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온전히 사랑할 순 있다.

라는 말을 듣고 나는 내가 늘 그 반대를 생각해오며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마도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반드시 배척하는 관계는 아닐 테지만 종국에는 어느 하나의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우리는 결국 이해 끝에 증오에 서기도, 사랑 끝에 외면하기도 하는 존재이니, 타자를 이해/사랑하기 위한 제도를 요구하는 일이 우리가 타자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랑의 지극한 실천이라는 믿음이 마냥 허황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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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정치는 정치적 참여를 독려하는 적절한 수단의 하나로 인식될 수 있는 한편, 부의 편중이나 고착화된 계급 구조와 같은 사회 구조적 문제로부터 주의를 돌리는 미끼 역할에 머무를 가능성도 함축한다. 애초에 양자는 서로가 서로를 촉발하는 피드백루프의 고리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양쪽의 문제를 상호 대립적이지 않은 형태로 동시에 인지하고 논의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포비아 페미니즘이 그런 작업을 선취하고 있는지는 좀 생각해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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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은 풍경을 주변으로 만들고 여행은 주변을 풍경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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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유물론 - 니체,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신체적 유물론
테리 이글턴 지음, 전대호 옮김 / 갈마바람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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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턴과 피터슨의 전개에서 유사성이 감지되는 연유는 뭘까. 유행 지난 신학에 대한 집착적 시간 낭비?

이글턴이 공들여 발전시킨 생리학적 유물론의 주요 전제는 인간은 몸이라는 물질의 완고함에 따라 한계지워진다는 사실로, 다시 말하면 조건지워진다고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자유롭지만 또한 구속되어 있다. 좀더 분명히 밝히면 구속과 자유는 이음동의관계다. 우리는 달릴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날지 못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사랑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이웃에 대한 애착과 인정을 갈구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경이롭고 한편으로 황당한 인간의 출산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의 사회 문화는 종의 번식과정이 요구하는 조건이자 환경으로 인간은 혼자 출산이 불가능하다는 생리학적인 이유에서 반드시 신뢰 관계에 있는 조력자가 필요했으며 하나의 개체로 성숙되기까지의 시간을 고려할 때 이런 조력관계는 거의 전생애에 걸쳐 지속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사회성은 이 과정을 지지하는 방향에 기초하여 형성된다.

피터슨은 암수, 부모와 자식, 지배구조 등의 사회적 개념을 인간의 생리학적 메카니즘의 오래된 작동 기제들로 이해한다. 이것은 의지와 무관하게 작동하며 따라서 ˝무의식적˝이다. 오히려 무의식적인 조건들이 이성과 의지의 토대로 동작한다. 그는 칼융의 신화분석을 통해 이와 같은 토대가 인간의 생리학적 조건과 연계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쉽게 변할 수 없는 혹은 디폴트값으로서의 문화, 가치들을 옹호하는 입장에 섰다.

이글턴이 유대 기독교적 윤리 전통에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에는 명시적이진 않지만 피터슨과 같은 장을 공유하는 측면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과 같은 아시아 문명에도 해당될지는 의문이다. 우리에겐 애초에 죽일 신이 없었다. 기원은 은폐되기 마련이므로 이성과 의지 만으로 사회가 조직되고 유지되고 기능한다는 생각은 망상에 가깝다. 우리를 조건 짓는 물적 토대와 생산관계의 분석이 객관화에 이를 수 있게 할 지니 모두 유물론자가 될 시간이 임박한 것이다.

이론은 이론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론가는 의사나 마찬가지다. 그 소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용도 폐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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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가지 인생의 법칙 - 혼돈의 해독제
조던 B. 피터슨 지음, 강주헌 옮김 / 메이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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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피터슨이 인간을 관찰하는 곳은 사각에 위치한다.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잘 안보인다.

전제는 이렇다. 문명은 불안정하다는 것.

국가 사회 공동체 대규모 협력과 같은 문명의 열매는 당장이라도 대규모 전쟁 학살 고문 혐오 공멸과 같은 혼돈으로 돌아갈 수 있다. 세계는 비극적이며 따라서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가치들이 어떻게 당연해질 수 있는지를 아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것.

우리가 적절히 행동하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근거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개인에게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래서 윤리의 심급을 묻는 질문은 늘 곤란하다. 토대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도인의 신화속에서 지구를 떠받치는 코끼리와 거북이처럼 허공에 떠 있을 뿐, 지금껏 그것의 기원은 종교와 전통의 이름 속에 은장되어 왔다.

혼돈의 도래를 경계하라는 그의 예언자적 외침이 호소력을 갖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인류가 20세기를 거쳐오면서 붕괴된 가치들이 토대를 덮은 장막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현대인들에게는 모든 가치를 상대화하라는 정언명령의 실천이며 적절하게 마음에 쏙 드는 일이다. 누군들 똑똑한 척 하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슬프게도 인간은 허공 위에 설 수 없다. 우리는 한 번 황폐해진 땅 위에 새로운 땅을 일구어야 한다. 우리가 너무 못나서가 아니라 위대한 탓에 이 작업은 결코 만만치 않은 노동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믿음을 잃었고 다 큰 아이에게 다시 산타크로스를 믿으라고 해봐야 소용없듯 솔직히 이 작업의 전망이 그리 밝아보이진 않는다.

그럼에도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대체로 최악의 상황에 가까웠고 뭐 밑져야 본전이니 망하기 밖에 더하겠는가라는 것. 서로를 일깨우고 도닥이며 가능성을 모색한다면 작은 단서라도 나오지 않을까. 그걸로 충분하다고 믿어보는 일이 무모한 낙관만은 아니기를 희망한다.

벤야민이 말했듯 역사를 폭파시키는 것은 작고 소소한 것일 수도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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