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교육
로맹 가리 지음, 한선예 옮김 / 책세상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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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계 유대인으로 태어나 조국 프랑스를 위해 싸운 2차세계대전 참전용사, 외교관 그리고 문인으로 삶을 마감했던 로맹 가리의 데뷔작을 읽었다. 개인적으로 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에 대항해서 싸운 레지스탕스 운동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로맹 가리에 전쟁 중에 집필했다는 소설은 나에게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역시 자기가 관심이 있는 주제를 다룬 책을 읽을 적에는 놀라운 집중력이 발휘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가 있었다.

 

<유럽의 교육>은 히틀러의 독일군이 전 유럽을 장악하고 있던 1942~43년의 폴란드의 어느 숲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열네 살 먹은 얀 트바르도브스키(야네크)는 나치 독일군의 야만적인 침탈행위에 분연히 대항하다가 목숨을 잃은 아버지가 몰래 만들어준 은신처에서 인디언 전사 와인투의 글을 읽으며 빨치산(partisan)의 꿈을 꾼다.

 

전격전(blitzkrieg)으로 독일에 참담한 패배를 당한 폴란드인들은 숲을 거점으로 삼아 독일점령군에게 대항하기 시작한다. 야네크는 장렬하게 산화한 아버지로부터 받은 브라우닝 권총을 가지고, 야블론스키가 이끄는 일단의 산사람들무리에 합류한다. 폴란드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볼가강 언저리의 스탈린그라드에서 벌어진 영웅적인 저항과 폴란드의 빨치산 나데이다의 신출귀몰하는 신화는 점령군의 폭력에 떠는 폴란드 민중의 한줄기 희망으로 다가온다.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언제 독일군의 총탄이 그들의 가슴을 관통할지 모르는 극악한 상황 속에서, 어린 야네크는 야블론스키의 심부름을 하면서 듣게 된 음악, 특히 프레데릭 쇼팽을 사랑하게 된다. 쇼팽의 조국이 폴란드라는 사실에서, 작가가 쇼팽의 피아노곡 폴로네즈를 고른 것이리라. 로맹 가리는 전쟁이라는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희망을 노래한다.

 

<유럽의 교육>에는 야네크가 빨치산 생활 도중에 만나게 된 대학생 출신의 아담 도브란스키가 애지중지하는 공책에는 소설 속의 소설이 등장한다. 나치의 천년제국이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시기에, 빨치산 나데이다의 신화만큼이나 전 유럽에서 나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가 결국 승리하리라는 신념을 불어 넣어주는 도브란스키의 메시지는 허무맹랑하게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로맹 가리가 레지스탕스 활동을 통해 들려주는 관계는 참으로 다양하다. 폴란드 민중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독일에 협력하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증오하며 폐병으로 죽어가는 빨치산 아들, 스탈린그라드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치른 장군 아들을 둔 늙은 제화공 출신 하사관 아버지, 빨치산과 독일군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다가 그만 사랑하는 아내를 점령군 경찰에게 빼앗겨 버린 농부, 30살이나 어린 아내를 둔 변호사 선생의 자살 트럭 공격, 사랑하는 두 딸을 잃어 미쳐버린 사나이의 절규 등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레지스탕스 활동에 나서게 된 사연들이 소개된다. 그네들의 사연을 읽으면서, 왜 이 책이 처음에 나왔을 때 원제가 <분노의 숲>이었는지 바로 깨달았다.

 

빨치산 나데이다는 폴란드 민중 내부로부터의 신화다. 그는 절대로 독일군에게 잡히지 않으면서 가장 어려워 보이는 시간과 공간에서 빨치산 전사들을 위로한다. 그는 저항군의 신부일 수도, 노벨화학상을 받은 천재 과학자일 수도, 전직 레슬링 선수일 수도 있다. 그 누구도 전설적인 인물 나데이다가 될 수 있다는 변화무쌍한 신화는 독일군의 선전과 폭력에 대항하는 민중의 분노와 힘을 이끌어낸다. 나데이다가 내부로부터의 저항의 상징이라고 한다면, 스탈린그라드는 외부에서 그들을 지원하는 상징이다. 훗날 2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꾼 것으로 간주하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얼마나 레지스탕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는지 로맹 가리는 생생한 기록으로 독자에게 환기시켜준다.

 

어쨌든 평화로운 세상이었다면 유럽의 정상적인 문명의 세례를 받았을 야네크와 조시아는 전쟁의 포화 가운데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 버렸다. 그들에게 당장 허기와 추위를 피하고, 살아남는 것 외에는 다른 목표가 없다. 생존이 최우선 목표인 다른 아이들에게 유대인 분더킨트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을 듣기 위해 자신의 생명 같은 감자 자루를 내던지는 야네크는 진귀할 존재일 따름이다. 로맹 가리는 전쟁을 통해 소년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야네크의 뒤를 쫓는다. 야네크는 그렇게 사랑을 배우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법을 알게 되고, 또 음악을 사랑하게 된다. 처절한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 작가가 말하는 선한 유럽의 교육은 그렇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느 작가의 데뷔작이 이렇게 경이적인 혜안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과연 공쿠르 상을 두 번이나 수상할 만한 작가의 필력이 데뷔작에서부터 그 아우라를 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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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8-04-14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군요!

레삭매냐 2018-04-15 23:31   좋아요 0 | URL
올해 숙제 같은 로맹 가리의 책들을
읽어야 하는데 잘 될 지 모르겠습니다.

유부만두 2018-04-16 08:12   좋아요 1 | URL
전 ‘새벽의 약속’ 읽고 울었어요;;;;;

레삭매냐 2018-04-16 09:16   좋아요 0 | URL
완독이 자꾸만 실패하는 책이 몇 권 있는데
제게는 그런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새벽의 약속>
입니다.

로맹 가리 이야기하다가 난 언제나 이 책을 읽게
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작년에 세번째로 읽기 시작했는데 못 다 읽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