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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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런 단편 소설은 없었다. 이것은 단편 소설인가, 아니면 장편 소설인가. 수년 전, 앨리스 먼로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슬리퍼를 꿰고는 헌책방으로 듣도 보도 못한 작가의 책을 사러 달려 나갔다. 그 후로도 앨리스 먼로의 책들을 사 모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읽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이번에 읽은 <거지 소녀>는 내가 처음으로 읽은 작가의 책이 되겠다.

 

평생 단편 소설만을 썼다는 작가, 앨리스 먼로의 작품 <거지 소녀>에는 10개의 단편이 들어 있다. 굳이 공통점을 꼽자면 모든 이야기마다 주인공 로즈가 등장한다. 작가가 나고 자란 어느 캐나다의 시골 마을 출신의 로즈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새어머니 플로의 슬하에서 자랐다.

 

전형적이긴 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드는 의붓딸과 새어머니의 갈등에서 비롯된 장엄한 매질(royal beating)’을 보라. 아마 로즈도 자신의 도발이 어떤 후과를 가져올지 모르고서 플로의 권위에 도전했던 게 아닐까. 장엄한 매질의 왕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행으로 로즈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모멸감을 느끼지만, 플로가 준비한 먹거리에 그녀의 서툰 보이코트는 그만 눈 녹듯이 무너져 버리고 만다. 아마 그런 의지박약한 모습에 로즈 자신도 놀랐으리라. 지금이야 가정폭력이 용서받을 수 없었겠지만 한 때는 서구 사회에서도 그런 모습이 있었다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로즈가 느낀 혼란스러운 감정의 배신이야말로 일상성의 이면이라는 표현으로 집약된다. 대가다운 솜씨가 아닐 수 없다.

 

저자가 타격하는 일상의 배신에 대한 기술은 남동생 브라이언의 그것과 대비해서 보다 극적인 효과를 연출한다. 꼬마 소년은 미래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의 누이들은 그렇지 못했노라고 앨리스 먼로는 조용하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로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홀로 서야만 한다. 일찍이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듯이 자신만의 공간을 그리고 현대 여성으로 생존하기 위해 고정 수입이 보장되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한편, 로즈는 아버지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길 원하면서도 그의 생물학적 유전자가 전달해준 품성이라는 DNA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최종적 진실을 받아들이라는 양가적 감정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기차여행에서 자신을 목사라고 소개한 남자에게 당한 성추행에 대한 로즈의 경험담은 오싹할 지경이다. 그전에 사제복을 입은 사람을 조심하라는 새어머니 플로의 경고를 로즈는 한쪽귀로 듣고는 무심코 흘려버린다. 사제복이나 목사 차림새는 악당들의 범죄행위로부터 그들을 가려주는 철저한 카무플라쥬의 코드로 사용된 게 아니었을까. 때로는 꼰대들의 조언이 유효한 것으로 판명이 될 수도 있구나 싶다.

 

그렇게 자란 거지 소녀는 어찌어찌해서 대학에 진학했고, 자신의 피를 팔아 번 돈으로 신발을 구입하고, 아이스트림선디를 사먹는다. 로즈를 동의어처럼 따라다니는 가난은 그렇게 궁핍했노라고 증언한다. 미래의 남편 패트릭 블래치퍼드는 로즈를 사랑했단다. 그들은 계급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힘으로 결혼은 했지만, 결혼생활을 영속시킬 수는 없었다. 로즈는 우리가 흔히 텔레비전에서 보는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비상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거지소굴 같은 배경과 피를 더 팔아 산 어울리지도 않는 앙고라 스웨터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니 로즈와 패트릭에게 이혼은 불가피한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로즈는 이혼을 기점으로 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이해한 진정한 자아를 지닌 여성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렇다면 패트릭과의 이별은 로즈에게 축복이었던 것일까. 일견 위태로워 보이는 모험도 마다하지 않는 투사로서의 이미지가 거지 소녀에게서 솟아나기 시작한다. 아니 도대체 앨리스 먼로는 이런 놀라운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앨리스 먼로는 연작 소설집 <거지 소녀>의 주인공 로즈가 산골 출신 철부지 소녀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대가다운 스타일로 잡아낸다. 패트릭과 이혼하고 딸 애나까지 거느린 로즈는 갑자기 내린 폭설로 도로가 봉쇄된 상황에서도 연인 톰과의 밀회를 기대하며 전력투구한다. 아쉽게도 그녀의 시도는 번번이 무산된다. 연애사업에서 로즈의 거듭된 실패는 하나의 연단의 기회로 작용한다. 대학에서 연기를 가르치는 교수가 된 로즈는 어느 파티에서 자신의 텃밭에 관심을 보이는 매력적인 강사 사이먼을 만나기도 한다. 로즈는 주위의 남자사냥꾼이냐는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범하게 그와 원나이트스탠드로 직행한다. 사이먼과의 재회를 애타게 기다리던 로즈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은 사이먼을 잊기 위해 아예 근거지를 떠나는 모험을 감행한다. 나중에 독자가 알게 되는 최종 진실은 결국 비극이다.

 

자 그렇다면 다음에 로즈를 기다리고 있는 주제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죽음이다. 여장부로 한 세대를 군림하면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살았던 새어머니 플로에게도 어김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왔다. 아마 치매에 걸려 총기가 떨어진 플로를 카운티 홈, 즉 요양원에 보내는 일련의 과정은 참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메멘토 모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는 다는 걸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꾸역꾸역 살아가는 게 아닐까 우리는. 한 때 허영을 삶의 무기로 삼았던 로즈처럼 우리는 행복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을 품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곧 플로가 직면하게 될 보이는 것도 재미난 일도 없는 일상을 나라면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가끔 생각해 보면, 존재하지 않게 될 두려움보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두려움의 간극에 대한 삶의 무게가 견딜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거지 소녀>를 읽으면서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하고 빛나는 삶의 진실을 과연 내가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그것은 아무래도 남의 생의 숙제지 싶다. Life Goes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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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9-04-28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두기만 했는데 빨리 읽어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