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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7월
평점 :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8/0805/pimg_7234051031974891.jpg)
뭐야 왜 이렇게 재밌는 거지? 어제(8월 3일)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한 이언 매큐언의 신간 <솔라>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고 그야말로 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래리 고닉의 미국사부터 (순전히 분량 때문에) 먼저 읽었다. <솔라>는 후일을 도모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폭염이 한풀 꺾였나 싶을 정도로 집 앞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래 <솔라>를 조금만 읽자는 기분으로 책장을 펴들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렇게 재밌을 수가 있나. 기존의 진지근엄한 이언 매큐언의 스타일과는 다른 흥미진진한 요소들로 가득한 게 아닌가. 재밌어서 단박에 절반을 읽어 내렸다.
표지에 보이는 것처럼 무언가 싸이파이 소설이 아닌가 싶은 소설 <솔라>는 노벨상을 받은 이론물리학자 마이클 비어드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무려 5번의 결혼 생활 중인 50대 비어드는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이자 매력적인 30대 아내 퍼트리스를 놔두고, 5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11번째 바람을 피웠다가 당찬 아내에게 망신을 톡톡히 당한다. 그러니까 니가 바람을 피워, 나도 맞바람으로 대응하겠다며 얼마 전 집수리를 맡긴 복근이 탄탄한 남자 로드니 타핀과 맞바람 질에 나선 것이다. 항상 버스가 출발한 다음에 후회는 밀려오는 법, 오쟁이진 남자 비어드 씨는 그제서야 아내 퍼트리스가 자신에게 과분한 여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보다 훨씬 어리고 물리적으로 강력한 타핀과 맞서 싸울 생각은 전혀 없다. 아니 한 번 그런 시도를 했다가 뺨 싸다구를 맞고 혼이 나갈 뻔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비어드의 전문 영역인 물리학은 바로 그런 실질적인 인간과의 물리적 싸움에서 뒤로 물러설 줄 아는 지각을 제공하는 원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8/0806/pimg_7234051031975507.jpg)
그런데 비어드의 자수에 따르면 자신의 노벨상 수상 이론인 비어드-아인슈타인 융합은 기존 아인슈타인의 논리에 올라탄 것이라는 것이다. 한 때는 잘 나가는 이론물리학자였을 진 몰라도 장강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를 순 없는 법. 실제로 정부의 보조를 받아 운영되는, 자신이 대표로 있는 센터에서 일하는 젊은 포스닥 직원들이 말하는 최신 이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을 옥죄는 주변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비어드는 기후변화가 지구온난화에 미치는 영향을 몸소 체험한다는 핑계로 북극에 가까운 스피츠베르겐 행에 도전한다. 스노모빌을 타고 가던 중에 오줌을 누겠다가 나섰다가 봉변(!!!)을 당하는 장면은 정말 이언 매큐언식 블랙유머의 최고봉이었다. 물론 이런 에피소드들은 2000년 1부에 후미에 등장하는 일대 사건을 위한 준비운동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누군가 한 명 죽어 나가야 이야기가 끝날 판이다.
2005년, 우리의 주인공 마이클 비어드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현재 문명의 유지와 가난으로부터 해방을 위해 미래의 세대에게 꼭 필요한 과제는 바로 무한공급이 가능한 에너지원의 창출이다. 더블 오쟁이 진 비어드는 마지막 아내 퍼트리스와 바람난 톰 올더스가 자신에게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광전효과를 이용한 인공광합성이라는 새로운 먹거리를 개발한 비어드는 수년 전의 재난으로부터 벗어나 꽃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시나 오산이었다. 이번에는 낸시 템플이라는 과학자에게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따른 신우생학적인 발언을 했다가,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신나치 교수’로 낙인이 찍혀 버린 것이다. 자신을 반대하는 시위대 중에 한 명이 던진 썩은 토마토를 받아, 그대로 언더핸드로 던져 얼굴에 적중시키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오, 맙소사! 노작가에게 이렇게 격렬하면서도 냉소적인 유머를 창출해낼 능력이 있었단 말인가. 놀랍다 놀라워. 현장에서 경찰에게 긴급체포되는 장면이 미디어의 도움으로 전 세계로 타전되면서 비어드의 악명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물론 그것도 잠시였을 뿐, 또다른 스캔들로 비어드의 스캔들은 대중에게 망각의 재료가 되었을 따름이다.
비어드의 성과 음식에 대한 탐닉은 궤도를 벗어난 열차처럼 폭주하기 시작한다. 베를린 테겔공항에서 연설을 위해 부리나케 런던으로 돌아온 우리의 교수님은 오래 살기 위해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지상과제를 망각해 버리고 그만 감자칩의 유혹에 넘어가 버렸다. 문제는 열차 안에서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서슴지 않고 집어먹은 감자칩 봉지가 바로 타인의 것이었다는 점이다. 나에게 비어드는 마치 한 명의 빼어난 저글링 선수처럼 보인다. 자신의 분야에서 만들어진 스스로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자,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접어든 나이에도 성욕과 식욕을 절제할 줄 모르는 남자 그리고 새로운 여자친구로부터 처음으로 아빠가 될 예정이라는 선언에 경악하는 남자의 모습 사이에서 쉴 새 없이 공을 허공으로 주고받는 그런 모습 말이다.
이언 매큐언이 8년 전에 발표한 소설 <솔라>에서 그가 보여주는 걸출한 문학적 오케스트레이션은 정말 대단했다. 자신의 평생을 좌우할 노벨물리학상을 바탕으로 삼아, 유년시절 바람난 어머니의 부재를 보상이라도 하듯 수많은 여성들을 꾀고, 음식에 탐닉하는 캐릭터 마이클 비어드는 확실히 매력적이다. 비어드가 거둔 성공에서 처음부터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의 아이디어에 무임승차하고, 나중에는 타인의 아이디어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포장해서 신에너지를 개발해서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거창한 꿈에(그의 모습은 마치 에너지 메시야처럼 보인다) 부풀어 미국의 사막으로 향하지 않았던가. 이미 매력적인 댄스 스튜디오 운영자 멜리사 브라운에게 임신 사기를 당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이제 전락(轉落)일 뿐이다.
대가가 준비한 전락의 요소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진행된다. 미국 현지에서 새로 만난 미국 애인 달린과 이제는 진짜 자신의 아이 엄마가 된 멜리사의 아내가 되겠다는 경쟁, 법정에서 16년형을 받은 전직 건설노동자 로드니 타핀이라는 존재의 위협(그는 비어드가 모르는 비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도용한 아이디어의 원저자가 제기한 법정 소송에 이르기까지 비어드의 추락을 위한 무대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준비되었다. 우리의 스타 과학자는 과연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이언 매큐언은 현재에서 출발해서 과거를 오가는 플래시백 구성으로 성공의 정점에 오른 한 인간의 실체 해부에 나선다. 존 밀턴을 연구했던 첫 번째 아내와의 실패한 결혼 생활은 물론이고, 언제나 자신의 삶(심지어 불륜까지도)에 뻔뻔할 정도로 당당했고 매력적인 여성들과 지속적인 애정전선을 향유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어떤 책임도지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했던 한 남자의 초상의 진실은 허무 그 자체다. 게다가 그의 성공의 비밀 또한 초라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이언 매큐언은 바로 그 허술한 지점을 노리고 예리한 타격을 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세속에서 추구하는 그런 성공과 사적 욕망이라는 것이 어느 한순간 무너져 버릴 수도 있는 신기루 같은 것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이번 <솔라>까지 해서 국내에 소개된 이언 매큐언의 모든 책들을 읽었다. 그런데 이번 책처럼 그야말로 손에서 책을 떼지 못하고 폭염 속에서 매달릴 정도로 매력적인 책이 있었던가? 아니 아마 <솔라>가 유일했던 것 같다. 특히나 그가 소설에서 구사하는 특유의 블랙유머와 냉소주의는 정말 대단했다. 아니면 저자의 그런 부분이 나의 독서 취향에 딱 맞아 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매력적인 소설을 읽느라 8월의 첫 번째 주말의 밤들을 그야말로 하얗게 세웠다. 너무 피곤하다. <솔라>를 부지런히 읽느라 각성된 뇌활동은 멈출 줄을 몰랐고, 내친 김에 로즈 트레마인의 <구스타프 소나타>까지 달리게 만들었다. <솔라>는 이언 매큐언 최고의 걸작은 아닐지 몰라도, 최고로 재밌는 작품에는 분명하다.
[뱀다리] 책을 다 읽고 나서 구글링으로 <솔라>의 다른 표지를 찾아냈는데, 이게 더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