들은 소희가 키워내는 작물들처럼 생명력을 가득 머금고 쑥쑥 자라날 것이다.  

그들에겐 진정한 사랑의 뫼비우스의 띠가 얽혀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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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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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하다. 

얼마전 손상된 오른쪽 무릎의 반월상 연골판을 봉합하는 수술을 받느라 정형외과에 2주 가까이 입원했더랬다. 20평쯤 되 보이는 병실에는 무려 7개의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어떤 침대는 보호자가 자리잡을 공간조차 없어 보였다. 연골판을 봉합하기 위해 관절경 수술을 했는데, 그 원리는 이렇다. 일단 무릎 피부에 한쌍의 구멍을 뚫는다. 그 안에  수압이 강한 물을 쏴서 뼈와 근육, 혈관들을 분리해 낸다. 그리고 그 안으로 집게와 니들을 넣어 찢겨지고 접혀지고 말려 올라간 연골판들을 잡아 특수한 실로 꿰맨다. 간단해 보이지만, 어쨌든 수술을 마친 내 오른쪽 무릎은 뼈와 근육들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 하나로 붙어야 하는 것이다. 척추 마취가 풀리고 2~3일간 극심한 격통에 나는 마약 성분(아마 몰핀이겠지?)이 들어있는 무통주사 기구에 달려있는 '약 두배씩 들어가게 하는' 버튼을 사정없이 눌렀더랬다.

 4~5일 뒤 극심했던 격통은 잦아들었고, 어느정도 견딜만해졌을 즈음, 맞은편 침대에 있던 환자가 나와 비슷한 수술을 하고 왔다. 그 역시 무통주사의 버튼을 자주 눌러댔음은 당연한 일.

 하지만, 나는 이미 어느정도 견딜만해졌지만, 여전히 꽤나 욱씬거리는 나의 고통에만 관심이 있었다. 불과 며칠전에 겪었던 - 맞은편 침대의 그 남자가 겪고있는 - 고통은 잊은지 오래였다. 

만약 그 옆 사람이 다리를 절단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 무릎이 더 아팠을것이다. 물론, 내가 수술하기 전날 하루 금식하는 동안, 옆 침대에서 보호자와 함께 치킨과 맥주, 족발을 먹던 환자도 나의 허기짐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역시 내가 입원하기 전날 다른 어딘가의 수술을 이미 받은 뒤였으니까. 


 우리는 사실 타인의 모든 것에 무감한 편이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을 상상하고 스스로에게 적용시키곤 한다. 그 뿐이다. 상상력의 결과일 뿐, 타인의    감정이나 고통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의 골반을 부수고 나오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완벽하게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인간의 외로움은, 절대적인 고독성은 생득권인 것이다.

삶이란, 어쩌면, 이러한 절대적인 고독함을 이해하는 과정, 혹은 절대적인 고독함을 망각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태생적으로 감수성이 더 풍부한, 아니 감수성이 풍부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이러한 직함을 갖게 된 '작가' 라는 종족들은 어떨까? 그들은 절대적인 고독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이해의 대상? 혹은 어떻게든 싸워 이겨 내야 하는 타도의 대상? 


내가 처음으로 접한 김연수 작가의 작품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이었다. 군대를 막 제대하고, 약간의 조울증 속에서 '상대적인 외로움'에 고통받고 있던 시기에 위로처럼 파고든 제목에 이끌렸던 것이다. 철저히 독립된 개체이지만, 톱니바퀴처럼 얽혀있는 역사와 인간에 대한 작가의 통찰에 감동했고, [꾿빠이, 이상]과 [밤은 노래한다]를 통해 그의 치열한 '글쓰기' 라는 행위에 매료되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에서 치열한 그의 장편에서 볼 수 없었던 재치와 유머를 볼 수 있었고, 그가 젊은 시절에 썼던 글의 개정판인 [7번 국도REVISITED] 를 통해 그가  치열하게 외로움과 고독을 마주했던 순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원더보이]를 접했을때의 느낌은, [꾿빠이, 이상] 을 읽어내려가던 때와 상당히 비슷하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느낌말이다. [꾿빠이, 이상]은 이야기의 플롯 자체가 논픽션에 가까운 흐름이었고, 실제로 김연수 작가가 일본의 헌책방들을 뒤지고 국립 도서관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는 말을 듣기도 해서였지만, [원더보이]는 주인공 정훈이에게 김연수 작가가 투영되었다. 하지만, 이야기의 구성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과 비슷하다. 특히 정훈의 부모님의 과거가 짜맞춰지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카타르시스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의 클라이맥스와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김연수 작가의 자전적인 작품으로 읽힌 것은, 문장마다 짙게 베어있는 진정성이 와닿았기 때문일터다. -열세살 열무에게 보내는 아빠의 편지 같은 느낌이었달까.-

덕분에, 이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우리의 아픈 근현대사에 대한 부분보다는, 화자인 정훈의 성장담과 김연수 작가가 가지고 있는 외로움과 고독, '혼자' 에 관한 부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아버지를 놓치고, 독심술같은 초능력을 손에 쥐고 삶으로 귀환한 정훈.

그에게 남겨진 건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함. 때로는 우리 주변의 환경이, 사회가, 역사가 나를 고독하고 외롭게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고독함과 외로움은 '자각' 의 산물이다. 내가 '나' 임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모두 '혼자' 임을 알게 된다. 육십억 분의 일. 나는 언제나 오롯히 나일 뿐, 내가 네가 될 수는 없다. 영원히 나는 나. 너는 너이다. 

 내가 외로운 존재임을, 고독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을때, 비로소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혹은, 그 반대의 순서도 가능하다. 타인을 사랑하게 됨으로써 외로움과 고독함을 깨닫고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정훈이 초능력을 잃어가는 과정은 그가 외로움과 고독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냥 거기 내려놓으면 돼!"

"너의 그 마음을."

"이렇게 두 팔을 펼쳐봐.네 몸은 종이처럼 가벼워질 거야."

"모든 건 너의 선택이라는 걸 잊지 말아라."

"혼자서는 어디도 갈 수 없다는 걸 기억해."

"너를 움직이게 하는 건 바람이란다." 

P.300


그 외로움과 고독함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어쩌면 인간의 유구한 역사는 외로움과 고독함을 이겨내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의 기록인지도 모른다. 혼자서는 어디도 갈 수 없기에, 함께 갈 사람들을 찾고, 붙들고, 부둥켜 안고. 타인과의 접촉 속에서, 우리는 타인의 속마음을 정확히 읽어낼 수 없으며, 타인의 고통도 함께 느껴볼 수 없고, 타인의 말조차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달으며, 외로움과 고독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 순간, 

당신은 나에게 있어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한 호모 사피엔스의 수 1천 65억여명 중,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하나가 아니라,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한 호모 사피엔스의 수 1천 65억여명 중,

유일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외롭지도 않고 고독하지도 않다면, 나에게 그런 특별한 '또다른 하나'는 필요 없을 테니까.


외로움과 고독함이 고통일까?

작품 안에서 외로움과 고독함은 '밤' , '어두움' 으로 은유된다. 

그것은 고통과는 다른 이미지이다. 

내가 유일자라는 것. 혼자라는 것이 고통인가? 

그것이 고통이라면, 난 영원히 타인의 외로움과 고독함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로움과 고독은 모든 인간들에게 동등하게 내려진 것이다. 

누구는 누구보다 더 외롭고, 누구는 누구보다 덜 고독할 수 없다. 수많은 가족들 틈에서도, 외딴 무인도 안에서도, 행인들로 가득한 대로에서도, 광활한 황무지 위에서도, 모두가 똑같이 외롭고 고독하다.

단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외로움과 고독함은 선물이다.

그렇기에 나는 너를 찾아갈 수 있다.

네 손을 붙잡고, 네 따뜻한 몸을 안으면서, 나는 더더욱 외로울테고, 더더욱 고독할테고, 

나는 더더욱 네 손을 붙잡고, 네 몸을 껴안을테니까. 


삶의 반은 고독과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그것들을 껴안고 영유하는 것일테지. 어쩌면 그 순간이, 작품속에서 작가가 말하는 "반짝이는 빛들의 물결" 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밤이 어두운 까닭은 우리의 우주가 아직은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 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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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독서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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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작가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책을 보아야 할까??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보아야 한다.

글이고, 그림이고, 음악이고, 많이 보고, 듣고, 느낀것들이 작가 개인의 경험과 철학이 맞물려 상상할 수 없는 산고를 거치고 나면 새로운 작품을 낳아낸다.

 

 한국의 떠오르는 젊은 작가인 김경욱은 자신의 풍부한 독서량을 바탕으로, 아예 태내에 품고있는 '독서' 그 자체를 소재로 한 작품을 낳았다. [위험한 독서] 부터 [황홀한 사춘기] 까지 총 8편의 단편들이 모여있고, 모든 단편들은 창작, 글, 문장, 단어, 읽기, 이해하기 등과 같이 모두 직간접적으로 독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소재들을 차용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위험한 독서] 라는 첫 작품은 단편집의 시작답게 그 의도를 확연히 드러낸다. 

첫 단편인 '위험한 독서' 의 화자는 책치료사이다. 치료를 원하는 상대방- 환자에게 환경과 사건, 심리에 맞는 책을 소개하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트라우마를 치료해 나간다. 일종의 심리 치료자인 셈이다. 상담을 통해 적절한 처방을 내리고, 그 처방전은 바로 '책' 인 것이다.  [책] 을 이용한 [심리 치료]. '책치료사' 라는 소재는 그 아이디어 자체가 참신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의 설득력도 상당하다. 미술치료, 음악치료도 있는 마당에, 문학치료가 없을리는 없지 않은가? 

 실제로 독서는 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체 게바라는 물론 마오쩌둥과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독서는 수많은 위인들의 첫 길잡이였다. 하지만, 독서가 한 인간에게 언제나 선한 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아니다. 히틀러 역시 상당한 다독가였다고 알려져있다. 지식이란  '힘' 과 같다.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활용되는 법. 한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로 '책' 이다. 책이란 일종의 '간접경험' 이기 때문이다. 직접 경험이 한 사람의 사고를 바꾸기도 하지만, 간접 경험 또한 그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걸 이용해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치료해주는 것이다.  

그 방식은, 환자 - 피상담자의 인생을 한권의 책에 오롯하게 대입시키는 방식이다. 환자-피상담자는 치료사의 추천으로 책을 접하고, 그 책 안에서 자신과 꼭 닮은 등장인물을 만나게 된다. 자신과 같은 일을 겪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등장인물. 그를 통해 환자-피상담자는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사건과 문제점들을 미리 알아챌 수 있고, 그것을 해결하고 이겨내는 과정들을 미리 알아낼 수 있다. 환자 자신과 같은 상처나 과거를 지닌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 책을 읽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역효과가 일어날 수도 있다. 책의 '해석' 과 '적용' 은 오롯하게 독서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책 치료사는 '안내' 만 해줄 뿐인 것이다.

  

 예로부터 '한권의 책' 은 '한 사람의 인생' 처럼 여겨져오기도 했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발터 뫼르스' 등의 작가들은 책에 생명을 부여하기도 했고, '알폰소 슈바이거트르' 역시 '책' 이 갖고있는 무한한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김경욱 작가 또한 그들처럼 '책' 그 자체에 대한 하나의 담론을 펼쳐낸 것이다.  

  


작가의 창작의 고통을 대변하는 듯한 [천년여왕] 은 극중 화자가 밝혔다시피 일본 애니메이션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맥도날드 사수작전] 은 과장과 익살스러운 표현들 속에 자본주의의 허상과 언론의 기만이 절묘하게 숨겨져있고, [공중관람차] , [고독을 빌려드립니다] ,[달팽이를 삼킨 사나이] 는 현 세대의 결혼, 연애, 육아 등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위트와 날카로운 풍자를 가득 담고 리얼과 판타지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아간다. 이 작품을 통해, 훗날 나오게 될 김경욱 작가의 장편인 [동화처럼] 이라는 사실주의적인 연애소설의 태동을 예감할 수 있다. 

 단편집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황홀한 사춘기] 는 한국 사회의 교육현실을 아주 냉정하게 짚어내고 있다.

군대식 기숙입시학원이라는 공간과, 권위주의로 점철되어있는 환경들은 한국의 현실을 냉정하게 짚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요소요소에 스며있는 절묘한 상상력들이 사실주의적인 문장들과 어우러져 상당한 시너지를 일으킨다. 리얼리즘을 오히려 극대화 시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유쾌하면서도 씁쓸하고, 허무맹랑하면서도 설득력있다.

 

언제나 이런 멋진 단편들을 만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단편이야말로 작가의 역량을 손쉽게 알아볼 수 있는 가장 간편하고도 효과적인 창구이다.

김경욱이라는 작가의 단편들은 지나치게 꼬여있지도 않고, 독자들을 현혹시키는 번득이는 반전들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단순한 구조의 이야기들 속에서 주제가 정확하고도 집중적으로 드러난다.

 

쉽고 효과적이다.

그의 작품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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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 - 제16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황현진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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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소년, 아니, 청년? 음 - 암튼 애매한 포지션의 남자가 있다. 

아마 나이를 말하면, 모두가 '애매한 포지션' 이라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아, 여기서 말한 포지션은 '어른' 과 '아이' 의 포지션을 말한다. 누구나 한번쯤은 겪게되는, 사실 어른과 아이를 나눈다는 개념도 조금은 모호하지만 이 나이대의 남녀들만큼 애매하지는 않을터다. 아직 교복을 벗지는 않았으나, 세상과 학교에 반쯤 걸쳐있는 고3. 그것도 취업을 앞둔 실업계 고등학교의 3학년 남학생. 

 한국에는 공고와 상고가 있다. 최근에는 정보고교등의 세련된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할 수 있는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이다. 대학으로 치면 칼리지, -전문대 정도로 말할 수 있겠으나, 어차피 우리나라에서의 대학교육이란 학문을 연구한다기 보다는 취업을 위한 통로이므로 사실 개념상의 큰 차이는 없을터다.


 암튼, 전문대도 마찬가지지만 이러한 실업계 고등학교의 경우 졸업반의 경우엔 2학기가 되기 전에 진학과 취업 사이에서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는 대학과 실업계 고교의 구분이 명확했던 적이 있었다. 대다수의 기업들에서 실무직은 실업계 고교 출신 고졸자들로 채워넣고, 관리직은 대학출신 대졸자들로 채워넣던, 그런 시절 말이다. 실업계 출신 학생들은 당연하게 취업했더랬다. 

 살기 힘들고, 혼란스러웠던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겠지만, 우리 아버지 시절만 해도 그랬다. 대졸자보다는 고졸자들이 훨씬 많던 그런 시절. 일찌감치 산업 일선에 뛰어든 19살 소년들은 소년이 아닌, 어른이었다


공고생 태만생. 

바로 위에 구구절절하게 언급한 바로 그 시기, 진로를 선택하는 그 시기에 "취업" 을 택함으로써 만생은 '사회' 라는 망망대해에 휙 하고 던져지게 된다. 그리고, 부모님은 태평하시게도 외아들을 한국에 휙 떨궈놓고, 태평양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에 휙 올라타게 된다!! 

이제 태만생에게 주어진 것은 옥탑방과, 매달 꼬박꼬박 들어올 얼마간의 부모님이 남기고 가신 집의 월세.

그리고, 태평양처럼 넓은 '자유'!!!


 대한민국에 홀로 남겨진 태만생의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장기' 보다는 '성숙담' 에 가까워보인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고3 - 19세의 나이면 성장은 끝난 상태라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 부모들이 유독 자식을 오랫동안 품안에 가둬두려 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미 수많은 외국의 19세들은 어른대접을 받는다. 무한한 자유와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게 되는 어른. 

 육체적, 지식적으로 어른인 만생은 부모의 품안에서 벗어남으로써 진정한 어른으로 성숙되어가는 이야기인 셈이다.


 이 작품의 주된 배경 공간인 옥탑방과 이태원은 서로 양 극단에 처해있는 장소이다. 옥탑방은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 이태원은 모든 욕망을 갈무리하고 수많은 책임들이 흐르는 냉혹한 사회. 모든 어른들이 생활하는 바로 그러한 공간이다.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며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감내해야하는 일터와, 한 몸 뉘일수 있는 휴식공간. 대한민국의 모든 어른들이 그러하듯, 만생도 이 두 공간을 넘나들며 자유와 책임의 인과관계를 깨달아간다. 

 

 서두에 언급했듯, 만생과 그 주변을 이루는 모든 것들은 '애매'하다.

유진의 육체를 탐하게 된 만생의 마음도 아직은 오선과의 사이에 애매하게 걸려있다. 친구 태화는 또 어떤가. 태화는 성 정체성이 애매하다. 만생의 입장에서는 오선도 애매하기만 하다. 대체 그녀는 뭐가 부족해서 그렇게 결핍된 무언가를 찾아 헤매이는가. 

심지어 이야기의 종반에는 부모님의 행방조차 애매해진다. 온통 애매한 속에서, 결국 '애매리카'!! 까지 외치게 되는 만생.


작품 안에서 애매하지 않은 것은, '확실한 것' 은 딱 두가지이다.

할머니처럼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는 것과 미미형님은 세상의 모든 편견을 떨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선택' 했다는 것.

그로 인해 미미형님은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포기' 했다는 것. 

 

만생은 그 무엇보다 가장 애매한 현상을 맞이한 순간, 그 애매한 것을 확실한 세상으로 끌어내기 위해 강릉으로 향한다.

진실을 마주한다는 것은 언제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만생이 진실을 찾아 강릉으로 떠나는 순간, 만생은 한층 더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진실을 찾아낼 공간인 강릉.

만생은 이 작품 안에서 가장 애매하면서도 가장 확실한 미미형님의 이미지를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는 애매한 것을, 애매한대로 넘기는 선택을 하게 된다.용기를 가지고 진실을 마주할 준비를 했지만, 결국 그는 진실과 마주하지 않는다. 미미형님이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여자라는 환상을 선택해 현실로 끌어내렸듯이, 만생은 애매함은 애매한대로 놓아두는 쪽을 선택한다. 삶과의 타협.

죽을 만큼 아프지 않으면, 아프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는, 자신과의 타협. 살기위해서 찾아낸 자신의 삶과의 타협점.

그 타협점을 찾아내는 순간 만생은 한층 더 어른이 된다.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어른'. 


 

유머러스한 문장속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디테일함이 캐릭터들에게 대단한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만생과 태화, 오선, 유진은 물론이고, 만생의 부모님과 개사장, 싱싱회수산 아저씨와 미미형님, 이태원 매장에 들르는 일본인 관광객 아주머니들까지. 인간 군상의 특징을 정확히 잡아내 종이 위에서 펄떡펄떡 뛰게 만드는 능력은 정말이지,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듯 하다. 이 작품엔 딱히 서사라고 부를만한 큰 이야기의 줄기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시트콤처럼 작은 에피소드들이 모이는데, 얼핏 정신없고 산만하다고 느껴질 정도이나, 이 작품은 이야기의 줄기를 따라가는 류의 작품 자체가 아니다. 

 작가는 자연스럽게 독자들의 시선을 화자이자 주인공인 만생의 감정의 흐름으로 유도해내는데, 그 '유혹의 기술' 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나도 모르게 술술 끌려가고 있었다' 고 할 만하다.

 이러한 기분은 천명관 작가님의 '고래'를 읽었을때와 비슷하다. '고래' 가 자연스럽게 독자들의 시선을 이야기의 줄기 깊숙히 깊숙히 빨아들이는 유혹의 기술을 선보인다면, 이 작품은 완벽히 그 대척점에 서있는 셈이다. 


확실히 이 작품의 작가인 황현진님은 세상을 보는 눈이 굉장히 좋은 듯 하다. 이런 디테일한 인물묘사력에 흡입력 있는 문장력, 그리고 아직 본격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서사를 얽어나가는 뜨개질 실력까지 발휘한다면 정말 무지막지하게 재미있는 작품이 나올 듯 하다. 이 작품보다 앞으로의 작품이 훨씬훨씬 더 기대된다. 






PS.

책 날개에 붙어있는 작가소개를 안보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가, 중반쯤 넘어서서, '작가가 여자였어??????" 를 10번쯤 외치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대체 남자들의 '이런 거' 를 어떻게 잡아냈을까?? 만생과 유진간의 첫경험이나, 화장품 냄새를 맡고 만생이 흥분하는 장면이라던가, 184페이지 11~13번째 줄에 묘사된 그런 심리.....  이런건 단순히 상상으로 될 부분들이 아니다.

 황현진 작가님이 기혼이시라면, 배우자의 내밀한 부분까지 심층 인터뷰를 했을수도 있겠으나....

암튼....184페이지 보고 다시한번 책날개의 작가님사진을 보고, 문동 카페에서 작가와의 인터뷰 장면도 찾아봤다.

이분 여자 맞으시다.

근데. 아무래도, 한밤의 아이들 '살림 시나이' 급의 능력을 타고나신게 틀림없다. 레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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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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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에서 '인상주의' 의 등장은 대단히 중요했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봉건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도래하며 당시 주류 화가들의 주 고객이었던 귀족들이 몰락해갔다. 이제 '주류' 화가들은 왕족과 귀족보다 부유한 상인들의 그림을 그려줘야 했다. 그림은 일종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일종의 선전 도구였다. 인상주의는 그런 주류 미술사회를 풍자하고 비틀면서 시작되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연의 '인상' 을 화폭에 담고자 했다. 사물이나 자연을 보고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을 색채로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찬란하게 반짝이는 물결을, 온 몸으로 빛을 반사해내는 수련을, 흩날리는 풀잎을, 인생 전체가 담긴 누군가의 얼굴을, 대기를 흐트러뜨리는 바람을 그려냈다. 

 지금 이 순간 느끼는 내 감정을 화폭에 담아내려 했던 것이다. 

인상주의는 후대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표현주의, 추상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인상주의 그림을 처음 보고 공부할때 문학, 특히 '시' 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의 감정을, 그 감정을 잊기 전에 재빨리 표현해낸다. 화가는 색채로, 시인은 단어로. 

감정을 담은 색채를 얽어 그림을 그려내듯, 이미지를 담은 단어를 얽어 문장을 적어낸다. 

참 닮아있지 않은가? 화가의 눈이 보는 세상을 그리는 것과, 시인의 눈이 보는 세상을 적어내는 것.


'희랍어 시간'을 읽어가면서, 마치 인상주의 화가의 화집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붓질 하나, 쿡 찍은 색 하나가 온갖 감정을 담아내듯, '희랍어 시간' 에는 감정이 가득 녹아있는 단어들이 수많은 인상을 그려내며 얽혀있었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의 이야기.

두 화자의 비중은 거의 비슷하지만, 내가 남자여서였을까...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가 말을 잃은 여자를 만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시력을 잃는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시각은 그 무엇보다 중요할터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주제 사라마구' 는 시각을 잃어버린 인간들의 자아가 어떻게 붕괴되는지 [눈먼 자들의 도시] 라는 작품을 통해 그려낸 적 있다. 온 지구적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시각을 잃는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희랍어 시간' 을 읽어가는 도중에 우연히 틴틴파이브 라는 그룹에서 유명세를 떨쳤던 개그맨  이동우씨의 기사를 접했다. 아마도 책속의 주인공과 개그맨 이동우씨가 앓는 병은 비슷한 병일터다. 이동우씨도 현재 빛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을 잃어버린 상태라고 한다. 책속의 주인공이 안경 없는 상황을 묘사할 때와 상당히 비슷하다. 감동적인 내용의 기사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소름이 오소소 돋아날 정도로 섬뜩했다. 그의 인터뷰에는 시력을 잃은 삶의 공포가 절절이 묻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속의 남자 역시 이동우씨처럼 패닉-거부-분노-수용 의 과정을 겪었을까? 

그가 사랑했던 여인을 잃었던 것은 그가 '거부' 와 '분노' 의 과정속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가 결국 어린시절에 떠나온 조국으로 돌아가는 결정에서 '수용', '체념'의 느낌이 묻어났다.  마흔이 다 되어가는 작품속의 남자는 익숙한 외국을 떠나 생경한 조국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역시 그는 한국인이었고, 그에게는 한국사회가 편했다. 그는 암흑이 된 조국을 원했다. 타인에게 애써 웃지 않아도 되는. 조국.   

 그는 앞으로 내일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의 눈은 언제나 과거를 향해 있을 것이고, 그가 보는 모든 것들은 과거의 것들일터다.

작가는 마치 그런 그의 삶을 위로하듯 매 순간 그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을 정성껏 제련해서 아름답게 주조해낸다. 


작가는 시간과 공간속에 흐르는 남녀의 감정들을 굉장히 농밀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시력을 잃고, '삶'을 지나온 시간속에 얼리고 있는 중인 남자와 삶을 잃고 그 반동으로 말까지 잃어버린 여자의 이야기.  


'삶' 이란 무엇일까? '살아가다' 는 것 은 무엇일까.

눈금이 빼곡하게 적힌 자 위를 걸어가는 느낌일까. 

아니면 한없이 뒤로 미끄러져가는 레일 위에서 제자리걸음 하는 중인걸까.

살아'가는'  것일까 살아 '오는' 것일까 살아 '내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삶이란 감정의 흐름이라는 것이다.

흘러가든, 흘러왔든, 30년을 살았든, 10년을 살았든, 각자가 살아온 시간들 속에는 감정들이 빼곡하게 묻어있다. 

한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의 감정으로 표현할 수 있을터다.


수용이란 체념과 비슷하다. 놓지 않으면 채워넣을 수 없다.

버리지 않으면 잡을 수 없다. 

나는 삶 속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채워넣고 있는가.


어차피 삶이란 잔뜩 가지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놓아가는 과정이다.

꿈도, 사랑도, 추억도, 욕망도, 그리고 종국에는, 호흡까지도. 


시력을 잃은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

그들은 그 빈 자리를 무엇으로 메꾸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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