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존재 - 삶이 노잼인 당신에게 바치는 짠한 힐링
개 지음, 뿜작가 그림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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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의욕 없는 프로고통러가 우리에게 전하는 담담한 자조와 위로!

공감에 키득키득, 씁쓸함에 쓰담쓰담! 가볍지만 묵직한 메시지! 

 

 

 

 

   여기 ‘프로고통러’를 자처하는 어느 ‘개’님이 존재한다. 이 개는 헛소리스트에 시간 낭비스트라 스스로를 자조하며 인생은 원래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사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인데 애써 멋들어진 말로 자신과 삶을 포장할 필요가 있을까. 세상을 아름답게만 바라보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이상한 세상에는 역시 이상한 글이 제격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신념대로 그는 트위터를 통해 이른바 ‘헛소리’에 가까운 농담조의 글들을 게시하기 시작한다. 스스로를 개라 하니 개 소리인 셈인데, 어쩐지 웃기면서도 슬프고 시크하게 툭 던지는 글들이 가볍다기보다 묵직한 잽 한방처럼 뒤통수를 친다. 그는 결코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이 땅의 다수를 위로하려고 쓴 글이 아니라는데,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읽고 힐링과 위로를 얻게 된다니 이 또한 흥미롭다.

 

 

   <보통의 존재>가 아니다. 이 책의 이름은 <고통의 존재>이다. 언뜻 노란 표지에 유사한 제목이라 낚일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그래서 뭔가 충동질하는 구석이 있는 책이다. 저자가 살아가며 흔히들 겪는 일상의 고통들을 때로는 푸념으로, 때로는 달관의 태도로 쓴 짧은 글에 뿜작가의 센스 넘치는 그림이 엮여 재치 발랄한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었다. SNS에 올라오는 짧은 글들을 읽듯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안에 술술 읽히니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 더없이 좋다.

 

 

 

 

 

   우리가 흔히들 개나 소나, 라는 말로 이들의 존재를 폄하하기도 하는데 여기 ‘개’를 자처하는 어떤 사람도 있으니 앞으로는 함부로 말 못하겠다. 쩝.

 

 

 

 

 

 

 

   SNS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공감갈 만한 이야기가 아닌가. 심지어 책을 읽는 와중에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나도 어쩌면 'SNS형 주의력 결핍' 증세를 앓고 있는 것이리라. 또르르…….

 

 

 

 

 

 

   청춘에 기름 붓고 열심히 사느라 아픈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이 땅의 젊은이들을 위로하는 내용이다. 내 SNS에 고이 스크랩해두고 싶은 부분이다.

 

 

 

 

 

 

   개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풉, 하고 웃음이 나오는 대목이지만 시국을 이렇게 풍자하기도 하는 이 묘미라니.

 

 

 

 

 

 

   '맞춤법'이라는 부분을 읽고, 뜨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빵~ 터져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이 뒤의 링딩동 시리즈도 웃겨서 혼자 미친 사람처럼 한참을 웃었다. 어쩐지 잠들기 전에 링딩동의 주술에 걸릴 것만 같다.

 

 

 

 

 

 

 

   2017년 정유년이 밝았다. 워낙 세상이 시끄럽다 보니 무겁기만 한 사설들이 넘쳐나서 마음도 무거운 이때 이 책으로 기분이 조금은 밝아진 것 같아 시작이 개운해진 느낌이다. 인간은 고통의 존재인 만큼 그 고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가볍게 훅 차버릴 수 있는 마음을 가져볼 계기도 되었다. 하루에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트위터와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개’님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 같으니, 대중들과 소통하는 창구가 앞으로도 쭉 개방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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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문장 이덕무를 읽다 - 간서치 이덕무와 그의 벗들이 들려주는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내면 풍경
한정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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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미친 바보라 불린 이덕무를 통해 바라본 18세기 조선의 모습!

시대를 앞서 나간 참다운 지식인들을 읽다!

 

 

  간서치, 즉 책에 미친 바보라 불린 이덕무는 ‘조선 인문학의 르네상스’라 불리던 18세기 조선 최고의 문장가이다. 그의 이름 석 자는 어쩐지 낯설지만 ‘북학파’의 주축 인물이며, 놀랍게도 연암 박지원과 담헌 홍대용은 물론 초정 박제가 등과 당대를 빛낸 위대한 지식인이다. 그간 교과서를 비롯하여 전기 및 많은 인문학 서적 등에서 북학파를 대표하는 이들의 삶을 조명하고 그 업적을 기리곤 했지만 이덕무라는 이름은 깊이 있게 언급되지 않았다. 새삼 18세기 지식인 이덕무의 글을 읽는다는 것이 오늘에 와서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무려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방대한 양을 완독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저자는 ‘이덕무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인문학적 사유의 개방성과 확장성, 그리고 불온성은 18세기와 21세기라는 시대를 막론한 인문학적 가치이자, 두 시대를 연결하는 핵심 키워드’라 말하며 그를 통해 ‘화석화된 과거를 읽는 것만이 아니라 생동하는 현재를 읽는’ 일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를 언급한다. 시대를 초월한 인문학의 정신을 비롯하여 학술적인 접근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책은 그저 책과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읽힐 정도로 재미있다. 무엇보다 18세기의 전반을 들여다보는 현미경과 같은 구체적인 그림을 제시한다는 점에 있어서 더 큰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18세기 조선의 모습

  이덕무의 삶을 비롯하여 그의 철학에 가깝게 접근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18세기 조선의 모습이다. 이 시기는 보수와 혁신의 흐름이 극단적인 형태로 공존하던 때였다.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학문과 사상이란 유학 그중에서도 특히 성리학으로, 이들이 이상으로 삼은 인간 모델은 공자나 맹자와 같은 성현이나 도덕군자였다. 성리학의 경전은 출세 즉 과거 시험을 통해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기에 사대부가의 자손이라면 예외 없이 성리학적 인간이 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성리학의 견고한 벽에 커다란 균열이 발생하는 대격변이 일어나는데, 성리학의 토대였던 화이론적 세계관이 몰락하면서 새로이 성장한 청나라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배우고자 북학 운동을 일으킨 ‘북학파’가 등장한 것이다. 이덕무를 비롯한 그의 벗들은 이 북학 운동의 선도자로 기존의 지식인들과 정반대의 입장에 선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들이었다. 비록 오늘날에는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덕무가 이 북학파의 핵심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조선 최고의 문장 이덕무를 읽다>는 그 본인은 물론, 북학파인들의 남다른 가치관과 사상, 철학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책이다.

 

 

어린아이의 눈과 마음으로, 독서하고 기록하다

  책은 이덕무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독서와 기록’ 그리고 ‘호기심과 탐구’에 의거하여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독서가, 문장가, 비평가로써 이덕무가 추구하는 사상과 철학을 살펴본다.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와 더불어 ‘한시사가(漢詩四家)’라 평가받을 정도로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인 이덕무는 자신의 원동력을 어린아이의 천진하고 순수한 감정이나 마음으로부터 삼는다. 이를 ‘영처의 미학’ 또는 ‘동심의 미학’이라 언급하는데, 이는 곧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거나 명예를 구하기 위해 글을 짓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 것이기에, 애써 꾸미거나 잘 쓰려고 억지로 힘쓸 필요가 없음을 강조한다. 그저 자신의 천진하고 순수한, 진실한 감정을 드러내면 되는 것이다. 스스로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어 글을 쓴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본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는 그의 메시지는 이 시대의 많은 작가들에게도 귀감이 될 만한 부분이다.

 

 

내 어린 아우 정대는 이제 겨우 아홉 살이다. 타고난 성품이 매우 둔하다. 정대가 어느 날 갑자기 말했다. “귓속에서 쟁쟁 우는 소리가 나요.” 내가 물었다. “그 소리가 어떤 물건과 비슷하니?” 정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소리가 동글동글한 별 같아요. 보일 것도 같고 주울 것도 같아요.”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형상을 가지고 소리에 비유하는구나. 이는 어린아이가 무의식중에 표현한 천성의 지혜와 식견이다. 예전에 한 어린아이가 별을 보고 달 가루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말은 예쁘고 참신하다. 때 묻은 세속의 기운을 훌쩍 벗어났다. 속되고 썩은 무리가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 『이목구심서』1 / 48p

 

 

조선의, 조선만의 조선의 것을 담아내라

  화이론적 세계관이 해체된 자리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자신의 공간인 ‘조선’에 대한 관심이 급속하게 성장해간다. 때문에 18세기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조선의 역사, 문화, 풍속, 지리는 물론 곳곳을 하나하나 탐구하고 저술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른바 옛 것이 아닌 지금의 ‘조선적인 것’을 담아내는 일이다. 이덕무는 자신의 삶과 생활, 감정이 뿌리박고 있는 조선의 지금을 담아낸 시문은 살아 있는 글이지만, 중국의 옛 시를 비슷하게 모방하거나 답습한 시문은 죽은 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연암 박지원은 이덕무의 시야말로 참다운 조선의 시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화를 통해 조선 사람의 모습을 묘사하기 시작한 최초의 화가였듯이 이덕무를 필두로 조선의 고유한 색과 풍을 추구하는 문화사의 흐름은 ‘진경 시’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확대된다. 이 책에는 이덕무 외에도 박지원, 유득공 등의 다채로운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하나하나가 큰 화폭을 담아낸 듯 아름답고, 정교하며, 유려하다. 당대의 풍속 또한 눈앞에 보는 듯 생경하게 담아내니 이를 쉽게 넘기지 말고 제대로 탐독하는 재미를 느껴보면 좋을 듯하다.

 

 

따라서 좋은 문장이란 자연스러움과 천진함이 온몸에 스며들어 자신의 감정과 마음이 가는 대로 언제 어느 곳에서나 글이 나올 때 이루어진다. 그것은 “삶의 본연과 천진을 깎아버리는 일이 없이, 진부하고 낡은 잔재들을 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옛 사람의 글 쓰는 법과 길을 완전히 버리는 것은 옳지 않지만 그대로 따르는 구속을 받아서는 더더욱 안 된다. (…중략…) 옛 사람의 글을 배척하지 마라. 오히려 열심히 배우고 익혀라. 그러나 그 글이 아무리 좋고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본뜨거나 흉내 내려고 하지 마라. 또 억지로 꾸미려거나 인위적으로 지어내려고 하지도 마라. 그냥 자신의 진실한 정감과 참다운 마음을 표현하는 데 힘써라!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글을 갖게 될 것이다. / 170p

 

 

  진정한 조선의 모습을 담아내려는 그의 뜻은 「서해여언」이라 제목을 붙인 여행기에서도 빛을 발휘한다. 이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개성과 해주와 장연 일대에 이르는 서해 중북부 지방의 독특한 풍속과 역사 문화를 고찰하고 기록한 일종의 풍속 역사서로, 무엇보다 오늘날 가보지 못하는 땅을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그 가치를 증명한다. 임꺽정에 관한 민간의 풍설을 옮긴 기록이나 ‘황당하다’의 어원이 알고 보면 해적이 몰던 배 이름 ‘황당선’에서 비롯된 것으로 유추되는 글은 꽤 흥미롭다. 민간에서 전해오는 호랑이 물리치는 비법 또한 재미있다. 이 외에도 『사소설』을 통해 세시풍속과 민간신앙, 민담, 설화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어 조선을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으니 보는 재미가 배로 늘어난다. 그러나 핵심은 사대부가의 뼛속 깊이 박혀 있는 신분 차별과 성차별의 제도, 문화에 강력한 경종을 울린다는 점에 있다. 결국 역사의 시간적 공간적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끈으로 이어져 있듯이 18세기 조선이 전하는 메시지를 오늘날에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저자의 뜻을 새겨봄직하다.

 

 

만월대는 옛날 고구려의 부소갑군이다. 군이 되었을 당시에는 훗날 고려의 태조 왕건이 이 언덕에 주춧돌을 세워 대궐을 지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또한 주춧돌을 세울 당시에는 500년 후에 나라가 망해 주춧돌 위의 기둥이 차디찬 잿더미로 변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더욱이 그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겨울철 어느 날 해질녘에 내가 홀로 이 주춧돌 위에 서서 그 옛날을 애도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다시 300여 년이 지난 어느 겨울철 해질녘에 나와 같은 사람이 있어 홀로 이 주춧돌 위에 서 있을지 어찌 알겠는가? 또한 몇 백 몇 천 년이 흐른 후 이 주춧돌이 사라져 누구 집의 섬돌로 변할지 어찌 알겠는가? - 「서해여언」/ 281p

 

 

동아시아의 흐름을 통찰하고 북학의 뜻을 세우다

  책의 2부에서는 조선을 넘어 청나라, 일본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전반에 대한 이덕무의 지적 호기심과 그 속에서 개방적인 사고, 이용후생의 가치를 전하려는 북학의 뜻을 담고 있다. 당시에는 청나라를 멸시하고 미개한 야만족의 나라로 멸시하는 분위기였지만, 이덕무를 비롯한 북학파는 조선을 크게 개혁해 부국안민의 나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비록 오랑캐라고 하더라도 찾아가서 스승으로 섬기고 배워야 한다하여 직접 청나라로 연행을 간다. 그곳에서 조선과 청나라의 학문적, 문화적 격차를 자각하여 북학을 통해 조선의 학문과 문화 수준을 획기적으로 개혁할 필요성을 새기기도 하고 중화주의에서 벗어나 어느 곳이나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혁신적인 사고를 갖게 된다. 또한 천주교와 서학을 분리하여 실용주의적 접근방법을 제시하는 발판을 마련하고, 조선과 청나라 지식인간의 인문학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지식과 정보 교류에 기여한다.

 

 

천하의 수많은 물품과 엄청난 재부(財富)가 모두 이곳에 모여들어서 하루 종일 물품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넘쳐났다. 아마도 이러한 모습을 보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라 것이다. “부유하다면 부유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백성의 생계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물품을 전부 불살라버린다고 해도 무슨 손해가 있겠는가?” 이 말은 확실히 옳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대개 푸른 산과 흰 구름은 모두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푸른 산과 흰 구름을 사랑한다. 만약 백성들의 생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서 골동품이나 서화를 좋아할 줄도 모르고 알지도 못한다면 그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 박제가, 『북학의』「내편」, <고동서화> / 391p

 

 

  이덕무의 업적 중 빛나는 것 하나는 일본학의 최고 권위자였다는 사실이다. 청나라를 멸시했던 시대 분위기는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이덕무는 일본에 대한 닫힌 인식에서 벗어나야 우리에게도 발전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조선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외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세우기 위해서는 외국에 대한 폐쇄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은 것이다. 당시 일본은 상당한 수준의 문명국에 도달했는데 이는 농업보다 상공업을 중시하는 경제구조와 신분 질서에 있다고 분석하면서 그 뜻을 『청령국지』에 수록한다. 같은 시기에 박제가가 『북학의』를 통해 청나라의 제도와 문물, 사회와 풍속 그리고 상공업과 기술 등을 항목별로 담아내 사회 개혁을 요구하는 북학파의 의지를 전했다는 점에서 이 두 책은 의미가 깊다. 안타까운 것은 두 책의 가치를 나란히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북학의』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청령국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폐쇄성이 짙은 일본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우리가 정조를 일컬어 갖가지 개혁 정책 및 탕평을 통해 대통합을 추진한 위대한 왕이었다고 기억하는 것은 이 같은 북학파들의 부단한 의지가 빛을 발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들 모두가 기존의 사상에서 완벽하게 물러설 수 없는 한계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삶을 관통하는 개방성과 혁신성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귀감으로 삼을 만한 정신임은 분명하다. 정부의 주도 하에 ‘문화계의 블랙리스트’가 생성되었다는 뉴스 소식을 듣고 나니 이 책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더 이상은 이 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눈과 귀, 손과 발을 묶는 행태가 다시는 벌어지지 않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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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 배제된 생명들의 작은 승리 EBS 다큐프라임 <생명, 40억년의 비밀> 3
김시준.김현우,박재용 외 지음 / Mid(엠아이디)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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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는 새로운 시도 속에 진화가 있다!

진화와 멸종을 거듭하여 탄생한 위대하고 아름다운 생태계의 역사!

 

 

  그 어떤 위기의 순간에서도 살아남으려고 노력했기에 아름다운 존재, 생명. 45억년이라는 긴 역사 속,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구의 환경 속에서 어떻게 적응을 하고 변화를 하느냐에 따라 생존이 결정되었기에 생명들은 숱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맞서야 했다. 살아 숨 쉬는 이 지구라는 공간 속에서 필연적으로 ‘진화’와 ‘멸종’은 거듭되어 왔다.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인간 역시 늘 그 경계에 놓여 있었다. 유사 이래 영원한 단일 종은 없었고, 그 어떤 생물이라도 홀로만 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수많은 진화 끝에 마침내 승리한 생태계의 최종 승리자인 듯 착각을 하고 있다. 이 인간의 오만함 앞에서 우리는 애초에 강한 자만이 살아남아 역사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한없이 작고 배제된 생명들이 진화를 통해 일구어낸 작은 승리가 결국 이 땅의 역사를 만들어왔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경계: 배제된 생명들의 작은 승리>는 이러한 경계 너머의 세계를 향한 열망과 끊임없이 변화를 갈망하고 진화를 거듭하려 했던 생명들의 이야기이자, 인류에 대한 준엄한 메시지이다.

 

 

경계에 내몰린 생명들의 눈부신 진화

 

  40억이 넘는 지구의 오랜 역사 속에 수많은 대멸종의 시기들이 존재했다. 생물들이 육지로 대거 올라오는 계기가 된 오르도비스기 대멸종, 지구상 생명의 98%가 사라진 페름기 대멸종, 공룡이 세상의 주인이 된 트라이아스기 대멸종, 포유류를 역사의 전면에 내세운 백악기 대멸종이 대표적이다. 이 뿐만이 아니라 수면의 높낮이, 온도, 산소의 농도 등 크건 작건 지구는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해왔고 그 간극 속에서 생물들은 기존의 생태계에서 새로운 생태계로 넘어가는 모험을 해야만 했다. 그들은 물가에서 밀려나 뭍으로 가야했고, 뭍에서 바다로 가야했으며, 땅에서 밀려 하늘로 날아가거나 지상에서 경쟁에 밀려 흙 속에 삶의 터전을 마련해야 하기도 했다. 더욱이 우리 인류는 숲에서 초원으로 경쟁에서 밀려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이족보행을 선택함으로써 진화를 거듭했다. 즉, 이들은 하나같이 변화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몸의 기능들을 버리거나 새로이 취득함으로써 이른바 ‘진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생태계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미처 적응하지 못하거나 변화를 멈추었던 다수의 생물들은 ‘멸종’의 비극을 맞았다.

 

 

진화란 그런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과 무수히 많은 시도를 담보로 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시도들은 지구 역사의 한 장면으로만 남게 된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무수한 ‘그침’ 속에 단 하나 ‘이어짐’의 역사다. 하지만 그 후손이 이어지지 않고 멸종했다고 해서 그들이 실패했다고 단정하지는 말자. 그들은 그저 그 장소, 그 시간에서 유전자의 이어짐을 ‘그쳤을 뿐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그 수많은 유전자 중 운 좋게 이어진 후손 중 하나일 뿐이다. / 9p

 

어떤 기관이 사라지는 과정을 퇴화라고 한다. 보통 퇴화는 진화의 반대방향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진화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오해다. 진화는 애초에 어떤 방향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필요 없어진 기관을 줄이고 그 에너지와 노력을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여타 행위와 기관에 집중하는 일이 진화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한 기관의 퇴화는 그 기관을 가진 개체의 입장에서 보면 진화인 것이다. / 31p

 

 

  책에서 언급되는 많은 종의 생물들이 진화와 퇴화를 거듭하는데, 그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민물고기의 경우 수온의 변화가 잦은 민물의 특수한 사정 때문에 아가미 외에 래버린스기관이라는 별도의 호흡기관을 확보하거나 장호흡을 하기도 하고 부레를 통한 폐호흡을 하는 등의 다양한 진화를 이루어냈다. 뱀의 경우, 가늘고 긴 몸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폐가 퇴화되고, 땅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도 사라졌으며, 먹이를 통째로 삼키기 위해 미각도 버렸다. 흙 속으로, 땅속으로 들어간 무족영원, 뱀, 두더지를 비롯한 포유류 등의 생명들은 팔다리를 없애고, 눈이 멀고, 모습을 완전히 바꾸는 긴 세월에 걸친 진화를 버텨내고 이겨내기도 했다. 이렇게 자신의 한계와 자연의 경계를 넘어간 생물들에 의해 지구는 좀 더 거대하고 다양한 생태계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혜택을 받은 존재들이다. 숱한 생명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 속에서 진화를 거듭한 끝에 지구 역사상 가장 폭발하는 아름다움을 뽐내는 시기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빨라지는 ‘멸종’의 시계

 

  역사상 대멸종과 비할 수 없을 만큼 소소한 멸종은 그보다 더 많았다. 멸종은 생태계에 빈자리를 만들게 마련인데, 빈자리가 생기면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한 생명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하지만 인간이 최종 포식자가 되고 생태계의 영역에서 벗어나 모든 종들을 경계로 몰아붙이고 파괴해감으로써 생물들이 경계를 넘어가고 빈자리를 채우려는 진화, 그 위대한 기회를 막고 있다. 즉, 인간이 스스로 대멸종을 초래하고 있는 셈이다. 거북의 경우, 백악기 대멸종에서 의연히 살아남아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보기 드문 신생대 해양파충류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간으로 인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먹고, 잡아가고, 산란할 장소를 뺏는 등의 행위로 2억 년이 넘는 역사가 막을 내리게 생긴 것이다. 고래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래 고기와 고래 기름을 얻기 위해 포경산업이 활발했던 과거, 인간들이 자행한 무자비한 살포로 인하여 오늘날 고래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바다소 역시 인간들이 그들의 삶을 뒤흔들었고 결국 멸종해 버렸다. 살아남은 바다소의 나머지 네 종인 아마존 매너티, 서인도제도 매너티, 아프리카 매너티, 듀공도 오늘내일하는 운명이라 하니 인간이 초래한 멸종의 시계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빨리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변하지 않는다면 21세기가 가기 전에 현재 존재하는 해상포유류의 절반 이상이 멸종하고 말 것이라는 점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그런 비극적인 일이 발생한다면 거의 2억 년에 달하는 중생대의 기나긴 시간을 전부 합쳐 멸종한 해상파충류의 종보다도 더 많은 종이 짧은 1만 년의 인류 역사 속에 일어나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생명이 같은 생명에게 이토록 폭력적인 역사를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암담해진다. 인간의 힘은 어떤 의미로든 대단하다. / 163p

 

인간이 개척한 곳마다 기존의 생태계는 배제된다. 농경지를 일구면 그곳에 살던 식물들이 사라지고, 식물과 함께 살던 동물과 균도 함께 사라진다. 도시를 세우면 숲이 사라지고 숲과 함께 하던 동물들이 사라진다. 도시를 세우면 숲이 사라지고 숲과 함께하던 동물들이 사라진다. 도로를 놓으면 도로 양쪽으로 자유롭게 오가던 동물들은 고립된다. 항구를 만들면 그 주변의 생태계가 파괴된다. 인간의 영역이 확장될수록 기존에 존재하던 지구 생태계는 줄어든다. 인간의 탈출은 이제 인간의 공습이 되었고, 한정된 지구에서 생태계는 지구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이후 최초로 영역이 축소되기 시작한 것이다. / 267p

 

 

  EBS 다큐프라임 「생명, 40억년의 비밀」시리즈 세 번째인 <경계>는 다큐를 텍스트로 전환한 만큼 다양한 시각적 자료와 입체적인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꽤 좋은 과학도서로 완성되었다. 청소년들에게도 생명과 환경 보호를 일깨워줄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스스로를 변화시킨 다양한 생물들의 진화 과정을 보며 경이로움을 금치 못했다. 나아가 우리 인간이 그러한 자생적인 노력을 우리의 기준으로 차단하고 기회를 박탈하고 있는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스스로가 위대한 진화를 이루어왔던 인간에게 경의를 표하는 만큼 많은 생물들에게도 그러한 마음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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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피아노 그 여자의 소나타
최지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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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되찾은 열정 속에서 피어난 로맨스!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한 판 대결을 그린 아름다운 성장기!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그 아찔하고 설렘 가득한 이야기에 밤잠 설치며 읽었던 로맨스 작품들이 불현듯 떠오른다. <오만과 편견>을 읽으며 사랑을 할 때 빠지기 쉬운 감정들을 이해하였고, <구해줘>를 통해 사랑이라는 위대한 운명에 대해 생각했으며, <해를 품은 달>로 한국 고유의 정서를 녹아낸 애절한 인연에 애달파하기도 했다. 일상에서 채우지 못하는 환상과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가치를 재확인한다는 데 있어 로맨스 작품이 가지는 의미는 내게 있어 좀 남다르다. 요즘 같이 어수선한 시국에 내내 불편한 소식들만 접해서일까, 마음에 스미는 부드러운 핑크빛 색감의 로맨스 책 한 권에 격한 반가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건반 위에 놓인 두 남녀가 마주보는 그림에서 오는 따뜻한 정서는 물론,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히 채워질 이 책의 소재가 더더욱 마음에 든 까닭이다.

 

 

북에서 온 이방인과 천덕꾸러기 피아니스트

 

  <그 남자의 피아노 그 여자의 소나타>는 제목 그대로 피아노를 소재로 한 로맨스 소설이다. 소설의 남자주인공인 원동호는 북에서 탈출한 피아니스트였다. 당의 배려로 모스크바 유학을 떠나 러시아 국립음악원에서 재능을 빛냈으며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잇달아 수상하며 ‘아시아의 호로비츠’라는 극찬까지 받은 촉망받는 인재였다. 이내 유학 기간이 만료되어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변변한 독주나 협연도 없이 군부대 행사에 불려가 합창단 반주를 맡는 정도의 활동이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공화국 최고 실세자가 눈독들인 여인을 사랑하게 된 이유로 반동분자에 내몰릴 위기에 처해 남한으로 도망쳐야했다. 그러나 남한 음악계에서 원동호는 철저히 이방인일 뿐이었다. 원동호에 밀려 늘 2인자 신세였던 노수창의 지시로 두 개의 손가락이 잘리는 사건까지 겪으면서 위기에 내몰린 그는 그나마 돌 구이 판 공장을 운영하며 음악계와 멀어진다.

 

 

“기래 이방인의 접근을 일체 거부하는 배타적인 세계 말이다우. 다른 일반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도록 오직 그들만의 난해한 언어로 대화하고 그래서 그들만의 이익을 오롯이 추구하던 집단이 바로 옛날 제사장의 무리들 아니갔네? 생각해보라우, 기독교의 예수님을 골고다 언덕에 못 박으로 꾄 자들이 과연 누구였네?” (……중략……)

“자신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이방인은 결코 환영하지 않는 족속, 바로 그네들의 제사장들이디.” / 312p

 

 

  한편, 여자주인공인 채율은 사랑하는 남자 모용하를 만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서둘러 귀국을 하다 아버지의 죽음을 뉴스로 접하게 된다. 빈털터리 상태였던 채율은 채권단에 쫓겨 오도가도 하지 못한 채 우연히 원동호를 만나게 되고, 우연찮게 갖은 사건사고를 일으키게 되면서 그의 돌 구이 판 공장에 얹혀살기로 한다. 낯선 남한에서 정착해 살기 위해 마음에 벽을 두르고 살게 된 원동호에게 채율은 그저 싸가지 없고 철없는 몰락한 부잣집 딸이었고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진 그들은 내내 티격태격하면서 결코 융화될 수 없는 시간을 함께 해나간다.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되찾은 열정, 그 속에서 피어난 로맨스

 

  애초에 부잣집 딸로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아왔던 채율과 북에서 온 까칠남 원동호는 어울릴 수 없었지만 몇 번의 위기에서 서로를 구했던 그들은 어느새 마음을 열어 보인다. 특히나 원동호에게 금전적으로나 마음으로나 많은 빚을 지게 된 채율은 원동호의 회사가 큰 위기에 처하자 이에 보답하기 위해 단 하나의 기회, 3억원이 걸린 콩쿠르에 도전하기 이른다. 그리고 원동호는 채율의 스승이 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한때 원동호의 라이벌인 노수창이 그들 틈에 들어와 훼방을 놓고, 마침내 다른 피아니스트를 앞세워 채율의 수상을 방해하려고 든다. 항상 2인자에 머물러야 했던 노수창은 원동호를 꺾고, 채율까지 제 쪽으로 오게 하기 위한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마침내 대한민국 최대의 콩쿠르를 앞두고 그들은 운명 같은 피아노 대결을 펼치기 시작한다.

 

 

불현듯 노수창은 데칼코마니가 떠올랐다. 종이에 물감을 바르고 두겹으로 접었다 떼면 양편에 같은 무늬가 나타나는 회화 기법……. 반채율을 꺾어 피폐한 과거를 보상받고자 하는 귀인의 욕망은 원동호를 짓밟고 싶어 하는 노수창의 그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의 욕망은 한 쌍의 데칼코마니였고 그런 면에서 두 남녀는 환상의 복식조였다. / 301p

 

 

  소설은 피아노를 매개로 서로의 과거를 이해하고, 현실을 극복하려는 젊은 청춘들의 도전을 아름답게 그려나간다. 잘린 손가락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우고 용서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려는 원동호는 물론, 잃어버렸던 열정을 되찾아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려는 채율의 의지도 단단하게 채워나간다. 갈등은 피아노에서부터 비롯되었으나, 끝내 피아노로 봉합되는 과정 또한 담담하고 성숙하여 한 편의 청춘 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미지근한 감정선, 로맨스는 살짝 아쉬워

 

  이 소설에 있어 살짝 아쉬운 점이 있다면 두 남녀 주인공 사이에 오가는 기민한 감정선이 다소 무디다는 점이다. 함께 의기투합하여 위기를 이겨내고 서로의 성장에 힘이 되어주는 여느 청춘 드라마에서 그치기만 하는 것이 아쉽다. 연민과 인정으로 시작되었던 동호의 감정이 차츰 사랑으로 발전되기까지 보다 섬세하게 그려졌다면 어땠을까. 그것은 채율 또한 마찬가지여서 마음을 흔들어 파고드는 두 사람의 로맨스다운 장면이 부족했던 게 내내 서운하기까지 하다. 또한 몇몇 소개되는 피아노곡에 대한 묘사도 단조롭게 그쳤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했던 단점을 역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자면 전체적으로 감정에 얽혀 스토리가 처지거나 느슨하게 늘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장점으로 꼽을 만하다. 가독성이 높아 빠르게 잘 읽히며, 다양한 작품의 프로듀서로 활약한 저자의 이력을 감안하면 충분히 영상화될 만한 개성 있는 작품이라는 점이란 생각도 든다.

 

 

  흔히들 청춘이 아름다운 건 상처받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어떤 형태로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동호와 채율을 통해 우리는 밑바닥의 좌절과 모욕을 감내해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서로 의지하고 응원하다보면 마침내 밝은 무대에 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지금 이 땅에는 많은 용기와 용서가 필요한 때인 듯하다. 동호와 수창이 앙상블을 이룬 연주를 통해 용서와 화해의 길을 찾아갔듯 이 책을 통해 많은 청년들이 진심으로 서로를 안아줄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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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하 대한민국 스토리DNA 13
채만식 지음 / 새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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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린 시국 속에서 제 것만 지키고 있으면 태평천하라,

시대를 읽어 강렬한 풍자적 리얼리즘을 완성한 한국 문학의 대표작!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조선시대 이조 판서를 지낸 김상헌이 청나라로 끌려가며 지은 시 ‘가노라 삼각산아’에 나오는 구절이다. 때는 병자호란이 일어난 시점으로 당시의 시대가 꽤나 혼란스러웠음을 표현한 것이다. 역사 이래 태평성대한 때가 어디 자주 있었겠나만, 작금의 ‘하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이 거대한 혼란 속에서 태평천하를 찾을 길이 깜깜하게만 느껴진다. 이러고 보니 시대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날카로운 펜과 목소리를 냈던 이들의 뜻이 유독 사무친다. 일제강점기 시절 나라를 잃고도 민족의식이나 시대의식 따위 없이 그저 내 것만 지니고 있으면 이 땅이 태평천하라고 부르짖던 한 노인의 어긋난 시대상을 비판한 작품, <태평천하>가 바로 그러하다. 새삼 오늘에 와서, 아니 오늘에 견주어 하등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시절이지만은 이 고전이 그 어느 때 보다 더욱 와 닿는 이유는 시대에 대응하여 문학이 할 수 있는 사명과 존재론적 가치를 냉철하게 담아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만 빼놓고 다 망하라던, 윤직원 영감이 사는 법!

 

때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시대로, 느닷없이 졸부가 된 아버지 윤용규로부터 가산을 물려받아 이제껏 잘 키워온 노인 윤직원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72살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100kg이 넘는 홍안백발의 좋은 풍신에 오래 살고, 부유하고, 귀해 보이는 인상을 지녔으며 의관 또한 번지르르한 것이 누가 봐도 있는 집 대감으로 보임직 하다. 부패한 지주이자 은행에 넣어둔 돈과 고리대금업으로 이자를 받아가며 남부럽지 않을 부를 누리니 열다섯 살인 어린 기생을 애인으로 삼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가락 소리를 듣는 낙으로 사는 것 또한 영락없이 팔자 좋은 노인이라. 그러나 인색하기 짝이 없는 구두쇠, 자린고비 영감이라 인력거꾼의 삯을 깎아들려고 하질 않나 나라에 내는 세 마저도 흥정을 하고, 명창대회 구경을 가서 하등석 표를 끊어놓고 상등석에 기어코 앉는 등 옹색한 구석이 다분한 자이다. 심지어 진시황이 영생불사를 하고 싶어 불사약을 구하려고 다녔듯, 오줌도 먹고 보건체조도 하고, 좋은 보약도 먹고 해서 만석의 부를 길이길이 지키고 가문에 양반을 만들어 대대로 영광을 누리고자 혈안이 되었음이다. 큰 집안의 웃어른이자 넉넉한 자산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 뻔뻔한 면면들을 보고 있자면 우습기 짝이 없고 못나기도 이렇게 못날 수가 없다. 양반이나 지배층을 놀림거리로 삼았던 가면극이 그러하듯 우스꽝스러운 윤직원 영감의 행태들은 이 소설을 지배하는 풍자의 근거가 된다.

 

 

 

 

 

나라와 민족이 어찌되었든 일신의 안녕과 가족의 이익만을 오로지 중요시 여기는 윤직원 영감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 아버지 윤용규가 살아있었을 적에 화적떼가 들이닥쳐 집안의 남자란 남자는 반죽음이 되게 매질을 하고 가산을 훔쳐가는 것은 물론, 탐욕스러운 수령이 공연히 잡아다가 보석금을 받아 챙기기 일쑤이니 하루라도 마음 편안할 날이 없었다. 느닷없이 또 화적떼가 등장하여 옷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윤직원이 꽁무니에 불이 나도록 도망치던 시각, 숱하게 당하고 당한 것이 억울하고 분하였던 윤용규는 악에 받쳐 칼을 휘두르다 기어코 죽음을 맞게 되었다. 뒤늦게 돌아온 윤직원은 참혹하게 죽어 넘어진 부친의 시체를 안고 땅을 치며 울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나니 개인의 안전과 가솔들의 안녕을 지켜주지 못하는 나라 따위야 어찌 되든 망해버리라고 분노할 만하다. 고난과 풍파를 겪고 마침내 피까지 적신 재물인 만큼 한 푼에 벌벌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놈의 세상이 어느 날에 망하려느냐!”

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울음을 진정하고도 불끈 일어서 이를 부드득 갈면서,

“오-냐,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

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또한 웅장한 절규이었습니다. 아울러, 위대한 선언이었고요. / 60p

 

 

이러한 연유로 돈도 돈이지만 집안에 문벌을 세워야겠다는 그의 생각은 더욱 절실해졌을 것이다. 듬직한 뒷배나 연줄이 있어야 안위를 보장 받고 자신의 가문을 함부로 대하는 자가 없을 테니 말이다. 결국 그는 가문을 빛나게 할 네 가지 방책을 세운다. 이천 원의 돈을 들여 족보를 새롭게 꾸미기, 자신의 이름 앞에 직함이 붙어야겠으니 아쉬운 대로 학교의 우두머리 자리인 직원(直員)이라는 벼슬자리 구하기, 찢어지게 가난해도 양반집에서 며느리 구하기, 손자 둘이 있으니 하나는 군수요 하나는 경찰서장으로 양성하기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에도 버젓이 부정청탁과 부정입학으로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열심히 노력하는 자들을 짓밟고 올라가는 세상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세상이 오로지 자신의 재산과 안위를 지켜줄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라 믿는 그의 시대착오적인 발상은 옹호하기 어렵다. 이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부조리한 사회의 일그러진 정의와 윤리의식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제 소란한 시절은 갔다고, 이 얼마나 태평한 세상이냐고, 가진 자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세상을 이치로 삼는 그의 이기적이고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을 비판하려는 작가의 의식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송도 말년(松都末年)에는 쇠가 쇠를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던게 지금은 다 세태가 바뀌고, 을축갑자(乙丑甲子)로 되는 세상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겠지만, 쇠가 쇠를 낳기로 마련이니 그건 무슨 징조일는지요.

아무튼 그놈 돈이란 물건이 저희끼리 목족(睦族)은 무섭게 잘하는 놈인 모양입니다. 그렇길래 자꾸만 있는 데로만 모이지요? / 121p

 

 

 

새어나가는 바가지, 마음의 빈민굴!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 이러한데, 가족들이라고 해서 어디 올바른 사람이 있겠는가. 흥미롭게도 <태평천하> 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모순되거나 누구하나 바른 윤리관이나 사회의식을 지닌 이 하나 없다. 윤직원에서 아들 윤창식으로, 손자인 종수와 종학에게로 새끼를 치듯 이어지는 속물근성과 무너진 윤리기강은 전염병 같다. 모두들 하나같이 윤직원의 재산에 의지해 탕진만 해댈 뿐이고 건실하게 살뜰히 살피는 사람이 없으니 결말을 보지 않아도 이 집안이 어찌될지 불 보듯 뻔하다. 이러고 보면 몇 푼 쓰는 것이 아까워 혼자서 벌벌 떠는 윤직원의 모양새가 참 딱할 지경이지만, 집안이 콩가루가 되어 가는지도 모르고 어린 기생과 오입질 할 생각에 침을 흘리고 앉아 있는 꼬락서니를 보면 말을 다한 셈이다. 오늘날 입장에서 보았을 때 밖으로 도는 남편들 때문에 집안의 여자들 역시 한없이 무기력해있으며 소외된 채 그저 방치된 모양새도 참으로 불편하다. 이렇듯 윤용규로부터 5대째 자식과 또 그 자식들이 부를 누리고 살고 있지만 윤직원네 일가는 실상 언제 다 샐지 모르는 구멍 난 바가지이고, 헛헛하기 짝이 없는 마음의 빈민굴과 다름이 없다.

 

이렇게 생과부, 통과부, 떼과부로 과부 모를 부어 놓았으니 꽃모종이나 같았으면 춘삼월 제철을 기다려 이웃집에 갈라 주기나 하지요. 이건 모는 부어 놓고도 모종으로 갈라 줄 수도 없는 인간 모종이니 딱한 노릇입니다. / 73p

 

 

 

무너지는 태평천하

 

세상 다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마지막 희망은 있다고, 윤직원 영감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자랑이자 희망은 손자 종학이다. 동경에서 대학교를 다니며 착실하게 경찰서장이 될 발판을 마련하고 있는 그야 말로 집안의 보배이자 든든한 재산이다. 하지만 그 희망이 동경에서 날아온 전보 한 통에 만리장성이 무너져 내리듯 허물어진다. 사회주의에 동조하여 경시청에 붙들렸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사회주의라니, 가진 자가 편하게 살 수 있는 자유주의 세상을 두고 사회 전체의 이익을 생각해 재산을 나눠야 하는 사회주의에 다름 아닌 손자가 동참했다는 사실은 그를 절망에 빠뜨리게 한다. 일찌감치 윤직원은 일제 순사들 덕분에 흉악한 화적들이 사라지고, 중국과의 전쟁으로 사회주의를 막아내 주니 이토록 고마울 것이 없다며 적극적으로 일본을 옹호하거나 사회주의를 비방하였기에 종학의 소식은 더욱 비통하게 느껴진다.

 

 

“청국을……? 청국두 그놈의 사회주의라냐. 그 부랑당 속을 맨들어……? 그게 무어니무어니 하여두 이 사람아, 알구 보냉개루 바루 부랑당 속이지 별것이 아니데그려……? 자네는 모르리마넌 옛날 죄선두 활빈당(活貧黨)이라넝 게 있었너니. 그런디 그게 시체 그놈의 것 무엇이냐 사회주의허구 한속이더니…….” / 143p

 

“화적패가 있너냐아? 부랑당 같은 수령들이 있더냐……? 재신이 있대야 도적놈의 것이요, 목숨은 파리 목숨 같던 말세넌 다 지내가고오…… 자 부아라, 거리거리 순사요, 골골마다 공명헌 정사(政事),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남은 수십만 명 동병(動兵)을 히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히여 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제 것 지니고 앉아서 편안허게 살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구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그런디 이런 태평천하에 태어난 부자놈의 자식이, 더군다나 왜 지가 떵떵거리구 편안허게 살 것이지, 어찌서 지가 세상 망쳐 놀 부랑당패에 참섭을 헌담 말이여, 으응?” / 310p

 

 

지식인으로써 사회주의에 몸을 담은 종학을 그나마 긍정적인 인물로 보아야 하는가 하면 이 또한 의아하지만 어쨌든 태평천하라고 믿었던 윤직원의 세상은 사실 사상누각에 불과했다. <태평천하>는 이미 그 말 속에 수많은 반어와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었기에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결말이지만, 무엇보다 모두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던 작가의 투철한 사회의식에 감탄과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풍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일제강점기든, 2016년의 대한민국이든 우리들은 욕망의 그늘에서 멀찌감치 물러설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이러한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도, 시대가 급변하고 더욱 자유로워진다 하여도 시대의식은 오히려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불편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내내 지켜봐야하는 시대일수록 말이다.

 

 

시점이니, 문체니 하는 관념적 구조 속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고전의 매력에 빠져서 읽었다. 분명 학창시절에도 <태평천하>를 읽었을 텐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걸 보면, 학습에 얽매여 일부만 읽느라 이렇게 개성 있는 인물과 언어유희가 가득한 소설인줄도 모르고 읽었나보다. 고전은 영원하다더니,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점에서 올해에도 다양한 책들이 나왔지만 다시금 고전이 새로이 기획되고 계속해서 출간되는 것이 새삼 반갑다. 지금 읽어도 좋은 고전들은 자주 찾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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