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혐오예요 - 상처를 덜 주고받기 위해 해야 하는 말
홍재희 / 행성B(행성비) / 2017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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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내 이상과 완전히 부합하면서 그 이상을 보여주는 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이 책은 나의 이상이 바로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은 반가움을 선사해줬다. 읽기 전엔 얇은 책이 무슨 15,000원이나 하냐면서 놀랐지만 다 읽으니 수긍이 간다. 책이란 게 가격을 책정하기 어려운 상품이긴 하지만 이 정도 책이라면 그 가격을 받아도 될 듯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에 동의할는지 모르겠다만.

 이 책은 저자가 만난 6명의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과의 문답을 통해 편견, 차별, 혐오에 정면으로 맞선다. 여성,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양심적 병역 거부자, 성 소수자, 그리고 동물이 그간 받아온 차별을 가감없이 비판하며 혐오의 시대로 접어드려는 작금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여러 예시를 들어 꽤 설득력 있게 주장을 전개하는데 개인적으로 공감가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헬프>에서 외면당하는 흑인의 인권 유린을 고발한 주인공 스키터가 남자친구에게 결별을 통보받는 장면이 있다. 남자가 말하길 자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하곤 못 어울린다나.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스키터의 대답만은 기억난다. 문제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원래부터 있던 문제라고.

 어떤 사람들은 왜 문제를 일으키느냐고 묻는다. 왜 굳이 들춰내서 힘겹게 살아가냐고 말이다. 왜 그리 불편하게 구냐고. 그들이 간과하는 게 있다면 지적당하는 모든 문제는 이미 일어난 것이고 굳이 힘겹게 들춰내야하는 것이고 불편하게 굴어야 할 만큼 중요하고 가치 있다는 것이다. 이건 차별을 받는 소수자를 위해서도,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온당치 못한 이유로, 또 근거도 없는 모략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소수자들을 외면하면 우리가 소수자가 됐을 때도 마찬가지로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멸시하는 사회만큼 살벌한 세상도 없을 것이다. 사람은 모두 다른데 서로를 향한 차별을 묵인하면 나 자신의 다름도 부정하는 꼴이나 다름 없지 않은가.


 평소 내가 관심 가졌던 분야에 대해서 속 시원히 얘기하느라 술술 읽었다. 어떤 부분은 미처 생각 못했던 부분도 있고 깨달음을 얻기도 했는데 저자의 기획력이 참으로 빛을 발하지 않았나 싶다. 해당 분야에 천착한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들의 남다른 통찰은 참으로 탄복할 만했다.

 특히 기억에 남았던 부분이 몇 개 있는데 간단히 짚어보고 이 글을 마무리하면 좋을 것 같다. 파트별 내용이 긴밀하게 연관된 나머지 하나를 언급해도 열 이상의 얘기가 쏟아지니 이렇게 얘기하는 게 효율적일 것 같다.




 1장. 여성이 혐오하는 여성은 누구인가


 1장에 등장하는 차별의 대상은 바로 여성이었다. 일단 저자도 여성이고 최근 특정 성을 혐오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와중인 만큼 적절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호기롭게 시작을 끊은 책은 저자가 실제로 겪은 성 차별 사례를 들어가며 나아가 성차별의 핵심에 다가간다.

 그런데 내가 남자라서 그런 걸까. 극단적이지 않은, 이른바 치우치지 않은 명망 있는 페미니스트의 글일지라도 남자인 내가 읽기엔 그들이 간혹 감정적으로 논조를 이끌어간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이 작가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 자신이 남자에게 폭행을 당한 일화를 두고 같이 분개했던 남성에게 보인 태도는 약간 실망스러웠다. 아니, 저자의 논리에는 공감하는데 자칫 오해를 살 만한 표현을 쓴 게 눈에 밟힌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모든 사람이 고정적인 성 역할에 구애받지 않아야 하고 차별을 하면 안 된다면 진정 페미니즘을 추구하고 남성의 성 역할에 반대하는 남성의 존재도 분명 언급했어야 했다. 그렇게 논리적이고 통찰력을 갖춘 사람이 지나가는 한 줄이라도 더 이런 남성들을 언급하기를 소홀히 했다는 건 어떻게 보면 차별당하는 여성이라는 주제를 위해 의도적으로 시야를 차단한 꼴이 됐다. 이 부분 때문에 과연 이 작가가 이후에도 치우치지 않은 자세를 계속 보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여성도 동의하는 여성 혐오, 이분법적 성 역할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니 인상이 달라졌다. 유독 성 문화를 터부시하는 우리나라의 정서에서 매춘과 그 종사자들은 그늘에 가려진 존재였는데 그들을, 그것도 여성이 조명한다는 게 일단 신선했다. 여성의 경우엔 정조를 지켜야 하고 남성의 경우엔 여색을 밝혀도 은근히 용인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들춰낸 것이다. 성에 따라 특별히 성욕의 여부에 차이가 있지 않을 텐데 유독 여성의 성욕을 부정하는 것은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인 사고로 오늘날의 가족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세뇌라는 것은 확실히 납득이 갔다. 가정을 지켜야 하는 여성이 남성만큼 성 생활에 빠져들어선 안 된다는 그들의 논리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잘 먹혀들었는데 이는 매춘부에 대한 혐오에서 법적 금지에 이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자만큼 성 생활을 한다고 해서 몸이 더 불결해진다는 것도 이상한 얘기다. 성욕이 남성만의 전유물도 아니고 하물며 남자를 상대하는 매춘부도 엄연히 직업적인 측면에서 노동을 하고 화대라는 대가를 받을 뿐이니 도덕적으로도 비난할 여지도 없다. 다만 전통적인 의미의 정절과는 맞지 않기에 반감이 들 뿐인데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들마저도 그들을 혐오하면 결국 전통적인 성 역할 안에 여성을 가두는 꼴이 아닐까?


 여성 혐오와 더불어 성차별의 핵심을 이분법적 성 역할로 보고 남성만이 아닌 여성들도 거들었던 차별까지 언급한 건 정말이지 놀라웠다. 여성도 남성만큼 성욕도 있는 등 남성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부각시켜 성 고정관념을 흔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나아가서 진정한 페미니즘에 대한 고찰도 설파하는데 진정한 평등엔 남자도 여자도 배제될 수 없다는, 당연하지만 간과했던 사실도 언급해 남은 저자의 글에 대해서도 신뢰할 수 있게 됐다.




 4장. '개인'을 지우는 군대를 거부합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건대 나는 군대를 순전히 감옥에 가기 싫어서 갔다. 그리고 남들도 다 군 생활하고 전역하는데 나라고 못할까 싶어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입대했다. 그렇게 군 생활을 해보니 막상 전역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쉬운 것도 아니고 군인이란 정말 호국보훈의 투철한 애국심을 가진 게 아닌 이상 못해먹을 짓이라며 치가 떨리는 세월을 보내고 전역했다. 입대 전엔 군대에 전혀 관심이 없었거늘 전역 이후엔 군대 관련 이슈에 눈이 많이 가는데 그때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뉴스는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전역할 정돈데 그렇게 군대를 안 가겠다고 버티는 게 영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예부터 병역 거부자에 대한 뉴스도 접했고 그들의 처우에 대한 뉴스도 봐왔지만 하찮은 보상 심리 때문인지 그들을 고깝게 봤던 것 같다. 종교적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면 그걸 악용하는 사람도 나오지 않겠냐며 사뭇 타당해 보이는 반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사실 군대에 대해 의구심이 병역 거부자 못지않은지라 아까 위에서 착잡하다고 했던 것 같다.


 저자는 양심적 병역 거부에 의해 3년의 수감 생활을 한 바 있는 김경묵 감독과의 문답을 4번째 차별 이야기의 발판으로 삼았다. 여성의 시선으로 보는 군대 문제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김경묵 감독의 용기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이유도 아닌 그저 자신이 군 생활을 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는 그는 어떻게 보면 책임 회피일 수 있지만 한편으론 한없이 솔직하면서도 최선의 방법으로 거부 의사를 표명한 것이라고도 여겨진다. 더군다나 군대가 '개인'을 지우기 때문에 거부한다니, 경험이 전무한 주장임에도 그 내용은 심히 공감됐다.

 군대에서 나는 이름보다 계급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군대 안에서의 계급에 어울리는 행동만 허용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좋은 군인이 되려면 일단 나 스스로를 지우는 게 큰 관건이었는데 이게 그 무엇보다도 힘들었다. 어떻게 보면 군인으로서는 꼭 필요한 덕목이지만 사람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부분이었던 것이다. 세상이 정한 규격에 나 자신을 맞추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고 그걸 해내지 못했을 때 가해지는 제재도 만만치 않게 고통스러웠다.


 문제는 그 고통스러운 것이 군대를 비롯해 사회에서도 비슷하게 요구된다는 것이다. 개인이 사회에 맞추느라 신음을 흘리든 뭐든 사회를 운영하는 입장에선 그게 더 편리하니까. 그래서 타인의 다름이 그토록 배척되고 복종과 획일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것일까.

 글쎄, 군대를 두고 찬반의견을 나누는 것만큼 논란이 되는 것도 없다. 군대의 필요성은 분명한데 지금까지의 징집 제도가 결코 이상적이라고 할 순 없다. 병영 문화 개선이 대안이 될 순 있지만 직접 경험한 입장에서 진정한 병영 문화 개선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군대는 특수한 공간이고 자체적인 법에 의해 보호되므로 사회의 상식이 통용되리라 기대하긴 어려움이 따른다.


 지금까지의 군대의 메카니즘이 그 필요성을 차치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문제점과 모순도 안고 있었는지 더 말해봐야 입 아픈 것이다. 그를 통찰로나마 파악해 입대를 거부한 김경묵 감독을 과연 겁쟁이라고만 단정지을 수 있을까. 그의 행보는 사회에 기여한 바는 없지만 자신의 소신을 따르는 모습은 가히 귀감이 될 만하다. 어차피 다 지나간 얘기지만,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병역을 거부했더라면 내 인생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한 번 상상해봤다. 이 상상은 나를 겉잡을 수 없는 불안함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그제서야 김경묵 감독의 선택은 분명 용기라는 생각에 미치게 됐다. 모두가 부정할 타자他者가 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의 선택이 반드시 옳다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그가 자기 소신에 따라 걷고자 하는 길은 결코 평탄치 않기에 이후의 행보가 궁금해졌다.




 6장. 장 보듯이 동물을 보는 사회


 하루도 고기를 먹지 않는 날은 없지만 지금 입 안의 고기의 출처에 대해 떠올린 적은 거의 없었다. 고기라는 것은 동물의 시체니 분명 살생을 통해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부커상을 받은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살생이란 이름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채식주의를 선언한 여자의 이야기였다. 고백하자면 그 소설 때문에 한동안 채식주의에 대한 공포스런 선입견이 박혀 있었다. 이제 그 선입견은 많이 덜게 됐지만 채식주의의 이념은 나와 맞지 않게 숭고한 부분이 있어 늘 거리가 느껴졌다.

 차별의 대상으로 동물을 언급한다는 것은 솔직히 많이 의외였다. 인간의 식성 때문에 한 평생을 좁은 곳에서 고통 받는 소, 돼지, 닭의 이야기는 딱하지만 당장의 맛있는 식사를 떠올리며 외면했었다. 작가는 황윤 감독과의 문답으로 기어코 축산 산업의 잔혹성을 강조하는데 내가 외면한다고 의식도 않았던 이야기를 되짚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동물이 차별의 대상이었다는 것이 의외였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정말 잔혹한 태도였으리라.


 인간의 식성과 기호를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강요해서도 안 되기에 이 문제가 금방 해소될 것 같진 않다. 게다가 글에서 언급하듯 우리나라는 채식주의자가 살기 어려운 나라로 육식 문화가 아주 일상적인 나라니까 말이다. 치킨과 삼겹살과 한우는 인기 있는 외식 메뉴고 그 인기에 비례하게 어마어마한 수의 닭과 돼지와 소가 죽어나가고 있다.

 동물의 권리를 주목하는 황윤 감독의 동물을 두고 '비인간 동물'이라는 호칭을 썼다. 인간이 아닌 동물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이는 인간 또한 동물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인간은 꽤나 공공연하게 다른 동물을 얼마든지 착취해도 되는 특별한 존재라고 자칭한 것 같다. 비인간 동물이 생태계의 먹이 사슬 안에서만 생활하는 것에 비해 인간은 자기 이외의 수많은 동물을 잡아먹는다. 그것도 산업 발전에 따라 무척이나 잔인한 방식으로.


 오직 인간만이 철저하게 동물의 권리를 짓밟는다. 몸 한 번 움직이기 어려운 좁디좁은 우리 안에 가둬 출산을 반복시키다가 살을 찌워 끝내 잡아먹는다. 식용이라는 이름 하에 동물이 동물답게 살 권리마저 앗아간다. 이것도 살처분 앞에서는 빛이 바래질 정도니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산 채로 구덩이에 매장하는, 모자이크 처리된 영상이라도 보노라면 도무지 인간을 잔인한 존재라고 부르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이 육식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산업 구조라며 외면당한다.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의외로 채식이 어렵지 않음을 묘사한 글의 내용은 꽤 구미가 당겼다. 돈까스를 좋아하는 황윤 감독의 가족이 채식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사실은 돼지고기를 좋아한 게 아니라 바삭한 튀김옷을 좋아했던 것이라고 깨달았단다. 저자는 채식 레스토랑에서 콩 스테이크가 있는 걸 보고 그렇게까지 고기가 아닌 단백질을 섭취해야 할까 싶어 우스웠다는 내용도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먹은 콩 스테이크가 충분히 고기를 대체할 수 있다는 저자의 의견을 읽으니 생각이 또 달라졌다.


 육식의 산업화가 이다지도 잔인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선 채식주의자가 나날이 늘어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테다. 가장 어려운 방법이지만 확실히 효과적이리라. 문제는 채식주의의 필요성이나 높은 장벽을 쉽사리 공감하고 넘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기 섭취 자체는 건강을 위해서도 좋다는 말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맛있어서 그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 그런 유혹 앞에서 동물의 가련한 처지에 대해 얘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안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조금이라도 유혹이 충족된 뒤에 고기가 아닌 동물에 대해 얘기하면 그만이다. 아무튼 인간이 언제까지고 유혹에 흔들리며 이성을 마다하는 존재일 리도 없다. 책의 후기에 루쉰의 말이 인용됐다.



 희망이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대체로 감정에 쉽게 휘둘린다지만 항상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나는 누구나 반드시 이성적인 순간이 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장에 희망이 없어 보인다고 낙심해선 안 될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니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책의 저자를 비롯해 여섯 명의 감독처럼 차별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온다면 분명 우릴 둘러싼 문제들은 들춰지고 머잖아 해결될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세상은 분명 변하리라. 내가 채식주의에 대해 서서히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하루 아침에 땅 위에 길이 생기지 않는 것처럼 느릿느릿 변하더라도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희망적이다.

 

 

 

 

인상 깊은 구절

 

 

여성 혐오는 남성들한테만 있는 게 아녜요. 여성 스스로 여성을 혐오하기도 해요. 여성 내부에서도 성의 이분법에 들어맞지 않는 여성을 배제하고 단죄하고 배척하는 경향이 있어요. - 37p


제가 할 수 있는 건 상황을 계속 불편하게 만드는 거예요. 왜냐고요? 세상에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어디에나 아주 많이 존재하거든요. 그 사람들이 상처받고 있다는 걸 누군가는 이야기해야 해요. - 59p


저는 타자가 되는 경험은 결국 상처를 받아 보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상처를 통해 자기라고 믿었던 견고한 틀에, 고정된 정체성에 균열이 생기는 거죠. 그 균열을 통해 자기 밖으로 외부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기회, 세계를 바깥에서 볼 수 있는 창문을 하나 가지게 되고요. 상처에 함몰되면 자기 삶이 무너지겠지만 그 상처를 통해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세계가 밖에 있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저는 자신을 타자화해 보는 거, 타자가 되어 보는 경험이 정말 소중하다고 봐요. - 148p


차별의 논리는 대상을 바꿔 가며 확장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대상을 차별해도 된다고 합리화했던 논리는 다른 상황에서 다른 대상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 말은 사실상 우리가 모두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거예요. - 1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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