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와 환경의 믹스매치. 개그의 기본이랄까. 그런 점에서 보면 매우 개인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여자 사람이 축구가 좋아서 할아버지들과 축구시합을 하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책은 기본을 한다. (근데 이때 서로에 대한 ‘공식‘ 호칭이 아부지, 딸 이라니 으엑 많이 징그럽다. 나도 개인주의자라서인가?)

고양이 알러지가 있는 사람이 고양이를 사랑해서 결국 콧물눈물 흘리며 고양이를 키우는 이야기처럼 ‘아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이걸해야 하나‘라는 심정이 베어있는 점이 좋다. 좋아하는 것에 싫어하는 것이 섞여 있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지 결국 인생에서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는 것들이 대체로 그렇듯 난처하면서 기분좋기도 한 것이, 비닐장갑을 끼고 고양이 등을 쓰다듬는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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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
대리언 리더 지음, 배성민 옮김 / 까치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라캉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조금이나마 알아들으려면 국내에서는 두 권의 책을 읽으면 되는데 이 책이 그 중 하나다.

리더는 조금 소프트한 버전으로 대중서라고 보여지는 다른 책들을 많이 썼는데 그것들은 썩 좋지는 않았다. 번역이 이상했거나 저자가 이상했거나 인데 이 책을 보면 전자의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이 남았을까 싶을 때 이 책을 읽어보면 조금 위안이 될 수도 있다. 라캉이라는 사람이 프로이트를 경유해 들어간 세계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프랑스 버전 처럼 심란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순과 불합리함이 넘실대는 인간 심리를 나름의 기술을 가지고 항해한 선박의 탐험기록처럼 신뢰감 있게 읽히기도 한다.

라캉에게서 혹은 리더에게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라면 ˝정신병을 촉발시키지 않는 망상˝에 관한 관심일 것이다. 비유해서 생각해보면 인간의 언어(와 그에 따른 가치체계)가 소프트웨어로서 안정적으로 설치 운영되려면 (부성은유와 같은)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에러가 발생되어 오작동할때 운영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비상체제로서 ‘망상‘이 구멍난 부분을 메운다는 것이다.

즉 정신병은 구조적 문제이며 이는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정신분석의 목표는 구조적 안정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재건축에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

이게 꼭 정신병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인지 의문이다. 언어는 대체로 논리적이지만 군데군데 매우 비논리적인 믿음이 자리하고 있는데 어쩌면 이런 구조 자체가 일반적인 마음의 구조적 형태가 아닐까. 그게 꼭 ˝나는 신의 아들이다˝와 같은 극단적인 모습이 아니더라도 이를테면 ˝강단역사학은 모두 일제식민사관의 노예이며 재야사학만이 진리다˝와 같은 믿음을 고수하는 모습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정신적으로 어느 정도 불안정하다는 의미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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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22-06-19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과 핑크의 <라캉과 정신의학>을 꼽으실 것 같군요:(
 

소크라테스를 다루는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변증법은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야 하는 과학적 사실의 발견에 있어서는 별 쓸모가 없는 방법론, 이라는 게 러셀 경의 결론인데 선뜻 이해가 되진 않는다.

예를 들어 천동설의 모순을 변증법적으로 탐구하여 지동설의 가능성을 도출해낸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새로운 사실의 발견 자체가 과학적 관찰에 의존한다손 쳐도 관찰의 필요성을 상기하기 위해서는 기존 체계의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실험의 성과인 과학적 발견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과정으로서 합리성을 따져묻는 토론이 뒤따르는 게 당연해보인다.

철학, 요즘말로 치면 인문학과 과학의 관계는 흥부와 제비가 물어다 준 박처럼 분명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지만 박 속에 든 보물이 흥부가 피땀 흘려 쟁취한 소유물이라기보다 ‘이벤트성 경품‘에 가깝듯 전적으로 응원하기에는 좀 애매한 구석이 있는 게 사실이다. 과학적 성과가 철학의 영역에 어떤 종류의 유익함을 가져다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흥부가 보물을 다시 얻어보겠다고 다리 부러진 제비만 찾아다니는 게 이 이야기의 후속편이 아니듯 첨단과학으로 철학이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지적대로 철학은 오히려 언어 게임에 가까우며 언어 게임을 둘러싼 근본적인 구조적 한계 탓에, 다시 말해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눈을 직접 볼 수 없는 탓에 외부의 개입을 필요로 하는데 그 심판 역할을 과학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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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 속의 빈곤‘보다 ‘풍요가 만든 빈곤‘이 맞는 말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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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때 일본 센코쿠시대의 전쟁 양상에 대한 발표문을 작성하면서 별로 궁금하지 않던 사실들을 몇 가지 알게 되었는데 그게 이후의 내 지적인 관심사의 행로에 적잖이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그 중 하나가 ‘지루시‘라고 하는 병사들이 등에 꼽고 다니던 깃발인데 요즘으로 치면 ‘피아식별띠‘같은 것으로 적과 아군을 구별해주는 기능을 한다. 그때서야 아 그렇지 전쟁중에는 그런 기능을 하는 물건이 필요하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고, 구체적으로 아는 것과 추상적으로 아는 것을 구별할 필요를 느꼈다.

누구랑 누구랑 싸웠대 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가 즉시 머리에 떠올리는 이미지는 자신의 직간접적 경험의 추상을 거친 결과물이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타인의 언어를 이해하는데 이건 효율적이긴 하지만 효율성보다 구체성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는 잠시 꺼두는 편이 좋다.

누구가 누구에게 싱글렉테이크다운을 시도했는데 카운터를 먹어서 트라이앵글초크에 걸려 기절했대. 라고 하면 그래플링을 모르는 사람에겐 외계어지만 용어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좀전의 기술보다 훨씬 생생하게 느껴질 것이다.

게다가 앞선 문장을 문화적 전통이 전혀 다른 개체가 접할 경우 엉뚱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 과거의 인간이나 사회 현상에 대한 서술이 일종의 동음이의어적인 착오를 반복할 때가 많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과거 뿐 아니라 동시대의 서로 다른 준거 집단 간의 소통도 비슷한 양상을 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이름들을 서로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탓에 결과적으로 이들의 이름들은 서로 다른 의미를 품는다. 이 차이를 합치려는 게 아니라면 차이를 발굴하는 것 그 작업이 필요하고 여기에 ‘고증‘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고증‘은 자유 토론에 앞서 선결되어야 할 협상조건이며 역사적 사례와 더불어 현재의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사항이다.

차이나는 클라스 강연을 재밌게 들었는데 ‘삼국편‘은 생각보다 소소했고 고대전쟁사는 기대를 가져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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