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혐오예요 - 상처를 덜 주고받기 위해 해야 하는 말
홍재희 / 행성B(행성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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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내 이상과 완전히 부합하면서 그 이상을 보여주는 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이 책은 나의 이상이 바로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은 반가움을 선사해줬다. 읽기 전엔 얇은 책이 무슨 15,000원이나 하냐면서 놀랐지만 다 읽으니 수긍이 간다. 책이란 게 가격을 책정하기 어려운 상품이긴 하지만 이 정도 책이라면 그 가격을 받아도 될 듯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에 동의할는지 모르겠다만.

 이 책은 저자가 만난 6명의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과의 문답을 통해 편견, 차별, 혐오에 정면으로 맞선다. 여성,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양심적 병역 거부자, 성 소수자, 그리고 동물이 그간 받아온 차별을 가감없이 비판하며 혐오의 시대로 접어드려는 작금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여러 예시를 들어 꽤 설득력 있게 주장을 전개하는데 개인적으로 공감가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헬프>에서 외면당하는 흑인의 인권 유린을 고발한 주인공 스키터가 남자친구에게 결별을 통보받는 장면이 있다. 남자가 말하길 자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하곤 못 어울린다나.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스키터의 대답만은 기억난다. 문제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원래부터 있던 문제라고.

 어떤 사람들은 왜 문제를 일으키느냐고 묻는다. 왜 굳이 들춰내서 힘겹게 살아가냐고 말이다. 왜 그리 불편하게 구냐고. 그들이 간과하는 게 있다면 지적당하는 모든 문제는 이미 일어난 것이고 굳이 힘겹게 들춰내야하는 것이고 불편하게 굴어야 할 만큼 중요하고 가치 있다는 것이다. 이건 차별을 받는 소수자를 위해서도,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온당치 못한 이유로, 또 근거도 없는 모략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소수자들을 외면하면 우리가 소수자가 됐을 때도 마찬가지로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멸시하는 사회만큼 살벌한 세상도 없을 것이다. 사람은 모두 다른데 서로를 향한 차별을 묵인하면 나 자신의 다름도 부정하는 꼴이나 다름 없지 않은가.


 평소 내가 관심 가졌던 분야에 대해서 속 시원히 얘기하느라 술술 읽었다. 어떤 부분은 미처 생각 못했던 부분도 있고 깨달음을 얻기도 했는데 저자의 기획력이 참으로 빛을 발하지 않았나 싶다. 해당 분야에 천착한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들의 남다른 통찰은 참으로 탄복할 만했다.

 특히 기억에 남았던 부분이 몇 개 있는데 간단히 짚어보고 이 글을 마무리하면 좋을 것 같다. 파트별 내용이 긴밀하게 연관된 나머지 하나를 언급해도 열 이상의 얘기가 쏟아지니 이렇게 얘기하는 게 효율적일 것 같다.




 1장. 여성이 혐오하는 여성은 누구인가


 1장에 등장하는 차별의 대상은 바로 여성이었다. 일단 저자도 여성이고 최근 특정 성을 혐오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와중인 만큼 적절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호기롭게 시작을 끊은 책은 저자가 실제로 겪은 성 차별 사례를 들어가며 나아가 성차별의 핵심에 다가간다.

 그런데 내가 남자라서 그런 걸까. 극단적이지 않은, 이른바 치우치지 않은 명망 있는 페미니스트의 글일지라도 남자인 내가 읽기엔 그들이 간혹 감정적으로 논조를 이끌어간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이 작가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 자신이 남자에게 폭행을 당한 일화를 두고 같이 분개했던 남성에게 보인 태도는 약간 실망스러웠다. 아니, 저자의 논리에는 공감하는데 자칫 오해를 살 만한 표현을 쓴 게 눈에 밟힌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모든 사람이 고정적인 성 역할에 구애받지 않아야 하고 차별을 하면 안 된다면 진정 페미니즘을 추구하고 남성의 성 역할에 반대하는 남성의 존재도 분명 언급했어야 했다. 그렇게 논리적이고 통찰력을 갖춘 사람이 지나가는 한 줄이라도 더 이런 남성들을 언급하기를 소홀히 했다는 건 어떻게 보면 차별당하는 여성이라는 주제를 위해 의도적으로 시야를 차단한 꼴이 됐다. 이 부분 때문에 과연 이 작가가 이후에도 치우치지 않은 자세를 계속 보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여성도 동의하는 여성 혐오, 이분법적 성 역할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니 인상이 달라졌다. 유독 성 문화를 터부시하는 우리나라의 정서에서 매춘과 그 종사자들은 그늘에 가려진 존재였는데 그들을, 그것도 여성이 조명한다는 게 일단 신선했다. 여성의 경우엔 정조를 지켜야 하고 남성의 경우엔 여색을 밝혀도 은근히 용인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들춰낸 것이다. 성에 따라 특별히 성욕의 여부에 차이가 있지 않을 텐데 유독 여성의 성욕을 부정하는 것은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인 사고로 오늘날의 가족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세뇌라는 것은 확실히 납득이 갔다. 가정을 지켜야 하는 여성이 남성만큼 성 생활에 빠져들어선 안 된다는 그들의 논리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잘 먹혀들었는데 이는 매춘부에 대한 혐오에서 법적 금지에 이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자만큼 성 생활을 한다고 해서 몸이 더 불결해진다는 것도 이상한 얘기다. 성욕이 남성만의 전유물도 아니고 하물며 남자를 상대하는 매춘부도 엄연히 직업적인 측면에서 노동을 하고 화대라는 대가를 받을 뿐이니 도덕적으로도 비난할 여지도 없다. 다만 전통적인 의미의 정절과는 맞지 않기에 반감이 들 뿐인데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들마저도 그들을 혐오하면 결국 전통적인 성 역할 안에 여성을 가두는 꼴이 아닐까?


 여성 혐오와 더불어 성차별의 핵심을 이분법적 성 역할로 보고 남성만이 아닌 여성들도 거들었던 차별까지 언급한 건 정말이지 놀라웠다. 여성도 남성만큼 성욕도 있는 등 남성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부각시켜 성 고정관념을 흔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나아가서 진정한 페미니즘에 대한 고찰도 설파하는데 진정한 평등엔 남자도 여자도 배제될 수 없다는, 당연하지만 간과했던 사실도 언급해 남은 저자의 글에 대해서도 신뢰할 수 있게 됐다.




 4장. '개인'을 지우는 군대를 거부합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건대 나는 군대를 순전히 감옥에 가기 싫어서 갔다. 그리고 남들도 다 군 생활하고 전역하는데 나라고 못할까 싶어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입대했다. 그렇게 군 생활을 해보니 막상 전역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쉬운 것도 아니고 군인이란 정말 호국보훈의 투철한 애국심을 가진 게 아닌 이상 못해먹을 짓이라며 치가 떨리는 세월을 보내고 전역했다. 입대 전엔 군대에 전혀 관심이 없었거늘 전역 이후엔 군대 관련 이슈에 눈이 많이 가는데 그때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뉴스는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전역할 정돈데 그렇게 군대를 안 가겠다고 버티는 게 영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예부터 병역 거부자에 대한 뉴스도 접했고 그들의 처우에 대한 뉴스도 봐왔지만 하찮은 보상 심리 때문인지 그들을 고깝게 봤던 것 같다. 종교적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면 그걸 악용하는 사람도 나오지 않겠냐며 사뭇 타당해 보이는 반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사실 군대에 대해 의구심이 병역 거부자 못지않은지라 아까 위에서 착잡하다고 했던 것 같다.


 저자는 양심적 병역 거부에 의해 3년의 수감 생활을 한 바 있는 김경묵 감독과의 문답을 4번째 차별 이야기의 발판으로 삼았다. 여성의 시선으로 보는 군대 문제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김경묵 감독의 용기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이유도 아닌 그저 자신이 군 생활을 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는 그는 어떻게 보면 책임 회피일 수 있지만 한편으론 한없이 솔직하면서도 최선의 방법으로 거부 의사를 표명한 것이라고도 여겨진다. 더군다나 군대가 '개인'을 지우기 때문에 거부한다니, 경험이 전무한 주장임에도 그 내용은 심히 공감됐다.

 군대에서 나는 이름보다 계급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군대 안에서의 계급에 어울리는 행동만 허용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좋은 군인이 되려면 일단 나 스스로를 지우는 게 큰 관건이었는데 이게 그 무엇보다도 힘들었다. 어떻게 보면 군인으로서는 꼭 필요한 덕목이지만 사람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부분이었던 것이다. 세상이 정한 규격에 나 자신을 맞추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고 그걸 해내지 못했을 때 가해지는 제재도 만만치 않게 고통스러웠다.


 문제는 그 고통스러운 것이 군대를 비롯해 사회에서도 비슷하게 요구된다는 것이다. 개인이 사회에 맞추느라 신음을 흘리든 뭐든 사회를 운영하는 입장에선 그게 더 편리하니까. 그래서 타인의 다름이 그토록 배척되고 복종과 획일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것일까.

 글쎄, 군대를 두고 찬반의견을 나누는 것만큼 논란이 되는 것도 없다. 군대의 필요성은 분명한데 지금까지의 징집 제도가 결코 이상적이라고 할 순 없다. 병영 문화 개선이 대안이 될 순 있지만 직접 경험한 입장에서 진정한 병영 문화 개선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군대는 특수한 공간이고 자체적인 법에 의해 보호되므로 사회의 상식이 통용되리라 기대하긴 어려움이 따른다.


 지금까지의 군대의 메카니즘이 그 필요성을 차치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문제점과 모순도 안고 있었는지 더 말해봐야 입 아픈 것이다. 그를 통찰로나마 파악해 입대를 거부한 김경묵 감독을 과연 겁쟁이라고만 단정지을 수 있을까. 그의 행보는 사회에 기여한 바는 없지만 자신의 소신을 따르는 모습은 가히 귀감이 될 만하다. 어차피 다 지나간 얘기지만,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병역을 거부했더라면 내 인생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한 번 상상해봤다. 이 상상은 나를 겉잡을 수 없는 불안함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그제서야 김경묵 감독의 선택은 분명 용기라는 생각에 미치게 됐다. 모두가 부정할 타자他者가 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의 선택이 반드시 옳다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그가 자기 소신에 따라 걷고자 하는 길은 결코 평탄치 않기에 이후의 행보가 궁금해졌다.




 6장. 장 보듯이 동물을 보는 사회


 하루도 고기를 먹지 않는 날은 없지만 지금 입 안의 고기의 출처에 대해 떠올린 적은 거의 없었다. 고기라는 것은 동물의 시체니 분명 살생을 통해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부커상을 받은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살생이란 이름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채식주의를 선언한 여자의 이야기였다. 고백하자면 그 소설 때문에 한동안 채식주의에 대한 공포스런 선입견이 박혀 있었다. 이제 그 선입견은 많이 덜게 됐지만 채식주의의 이념은 나와 맞지 않게 숭고한 부분이 있어 늘 거리가 느껴졌다.

 차별의 대상으로 동물을 언급한다는 것은 솔직히 많이 의외였다. 인간의 식성 때문에 한 평생을 좁은 곳에서 고통 받는 소, 돼지, 닭의 이야기는 딱하지만 당장의 맛있는 식사를 떠올리며 외면했었다. 작가는 황윤 감독과의 문답으로 기어코 축산 산업의 잔혹성을 강조하는데 내가 외면한다고 의식도 않았던 이야기를 되짚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동물이 차별의 대상이었다는 것이 의외였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정말 잔혹한 태도였으리라.


 인간의 식성과 기호를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강요해서도 안 되기에 이 문제가 금방 해소될 것 같진 않다. 게다가 글에서 언급하듯 우리나라는 채식주의자가 살기 어려운 나라로 육식 문화가 아주 일상적인 나라니까 말이다. 치킨과 삼겹살과 한우는 인기 있는 외식 메뉴고 그 인기에 비례하게 어마어마한 수의 닭과 돼지와 소가 죽어나가고 있다.

 동물의 권리를 주목하는 황윤 감독의 동물을 두고 '비인간 동물'이라는 호칭을 썼다. 인간이 아닌 동물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이는 인간 또한 동물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인간은 꽤나 공공연하게 다른 동물을 얼마든지 착취해도 되는 특별한 존재라고 자칭한 것 같다. 비인간 동물이 생태계의 먹이 사슬 안에서만 생활하는 것에 비해 인간은 자기 이외의 수많은 동물을 잡아먹는다. 그것도 산업 발전에 따라 무척이나 잔인한 방식으로.


 오직 인간만이 철저하게 동물의 권리를 짓밟는다. 몸 한 번 움직이기 어려운 좁디좁은 우리 안에 가둬 출산을 반복시키다가 살을 찌워 끝내 잡아먹는다. 식용이라는 이름 하에 동물이 동물답게 살 권리마저 앗아간다. 이것도 살처분 앞에서는 빛이 바래질 정도니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산 채로 구덩이에 매장하는, 모자이크 처리된 영상이라도 보노라면 도무지 인간을 잔인한 존재라고 부르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이 육식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산업 구조라며 외면당한다.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의외로 채식이 어렵지 않음을 묘사한 글의 내용은 꽤 구미가 당겼다. 돈까스를 좋아하는 황윤 감독의 가족이 채식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사실은 돼지고기를 좋아한 게 아니라 바삭한 튀김옷을 좋아했던 것이라고 깨달았단다. 저자는 채식 레스토랑에서 콩 스테이크가 있는 걸 보고 그렇게까지 고기가 아닌 단백질을 섭취해야 할까 싶어 우스웠다는 내용도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먹은 콩 스테이크가 충분히 고기를 대체할 수 있다는 저자의 의견을 읽으니 생각이 또 달라졌다.


 육식의 산업화가 이다지도 잔인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선 채식주의자가 나날이 늘어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테다. 가장 어려운 방법이지만 확실히 효과적이리라. 문제는 채식주의의 필요성이나 높은 장벽을 쉽사리 공감하고 넘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기 섭취 자체는 건강을 위해서도 좋다는 말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맛있어서 그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 그런 유혹 앞에서 동물의 가련한 처지에 대해 얘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안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조금이라도 유혹이 충족된 뒤에 고기가 아닌 동물에 대해 얘기하면 그만이다. 아무튼 인간이 언제까지고 유혹에 흔들리며 이성을 마다하는 존재일 리도 없다. 책의 후기에 루쉰의 말이 인용됐다.



 희망이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대체로 감정에 쉽게 휘둘린다지만 항상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나는 누구나 반드시 이성적인 순간이 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장에 희망이 없어 보인다고 낙심해선 안 될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니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책의 저자를 비롯해 여섯 명의 감독처럼 차별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온다면 분명 우릴 둘러싼 문제들은 들춰지고 머잖아 해결될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세상은 분명 변하리라. 내가 채식주의에 대해 서서히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하루 아침에 땅 위에 길이 생기지 않는 것처럼 느릿느릿 변하더라도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희망적이다.

 

 

 

 

인상 깊은 구절

 

 

여성 혐오는 남성들한테만 있는 게 아녜요. 여성 스스로 여성을 혐오하기도 해요. 여성 내부에서도 성의 이분법에 들어맞지 않는 여성을 배제하고 단죄하고 배척하는 경향이 있어요. - 37p


제가 할 수 있는 건 상황을 계속 불편하게 만드는 거예요. 왜냐고요? 세상에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어디에나 아주 많이 존재하거든요. 그 사람들이 상처받고 있다는 걸 누군가는 이야기해야 해요. - 59p


저는 타자가 되는 경험은 결국 상처를 받아 보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상처를 통해 자기라고 믿었던 견고한 틀에, 고정된 정체성에 균열이 생기는 거죠. 그 균열을 통해 자기 밖으로 외부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기회, 세계를 바깥에서 볼 수 있는 창문을 하나 가지게 되고요. 상처에 함몰되면 자기 삶이 무너지겠지만 그 상처를 통해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세계가 밖에 있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저는 자신을 타자화해 보는 거, 타자가 되어 보는 경험이 정말 소중하다고 봐요. - 148p


차별의 논리는 대상을 바꿔 가며 확장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대상을 차별해도 된다고 합리화했던 논리는 다른 상황에서 다른 대상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 말은 사실상 우리가 모두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거예요. - 1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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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에밀 뒤르켐 지음, 황보종우 옮김, 이시형 감수 / 청아출판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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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인문학 도서, 특히 사회학이나 심리학, 과학 도서는 늘 읽기 버겁다. 현재의 내 식견으로는 세세한 부분까지 이해하려 애쓰기 보단 저자의 논리, 책을 쓴 저의를 파악하며 이해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마저도 쉽지 않지만 안타깝게도 불가항력에 따른 나름의 독서 방법이다.

 이 책은 내가 쓰려는 어떤 소설을 위해 읽게 됐다. 내 소설의 습작을 읽은 어떤 지인분이 '뒤르켐의 <자살론>이 보이기도 한다' 고 평을 남겼는데 난 그 책을 읽지 못해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책이 있는 줄도 모르고 흉내를 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그런 책을 읽지도 않고 창작에 임했다는 게 약간 부끄럽기도 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 슬슬 그 소설의 퇴고에 박차를 가할 때가 다가와서 참고 문헌 삼아 읽게 됐다. 사람들은 표지를 보고 움찔하던데, 어떤 사람은 '왜, 자살하려고?' 라며 농담인지 뭔지 모를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때 못한 대답을 하자면 자살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살을 하지 않기 위해서 읽는 게 아닐까..?

 무려 100년도 더 전에 쓰여진 책인데 당시의 반응은 어땠을지 사뭇 짐작이 간다. 21세기의 나도 <자살론>을 읽으니 이상하게 비춰지는데 하물며 19세기의 저자가 자살을 연구한다니 얼마나 낯설게 보였을까. 책 속에는 그런 시선에 대한 작가의 논리적 주장과 그에 대한 노력이 알게 모르게 녹아들었는데, 그야말로 차가운 열정이 물씬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이상한 말로 들릴 텐데, '차가운 열정'이라니 무슨 소리냐면 저자의 이성적 태도가 방대한 분량에 걸쳐 열성적으로 나열됐기에 나오고 만 표현이다. 저자는 사회학에 대한 정의를 비롯해 자살에 대한 거의 모든 편견에 대해 하나 하나 세밀하게 따져본다. 읽으면서 흡사 탐정이 추리소설 말미에 사건 관계자들을 모아 놓고 추리를 펼치는 것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표와 그래프가 수시로 나열되는데 - 인상 깊었던 건 가끔 저자 수치를 언급할 때 잘못 기술한 부분을 역자가 고치고 그걸 역주로 알려주는 부분이었다. 꼼꼼하기가 저자 못지않은 역자였다. - 저자의 꼼꼼함은 물론이고 연구의 목적에서도 상당한 통찰력을 엿볼 수 있었다. 자살에 대해 알고 싶다면 질릴 정도로 유익한 책이 아닐 수 없는 건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이다.

 솔직히 저자가 쓰는 용어가 너무 어려워 내 것으로 만들기 힘들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읽었는지조차 의심 -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자살'을 책의 내용에 대입하며 읽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 스럽다. 자살이라... 나는 자살을 사회가 저지르는 살인으로 개인의 부도덕함이나 정신적 미숙함으로만 자살을 규정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는데,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다면 이 부분 때문에 지인이 내 소설에서 뒤르켐을 느꼈다고 말한 것일 터였다. 만약 그렇다면 저자에게서 동의를 얻어낸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독서가 아니었을까. 누구 마음대로 동의를 얻어냈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이 반갑지 않을 리 만무하다.


 애꿎은 아쉬움이지만 이 책이 더 나중에 저술됐다면 또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이만큼 썼을 정도면 더 많은 자료가 갖춰진 지금에 와서는 얼마나 대단한 연구가 이뤄졌을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학에 대한 저자의 자세, 그러니까 이성적 관찰을 중시하는 태도는 오늘날은 물론이고 미래에서도 귀감이 되고도 남으니 의미는 없지만 아쉬움은 어쩔 수 없이 들었다. 시대를 잘못 났다고 하긴 그렇지만 때론 동시대에 같이 살았으면 하는 인물이 꼭 있다. 참으로 애꿎게도 말이다.

물론 사회학의 미래를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상태가 끝나기를 바란다. 만일 지금과 같은 상태가 계속된다면 사회학은 다시 과거처럼 불신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성의 발전을 바라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퇴보를 반기지 않을 것이다. 이성의 발전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인간 정신은 심각하게 퇴보할 것이기 때문이다. - 11p




사회학자들이 이런 식으로 독단적 주장을 일삼으면서 증명을 하려는 요구를 공공연하게 회피하지 않아야만 사회학이 하나의 과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 159p




우리는 사회의 작품이기 때문에, 작품이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느낌이 없이는 사회 자체의 퇴락을 의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좌절과 실망의 물결은 특정한 개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 자체의 해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 258p




그러므로 자살이 비도덕성을 감소시키는 바람직한 효과가 있고, 그 확산을 막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다고 하는 것은 정확하지 못한 주장이다. 자살은 살인의 파생물이 아니다. 물론 이기적 자살을 일으키는 도덕적 특질과 문명인들 사이에서 살인을 감소시키는 도덕적 특질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기적 자살을 하는 사람은 살인하려다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살인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그는 한 사람의 슬프고도 우울한 인간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행동은 살인과 같은 종류로 취급할 수 없다. - 463p




필연적인 불완전성은 병이 아니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병이라고 한다면, 완벽한 것은 없으므로 모든 것이 다 병이라고 해야 한다. - 4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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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1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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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네이버 책에 '고백'이라고 치면 이 작품이 최상단에 뜰 정도로 이 작품의 위상은 어마어마하다. 두 번째로 읽음에도 여전히 충격적인 내용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르겠다. 제목의 어감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내용의 이 작품이 출간 당시에 불러일으킨 신드롬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감독 나카시마 테츠야가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덕에 더 주목받기도 했다. 영화는 소설과 거의 맞먹는, 어떤 부분에선 능가하기도 하니 못 본 사람은 꼭 보자. 특히 원작은 읽었는데 영화는 아직 못 봤으면 더더욱. 이 작품은 혼자만 알기에 너무 아깝다. 지금은 오히려 혼자만 알기도 쉽지 않지만.


 그래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간략히 줄거릴 풀어내자면, 종업식 날 교사인 화자가 학생들에게 '얼마 전에 죽은 내 딸은 우리 반 학생이 죽였습니다.'라고 말하며 시작되는 이야기다. 미나토 가나에의 장기인 1인칭 화자 시점에 따른 독백의 묘미가 가장 잘 두드러진 작품인데 - 이 작품이 데뷔작인데 가장 뛰어나다. 정말이지 안타까운... - 하나의 사건을 두고 여러 묘사되는 인물의 심리가 일품으로 데뷔작 같지 않은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 솔직히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본 지금도 이 생각엔 변함이 없다.  

 오쿠다 히데오의 <침묵의 거리에서>가 이 작품과 유사하다면 유사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작품이 현실적이었다면 이 작품은 다소 막장일지라도 광기 어리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다르다. <고백>을 읽으면 이 세상에 광기에 물들지 않은 인간이란 존재할까 의문이 다 든다. 딸을 잃은 엄마, 군중 심리에 물드는 아이들, 자기 자식을 과보호하는 엄마, 그리고 두 명의 살인자... 무엇보다도 우리와 그렇게 동떨어진 인물이 아니라는 것에 더욱 소름이 돋는다.


 말은 가벼울 수 있어도 글은 가볍지 않다던가. 누가 쓰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확실히 글은 말보다 무게가 있다. 이 작품에서 선보이는 서간 형체나 독백 형식의 글은 음성의 말과는 판이한, 남다른 진지함을 자아낸다.

 왜냐하면 글은 입바르거나 누구나 할 법한 이야기를 하고자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소 자극적이고 동의를 얻어낼 수 없을지라도 자기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기 위해 펜을 잡는 것이 아닐까. 난 이런 글이야말로 소설 속 등장인물을 빛나게 해준다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 <고백>은 그 부분에서 월등한 영역을 점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법 이전의 인간의 복수심을 다룬 시점에서 이 작품의 시원시원함은 진즉에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들의 윤리 의식이 마치 시시껄렁한 것이라도 되는 양 숱하게 배반하는 인물들의 행동거지가 쾌감과 절망을 동시에 선사한다. 이런 막장이 다 있을까 싶지만 한편으론 동정심도 적잖이 든다. 특히 만악의 근원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소년 A의 파트는 유달리 몰입됐다.

 우리는 악인의 속내를 좀처럼 알 수가 없다. 여기서 악인을, 자기 행동이 충분히 악한 줄 알면서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더욱 그렇다. 악인은 자기가 악하게 보이길 원치 않아서 선한 사람보다 더 선한 척을 한다. 그래서 그들이 무슨 심정으로 악행을 일삼았는지 듣기란 무척이나 힘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소설가들은 자신의 글로나마 악인의 숨겨진 속내를 그려내기도 한다. 대체로 상상력과 통찰력이 뛰어난 작가일수록 그 속내를 복잡 미묘하게 그리는 것 같다. 일리는 있지만, 동정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용서할 수 없는 사정들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이번 재독에서 인상 깊었던 점을 하나만 꼽자면 단연 작가의 글의 마력을 들 수 있다. 충격적인 서사는 물론이거니와 그를 지탱하는 심리 묘사도 수위가 세다. 수위 자체로만 보면 우리가 하나도 공감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막상 읽기 시작하면 빠져들 듯이 읽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난 이를 작품 특유의 '가식 따윈 없는 속내 들추기'의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평소 거의 외면하다시피 한 불편한 이야기에 대한 갈증을 이 작품이 제대로 해소시켜준 덕분이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 작품의 성공은 설명이 안 될 것이다. 기분 나쁜 추리소설이란 신조어 '이야미스' 장르를 개척한 작품과 저자를 떠올리면 우리들에게 불편한 이야기에 대한 갈증이 마냥 없지만은 않은 것 같다.

 소설도 읽었으니 영화도 다시 보고 싶어졌다. 더불어 작가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졌다. 거의 대다수의 작품을 읽었지만 최근 출간작은 안 읽어서... 데뷔작을 능가하리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지만 그래도 다시금 기대되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남에게 칭찬받고 싶다는 소망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착한 일이나 훌륭한 행동을 하기란 힘듭니다. 그렇다면 가장 간단한 방법은 무엇일까.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질책하면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가장 먼저 규탄하는 사람, 규탄의 선두에 서는 사람에겐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겠지요. 아무도 찬동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규탄하는 누군가를 따르기란 무척 쉽습니다. 자기 이념은 필요 없고, ‘나도, 나도‘ 하고 말만 하면 그만이니까요. 게다가 착한 일을 하면서 일상의 스트레스도 풀 수 있으니 최고의 쾌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어리석은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벌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 78p




바보일수록 변명을 좋아하는 법입니다. - 2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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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는 풀렸다! - 기막힌 반전에서 절묘한 트릭까지, 깨알같고 비밀스런 추리소설 산책
박광규 지음, 어희경 그림 / 눌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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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추리소설 작법서인 줄 알고 읽었다. 펼쳐 보니 그건 아니고 추리소설의 이모저모를 얘기하는 책이었다. 기대와는 다른 내용이었지만 책 자체는 가볍고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추리소설을 좋아하고 추리소설을 쓰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식으로라도 재밌을 내용들이었다.

 내가 추리소설을 접한 지 8년이 지난 것 같다. 추리소설뿐만 아니라 독서 자체를 늦게 맛들렸는데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참 열광하며 읽어댔는가 보다. 이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대체로 이미 알던 것들이고 들어본 것들이라 그렇게 신선하진 않았다. 언급되는 작품 중 읽은 것도 꽤 있고 안 읽어봤다 할지라도 이름조차 처음 듣는 작품은 거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추리소설 애독자들을 위한 내용이건만 정도에 따라선 그리 신선하지 않을 수 있는 기묘한 아이러니함을 안고 있는 책이었다.


 그런고로 추리소설 입문자가 읽으면 더 좋을 듯하다. 추리소설의 다양한 요소를 잘 정리했기 때문에 어떤 추리소설을 읽을까 고민되면 좋은 지침이 될 것이다. 이제 갓 추리소설에 재미를 붙인 사람들에게 건네주기에 참고할 수 있는 내용이 가득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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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말 엔시 씨와 나 시리즈 1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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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나는 일상 미스터리를 정말 좋아한다. 추리소설 중 가장 부담없이 읽는 하위 장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단순히 추리소설로써 좋아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는 일부 추리소설 애독자나 일반 독자들에겐 아리송한 말일 수 있겠다. 추리소설을 추리소설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선뜻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일상 미스터리라 하면 아가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 시리즈가 원조라고 하는데 난 그 할머니가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것도 종종 본 지라 솔직히 별로 안 와 닿는다. 나는 주로 와카타케 나나미나 가노 도모코 같은 일본 일상 미스터리가 떠오른다.


 어쨌든 이 작가들과 관련된 글을 읽으면 '기타무라 가오루'라는 이름을 심심치 않게 발견하곤 했다. 기타무라 가오루는 노리즈키 린타로의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에서도 크게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당대... 그러니까 80년대 후반 일본 추리소설계를 뒤흔든 작품의 저자라서 그런가 어딘지 낯익은 이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작가의 작품으로 <스킵>이나 <달의 사막을 사박사박>을 읽어봤다. 읽을 때마다 '그 전설의 데뷔작이나 출간할 것이지...' 라고 중얼거렸는데 그 작품이 드디어 출간됐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이 신본격 미스터리의 효시를 알렸다면 기타무라 가오루의 <하늘을 나는 말>은 정반대의 작풍인 일상 미스터리의 바람을 일으켰다고 한다. 숱하게 명성을 들은 작품이라 사뭇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출판사가 이 작품을 홍보하기를 일상 미스터리의 전설과도 같은 작품이라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퍽 틀린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일상 미스터리의 전형이자 정점을 찍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복면 작가로 활동한 탓에 여성 작가로 오해를 받았다는데 그 이유를 대번에 알 수 있는 섬세한 문체나 추리소설답지 않은 따뜻한 드라마와 일상의 작지만 놀라운 수수께끼와 진상들이 알차게 그려져 있었다.

 다만, 일본 문화 중 하나인 라쿠고를 당최 알지 못하니 주인공과 엔시 씨의 대화나 일부 인용이 바로 바로 이해되지 않았는데 그 점은 참 아쉬웠다. 이건 외국 소설이라 어쩔 수 없는 문제긴 하지만... 그 외에도 책에 수록된 작품들이 전반적으로 추리소설의 시원한 결말보다는 여운을 주는 쪽으로 결말을 지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했다가는 내내 어리둥절하면서 읽지 않을까 싶었다. 이 부분은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의 영역이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좋고 싫음이 정확히 반반이었다.


 개인적으로 두 번째 작품인 '설탕 합전' 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알바 경험을 대입해 읽으니 공감 가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추리소설다웠고 작중의 미스터리가 적잖이 궁금증을 자아내서 꽤나 만족스럽게 읽었다.

 소설 본편과 무관한 듯 무관하지 않았던 주인공과 엔시 씨의 대화는 이 책의 백미다. 위에서는 바로 바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아쉽다고 했는데 이는 둘 사이를 오가는 내용을 좀처럼 놓치고 싶지 않은 탓에 나오게 된 불만이었다. 인상 깊었던 구절에 옮긴 게 전부 그 대화 중에 나온 구절들인데 어떻게 보면 엔시 씨가 추리를 펼쳐 미스터리를 푸는 것보다 인상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부분이 바로 일상 미스터리의 장점이자 단점이지 않을까. 서두에 밝혔듯 이런 점 때문에 나는 일상 미스터리를 추리소설로써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히 수수께끼 해결에만 주력하지 않으며 인물간의 드라마나 뜻밖의 감동을 전해주는 일상 미스터리 특유의 작풍 때문에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 설령 추리소설이라고 불릴 수 없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일상 미스터리는 오래도록 읽어나갈 수밖에 없다고 새삼 느끼기도 했다.

 오랜만에 읽은 일상 미스터리 작품이었는데 기대에 살짝 미치지 못해도 역시 좋았다. 후속작인 <밤의 매미>는 일본추리작가협회상(단편 부문)을 수상했다는데 그 작품 또한 기대된다.

하지만 나는 말입니다, 뜸을 뜨려고 줄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세계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안에서만 가능한 옹고집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 120p




많은 사람을 상대하고 있지는 않답니다.

그러면 일부, 이야기의 내용을 아는 사람만을 상대하는 건가요?

아니요. 일부도 아니고 단 한 사람, 자신입니다.

네, 젊은 날의 나를 상대하는 것이지요. 한 무대 한 무대를 순수한 기대를 안고 귀 기울여 들었던 나 자신. 모든 관객을 그 시절의 나라고 생각하고 공연하고 있답니다. 그 상대는 기만할 수 없어요. 그걸 기만한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라쿠고를 그만두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 231~232p




하지만 한번 마음에 걸린 이상에는 거기에 이유를 붙이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요. 머리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데, 그 반대를 불가능한 것이지요. 이것이 머리로 움직이는 인간의 슬픔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머리는 영원히 감정을 질투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 327p




......어떻습니까, 인간이란 존재도 아주 가치가 없지만은 않지요? - 4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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