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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단의 방문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평점 :
나는 미국 문학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다. 로빈쿡,
존그리샴, 리처드 매드슨, 스티븐 킹은 물론, 헤밍웨이, 레이몬드 카버, 토니 모리슨, 하퍼 리, 폴 오스터, 코멕 매카시는 물론 최근에 접한
마이클 셰이본과 팻 콘로이, 조너선 샤프런 포어 까지. 그래픽 노블 스토리 텔러와 드라마 작가들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할거다. 엔터테인먼트가 가득한 장르에서부터 르포타주에 가까운 리얼리즘까지.
뿐만
아니라 문학적 표현의 폭도 굉장히 넓다. 언제나 참신한 화법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실험적인 표현들이
시도된다. 아, 그러고 보니 잭슨 폴록, 앤디 워홀 같은 예술가들도 미국 문화의 범주 안에 넣어야 겠구나. 다양한 문화가 모인 덕인지 미국
예술은 정말 다양하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다양하다. 문학에서도 그러한 특징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우리의 편협한 시각 속에서 "이것도 책이야? " "이것도 소설이야?" 라고 부를만한 작품들은 대부분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 일 것이다. 아 난 물론 가카같은 '종미'는 절대 아니다. 미국엔 가본적도 없고, 미국 친구도 없고, 사실 그닥
가고싶지도 않다. 하지만, 미국 문화가 가지고 있는 다양성 만큼은 존중하고, 좋아한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에서 보았던 깜짝 놀랄만한 파격적인 '문학적 표현' 들을
[깡패단의 습격] 안에서도 여지없이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깡패단의 습격]이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모든 세대에 고루 어필할만한 포인트가
있었으며, 메시지가 좀 더 보편적이었다는 점이 '2011 퓰리처 소설상' 이라는 영예를 안겨주었을 터다.
작품상
가장 중요한 인물, 아니, 이 작품 안에서 이런 표현은 의미가 없을터다. 작품상 기준점이 되는 인물인 '베니' 는 음반 회사의 프로듀서이다.
밴드를 발굴, 기획, 관리는 물론 전체적인 활동의 컨셉까지 잡아주는 역할이다. 베니의 비서인
'샤사' 가 '알렉스' 와 만나 하룻밤을 보내는 내용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각 챕터별로 시간과 화자가 끊임없이 바뀌게 된다. 첫 챕터가 현재의
사샤의 이야기이고, 두번째 챕터는 첫 챕터보다 과거의 베니의 이야기이다. 세번째 챕터는 갑자기 베니가 고교시절이었을 무렵의 '리아' 라고 불리는
소녀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네번째 챕터는 리아가 친구 조슬린, 그리고 베니의 밴드가 함께 만났던 '루' 라는 늙은 음반 프로듀서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물론 시간은 세번째 챕터보다 훨씬 과거로 젊은 시절의 루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런 식으로 매 챕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간과 공간, 화법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주인공 시점으로, 3인칭과 1인칭을 왔다 갔다 하고, 각종 도표로 꽉 찬 PPT 화면 같은
연출로 한 챕터가 이어지기도 하고, 기사와 편짓글이 반씩 나뉘어 실려있는 연출도 있다. 한마디로, 집중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흐름을 놓쳐버릴 수도 있다. 전 챕터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세 챕터쯤 뒤에 흘러가듯 지나가기도 하고, 몇 챕터 전 이야기 안에서
지나가듯 흘러간 인물이 이번 챕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앞에 나왔던 사건의 원인이 훨씬 뒤에 나타나기도 하고, 챕터 별
캐릭터의 행동 요인 역시 챕터 곳곳에 파편처럼 흩어져있다. 챕터가 총 19개인데, 19명의 화자,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의미이다. 한마디로, 정말 읽기 까다로운 작품이다. 이런 비슷한 화법을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에서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내 이름은
빨강]의 경우엔 서사의 흐름에 따라 화자만 바뀌는 형식이어서 읽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깡패단의 습격] 은 [내 이름은 빨강] 보다는 좀 더
까다롭다.
집중해서
책을 읽다보면, 예전에 한때 인터넷 상에서 큰 관심을 모았던 '케빈 베이컨 놀이' 가 떠오른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일군의 학생들이 '케빈 베이컨' 과 함께 다른 배우들을 함께 출연했던 영화로 연관시키는 놀이에서 시작된 이 법칙은, 최대 4다리만
거치면 모두가 케빈 베이컨과 연관이 되는 재미난 현상을 보여주었더랬다.
예를들어,
마이클 더글라스와 케빈 베이컨을 연결하려 해 보면, 마이클 더글라스는 블레어 브라운이라는 배우와 센티널이라는 영화에 함께 출연을 했고, 블레어
브라운은 러버보이라는 영화에 케빈 베이컨과 함께 출연을 했다. 마이클 더글라스는 두단계만 거치면 케빈 베이컨과 연결된다. 재미있는 점은 어떤 무명 배우를 떠올려도 거의 네 단계 안에 다 연관이 된다는
점이다.
예를들어
송혜교 같은 국내 배우를 떠올려봐도 된다.
송혜교는
이병헌과 '올인'이라는 드라마에서 함께 연기를 했었다. 그리고 이병헌은 '나는 비와 함께 간다' 라는 영화에서 엘리아스 코티즈와 함께 연기를
했고, 엘리아스 코티즈는 노보체인이라는 영화에서 케빈 베이컨과 연기를 했다.
이렇게
송혜교도 3단계만 거치면 케빈 베이컨과 연관이 된다.
이
놀이는 여러 대학에서 SNS의 파급력을 연구할때 비슷한 방식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페이스
북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나도 모르게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이 놀이에서 '함께 출연한 작품' 을 '함께 다닌
학교' '함께 다닌 교회' '함께 가입한 온라인 커뮤니티' 등으로 연관시키면 엄청나게 크고 복잡한 거미줄 같은 인맥을 발견할 수
있을터다.
이
작품은 이런 사회 현상을 너무나 절묘하게 잡아내고, 묘사하고 있다.
사샤의
이야기로 첫 문을 연 [깡패단의 습격]은 케빈 베이컨 놀이와 비슷하게 챕터와 챕터; 인물과 인물의 이야기가 물리고 물린다. 사샤가 모시던 상사
베니, 베니와 학창 시절을 함께 보냈던 리아, 리아와 잠깐 인간적인 관계가 있었던 늙은 프로듀서 루, 루가 젊은 시절 낳은 아들 롤프, 루가
정부였던 민디, 아들 롤프, 딸 샬린과 함께 떠났던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 죽어가는 루가 임종을 앞두고 불렀던 과거의 친구들, 그 자리에 참석한
리아, 학창시절 리아, 베니 등과 함께 밴드를 결성했던 스코티...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연결되어 간다.
우연같은
만남은 필연적으로 또다른 우연을 낳는다. 우연과 우연 속에서 인연과 인연이 연결되고, 촘촘하게 얽힌 인연과 우연의 거미줄 사이로 또다른 우연이
걸려드는 것은 필연일 것이다. 결과는 원인을 낳고, 원인은 결과를 낳으며, 그 결과는 또 다른 원인을 낳는다. 필연적으로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원인이 모두 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고, 대부분 하나의 결과는 여러개의 원인이 복합적으로 맞아 떨어졌을 때 발생되는 경우가
많다. 원인들이 우연히 결합되고, 그 결합된 것들이 우연히 결과를 도출해내고, 그 결과 역시 우연히 다른 무언가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시간이란
그렇게 우리에게 결코 선택권을 순순히 내어주지 않는다.
누구나 늙는다.
그리고,
누구나 죽는다.
시간의
흐름은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빨라진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마치, 죽지 않을 것만 같이 느껴진다.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다른 세상
사람처럼 느껴진다. 시간은 영원히 내 편일 것만 같고, 영유하는 모든 시간들은 영원처럼 길게 느껴진다. 하지만, 젊음을 지나 육체가 서서히
쪼그라들어가는 시점이 찾아오면, 시간은 더이상 내 편이 아니고, 모든 시간들은 칼날처럼 육신을 쪼아대기 시작한다. 무덤을 향해 한발 한발
걸어가다, 옆에 놓여있는 삽을 주워들고 열심히 웅덩이를 파기 시작하면, 언젠가 그 웅덩이 위로 종잇장처럼 팔랑대며 고꾸라질 터다. 삶이 결국엔
무덤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젊음이 눈부시게 느껴진다.
그래,
어쩌면 [은교]의 이적요 처럼, 그런 눈부신 젊음 앞에 눈이 멀지도 모른다. 그 때가 되면, 젊음은 다른 세상처럼 느껴질터다.
아아, 그래서 제니퍼 이건은 "시간은 깡패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우리는 깡패같은 시간에게 모든 걸 내어주고, 비참하게 쪼그라들어 죽어야만
하는걸까?
수많은 사람들의 행동들이 수많은 결과를 낳고, 그 수많은 결과들이 또다시 수많은 행동 요인이
되어, 스코티는 시간이라는 깡패와 대면하게 된다. 한때는 화려한 뮤지션이었으나, 이혼당하고 노숙자로 살아가던 스코티
하우스먼.
"시간은 깡패야. 그렇잖아? 그 깡패가 널 해코지하는데 가만있을 거야?"
p.451
우리는
필멸의 존재이다. 태어나는 그 순간, 죽음으로 가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다. 째깍째깍.
시간은 우리의 모든것을 앗아간다.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누구와 우연히 만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또 다른 누구를
우연히 만나고, 또 사랑하고, 또 미워하게 될 것이다. 사실, 시간이라는
깡패는,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늙더라도,
약해지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는 태어나고, 자라는 법이니까.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면, 시간이라는 깡패는 우리에게 어떠한 해코지도 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