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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우리들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하다.
얼마전 손상된 오른쪽 무릎의 반월상 연골판을 봉합하는 수술을 받느라 정형외과에 2주 가까이 입원했더랬다. 20평쯤 되 보이는 병실에는 무려 7개의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어떤 침대는 보호자가 자리잡을 공간조차 없어 보였다. 연골판을 봉합하기 위해 관절경 수술을 했는데, 그 원리는 이렇다. 일단 무릎 피부에 한쌍의 구멍을 뚫는다. 그 안에 수압이 강한 물을 쏴서 뼈와 근육, 혈관들을 분리해 낸다. 그리고 그 안으로 집게와 니들을 넣어 찢겨지고 접혀지고 말려 올라간 연골판들을 잡아 특수한 실로 꿰맨다. 간단해 보이지만, 어쨌든 수술을 마친 내 오른쪽 무릎은 뼈와 근육들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 하나로 붙어야 하는 것이다. 척추 마취가 풀리고 2~3일간 극심한 격통에 나는 마약 성분(아마 몰핀이겠지?)이 들어있는 무통주사 기구에 달려있는 '약 두배씩 들어가게 하는' 버튼을 사정없이 눌렀더랬다.
4~5일 뒤 극심했던 격통은 잦아들었고, 어느정도 견딜만해졌을 즈음, 맞은편 침대에 있던 환자가 나와 비슷한 수술을 하고 왔다. 그 역시 무통주사의 버튼을 자주 눌러댔음은 당연한 일.
하지만, 나는 이미 어느정도 견딜만해졌지만, 여전히 꽤나 욱씬거리는 나의 고통에만 관심이 있었다. 불과 며칠전에 겪었던 - 맞은편 침대의 그 남자가 겪고있는 - 고통은 잊은지 오래였다.
만약 그 옆 사람이 다리를 절단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 무릎이 더 아팠을것이다. 물론, 내가 수술하기 전날 하루 금식하는 동안, 옆 침대에서 보호자와 함께 치킨과 맥주, 족발을 먹던 환자도 나의 허기짐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역시 내가 입원하기 전날 다른 어딘가의 수술을 이미 받은 뒤였으니까.
우리는 사실 타인의 모든 것에 무감한 편이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을 상상하고 스스로에게 적용시키곤 한다. 그 뿐이다. 상상력의 결과일 뿐, 타인의 감정이나 고통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의 골반을 부수고 나오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완벽하게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인간의 외로움은, 절대적인 고독성은 생득권인 것이다.
삶이란, 어쩌면, 이러한 절대적인 고독함을 이해하는 과정, 혹은 절대적인 고독함을 망각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태생적으로 감수성이 더 풍부한, 아니 감수성이 풍부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이러한 직함을 갖게 된 '작가' 라는 종족들은 어떨까? 그들은 절대적인 고독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이해의 대상? 혹은 어떻게든 싸워 이겨 내야 하는 타도의 대상?
내가 처음으로 접한 김연수 작가의 작품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이었다. 군대를 막 제대하고, 약간의 조울증 속에서 '상대적인 외로움'에 고통받고 있던 시기에 위로처럼 파고든 제목에 이끌렸던 것이다. 철저히 독립된 개체이지만, 톱니바퀴처럼 얽혀있는 역사와 인간에 대한 작가의 통찰에 감동했고, [꾿빠이, 이상]과 [밤은 노래한다]를 통해 그의 치열한 '글쓰기' 라는 행위에 매료되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에서 치열한 그의 장편에서 볼 수 없었던 재치와 유머를 볼 수 있었고, 그가 젊은 시절에 썼던 글의 개정판인 [7번 국도REVISITED] 를 통해 그가 치열하게 외로움과 고독을 마주했던 순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원더보이]를 접했을때의 느낌은, [꾿빠이, 이상] 을 읽어내려가던 때와 상당히 비슷하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느낌말이다. [꾿빠이, 이상]은 이야기의 플롯 자체가 논픽션에 가까운 흐름이었고, 실제로 김연수 작가가 일본의 헌책방들을 뒤지고 국립 도서관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는 말을 듣기도 해서였지만, [원더보이]는 주인공 정훈이에게 김연수 작가가 투영되었다. 하지만, 이야기의 구성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과 비슷하다. 특히 정훈의 부모님의 과거가 짜맞춰지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카타르시스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의 클라이맥스와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김연수 작가의 자전적인 작품으로 읽힌 것은, 문장마다 짙게 베어있는 진정성이 와닿았기 때문일터다. -열세살 열무에게 보내는 아빠의 편지 같은 느낌이었달까.-
덕분에, 이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우리의 아픈 근현대사에 대한 부분보다는, 화자인 정훈의 성장담과 김연수 작가가 가지고 있는 외로움과 고독, '혼자' 에 관한 부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아버지를 놓치고, 독심술같은 초능력을 손에 쥐고 삶으로 귀환한 정훈.
그에게 남겨진 건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함. 때로는 우리 주변의 환경이, 사회가, 역사가 나를 고독하고 외롭게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고독함과 외로움은 '자각' 의 산물이다. 내가 '나' 임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모두 '혼자' 임을 알게 된다. 육십억 분의 일. 나는 언제나 오롯히 나일 뿐, 내가 네가 될 수는 없다. 영원히 나는 나. 너는 너이다.
내가 외로운 존재임을, 고독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을때, 비로소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혹은, 그 반대의 순서도 가능하다. 타인을 사랑하게 됨으로써 외로움과 고독함을 깨닫고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정훈이 초능력을 잃어가는 과정은 그가 외로움과 고독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냥 거기 내려놓으면 돼!"
"너의 그 마음을."
"이렇게 두 팔을 펼쳐봐.네 몸은 종이처럼 가벼워질 거야."
"모든 건 너의 선택이라는 걸 잊지 말아라."
"혼자서는 어디도 갈 수 없다는 걸 기억해."
"너를 움직이게 하는 건 바람이란다."
P.300
그 외로움과 고독함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어쩌면 인간의 유구한 역사는 외로움과 고독함을 이겨내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의 기록인지도 모른다. 혼자서는 어디도 갈 수 없기에, 함께 갈 사람들을 찾고, 붙들고, 부둥켜 안고. 타인과의 접촉 속에서, 우리는 타인의 속마음을 정확히 읽어낼 수 없으며, 타인의 고통도 함께 느껴볼 수 없고, 타인의 말조차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달으며, 외로움과 고독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 순간,
당신은 나에게 있어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한 호모 사피엔스의 수 1천 65억여명 중,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하나가 아니라,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한 호모 사피엔스의 수 1천 65억여명 중,
유일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외롭지도 않고 고독하지도 않다면, 나에게 그런 특별한 '또다른 하나'는 필요 없을 테니까.
외로움과 고독함이 고통일까?
작품 안에서 외로움과 고독함은 '밤' , '어두움' 으로 은유된다.
그것은 고통과는 다른 이미지이다.
내가 유일자라는 것. 혼자라는 것이 고통인가?
그것이 고통이라면, 난 영원히 타인의 외로움과 고독함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로움과 고독은 모든 인간들에게 동등하게 내려진 것이다.
누구는 누구보다 더 외롭고, 누구는 누구보다 덜 고독할 수 없다. 수많은 가족들 틈에서도, 외딴 무인도 안에서도, 행인들로 가득한 대로에서도, 광활한 황무지 위에서도, 모두가 똑같이 외롭고 고독하다.
단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외로움과 고독함은 선물이다.
그렇기에 나는 너를 찾아갈 수 있다.
네 손을 붙잡고, 네 따뜻한 몸을 안으면서, 나는 더더욱 외로울테고, 더더욱 고독할테고,
나는 더더욱 네 손을 붙잡고, 네 몸을 껴안을테니까.
삶의 반은 고독과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그것들을 껴안고 영유하는 것일테지. 어쩌면 그 순간이, 작품속에서 작가가 말하는 "반짝이는 빛들의 물결" 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밤이 어두운 까닭은 우리의 우주가 아직은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 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