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R - Rossum's Universal Robots 로숨 유니버설 로봇
카테르지나 추포바 지음, 김규진 옮김, 카렐 차페크 원작 / 우물이있는집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3


 카렐 차페크의 전설적인 희곡 <R.U.R>을 만화화한 작품, 아니 이 경우엔 그래픽 노블화했다고 말해야겠다. 책의 크기이나 가격, 작화의 퀄리티 등 전반적인 만듦새가 딱 그래픽 노블이다. 나도 정확히 그래픽 노블을 뭐라 정의해야 할는지 모르겠지만, 대체로 유명 소설이 원작이거나 일본이 아닌 서양 국적의 작가가 올컬러로 그린 다소 가격대가 나가는 만화를 흔히 그래픽 노블이라 부르지 않나 싶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런데, 나는 편의상 만화라고 호칭을 통일하겠다. 그래, 명칭은 둘째 문제고 중요한 건 그래픽 노블이라 칭해지는 책들은 하나같이 접근성은 높으나 읽었을 땐 대체로 그에 걸맞는 만족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니까... 그런데 이 책의 만족도는 조금 미묘하다.

 원작이 100년이 훌쩍 넘은 과거에 집필됐고 희곡을 바탕으로 한 연극 무대를 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작중 상황이나 비주얼을 상상하기 까다로운 부분이 없잖았다. 그렇기에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의 세계는 어떨지 무척 기대됐다. 그런데 내 기억에 내용은 하나도 손댄 구석이 없고 희곡의 특성상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공장에서만 펼쳐지는 제한된 장소 제공조차도 변함이 없다. A부터 Z까지 원작과 판박이인데 원작의 서사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독자에겐 좋은 일이지만 원작과 색다른 연출을 기대했을 독자에겐 좀 멋없는 2차 창작이라 여길는지 모르겠다. 그림체가 워낙 독창적이고 유려해 눈은 즐겁지만 그게 다라면서 말이다.


 원작에서 의문이거나 아쉬웠던 부분, 헬레나가 도민의 청혼을 받아들인 부분이나 로봇을 만든 로숨의 과거가 짧게 설명되거나 하는 등 만화로 2차 창작되면서 충족되길 원했던 부분조차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진 건 김새는 부분이었고 후반부에 아담과 이브를 연상시키는 두 로봇 헬레나와 프리무스를 놓아주면서 알퀴스트가 쏟아내는 방백도 만화보다 희곡에서 더 전율과 웅장함이 느껴지게 연출됐다. 실제 무대에서 상연된 걸 보더라도 이런 느낌을 받으려나. 희곡의 집필할 때 반드시 무대에서 상연되는 걸 전제로 하니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연극보다 훨씬 표현의 자유가 폭넓은 만화이기에 희곡이 표현 못한 세계를 무궁하게 펼쳐주겠거니 기대했지만, 껍데기가 유려한 것 그 이상의 뭔가를 보여주지 못해 아쉽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희곡보다 먼저 만화로 접했어도 그때도 똑같이 스토리에 갈증 비슷한 아쉬움을 느낄 테니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로봇에 의지해 생식 능력마저 잃은 인간의 종말도 신문 기사 몇 구절로 설명을 대신해버리는 이 여백 많은 세계관에 몰입하고 사유를 생성해내려면 그림으론 표현되지 않는 뭔가가 더 필요했으리라 본다.


 누군가는 이만하면 훌륭한 만화화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너무 원작을 그대로 재현해버리면 완성도와 별개로 늘 멋대가리 없는 일이라는 날것의 감상이 먼저 튀어나와버린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마지막화 같은 무리수만 아니라면 2차 창작은 언제든 환영인데... <R.U.R>을 원작으로 한 다른 2차 창작 작품으론 뭐가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더 있으면 좋으련만, 아니 있다면 그 작품만의 뭔가가 있길 바란다.

비생산성이 인류가 달성할 수 있는 마지막 과업이지요. - 87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