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부름 - 십자군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피터 프랭코판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그동안 십자군원정의 발단은 동방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소스의 긴급한 요청을 받아들인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10951127일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말로 성지회복을 위해 서방 기사들을 선동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크로드 세계사>로 기존의 관점과는 다른 시선의 역사서술을 보여준 옥스퍼드대학 피터 프랭코판 교수는 비잔티움 역사의 전문가로 종래의 서방 라틴 세계의 관점이 아니라 동방의 관점에서 새로운 십자군 이야기를 선사한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군인 출신 황제 알렉시오스가 통치하던 1090년대 초반 비잔티움 제국은 사방에서 제국의 심장부인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침략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제국의 서방에서는 노르만인들이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를 비롯한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했고, 북서쪽에서는 페체네그족의 끊임없는 공격이 계속되고 있었다. 진짜 위기는 제국의 동부로부터 왔는데 투르크족이 아나톨리아와 소아시아 일대를 휩쓸었다. 군인 황제답게 군사적 대응을 하다 보니, 재정위기까지 겹치게 되었다. 젊은 장정들을 죄다 현역 로 징집해서 제국을 침입하는 이민족들과 상대하다 보니 정작 농사를 지을 인원이 부족했고 그것은 바로 곡물 가격폭등으로 연결되었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계속도는 원정에 필요한 재정확보를 위해 정교 사원과 수도원에까지 세금을 과세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을 떠받드는 하나의 축인 종교계와도 대결하게 되었다. 제위를 찬탈하면서 성당을 약탈하고, 수도사들을 학살한 전과도 한몫했다. 게다가 과세를 위해 관리들이 날조까지 마다하지 않았으니, 제국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중해의 중요한 거점인 크레타와 키프러스에서는 반란의 기미까지 보였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알렉시오스는 서방에 SOS를 날렸다는 게 지금까지의 정설이다.

 

한편 서방의 라틴 세계 역시 교권과 황제권의 대결로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초반에는 중세를 장악한 교황의 우세로 판세가 기우는 것처럼 보였지만,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무력을 바탕으로 이탈리아의 교황을 제압하고 대립교황을 내세워 교황권의 약화를 도모했다. 즉위 초기 클레멘트 3세에 비해 세가 약했던 우르바누스 2세는 필리오케와 발효된 빵을 성찬식에 사용할 것인가로 촉발된 교리 논쟁으로 서방교회에서 대분열로 떨어져 나간 동방교회를 끌어안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는 기본적으로 중요한 전략거점인 니케아와 타르수스 그리고 안티오크를 투르크족으로부터 수복하기 위해 서방 세계에 요청한 기사들을 용병으로 쓸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사실 동방의 정보는 비잔티움 제국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도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사실을 교묘하게 비튼 선전과 선동은 서방 기독교 세계 전사들을 자극하는데 주효했다. 교황 우르바누스가 알렉시오스가 요구하는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한 라틴 기사들을 효과적으로 모집하기 위해 성도 예루살렘의 회복을 모토로 삼은 종교적 프로파간다는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로 분열한 교회의 통합이라는 대의도 한몫했다.

 

십자군전쟁을 기록한 서방 연대기 저자들은 거의 한 목소리로 알렉시오스를 평가절하고 매도했다. 하지만 8만 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세 최대의 원정이 진행되는 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가 원정군을 위해 다채로운 방식의 외교술과 군수물자의 보급을 진행했다는 점을 볼 때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문제는 모든 것이 황제가 의도한 대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교황이 계획한 성지 회복이라는 거대한 목적 아래 기사들의 참전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구체적인 군사계획은 사실 전무했다. 그 점에 대해 저자는 일단 십자군 부대가 황제의 영토에 들어오면 자신의 지휘 아래 움직일 거라는 판단 아래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고 가정한다. 가장 유력한 부대를 구성한 툴루즈 레몽을 필두로 부용의 고드프루아 그리고 알렉시오스의 숙적 로베르 기스카르의 아들 보에몽 같은 역전의 용사들에게 충성 맹세를 요구하며 자신의 봉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황제에게 기사들은 제각각 다른 의도에서 때로는 수용하기도 하고, 레몽처럼 끝까지 버티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런 서로 이해관계가 각기 다른 기사단 부대를 통솔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은자 피에르가 지휘한 민중 십자군 부대였다. 순수한 의도에서 자발적으로 구성된 민중 십자군은 알렉시오스가 미처 계산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들은 알렉시오스의 동방 탈환 작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짐이 되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격렬한 증오로 민중 십자군 부대가 지나가는 각처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학살이 벌어졌고, 비잔티움 제국 내의 같은 기독교를 신봉하는 제국의 신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약탈을 감행했다. 이런 오합지졸 같은 부대의 존재로 이미 십자군전쟁의 대의는 이미 상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소아시아 전투에서 일시적 승리를 거두기도 하지만, 본격적으로 정예 투르크군과 상대하면서 초전에 박살이 나고 자신들이 저지른 학살극의 재현을 목격하게 된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한 정예 십자군부대는 투르크와의 전투에 나서게 된다. 첫 번째 목표는 바로 난공불락으로 알려진 니케아였다. 방어에 나선 투르크인들은 오랜 준비로 농성에 자신이 있었지만, 십자군 가운데 보에몽으로 대표되는 노르만인들이 그동안 개발한 혁신적이고 탁월한 공성 능력에 대해서는 미처 몰랐다. 십자군의 분투와 알렉시오스의 화전양면 전략으로 결국 투르크 수비부대는 항복한다. 뒤이은 도릴라이온 전투에서 보에몽이 이끄는 부대의 활약으로 초반의 열세를 딛고 대승리를 거두면서 소아시아 전역에 십자군의 위명이 퍼지기 시작했다. 한편, 십자군 전사들은 투르크 전사들이 자신들만큼이나 전장에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됐다. 이런 강력한 적을 상대로 이후 전개된 안티오크 공략전의 성패는 십자군전쟁의 분수령이었다.

 

한편, 알렉시오스는 내부 반란에 대한 우려 때문에 소아시아 깊숙이 진격하는 십자군 부대의 원정에 동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대로 소아시아 수복전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보에몽과 그의 조차 탕크레디와 달리 자신에게 한 충성맹세를 성실하게 이행하던 고드프루아의 조카 보두앵이라는 천상의 파트너를 대리인으로 삼게 된다. 영악한 비잔티움 제국의 관리들은 십자군 부대를 성도 예루살렘으로 바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필요한 전략거점들을 하나씩 수복하면서 남하하도록 유도했다. 이런 전략이 비잔티움 제국과 십자군부대 쌍방에 유리할 수도 있었겠지만, 성도 탈환이라는 십자군전쟁의 대의가 계속 변질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니케아보다 훨씬 더 강력한 방어시설과 준비를 자랑하던 안티오크는 결국 10986월 함락되었다. 십자군 정예부대들은 안티오크 공략전에서 엄청난 병력 손실과 물자 보급의 부족으로 곤경에 처하기도 했지만 결국 성을 함락시키고 곧바로 당도한 모술의 지사 카르부가와의 압도적인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여타 다른 도시들과 달리 황제의 관리들이 배치되지 않았고, 본국에서 이복동생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린 보에몽은 비잔티움 제국 동방의 최대 도시 안티오크를 바탕으로 독립을 획책했다. 안티오크 정복 후, 자신감에 찬 십자군에게 성도 예루살렘의 함락은 시간 문제였다.

 

비잔티움 전문가 피터 프랭코판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십자군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알렉시오스 황제였다. 그의 딸인 안나 콤니니가 기술한 <알렉시아드>를 온전하게 믿을 수 없지만, 황제에 대한 매도와 악의로 가득한 <프랑크인의 행적> 같은 연대기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차 십자군 원정의 실패 후 희생양을 찾는 서방인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매도되고 폄하되었지만, 알렉시오스 황제야말로 십자군전쟁의 숨은 공신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황제의 의도는 붕괴 직전까지 몰린 자신의 제국을 다시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서방의 기사들을 동방으로 불러 모으는데 성공했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보에몽과 탕크레디 같은 전사들을 이용해서 제국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한 마디로 황제의 십자군전쟁 흥행은 대성공이었다는 결론이다. 피터 프랭코판이 다룬 1차 십자군전쟁에 대한 서사시인 <동방의 부름>은 알렉시오스 1세 콤네소스를 위한 21세기 신원이다.

 

*** 그나저나 왠 놈의 오탈자가 이리도 많은가. 출판사는 좀 각성하라. 그 이유로 별 하나는 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19-01-22 22: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좋은 책 번역에 오탈자가 출판사가 대충 검토 했나봐요

십자군 원정 쩐의 전쟁 분열된 교회의 영역 다툼
저자 피터 프랭코판 관점이 새롭네요. ^.^

레삭매냐 2019-01-23 10:08   좋아요 1 | URL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비잔티움 제국의 사료
를 바탕으로 전개한 서사가 마음에 들었습
니다.

아마추어가 봐도 티나는 실수를 출판사에서
는 못보았는지 거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