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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이 구르는 속도 - 제4회 사계절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ㅣ 사계절 아동문고 113
김성운 지음, 김성라 그림 / 사계절 / 2024년 9월
평점 :
오랫동안 공들여 쓰신 느낌이 나는 작품이 사계절 문학상 수상작으로 내 눈에 띄었다. 작가님은 “이제 제게도 독자 여러분이 생긴다니 꿈만 같습니다.” 라는 소감으로 떨리는 마음을 표현했다. 수상작이라고 무조건 프리미엄을 붙여 다른 작품과 차별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작품은 정말 좋았다. 지금 맡고 있는 4학년 아이들과 함께 읽고 싶은 작품이다. 내년에는 이 학년을 떠나 이정도를 읽기엔 좀 어려운 학년으로 갈 것 같아서 아쉽다. 어쩌다보니 같은 학년을 연달아 하게되어 좋은 책들을 1년에 다 읽기 어려울 만큼 온작품읽기 세트로 축적해 두었는데, 좋은 작품은 나오고 또 나와서 계속 입맛을 다시고 욕심을 내게 만든다. 이 책은 학급이 함께 읽는다면 주인공 학년인 4학년, 같은 학년은 아니지만 5,6학년도 좋을 것 같다. 개인이 읽는다면 독서력에 따라 더 어린 학년도 괜찮겠지.
이 책은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인 하늘이의 이야기면서, 하늘이를 둘러싼 주변의 이야기다. 그 주변은 확대한다면 ‘세상’이다. 그 세상엔 좋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내 느낌엔, 실제 세상의 비율보다는 좋은 사람이 훨씬 많고, 나쁜 사람은 적고 강도도 낮다. 이런 세상이면 별 걱정이 없겠다는 느낌이었다. 따뜻하고 유머스럽고 미소가 번지는 세상이다. 그 느낌은 디테일에서 온다. 아직 첫 작품을 읽었을 뿐이지만 작가님의 특징이자 특기가 아닐까 싶다. 아주 작은 것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며 천천히 가는 느낌.
일단 하늘이의 가족. 부모님은 도시와 약간 떨어진 바닷가 마을에서 슈퍼를 운영한다. 유명 관광지도 아니니 손님도 드문 형편이다. 거기에 딸의 장애까지 생각하면 한숨을 쉴 만도 한데 그러지 않는다. 타인에게 친절하고 긍정적이며 농담을 즐긴다. 하늘이도 부모님의 성정을 그대로 물려받았는지 웬만해서는 좋게 생각하고 비관이나 서러움에 깊이 잠기지 않는다.
그리고 하늘이네 학교. 딱 한 명 빡구라는 빌런이 있긴 하지만 워낙 방어벽이 두터워 거의 힘을 쓰지 못한다. 친구들이 너무 멋지다. 대단하게 뭘 하는 건 아닌데, 무심하게 멋지다. 이게 최고다. 난 이게 딱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왕별이랑 보라는 하늘이의 단짝 친구다. 어느날 둘이 수업끝나고 분식집에 가자고 얘기하고 있었다. ‘왜 나한테는 말 안하고?’ 의아해진 하늘이는 같이 가자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곤란해하는 아이들. 이유는 하교 때 하늘이 엄마가 데리러오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줌마가 계시면 불편하다고. 하늘이는 그만 울적해졌다. 휠체어만 아니었으면....ㅠ 그때 두 친구는 깨달았던 것 같다. 무심코 한 생각이 친구를 서운하게 했겠구나. 하필 그날 급식에 떡볶이가 나왔다. 친구들은 하늘이한테 떡볶이 먹지 말고 남기라고 하더니 빈 우유갑에 떡볶이를 담아 밖으로 나왔다. 셋이 못가는 분식집 대신 급식 떡볶이를 먹으며 비밀 이야기를 하기로 생각한 것이다. 그 이야기는 바로 보라한테 남친이 생겼다는! 어른 있으면 못할 얘기가 맞잖아?^^ 그날 하늘이는 다이어리에 쓴다. 우리 우정 의심하지 않기. 얼마나 멋진 아이들인가! 오해 상황-서운함-피로감-상처-멀어짐 이런 코스를 밟지 않는 이 아이들은 어른보다도 낫다. 무심한 일상인것 같지만 좀처럼 벌어지기 힘든 풍경이다. 진짜 감탄했다. 너무 대견해!
마지막으로 이웃들. 이웃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 않지만 일단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태양이네 부모님도 좋은 사람들이고, 이제 막 이웃(아니 식구인가?)이 된 이라크 언니, 마람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다. 무슨 일로 한국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이 마을에서 한 달만 지낸다고 하며 하늘이네 2층에 한달 월세로 들어왔다. 한국 오기 전부터 드라마로 한국말을 배웠다는 마람 언니는 줄줄 막힘이 없고 능청스런 농담까지, 아주 한국말 고수다. 언니는 자신을 램프의 요정이라고 소개한다. 소원 들어주기 성공해야 고국에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 하늘이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 속에서 소원을 고르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설정이다. 이 설정 속에서 하늘이가 겪은 다양한 상황들이 독자에게 보여진다.
대표적인 것은 장애를 가진 하늘이가 현장체험학습을 고대하는 모습이다. 현실적인 상황이 많이 들어가 있다.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걱정이 많은 분이었고, 하늘이 부모가 포기하기를 은연중에 바랐다. 2학년 때는 장소가 산이어서 엄두도 못 냈고, 3학년 때는 체험 장소에서 난색을 표했다. 요란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이건 명백한 차별의 상황이 맞다. 하늘이는 전혀 배려받지 못하고 제외되었다. 4학년인 올해는 박물관이다. 하늘이는 과연 무사히 참여할 수 있을까?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상황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활동지원 선생님이 붙었고, 담임선생님의 계획은 저상버스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저상이라도 대중교통을 어떻게 믿고... 걍 전세버스로 가시지.... 라는 생각을 하는 나. 아니나다를까, 믿었던 저상버스는 경사판이 고장나 탈 수 없었다. 그나마 활동지원 선생님이 계셔서 다음 차를 타기로 하고 일행을 먼저 보냈지만, 자주 오는 버스가 아니라서 친구들보다 훨씬 늦게 합류하게 됐다. 그래도 첫 체험학습은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다. 그 과정에 하늘이의 성취를 자기 일처럼 마음 졸이고 기다리는 친구들의 모습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능한 기쁨이었다.
이 대목에서 하늘이가 만조의 비유를 한 것이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이쪽 바다가 만조일 때 반대편 바다도 만조라고 한다. 한쪽으로 쏠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늘이는 친구들을 ‘함께 바닷물을 당기고 있는 지구 반대편 바다’라고 생각했다. 멋진 비유다. 작품에 이런 비유가 한두개 들어있으면 작품의 가치가 확 올라간다. 자연현상을 놓치지 않고 작품에 비유로 활용한 작가님의 세심한 센스가 돋보인다.
이런저런 사건들 속에서 하늘이의 소원들이 다가왔다가 넘어간다. 결국 채택된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이라크에서 온 마람 언니는 한 달 월세살이를 채우고 떠나갔다. 과연 소원은 누가 들어준 것일까? 마람 언니의 정체는 정확히 뭘까? 언니가 요정을 자처하며 소원을 들어준다고 말하는 건 너무 억지스러운 설정 아닐까? 작품은 굳이 이런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무심히 넘어간다. 대신 굳이 물어보지 않았던 작은 장면들, 이를테면 아가였던 하늘이가 어린이집에 가지도 못하고 온종일 바닷가에서 혼자 놀던 장면, 엄마가 우리 딸 다리를 고쳐 주세요 라는 소원을 빌지도 못하고 “저와 제 딸의 다리를 바꿔 주세요.”라고 빌던 장면을 살며시 보여준다. 그런데 푸하하 웃게 되는 점은 바로 하늘이가 이렇게 치고 나온다는 것이다.
“매끈한 내 다리랑 왕 두꺼운 엄마 다리를 바꾸는 건 내가 너무 손해인 것 같지 않아?”
‘이게 나잖아’ 라고 생각하는 하늘이의 건강한 마음은 스스로 소원을 향해 다가간다. 절대 혼자서는 아니고 부각되지는 않는 다양한 배경들과 함께. 그 희미한 배경 속에 내가 있기를 바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배경엔 네가. 너의 배경엔 내가. 그렇게 살면 모두가 조금 더 행복하지 않을까. 휠체어 구르는 소리가 어우러지는 세상. 그 속도가 중요하지 않은 세상. 날로 비관적이 되고 마음의 끈들을 거두어들이는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살며시 다가와 이런 세상도 가능하다고 보여주는 작품이다. 차별과 편견을 말하는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농담이 어색하지 않은 재밌고 따뜻하며 특별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