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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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 이제 드디어 연휴 때 읽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마지막 책에 대한 리뷰를 쓰게 됐다. 리뷰를 쓰기에 앞서 경건한 마음으로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에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 연출의 <남아 있는 나날>을 감상했다. 젊은 날의 휴 그랜트와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의 슈퍼맨 크리스토퍼 리브가 등장해서 잠시 충격을 먹기도 했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영화는 소설만큼이나 그렇게 훌륭했다.

 

다시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수십 년간, 옥스퍼드셔 달링턴 홀에서 수석집사로 작고한 달링턴 경을 모셔온 스티븐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능한 집사(butler)다. 그의 유일한 관심을 주인님인 달링턴 경을 어떻게 모시고, 그가 초대하는 수많은 저명인사들을 대접하고, 잦은 행사를 무사히 치르는가이다. 그러기 위해서 스티븐스는 마치 제각각 개성이 다른 하인과 하녀들 그리고 조리사들로 구성된 집단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영화에서는 달링턴 하우스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여우사냥에 나서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특이하게도 여성들은 한쪽으로 다리를 모으고 말을 타는 장면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아마 고증을 거친 뒤에 촬영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시절에는 여성들이 말을 그렇게 탔었구나.

 

물론 수석집사 홀로 그 수많은 직원들을 부릴 순 없다. 그래서 그는 최근이 눈이 맞아 달아난 보조집사와 하녀장의 자리에 자신의 아버지 스티븐스 시니어와 켄턴 양을 배치한다. 스티븐스 삶에서 가장 우선은 주인님의 심기경호다. 그리고 보니 모처의 감옥에 있는 인사 생각이 떠오른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못하고, 오로지 그의 심기경호에만 전념하다가 결국 주군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인사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시구로 선생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재연된다.

계급이나 재산 같은 유형의 자산보다 주인을 모시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도덕적 가치(moral statue)라고 스티븐스는 자신 있게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달링턴 경이 사망하고 미국인 갑부 패러데이는 스티븐스의 고용을 승계했지만, 달링턴 하우스에 예전과 같은 흥청거림 혹은 영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 대전으로 구질서 자체가 붕괴되어 버린 탓이다. 어쨌든 만성적인 인력부족에 시달리던 스티븐스는 유능했던 옛 하녀장 켄턴 양의 편지를 받고 들뜬 마음에 재고용 위해 패러데이 주인님의 허락을 얻어 정말 오랜 만에 여행에 나선다. 주인님의 포드차까지 빌려 타고 가다 보니, 들리는 곳곳마다 진짜 신사 취급을 받는다. 문제는 저간에서 느끼는 고 달링턴 경에 대한 야박한 평가다. 영화에서는 심지어 매국노라고까지 하는데, 전쟁 중에 히틀러에 협력한 나치 동조자라는 평가에 스티븐스는 마치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처럼 자신은 달링턴 경 밑에서 일하지 않았노라고 선언한다.

 

그러니까 스티븐스 자신도 달링턴 경 삶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일까? 자기 삶에 최우선하는 가치로, 주인님을 충실하게 모셔야 한다는 대의는 자신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도덕적 가치 덕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임종도 돌보지 않고, 자신에게 호감이 가지고 대했던 켄턴 양의 애정마저도 무시했던 스티븐스가 말년에 알게 된 달링턴 경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그의 생각과 너무나 달랐다. 호전적 제국주의자 처칠과는 달리 달링턴 경은 인류애적인 관심에서 독일의 재건과 재무장을 허용해야 한다는 독일외상 폰 리벤트로프의 사탕발림에 그만 넘어가 버렸다. 히틀러가 평화를 원했다고?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당시 영국 귀족들 사이에서는 상당 부분 호응을 얻었던 모양이다. 전간기의 중요한 모임에서 미국 출신 하원의원 루이스는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에 속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영화에서 크리스토퍼 리브가 연회장에서 연설하는 장면은 최고였다. 독일의 재무장에 부정적이던 프랑스 대표마저 넘어가 버린 마당에, 루이스는 정치와 외교는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고한 신분제에 의거한 아마추어 외교관들이 정세판단을 잘못해서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을 결정지어 버린 뮌헨 협정 같이 중대한 외교가 달링턴 하우스의 서가 같은 밀실에서 소수에 의해 결정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이시구로 선생은 지적한다. 소설에서 달링턴 경들의 외교관 동료들은 마치 수백만의 무지한 영국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스티븐스를 지목해서, 그가 대답할 수 없는 전문적인 내용에 대한 의견을 묻고 스티븐스의 잘 모르겠다는 대답에 그것 보란 듯이 무시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민주주의와 공론의 장에서 그런 국가적 대사를 논의해야 하는 이유를 망각한 이들의 정치놀음을 보는 것 같았다. 하긴 우리나라에도 여전히 그런 인사들이 한 때 정권을 잡고 있으면서 국정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게 지금에서야 속속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1930년대 독일 이외에 유럽에서 가장 반유대주의가 극성을 부린 나라가 영국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이미 오래 전에 조지 오웰이 지적한 대로, 유서 깊은 반유대주의가 영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블랙셔츠 단으로 대표되는 반유대주의에 경도된 달링턴 경 역시 집안 하인들 중에 유대인을 색출해서 쫓아내라는 결정을 스티븐스에게 전달한다. 켄턴 양은 이에 격렬하게 반발하지만, 그녀 역시 스스로를 비겁자라고 부르면서 달링턴 하우스에 잔류를 선택한다. 달링턴 경은 곧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오하게 되지만, 이미 열차는 떠난 다음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주인님의 잘못된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바로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텐데, 스티븐스의 달링턴 경에 대한 맹목적 충성이 결국 문제였다. 더 큰 문제는 아무런 의견 없이 주인님의 결정에 대한 스티븐스의 맹신이 아니었을까. 엄정한 역사는 사소한 역할을 맡은 이에게도 이렇게 책임을 묻는 모양이다.

 

<남아 있는 나날>은 과거에 벌어졌던 일들을 플래시백으로 처리하면서, 동시에 일종의 로드무비 스타일을 취하고 있다. 달링턴 하우스라는 공간이 전부였던 스티븐스는 켄턴 양을 서쪽으로 여행을 하면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스티븐스에게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동력은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아버지 스티븐스 시니어처럼 평생 죽어라고 남의 뒤치다꺼리나 하다가 그렇게 죽는 것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인 것이다.

 

영화는 원작에 충실하게 따르면서, 좀 더 극적인 장치들을 차용했다. 가령 예를 들면, 미국 하원의원인 잭 루이스가 소설과는 달리 달링턴 하우스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한다. 켄턴 양 역할을 맡은 삼십대 초반의 엠마 톰슨의 연기는 나무랄 데가 없다. 스티븐스와 묘한 감정의 썸을 타면서도, 자기가 말해야 할 때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장면에서는 감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옹고집쟁이 버틀러 역할의 앤소니 홉킨스의 열연 또한 일품이었다. 달링턴 경의 대자 역으로 등장한 기자 역할의 휴 그랜트 역시 감초 같은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음악도 긴장을 고조시키거나, 스토리를 전개하는데 있어 한 부분을 담당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모쪼록 영화를 보게 된다면 부디 원작 소설을 보시고 영화를 보시길. 영화를 먼저 보게 되면 원작에 대한 감상이 훼손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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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래히 2017-10-14 15: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책이 먼저 이군요^^

레삭매냐 2017-10-14 23:48   좋아요 0 | URL
아무리 영화가 잘 만들어져도 원작의
아우라를 넘어서기란 버거운 것 같습니다.

<네버 렛 미 고>도 마찬가지구요.

shuai 2017-11-05 1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라는 표현을 저도 사용했는데 제가 나중에 썼으니 표절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독후에 이런 꼼꼼한 리뷰를 보니 소설을 제대로 복기하는 기분이 듭니다. 영화도 보고싶어지는군요.

레삭매냐 2017-11-05 10:44   좋아요 0 | URL
표절이라뇨 무신 그런 말쌈을 -
공감대의 확장이라고 생각합니다 :>

영화도 정말 흥미진진했습니다. 원작소설과
다른 점을 찾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영화도 한 번 보시길 추천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