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현대의 지성 111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유제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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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감회가 새롭다는 말을 하고 싶다. 세 번의 도전 끝에 결국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를 다 읽을 수가 있었다. 그것도 단 3일 만에. 완독하고 나서 왜 두 번이나 실패했는지 되짚어 보니, 독서의 맥을 끊는 어려운 각주들을 모두 읽겠다고 설친 것과 메노키오의 신앙 부분에 관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장애물이었던 것 같다. 전자는 패스하고, 후자는 유시민 선생의 충고를 따르면서 읽으니 금세 다 읽을 수가 있었다. 또 하나 자극점은 얼마 전부터 읽고 있는 제임스 레스턴이 저술한 <밧모섬의 루터>와 주경철 선생의 <일요일의 역사가> 덕분이라고 해두자.


서구 미시사의 신호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는 16세기말 이탈리아 북동부 프리울리 지방의 몬테레알레에 살던 도메니코 스칸델라(1532~1599), 다른 이름으로 메노키노라 불리는 방앗간 주인의 이단 재판 기록에서 출발한다. 1584년 2월, 메노키오는 이단적이고 불경한 발언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종교 재판소에 출두하게 된다. 어느 누구에게도 전수 받은 지식이 아니라, 독자적인 공부를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과 마리아의 처녀성 그리고 교황과 사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메노키오의 발언은 종교가 지배하던 시기에 이단으로 몰리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게다가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체제 질서가 흔들리던 시기에 정통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주장은 종교당국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진즈부르그 교수는 실제 역사와 문학을 넘나드는 아주 흥미로운 진술을 이어간다. 그의 주된 사료는 메노키오의 이단 재판 기록이다. 몬테레알레 마을 촌장과 행정관을 역임한 메노키오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지식인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글쓰기와 읽기를 할 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혁명으로 다양한 종류의 서적들이 이탈리아 민간에도 유포되고 있던 시기에, 메노키오는 <성서의 약술기>, <맨더빌 여행기>, 검열받지 않은 <데카메론> 그리고 <코란> 등과 같은 서적을 통해 자신만의 고유하면서도 독자적인 창조론과 우주관을 성립하기에 이른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삼위일체를 부정하면서 하나님은 공기며, 그리스도는 흙 그리고 성령은 물에서 온 것이라는 독특한 주장을 펼친다. 나머지 하나의 원소는 원(圓)이라는 주장을 자신의 운명에 대한 무시무시한 결정을 내릴 수도 이단 심문관 앞에서 거리낌 없이 전개한다.


메노키오의 이런 주장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던 이단 심문관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다. 그들은 1584년 메노키오의 첫 번째 재판에서 촌부 방앗간 주인의 모순과 왜곡으로 가득한 주장들을 상세한 기록으로 남겼다. 이 종교 재판 기록을 바탕으로 현대의 인문학자 카를로 진즈부르그는 다양한 상상력을 동원해서 추리소설에 버금갈 정도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메노키오가 재판 과정에서 보여주는 논리학과 수사학적 전개는 비록 자기모순적이고 텍스트에 대한 왜곡으로 논점에서 벗어난 부분들도 상당 부분 눈에 띄기는 하지만,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즈부르그는 교수는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메노키오의 사례가 당시 민중 문화와 상당부분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메노키오가 프로테스탄트 루터파와 직접적으로 접촉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기존 가톨릭의 부패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했던 루터의 영향력이 곳곳에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고위층의 엘리트 문화과 변별되는 구전 문화 전승에 입각한 민중 문화는 현실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접근보다는 물질주의(주경철 선생이 표현한 머티리얼) 혹은 유물론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다. 종교재판소에서 메노키오가 거듭해서 자신은 기독교인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이단 심문자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을 뿐 실제로는 유물론자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간이 죽으면 영도 마찬가지로 죽는다는 주장은 기독교의 영혼불멸을 부정하는 것이며, 마리아에게서 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그가 주장하는 천국의 모습은 기독교 세계의 천국이라기 보다 마호메트가 보여준 천국에 더 가까웠다. 지옥과 연옥은 사제들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 역시 루터파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아울러 세계인은 모두 자신만의 종교를 가질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점도 기독교 이단 심문자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기존 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이단 심문자들은 우리의 현실에 대입해 보면, 공안 검사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이단적 주장을 펼치는 방앗간 주인의 모습을 보면서 메노키오의 이런 주장이 기존의 종교 질서에 대한 도전이라는 자연적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편, 메노키오의 이런 주장이 독자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을 기존 질서의 수호자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 배후에 있다고 생각하고 두 번째 재판에서는 그를 고문하기에 이른다. 물론 자기 신념에 가득찬 메노키오는 시간끌기 전략과 부인으로 자신의 독자적 창조론과 우주관에 대한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자제할 수 없었던 메노키오가 동향인 다니엘 야코멜에게 “심문관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사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첫 번째 재판에서 메노키오는 보석으로 주기적인 고해 성사와 이단자를 상징하는 하비텔로를 입고, 주거지에서 벗어나면 안된다는 조건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5년이 지났지만, 독서와 사유를 통해 자신이 스스로 창조해낸 신념을 버릴 수 없었던 이 방앗간 주인은 이단으로 고발되어 다시 한 번 종교 재판정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 시절과는 달리 사랑하는 아내와 믿음직한 아들을 잃어버린 탓에 유능한 변호사를 구할 수 없었는지 혹은 같은 죄목(이단)의 재범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이번에는 종교당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처형당하고 만다.


메노키오의 종교 재판 기록이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여백에는 어김없이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상상력이 개입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지 않았을까하는. 기존의 거시사에서라면 보잘 것 없는 역사의 편린으로 치부되었을 사건 하나가 동시대의 어느 보편적 진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가정이야말로 미시사의 핵심요소라는 작가의 주장에 공감한다. 엘리트 교육을 받지 않은 일개 농민이자 방앗간 주인이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제들과 이단 심문과들을 상대로 당당하게 법정에서 철학자, 천문학자 그리고 선지자를 자처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 정말 흥미진진했다.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는 진실을 추구해 가는 과정을 그린 한편의 스릴러면서, 동시에 중세에서 근대로 가는 이행기에 벌어진 법정드라마기도 하면서, 종교개혁과 인쇄술 혁명의 가져온 한 개인의 사유의 극적 발전과 비극을 그린 그야말로 파노라마 같은 삶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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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llarosa 2017-05-18 16: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과 흔적> 힘들게 읽은 기억이 나네요. 오랜 시간이 흘러 내용이 뭐였는지, 읽을 당시에도 내공부족으로 ㅠㅜ 레삭매냐 님의 글 읽고 힘내서 저도 <치즈와 구더기> 도전해볼까 합니다. ^^;

레삭매냐 2017-05-18 17:47   좋아요 1 | URL
미시사 연구자들의 글이 좀 어려운 것 같긴 합니다. 진즈부르그의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도 읽고 싶은데 품절 책이라 구할 수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