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하 대한민국 스토리DNA 13
채만식 지음 / 새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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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린 시국 속에서 제 것만 지키고 있으면 태평천하라,

시대를 읽어 강렬한 풍자적 리얼리즘을 완성한 한국 문학의 대표작!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조선시대 이조 판서를 지낸 김상헌이 청나라로 끌려가며 지은 시 ‘가노라 삼각산아’에 나오는 구절이다. 때는 병자호란이 일어난 시점으로 당시의 시대가 꽤나 혼란스러웠음을 표현한 것이다. 역사 이래 태평성대한 때가 어디 자주 있었겠나만, 작금의 ‘하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이 거대한 혼란 속에서 태평천하를 찾을 길이 깜깜하게만 느껴진다. 이러고 보니 시대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날카로운 펜과 목소리를 냈던 이들의 뜻이 유독 사무친다. 일제강점기 시절 나라를 잃고도 민족의식이나 시대의식 따위 없이 그저 내 것만 지니고 있으면 이 땅이 태평천하라고 부르짖던 한 노인의 어긋난 시대상을 비판한 작품, <태평천하>가 바로 그러하다. 새삼 오늘에 와서, 아니 오늘에 견주어 하등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시절이지만은 이 고전이 그 어느 때 보다 더욱 와 닿는 이유는 시대에 대응하여 문학이 할 수 있는 사명과 존재론적 가치를 냉철하게 담아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만 빼놓고 다 망하라던, 윤직원 영감이 사는 법!

 

때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시대로, 느닷없이 졸부가 된 아버지 윤용규로부터 가산을 물려받아 이제껏 잘 키워온 노인 윤직원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72살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100kg이 넘는 홍안백발의 좋은 풍신에 오래 살고, 부유하고, 귀해 보이는 인상을 지녔으며 의관 또한 번지르르한 것이 누가 봐도 있는 집 대감으로 보임직 하다. 부패한 지주이자 은행에 넣어둔 돈과 고리대금업으로 이자를 받아가며 남부럽지 않을 부를 누리니 열다섯 살인 어린 기생을 애인으로 삼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가락 소리를 듣는 낙으로 사는 것 또한 영락없이 팔자 좋은 노인이라. 그러나 인색하기 짝이 없는 구두쇠, 자린고비 영감이라 인력거꾼의 삯을 깎아들려고 하질 않나 나라에 내는 세 마저도 흥정을 하고, 명창대회 구경을 가서 하등석 표를 끊어놓고 상등석에 기어코 앉는 등 옹색한 구석이 다분한 자이다. 심지어 진시황이 영생불사를 하고 싶어 불사약을 구하려고 다녔듯, 오줌도 먹고 보건체조도 하고, 좋은 보약도 먹고 해서 만석의 부를 길이길이 지키고 가문에 양반을 만들어 대대로 영광을 누리고자 혈안이 되었음이다. 큰 집안의 웃어른이자 넉넉한 자산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 뻔뻔한 면면들을 보고 있자면 우습기 짝이 없고 못나기도 이렇게 못날 수가 없다. 양반이나 지배층을 놀림거리로 삼았던 가면극이 그러하듯 우스꽝스러운 윤직원 영감의 행태들은 이 소설을 지배하는 풍자의 근거가 된다.

 

 

 

 

 

나라와 민족이 어찌되었든 일신의 안녕과 가족의 이익만을 오로지 중요시 여기는 윤직원 영감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 아버지 윤용규가 살아있었을 적에 화적떼가 들이닥쳐 집안의 남자란 남자는 반죽음이 되게 매질을 하고 가산을 훔쳐가는 것은 물론, 탐욕스러운 수령이 공연히 잡아다가 보석금을 받아 챙기기 일쑤이니 하루라도 마음 편안할 날이 없었다. 느닷없이 또 화적떼가 등장하여 옷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윤직원이 꽁무니에 불이 나도록 도망치던 시각, 숱하게 당하고 당한 것이 억울하고 분하였던 윤용규는 악에 받쳐 칼을 휘두르다 기어코 죽음을 맞게 되었다. 뒤늦게 돌아온 윤직원은 참혹하게 죽어 넘어진 부친의 시체를 안고 땅을 치며 울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나니 개인의 안전과 가솔들의 안녕을 지켜주지 못하는 나라 따위야 어찌 되든 망해버리라고 분노할 만하다. 고난과 풍파를 겪고 마침내 피까지 적신 재물인 만큼 한 푼에 벌벌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놈의 세상이 어느 날에 망하려느냐!”

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울음을 진정하고도 불끈 일어서 이를 부드득 갈면서,

“오-냐,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

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또한 웅장한 절규이었습니다. 아울러, 위대한 선언이었고요. / 60p

 

 

이러한 연유로 돈도 돈이지만 집안에 문벌을 세워야겠다는 그의 생각은 더욱 절실해졌을 것이다. 듬직한 뒷배나 연줄이 있어야 안위를 보장 받고 자신의 가문을 함부로 대하는 자가 없을 테니 말이다. 결국 그는 가문을 빛나게 할 네 가지 방책을 세운다. 이천 원의 돈을 들여 족보를 새롭게 꾸미기, 자신의 이름 앞에 직함이 붙어야겠으니 아쉬운 대로 학교의 우두머리 자리인 직원(直員)이라는 벼슬자리 구하기, 찢어지게 가난해도 양반집에서 며느리 구하기, 손자 둘이 있으니 하나는 군수요 하나는 경찰서장으로 양성하기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에도 버젓이 부정청탁과 부정입학으로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열심히 노력하는 자들을 짓밟고 올라가는 세상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세상이 오로지 자신의 재산과 안위를 지켜줄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라 믿는 그의 시대착오적인 발상은 옹호하기 어렵다. 이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부조리한 사회의 일그러진 정의와 윤리의식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제 소란한 시절은 갔다고, 이 얼마나 태평한 세상이냐고, 가진 자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세상을 이치로 삼는 그의 이기적이고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을 비판하려는 작가의 의식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송도 말년(松都末年)에는 쇠가 쇠를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던게 지금은 다 세태가 바뀌고, 을축갑자(乙丑甲子)로 되는 세상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겠지만, 쇠가 쇠를 낳기로 마련이니 그건 무슨 징조일는지요.

아무튼 그놈 돈이란 물건이 저희끼리 목족(睦族)은 무섭게 잘하는 놈인 모양입니다. 그렇길래 자꾸만 있는 데로만 모이지요? / 121p

 

 

 

새어나가는 바가지, 마음의 빈민굴!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 이러한데, 가족들이라고 해서 어디 올바른 사람이 있겠는가. 흥미롭게도 <태평천하> 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모순되거나 누구하나 바른 윤리관이나 사회의식을 지닌 이 하나 없다. 윤직원에서 아들 윤창식으로, 손자인 종수와 종학에게로 새끼를 치듯 이어지는 속물근성과 무너진 윤리기강은 전염병 같다. 모두들 하나같이 윤직원의 재산에 의지해 탕진만 해댈 뿐이고 건실하게 살뜰히 살피는 사람이 없으니 결말을 보지 않아도 이 집안이 어찌될지 불 보듯 뻔하다. 이러고 보면 몇 푼 쓰는 것이 아까워 혼자서 벌벌 떠는 윤직원의 모양새가 참 딱할 지경이지만, 집안이 콩가루가 되어 가는지도 모르고 어린 기생과 오입질 할 생각에 침을 흘리고 앉아 있는 꼬락서니를 보면 말을 다한 셈이다. 오늘날 입장에서 보았을 때 밖으로 도는 남편들 때문에 집안의 여자들 역시 한없이 무기력해있으며 소외된 채 그저 방치된 모양새도 참으로 불편하다. 이렇듯 윤용규로부터 5대째 자식과 또 그 자식들이 부를 누리고 살고 있지만 윤직원네 일가는 실상 언제 다 샐지 모르는 구멍 난 바가지이고, 헛헛하기 짝이 없는 마음의 빈민굴과 다름이 없다.

 

이렇게 생과부, 통과부, 떼과부로 과부 모를 부어 놓았으니 꽃모종이나 같았으면 춘삼월 제철을 기다려 이웃집에 갈라 주기나 하지요. 이건 모는 부어 놓고도 모종으로 갈라 줄 수도 없는 인간 모종이니 딱한 노릇입니다. / 73p

 

 

 

무너지는 태평천하

 

세상 다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마지막 희망은 있다고, 윤직원 영감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자랑이자 희망은 손자 종학이다. 동경에서 대학교를 다니며 착실하게 경찰서장이 될 발판을 마련하고 있는 그야 말로 집안의 보배이자 든든한 재산이다. 하지만 그 희망이 동경에서 날아온 전보 한 통에 만리장성이 무너져 내리듯 허물어진다. 사회주의에 동조하여 경시청에 붙들렸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사회주의라니, 가진 자가 편하게 살 수 있는 자유주의 세상을 두고 사회 전체의 이익을 생각해 재산을 나눠야 하는 사회주의에 다름 아닌 손자가 동참했다는 사실은 그를 절망에 빠뜨리게 한다. 일찌감치 윤직원은 일제 순사들 덕분에 흉악한 화적들이 사라지고, 중국과의 전쟁으로 사회주의를 막아내 주니 이토록 고마울 것이 없다며 적극적으로 일본을 옹호하거나 사회주의를 비방하였기에 종학의 소식은 더욱 비통하게 느껴진다.

 

 

“청국을……? 청국두 그놈의 사회주의라냐. 그 부랑당 속을 맨들어……? 그게 무어니무어니 하여두 이 사람아, 알구 보냉개루 바루 부랑당 속이지 별것이 아니데그려……? 자네는 모르리마넌 옛날 죄선두 활빈당(活貧黨)이라넝 게 있었너니. 그런디 그게 시체 그놈의 것 무엇이냐 사회주의허구 한속이더니…….” / 143p

 

“화적패가 있너냐아? 부랑당 같은 수령들이 있더냐……? 재신이 있대야 도적놈의 것이요, 목숨은 파리 목숨 같던 말세넌 다 지내가고오…… 자 부아라, 거리거리 순사요, 골골마다 공명헌 정사(政事),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남은 수십만 명 동병(動兵)을 히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히여 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제 것 지니고 앉아서 편안허게 살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구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그런디 이런 태평천하에 태어난 부자놈의 자식이, 더군다나 왜 지가 떵떵거리구 편안허게 살 것이지, 어찌서 지가 세상 망쳐 놀 부랑당패에 참섭을 헌담 말이여, 으응?” / 310p

 

 

지식인으로써 사회주의에 몸을 담은 종학을 그나마 긍정적인 인물로 보아야 하는가 하면 이 또한 의아하지만 어쨌든 태평천하라고 믿었던 윤직원의 세상은 사실 사상누각에 불과했다. <태평천하>는 이미 그 말 속에 수많은 반어와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었기에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결말이지만, 무엇보다 모두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던 작가의 투철한 사회의식에 감탄과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풍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일제강점기든, 2016년의 대한민국이든 우리들은 욕망의 그늘에서 멀찌감치 물러설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이러한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도, 시대가 급변하고 더욱 자유로워진다 하여도 시대의식은 오히려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불편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내내 지켜봐야하는 시대일수록 말이다.

 

 

시점이니, 문체니 하는 관념적 구조 속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고전의 매력에 빠져서 읽었다. 분명 학창시절에도 <태평천하>를 읽었을 텐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걸 보면, 학습에 얽매여 일부만 읽느라 이렇게 개성 있는 인물과 언어유희가 가득한 소설인줄도 모르고 읽었나보다. 고전은 영원하다더니,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점에서 올해에도 다양한 책들이 나왔지만 다시금 고전이 새로이 기획되고 계속해서 출간되는 것이 새삼 반갑다. 지금 읽어도 좋은 고전들은 자주 찾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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