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쓴 글을 다듬고 정리하여 책 한 권으로 만들어 지인들과 나누고픈 마음이 있다. 물론 출판이나 인세 또는 유명세를 보는게 아닌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한 작은 희망인데, 어제 마침 조금 일찍 업무를 마치고 시간을 낼 수 있어 프롤로그를 써봤다. 간만에 평일, 해가 밝은 시간에 시원한 카페에 앉아 아이스모카를 마시면서 한 시간 정도 끼적거리다 무라카미 류를 읽다가 하면서 작업한 글이다.
프롤로그: 태초에 책이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 그러니까 내 기억이 닿는 가장 먼 과거의 순간부터 책은 늘 내 옆에 있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모습들을 떠올려보면 단편적인 몇 개의 장면들이
영화화면처럼 그렇게 내 눈앞에 펼쳐진다.
5살 즈음에 인천 송림아파트에 살던 시절, 5시가 조금 넘은 시간까지 놀이터에서
트럭장난감을 갖고 놀다가 가을 무렵의 저녁 해를 등에 지고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가던 모습,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 사는 이모가 보내온 예쁜 구두를 신고 신나게 계단을 걸어 내려가다가 한바탕 구르고 울던 모습, 그리고
조금 더 나중에 살던 도화동의 단독에서 따끈한 구들장에 배를 깔고 엎어져서 책을 보던 내 모습이 그들이다. 어렵던 시절에도 책에는 돈을 아끼지 않던 부모님 덕분에 우리 집에는 늘
책이 가득했는데, 서울의 모 백화점에서 팔던 월트디즈니 동화전집과 카세트 테이프는 그 당시로는 드물게
책과 테이프 모두 국어본과 영어 원문이 같이 들어 있었던 것이 기억에 남아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한참을 그렇게 집에서
사주는 책을 아무런 생각이 없이 읽었는데,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한국/세계위인전기
전집, 백과사전세트, SF전집과 함께 청아출판사에서 나온
이야기 세계사, 중국사, 그리고 한국사를 열심히 읽던 모습이
대략 중학교 2학년 무렵까지의 내 독서편력이다. 그러다가 3학년 때부터는 김용의
무협지를 무려 점심값을 아껴가면서 한 권씩 모으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내게도 독서의 정체성 같은 일종의
자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시기부터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점을 들려 책을 구경하고 갖고 싶은 책은 돈을 모아서 한 권씩 구입하곤 했었다. 선인재단의 가장 꼭대기에서 교문까지 걸어서
내려오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10분 정도, 거기서부터 제물포
지하상가를 통과해서 버스 역까지 내려오는 시간은 15분 정도였고, 그
중간에는 오락실, 분식집, 술집, 당구장과 함께 서점들도 여럿 있었는데, 구매할 때에는 가급적이면
정책적(?)인 차원에서 구매는 당시 전교조 활동을 하다가 실직한 선생님께서 운영하던 서점에서 하려고
노력했다. 그 서점에서 사 읽은
책들 중, 니벨룽겐의 노래, 서부전선 이상없다, 그리고 나의 투쟁은 지금도 내 책꽂이에서 쉬고 있다. 물론 부모님 몰래 사서 숨겨놓고 읽던 공작왕과 북두신권 해적판도 잊을
수 없다. 집에서 사주지 않는 책은 용돈을 아껴서 사들였고, 모자란
부분은 밥값을 아껴서 채웠다. 예를
들어 점심으로 백반을 사먹으라고 준 돈 1000을 라면으로 때우면 약
700원 정도가 남고, 그 짓을 5일간 되풀이
하면 책 한 권 값이 나온 원리인데, 더 모자란 경우에는 버스표를 팔고 나머지 거리를 걸어가는 방식으로
충당했다. 내가 갖고 있는 김용의
책 대부분이 그렇게 얻어진 것인데, 그 덕분에 나는 아직도 그 옛날 인세도 지불하지 않고 들여온 김용의
소설 전부를 ‘금사 벽혈검’을 제외하고는 모두 갖고 있다.
그러다가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훌쩍 미국으로
와버렸는데, 이 시기부터 책이라고는 여름방학이 되어 한국에 돌아오는 시기를 택해 이런 저런 CD와 함께 사들여 미국으로 가져가는 것이 전부였기에 그리 다양한 독서를 할 수는 없었다. 영어로 된 책이야 지천에 깔려있었지만, 당시만해도 영어 = 공부였고, 영어책을
재미로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부모님과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한국어로 된 책은 내가
그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유일한 고리였기 때문에 신주단지처럼 갖고 있는 책을 모시고, 읽고 또
읽고 했던 것 같다. 이 시기에
인상 깊게 읽은 책은 이문열의 평역삼국지와 청아출판사의 역사책 시리즈 외에는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지금이야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비교적 쉬운 경로로 구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고, 책도 좋았지만 수퍼닌텐도로 구현된 당시
최고의 오락게임인 Street Fighter 2와 운동, 영화, 그리고 몇 안 되는 현지친구들과 노는 일에도 시간을 빼앗기느라 갖고 있는 책이 고장 책장 두 개가 채 못 되었기
때문에 일단 다양한 책을 읽기보다는 한 권을 여러 번 읽었던 것 같다. 그때 만약 영어책에 조금 더 마음을 기울였더라면 아마도 한 10년은 더 빨리 R. A. Salvatore나 Robert Jordan같은 판타지 작가들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는 유럽역사를 전공한 덕분에
교과서로 쓰인 고전을 중심으로 영어책을 읽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살면서 처음으로 문학을 제대로 접하게
된 것은 큰 수확이다.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하려고 로스쿨로 진학하게 될 것이었지만, 95년 입학 당시만 해도 역사를 공부해서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꽤 열심히 책을 보고, 서점을 돌아다니고 했는데, 따르던 몇 교수님의 방에도 종종 들려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등 꽤나 열정적인 공부를 했었다. 물론 성적은 생각만큼 나와주지는 않았지만, 내 인생에서 재미있는 공부를 한 처음이자 지금까지는 마지막의 4년으로
남아 있는 UCSC의 맑은 공기를 맡으며 보낸 대학생활은 내 인생의 큰 자산이다. 지금도 찾는 다운타운의 헌책방이자 중고음반을
파는 LOGOS와도 이때
맺은 인연을 시작으로 근 2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당시에만 해도 하드커버나 가죽으로 제본된
장정본에 대한 욕심은커녕 그런 것들 것 대한 인식조차도 없었기 때문에 되는대로, 손길이 가는 대로 책을
구했는데, 특히 교과서로 쓰인 녀석들은 거진 값이 저렴한 펭귄문고판이 대부분이라서 지금은 그 두께가
반 정도로 줄어버린 채 보관되고 있는데 나이와
함께 떨어진 시력 덕분에 2002년부터는 안경을 쓰기 시작한 뒤로도 눈은 계속 나빠졌기 때문에 이 책들을 읽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한때는 싹 정리하고 큼직한 녀석들로 바꾸어 나갈 생각도 했었지만, 좋던 시절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 그렇게는 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현재를 살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영광이나 미래의 기대만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은 안쓰러움을 넘어 심각한 수준의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누구나 이런 시기를 거쳐서 보다 더 안정적인 삶의 시기에 들어서는 것이 보통이기도 하다. 결국 문제의 본질은 일종의 balancing인데, 그런 의미에서 난 로스쿨 생활 내내 꽤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공부는
늘 어렵게 마련이지만, 적성에 맞는 공부에는 지식을 얻는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 공부는 어려울 뿐만 아니라 큰 보람을 느낄 수가 없는데, 돌아보면 로스쿨
공부가 나에게는 그랬던 것 같다. 차라리
변호사인 지금 실무를 통해 특정분야의 일과 법을 깊이 있게 파고드는 지금은 재미를 느끼지만, 법률의
바탕공부는 정말 재미없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게 했다.
그나마 나를 버티게 한 것은 과거도 아닌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었는데 시험에 붙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어보니 그 희망은
일루션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로스쿨 시절부터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게
된 몇 년간은 거의 책을 읽지 못했다. 내
독서인생을 하나의 컬러차트로 만든다면 이 시기는 아마도 백지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2007년 초입부터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 물꼬는 대망시리즈로 1부에 구성된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쓰였다. 야마오카 소하치라는 걸출한 대하소설작가의
책인데, 손자병법, 삼국지와 함께 기업인들이 꼽는 경영서적들로
늘 선정될 정도로 유명한 책이다. 특히
이 책에는 영웅호걸과 기인이사, 그리고 미녀들이 등장하는 모험담에서는 볼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인생
드라마가 펼쳐지기 때문에 내 생각으로는 30대에 즈음하여서는 누구나 한번 정도는 읽어봐야 할 책이다. 오다 노부나가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이어지는 일본통일의 시기를 권력의 중추에서 보내면서도 살아남아 종국에는 일본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다는
200년간 이어진 평화시기를 연 일통강호의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도 이 책이 주는 하나의 재미라고 하겠는데, 당시 나는 이 책을 통해, 꿈을 품되, 현실에 맞춰 가장 먼저 해 나갈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을 배웠고, 이로
인해 상당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마음으로 받들지 않는 사람을 보스로 받들고 그 밑에서 일을 하는 것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되,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적응하고, 힘을 길러 자신의 발판으로
삼는 지혜는 이렇게 읽은 책을 실생활에서 얻어지는 경험과 대비하여 하나씩 배워진다.
이때부터 연간 읽은 책의 권수를 헤아리는
버릇이 생겼는데, 2007년부터 지금까지 한해 평균 220여권을
읽은 것 같다. 그리고 2011년부터는 읽은 것을 남기기 위해 알라딘에 서재를 열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쓰면서 연습하는 독서행각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까지가 어제 쓴 글의 전부이다. 정말 글모음을 만들게 된다면 여러 번 고쳐 쓰게 될 것이지만, 점심을 먹다가 심심해서 한번 올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