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로베르트 제탈러 지음, 오공훈 옮김 / 그러나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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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에 앞서 소설 <한평생>은 구원과 고독 그리고 존엄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에게는 처음으로 번역되어 소개되는 오스트리아 출신 배우이자 시나리오 작가 그리고 소설가인 로베르트 제탈러의 <한평생>은 지난 봄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함께 맨부커 인터내셔널 최종심에 오른 수작이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 새로운 작가를 만난다는 즐거움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도전에 인색한 편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가 있었다. 2015년에 <스토너>의 존 윌리엄스를 만난 해로 기억될 수 있다면, 2016년은 로베르트 제탈러를 발굴해낸 해로 기억될 것 같다.

 

소설 <한평생>은 산사나이 안드레아스 에거의 평범한 일생에 관한 소설이다. 그런 점에서도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떠올리게 한다. 에거는 고아 출신으로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의 농부 크란츠슈토커의 포스터 차일드(foster child)로 입양되어 어린 시절부터 매질과 학대에 익숙한 삶을 살게 된다. 어느 날 양부의 심한 매질로 오른쪽 다리가 부러지고 접골사의 처방으로 낫긴 했지만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소설의 초반부터 내러티브는 어린 소년 에거가 앞으로 얼마나 험난한 삶을 살게 될지 그 징후를 보여준다. 소년을 세상에서 유일하게 따뜻하게 대해주던 크란츠슈토커의 장모 디아늘이 죽었을 때, 그늘진 장소에 숨어 흐느끼는 장면에서 소년의 고독을 읽을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소설의 시작은 에거가 염소지기를 오두막에서 구하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던가. 말없이 구원에 나선 에거의 노력은 폭설을 헤치고 마을로 향하던 와중에 눈발 속으로 “뿔 달린 하네스”가 도망치면서 수포가 되고 눈 속에서 고생하느라 지친 마음을 ‘황금 영양’ 여관에서 튀긴 도넛과 수제 크라우터러 소주로 달래는 가운데 젊은 여성을 만났고 그 순간을 에거는 평생 돌이켜 회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언제나 그렇듯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는 장면은 그렇지 않던가. 그렇게 인간의 구원 그리고 사랑은 일맥상통하게 된다는 점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걸까.

 

학교에서 다니면서 간신히 글을 깨우친 에거는 장성해서 크란츠슈토커의 매질에서 벗어나 비로소 독립된 삶을 꾸려 나가기 시작한다. 해준 건 없고 부려 먹기만 한 양부의 매질에 대한 거부는 한 인간이 지켜야 하는 존엄성에 대한 장엄한 선언이었다. 그리고 ‘비터만 운트 죄네’ 회사가 산중에 케이블카 설치를 시작한 것은 에거에게 하나의 기회였다. 산으로 상징되는 자연을 사랑했던 그에게 말없이 묵묵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세계가 자본주의로 시대로 진입하게 되면서, 오락과 휴식을 즐길 여가시간과 소득이 늘어난 대중에게 힘들이지 않고 산을 오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케이블카 사업이야말로 황금알을 낳은 거위였던 모양이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과 같은 개발에 따른 필연적인 환경파괴 이슈는 없었던 모양이다.

 

 

특별한 기술도 없고, 다리까지 저는 에거의 고용을 총지배인은 꺼리지만 막일꾼 에거의 가능성을 알아본 그는 즉석에서 고용을 결정한다. 그리고 벌목작업과 쇠기둥을 세우는 일이 투입된 에거는 산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현장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다. 동시에 황금 영양의 종업원 마리와의 사랑도 무르익어 간다. 직장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두둑한 보수와 크라우터러 소주로 매수했다) 산에 불로 만든 기발한 프로포즈를 동원해서 마침내 마리와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에거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고, 어느 날 신혼부부의 오두막을 덮친 산사태로 아내 마리를 잃는다.

 

그리고 누구나 다 알다시피 오스트리아 출신 상병 아돌프 히틀러가 기획한 게르만 민족의 레벤스라움을 위한 정복전쟁이 시작되고, 에거 역시 전시 복무에 지원하기 위해 징병검사위원회에 지원하지만 나이가 많고 다리를 전다는 이유로 깨끗하게 거절당한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선에서 코너에 몰리게 되자 4년이 지나지 않은 1942년 11월 에거는 징집 명령을 받고 러시아 코카서스 전선에 투입되어 후방의 보급도 받지 못한 채 산속에 머무르다가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고 만다. 혹독한 러시아 포로수용소 시절을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에게 달라진 상황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에거의 앞날이 막막하기만 했던 것도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고, 전쟁의 상흔으로부터 회복되면서 대중들이 다시 레저의 시간을 즐기게 되자, 산사나이 에거는 아름다운 티롤 지방의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이드가 되어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시작한다. 산에서 길을 잃은 노부부를 도왔던 일에 착안해서 에거는 새로운 사업에 나선다. 학교 교사였던 안나 홀러와의 짧은 로맨스도 등장하지만, 산 사람의 사랑이 죽은 사람의 깊은 사랑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만 깨달은 채 조용한 이별로 마무리되기도 한다.

 

고독했던 어린 시절, 아내를 잃은 슬픔 그리고 전쟁포로가 되어 숱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암혹한 시절을 견뎌낸 에거를 산은 묵묵하게 안아 주었다. 마을이 휴양지로 변신하기 시작하고, 가이드 생활에 염증이 난 에거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은둔생활에 들어간다. 산에서 나고 자란 남자에게 산이야말로 결국 돌아갈 곳이라는 암시였을까. 에거의 삶이 막바지로 치닫는 가운데, 소설 처음에 등장했던 사라졌던 ‘뿔 달린 하네스’의 시신이 발견된다. 삶의 온갖 간난신고를 겪어낸 에거는 그리고 천수를 누리고 생을 조용하게 마감한다.

 

로베르트 제탈러는 마치 솜씨 좋은 피아노 조율사처럼 그렇게 산사나이 안드레아스 에거의 삶을 그림 같이 아름다운 티롤 지방의 자연 속에 형상화시킨다. 고아로써 느낀 외로움, 개발과 전쟁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과정 가운데 에거는 성장하고, 사랑하고 그리고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다. 에거의 삶에 어느 순간 착근한 죽음은 더 이상 어색하지 않은 삶의 동반자 같은 존재였다고 해야 할까. 에거가 참여한 노동에 대한 질적 변신도 눈여겨 볼만 하다. 생의 시작은 농장에서 막일을 도맡아 하는 무보수 농부였다. 그 다음에는 케이블카 회사에 고용된 직원으로 산정상에 케이블카를 설치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추가 노동을 원했고, 그 다음에는 군인으로 대소전쟁에 참여해서 바위를 폭약으로 뚫고 진지를 사수하는 일에 투입됐다. 마지막으로 고향에 돌아와서는 산악 가이드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에거는 모든 인간처럼 다양한 노동 방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 보인다.

 

 

제탈러의 첫 만남은 기대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아직 출간되지 않은 그의 전작 <담배 가게 소년>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됐다. 영어책으로는 나온 모양이던데, 애용하는 북디파지토리를 통해 주문할까 하고 고민 중이다. 독일어를 읽을 수 없으니 영어책을 읽어야겠지 아마도. 최근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어느 독일인 이야기>도 열심히 읽고 있는데, 비슷한 시대의 이야기라 그런지 다양한 부분에서 공명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2016년 최고의 발견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제현에게 강력하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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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6-29 13: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끔 권위 있는 문학상 수상 작가보다 최종심사에 오른 후보작을 쓴 작가가 더 크게 알려지는 경우가 있어요. 아폴리네르가 공쿠르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다른 작가가 상을 받았습니다. 상을 받은 작가는 지금도 프랑스 내에 인지도가 있지만, 아폴리네르의 명성에 비하면 부족해요.

레삭매냐 2017-06-29 23:01   좋아요 0 | URL
동감하는 바입니다.
수상작보다도 어쩔 땐 경쟁작이 우수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죠.

이창래 선생의 <생존자>도 그런 경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