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소나타
로즈 트레마인 지음, 우진하 옮김 / 문학사상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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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 트레마인,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데 필력이 오래 되셨는지 비블리오그래피에 작품들이 상당하다. 국내에는 아마 처음 소개된 작품으로 보인다. 여름에 읽기 좋은 책 추천을 어디선가 보고 도서관에서 일단 빌렸는데, 왠지 사서 읽어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8월의 첫날 주문장을 날렸다. 그리고 이틀 묵혀서 오늘(8월 3일)부터 읽기 시작했다. 나의 예상은 빗나가는 법이 없구나. 예전에는 책에 메모나 밑줄긋기 이런 건 절대 하지 않았는데 산 책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관대해지기로 했다. 포스트잇도 붙이고, 메모도 달고 밑줄도 쫙쫙 그으면서 말이다.

 

소설 <구스타프 소나타>의 주인공은 당연히(응?) 구스타프 펠러다. 전후 스위스의 가상도시 마츨링헨에서 에멘탈 치즈 공장에서 일하는 싱글맘 에밀리에와 같이 산다. 아버지 에리히는 경찰관으로 근무하다가 전쟁 중에 돌아가셨다. 어머니 말로는 유대인들을 돕다가 돌아 가셨다고 하는데, 가난과 궁핍에 시달리는 에밀리에는 뒤에 등장할 우리의 조숙한 구스타프의 절친 안톤 츠비벨(독일어로 양파)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해 반유대주의의 가정적 실천이라고 해야 할까.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에서 이미 그려진 가난과 궁상에 대한 이미지가 세련되게 재현되는 느낌이 들었다.

 

가장 스위스적인 모습으로 살라는 엄마가 자신의 아들에게 보충수업을 해주시는 막스 호들러 선생님에서 보충수업비를 내지 않는 장면, 꽃가게 일자리를 알선해 주려는 안톤의 어머니에게 거지들이 무슨 선택이 있겠냐며 비아냥거리는 모습은 정말 마음에 안들었다. 한 마디로 가장의 부재와 가사의 궁핍을 초래한 원인제공자에 대한 증오라고 해야 할까. 어머니 에밀리에가 폐렴에 걸려 구급차에 실려 가자, 홀로서기를 위해 준비하는 구스타프의 모습은 정말 슬펐다. 거의 동시에 진행되는 피아노 영재 안톤의 무대 공포증 징크스도 그만큼 안타까웠고. 그러니까 구스타프에게 아버지의 부재가 가져다준 가난이 불행의 근원이었다면, 상대적으로 유복한 가정의 안톤에게는 자신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었던 무대공포증이 문제였던 셈이다.

 

로즈 트레마인은 그렇게 구스타프와 안톤에 대한 소개를 마무리한 뒤, 과거로 독자들의 시선을 돌린다. 그러니까 구스타프의 엄마 에밀리에가 어떻게 에리히를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게 되었는지 말이다. 바젤 출신의 에밀리에는 그저 소박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구스타프 같은 아이를 낳아 기를 꿈에 젖어 살았지만, 에리히가 시시각각 전쟁 국면으로 돌입하는 유럽의 정치상황을 고민하고 있었다. 임신 중이던 에밀리에를 밀었다가 아이가 사산되는 비극이 벌어지면서, 부부 사이는 영원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부서장 에리히가 서장 로거 씨가 부재 중인 동안, 히틀러의 박해를 피해 국경을 넘어온 유대인들에게 불법서류를 발급해 준 것이 들통나 해고되면서, 펠러네 집안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러니까 에밀리에의 반유대주의는 그녀로서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시간은 다시 점프를 해서 현재로 이동한다. 한 시절 피아노 영재를 꿈꾸던 안톤은 학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그리고 어린 시절 꿈도 없이 자란 구스타프는 펠러 호텔의 주인이 되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강조한 대로, 절제와 겸손 그리고 균형을 중요시하는 스위스인이 되어 객실 12개 짜리 자신의 호텔을 찾는 손님들에게 그야말로 가족같은 분위기의 편안함을 제공하는 멋진 호텔리어가 되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흘러갔으면 좋았으련만, 로즈 트레마인은 한 차례 평지풍파를 준비한다. 먼저 펠러 호텔에 찾아온 영국 대령 출신 애슐리 노튼 씨가 있었다. 그는 전쟁 당시, 영국군으로 베르겐-벨젠 수용소를 해방시키는 가운데 사진사로 현장을 기록하는 임무를 맡았었다. 당시의 비극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게, 그의 망막과 기억 속에 사진 같은 영상들을 현상시켰다. 구스타프 역시 유대인 구조에 나섰다가 비명횡사(?)한 아버지 에리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대령으로부터 더 늦기 전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을 찾아 보라는 조언을 듣는다. 그 와중에 구스타프는 독자들은 2부를 통해 알고 있던, 아버지의 죽음에 관련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도대체 누가 에리히가 스위스 연방정부의 방침에 위배되는 위조서류를 발급한 사실에 대해 스위스 법무부에 누설을 했는지도. 어쩌면 이 미스터리야말로 정말 궁금한 점이 아니었을까.

 

다음 중년의 위기는 제네바의 한스 히르슈라는 음반업자의 꼬임에 넘어가 평생을 살아온 고향을 등지고 떠난 안톤에게 들이닥친다. 자신이 가르친 영재가 세계무대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본 50대의 안톤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음반 취입을 미끼로 자신에게 접근한 한스의 부추김에 지난 세월을 후회하면서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떠난다. 자기파멸적 삶으로 치닫는 안톤에게 구스타프는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구스타프 소나타>는 1938년 스위스의 장크트갈렌의 경찰 서장파울 그뤼닝거(1891~1972)의 실화를 모티프로 삼은 소설이다. 소설에서처럼 파울 그뤼닝거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불법적으로 구조했다는 혐의로, 경찰서장에서 직위해제되고 해고되었다. 물론 연금지급도 없었고, 죽을 때까지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어려움 가운데 평생을 살았지만, 한 번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소설에서처럼 전쟁 중에 죽은 건 아니었다. 물론 로거 씨의 부인 로티와의 로맨스도 작가의 상상력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유대인도 아니면서 순수하게 인도적인 차원에서 유대인을 돕겠다는 선의에서 출발한 그뤼닝거의 의로운 행동에 대한 보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스위스 연방정부의 방침대로 행동했다면, 그뤼닝거에게 어떤 피해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했고, 그가 감수해야 할 고통은 심대했다.

 

한편 소설에서 에밀리에가 안톤과 츠비벨 가족에 보이는 적대감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유대인 난민협회에서 어느 정도 도움을 제공했자면 그녀의 반유대주의 감정은 훗날 그 정도로 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핑계거리가 너무 좋지 않은가. 당시는 전쟁 중이었고, 히틀러의 막강한 전차부대가 중립국 스위스를 언제 짓밟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라는 유용한 방패막이도 있지 않았던가. 솔직히 스위스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던 많은 수의 유대인들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밀려온 동포들에게 온정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던 게 사실이 아니었던가. 누가 옳고 그른가를 다투기에 앞서, 과연 그런 상황에서 어떤 양심의 호소에 따를 것인가는 정말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평생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어머니 에밀리에에게 구스타프는 보답 없는 사랑의 실체를 알려 주고 싶었지만, 그에게 남은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년시절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구스타프에게 온정의 손길을 내밀어준 이들이 바로 유대인 츠비벨 가족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왜 에밀리에는 그들의 도움을 선의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 어쩌면 에리히의 선행이 다른 방식으로 펠러 가족에게 보답해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던 걸까. 마지막에 평생 친구 안톤을 돕기 위해 구원의 길에 나서는 구스타프의 모습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에리히의 모습이 오버랩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구스타프 소나타>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그런 소설이었다. 실제 의인이었던 파울 그뤼닝거의 삶에 로티와의 불륜이라는 코드가 적합했는가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 들었다. 소설적 구성을 위해 어쩔 수 없었겠지만, 과연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까 싶다. 결말 부분에 가서 김이 좀 빠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모든 게 다 완벽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정과 보답 없는 사랑에 대한 <구스타프 소나타>는 나에게 참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뱀다리] 소설에 등장하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이 궁금해서,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이 연주한 음반을 구해서 들으면서 리뷰를 썼다. 건반 위에서 그야말로 한 마리 송어가 통통 튀는 듯한, 격정이 느껴지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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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8-06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 찾아내고 꼼꼼하게 짚어주시는 레삭매냐님 사랑합니다....

레삭매냐 2018-08-06 11:28   좋아요 1 | URL
국립 중앙도서관 여름 추천 도서로 읽은 걸요...

고수들이 즐비한 독서강호에서 그저 다른
이들의 초식을 흉내낼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