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들여다보는 사람 - 한국화 그리는 전수민의 베니스 일기
전수민 지음 / 새움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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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빛의 도시 베니스, 그 이국적 일상에 예술을 담다!

한국화를 그리는 화가가 쓴 남다른 베니스 일기!

 

 

 

심상을 읽어내는 화가, 전수민

 

 

   ‘심상(心象)’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으로 풀이하자면, 감각에 의하여 획득한 이전의 경험이나 현상이 마음속에서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인상을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를 맡음으로써 알게 되는 모든 자극을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란, 바로 이 심상을 표현하는 매우 인상적인 작업이다. 그리고 화가는 심상을 자유로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멋진 예술가인 듯하다. 이런 이유로 나는 늘 화가를 동경해왔다. 기술적인 부분을 차치하고서라도 예민한 감각으로, 사물과 풍경의 이면에 어른거리는 심상을 읽어낼 줄 아는 화가만의 정서를 닮고 싶었다. 노력으로 다할 수 없는 이 아름답고도 놀라운 특권을 가질 수만 있었다면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 믿어왔을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나는 화가 자신만의 고유한 심상을 화폭에 담아낸 작품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 중에서도 전수민 화가의 작품은 이 심상을 잘 녹아내어 관람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자아내게 하는 매우 감각적인 화풍을 지녔다.

 

 

내 그림들은

깊은 그리움과 오랜 기다림으로 완성된 것들입니다.

한지 위에 켜켜이 색을 쌓아올려,

가슴 안에 층층이 포개진 그리움을 나만의 속도로 표현합니다.

‘느림’이란 이름의 그림들이, ‘빠름’이란 이름의 시름들을 거짓말처럼 거둬가요. / 225p

 

 

   그녀는 ‘인류 최초의 그림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있어 그리는 일이란 그저 보이는 것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이 아니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오직 마음으로만 보이는 것들을 조심스레 세상에 내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화를 그리는 화가답게 우리의 전통 한지를 선택해 그 위에 채색하는 형식을 사용한다.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성으로 색채를 덧입히고, 자연스럽게 스미어드는 ‘느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 그녀의 이러한 수고로운 작업은 이역만리 베니스에서 더욱 빛이 난다. 가장 이국적인 곳에서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하려는 그녀. 천 년 이상 보존이 되는 우리 종이만의 경이로운 힘을 믿으며 특유의 재질이 주는 까다로움을 고스란히 품는 그녀. 참 매력 있다.

 

 

돗자리를 펴고 한지를 펼쳤다.

긴 여정에도 지치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우리의 한지,

그 위로 자연스러운 얼룩이 번져나간다.

이역만리 베니스에서도 한지의 매력과 위력은 고스란하다.

은근한 빛을 뽐내지 않고 뿜어낸다. / 30p

 

 

 

 

 

 

물과 빛의 도시, 마주하는 모든 순간이 그림이다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은 바로 예술가의 고장 베니스로 떠난 그녀가 한 달 동안 머무르며 보고 느낀 심상들을 써낸 일기이자,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한 여정을 담은 에세이다. 서른 한 편의 일기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 독특한 화가의 보다 특별하고 유별난 정서에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다니던 회사에서 승진한 날 사직서를 내고, 늘 ‘죽음’을 가까이 느끼며 유서 쓰기를 취미로 삼을 뿐만 아니라 농민의 자손이랍시고 베니스에서도 현지 음식이 아닌 매번 손수 차린 쌀밥을 고집한다. 지독한 길치라서 줄곧 ‘직진 산책’만 해야 했으며, 유년 시절에 목욕탕에 빠져 죽을 뻔했던 일을 계기로 정작 물의 고장인 베니스에 와서 물을 겁내는 참 재미있는 이력을 지녔다.

 

 

   그래서일까, 베니스의 한 스튜디오에 입주 작가로 선정된 일을 계기로 낯선 베니스에서 머무르게 된 그녀는 마치 새로운 우주 속에 몸이 내던져진 듯 불안하고 조심스러워 보인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가질 법한 설렘, 두근거림, 흥분된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마음을 나직이 써내려 간다. 베니스의 스튜디오에 도착해 마치 ‘최초의 인간’이 된 것 같다던 그녀의 고백은 늘 ‘죽음’을 유예하며 살아온 입장에서 남다른 감정을 느끼게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그녀는 단출하게 준비해온 옷을 꺼내 옷걸이에 걸고, 몇 자루의 붓과 팔레트와 종이, 물감과 같은 최소한의 도구로 스튜디오의 한 공간에 스스로를 안착시키면서 차분하게 새로운 세상과 마주할 준비를 해나간다.

 

 

 

“세상천지 내 돗자리 펼치는 곳이 다 내 작업실이다.”

흠… 과연 이렇게 말해도 괜찮을까요? 아마 괜찮을 거예요.

계속 기운 내서 그럴게요.

생각은 진작부터 그랬고,

이미 아무 데서나 잘도 그려요.

평생 붓을 들겠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라도’가 포함되는 다짐이 아닐까 해요. / 32p

 

 

   산타루시아 역 부근의 오래된 건물 사이 낮은 차양을 친 상점들, 일상이 녹아들어 있는 시장, 베니스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대운하와 리알토 다리, 바스텔 톤의 아기자기한 건물들, 소박한 메스트레의 화방, 천사 같은 꼬마들을 만난 리도 섬, 종소리로 가득찬 베니스 중심가 뒤편의 작은 광장, 오페라의 도시 베로나에서 만난 야경 등. 그녀는 베니스의 아름다움을 과하게 수식하지 않는다. 은은하고, 담담하게 글로 써내려간다. 물과 빛의 도시라 불리는 베니스의 풍경이 책의 곳곳에서 잔잔하게 너울거린다. 특히 짧은 여행이나 관광이었다면 알지 못했을 이탈리아의 종잡을 수 없는 매력과 산 경험들이 빛을 발한다. 무엇보다 스튜디오 내에서 함께 머무르며 새로운 친구들과 공유한 소소한 일상들이 베니스에서의 생활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것이 한 데 어우러져 그녀는 한 폭의 동화 같은 작품들을 완성해낸다.

 

 

베니스에서 본 풍경들은 마치 동화와 같았지요.

이탈리아 물감은 그래서 좀 다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캔버스라는 문이 있는데, 색깔은 약간의 물과 함께 통과하게 돼요.

초록이었는데 그 문을 통과하면 짙은 녹색이 되는 것이죠.

진한 분홍이었는데 그 문을 통과하면 빨강이 되고요. / 170p

 

 

 

 

 

 

오래오래 들여다보는 사람

 

   때로 우리는 가장 낯선 곳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민낯과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되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베니스의 풍경이 보고 싶어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그녀가 이 먼 거리를 떠나왔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완성된 그림과 마찬가지라서 베니스의 풍경을 사진처럼 그림에 담는 작업이란 그녀에게 중요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책은 다양하고도 이국적인 풍경을 잘 찍은 사진처럼 애써 담아내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베니스의 풍경들을 가이드처럼 상세하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보다 그녀는 낯선 베니스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에 보다 마음을 두고 있었으리라. 자신의 작업에 가장 영향을 끼치는 것은 역시 ‘나 자신의 문제’라던 그녀의 글처럼 심상을 통해 심연을 마주하는 일, 그 자체가 그녀에게는 예술이었을 것이다.

 

 

마음을 진정시킬 때 색연필을 깎는다.

나무 꺼풀이 얇게 벗겨지고,

색색의 심지들이 천천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내 마음의 심지는 어떤 것일까.

색연필을 깎으면서 내 마음을 추스른다.

자주 깎지는 않는다.

마음에 늘 진정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 42p

 

 

 

나는 평생 꼭 예술가로 살아가고 싶어요.

언젠가 엄마에게 힘들다고 했더니,

“그럼 너무 애쓰지 말고 형편이 나아지면 그림을 그리는 게 어때.” 말씀하셔서

겁에 질리고 말았어요.

나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지금 여기를 살고 싶습니다.

바로 지금, 이곳에서, 물러나지 않고,

나 자신이 주인이 되어 완전히 연소하면서. / 205p

 

 

 

 

 

   에피소드 중, 한 그림 앞에서 그것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을 찍은 사진이 인상적이다. 세상의 모든 경이로운 것들은 오래 들여다보게 하는 힘을 지닌 듯하다. 거꾸로 말해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야 말로 세상을 경이롭게 느낄 수 있는 게 아닐까. 이 땅의 모든 것들, 사람도, 나도. 결국엔 오래 들여다보아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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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너머에 사람이 있다 - 16년차 부장검사가 쓴 법과 정의, 그 경계의 기록
안종오 지음 / 다산지식하우스(다산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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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차 부장검사가 쓴 진짜 검사 이야기!

사건과 사고 너머에 존재하는 사람을 이해하려한 한 남자의 인생!

 

 

 

   각종 미디어에서 다루는 검사의 이미지는 법 앞에서 엄정한 잣대의 칼날을 드리우는 심판자에 가깝다. 즉, 그들은 피의자를 기소하여 그에 합당한 형벌을 받게 하기 위해 냉철하게 사건을 파헤치고, 냉정하게 심판대에 올리는 역할을 한다. 애석하게도 다수의 드라마와 영화에서 검사를 부정한 이미지에 함몰시키는 바람에 마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로 퇴색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런데 최근 대통령이 연루된 중차대한 일로 특별검사들에 관해 관심이 집중되면서 그들의 역할론이 부상하고 있다. 나 역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특검의 고군분투를 지켜본 이후, 법과 정의 앞에서 사력을 다하는 그들에게 응원과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때마침 아주 흥미로운 에세이 하나가 출간되었다. 법무연수원에서 신임검사들을 가르친 16년차 부장검사가 쓴 진짜 검사 이야기다. 아울러 검사라는 무게를 벗어던지고, 사건 사고 속 너머에 존재하는 ‘사람’의 가치를 먼저 들여다본 한 남자의 인생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건 하나에 적어도 하나의 인생이 걸려 있다

 

 

   ‘내가 겪어본 검사라는 직업은 사람들에게 인간적인 삶을 나눠주는 일이었다.’

   저자는 오랫동안 검찰청에서 수사와 공판업무를 담당해온 검사로 자신의 직업을 이렇게 정의한다. 자칫 잘못 휘두르는 칼날에 누군가의 인생이 세상 밖으로 떠밀려나갈지 모르며, 그 위험을 감수하기엔 단순히 투철한 정의감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듯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가 말한 정의는 법이라는 잣대가 아닌, 보다 인간적인 존중과 포용이 선행되는 데에서 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책에서는 실제 그가 담당한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검사라는 직업 안에서 겪는 다양한 인간적인 고뇌들을 느낄 수 있다.

 

 

    

 

 

   아무래도 아이를 둔 엄마의 입장이다 보니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첫 장인 ‘취급주의’였다. 열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영업이 끝난 횟집만을 골라 수족관에 달린 산소 공급기의 콘센트를 뽑아 물고기를 죽게 만들었다. 다섯 곳이나 돌아다니며 금고에서 돈을 훔치기도 했는데 고작 5만 원이 조금 안 된다. 알고 보니 소년은 일흔다섯 살의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고, 부모가 이혼을 하면서 자꾸 밖으로 나돌게 되다보니 용돈이 떨어져 범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었다. 횟집만 들어가게 된 사연은 즉, 유독 회를 좋아하는 할머니에게 지금 자신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보니 횟집만 보면 그냥 화가 많이 난 것이라고 한다. 사건으로 하여금 저자는 자신의 유년시절을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손녀를 끔찍하게도 아꼈던 외조부모님의 사랑 덕분에 그 사랑을 거름 삼아 평생을 튼튼한 나무처럼 살아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연세대 김주환 교수의 『회복탄력성』에도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어려움이 닥쳐도 이를 극복하며, 원래보다 더 나은 위치로 튀어오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다보니 이 소년의 사연에 날카로운 법의 잣대만을 들이대기엔 어쩐지 마음이 석연치 않다.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 대부분은 남다른 집안 사정이나 가정불화로 인해 제대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소년처럼 마음 한구석에 따뜻함이 남아 있는 녀석은 조심히 잘 다루어야 한다. 이대로 부서져버리든가, 아니면 좀 더 단단해지든가 기로에 서있는 것이다. / 19p

 

 

   때마침 소년의 할머니가 찾아와 손자의 선처를 부탁한다. 착한 손자가 자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 양 자책하는 것이 안쓰럽다. 다행히도 별다른 전과가 없는 아이이다 보니 수사관을 통해 피해를 입은 횟집 주인들에게 그 아이의 현재 상황을 간곡히 설명하고 처벌불원서를 받을 수 있었다. 석방하기 전 할머니 혼자서 아이를 관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 하에 소년 사범 관리에 전문성을 가진 법사랑 위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덕분에, 소년은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학교에 잘 다닌다고 한다. 구속된 경험이 ‘낙인’이 아닌, 인생에 반전을 가져다준 ‘기회’가 되기를 소망했던 저자의 인간적인 독려가 마음에 위안을 주는 이야기다. 아울러 중3인 아들에게 엄마와 아빠로부터 사랑받았던 장면을 떠올리며 어려움을 극복하고 튀어올랐으면 좋겠다는 글 역시, 한 아이의 인생에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이 외에도 저자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검사실은 물론 법정에서 오가는 다양한 삶의 편린과 때로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기도 하는 그 엄중한 현실을 담담하게 풀어나간다.

 

 

나는 그 인생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바라볼 수 있는 배심원도 아니고 지나가는 행인도 아니다. 그들의 먼 미래를 바꿀 수는 없어도 눈앞에 닥친 상황에 작게나마 영향을 미쳐야 하는 검사다. 삶과 죽음, 피해자와 피의자, 분노와 처절함으로 들끓는 인생의 도가니를 지켜보는 이 순간이 두렵지만, 그들의 인생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것 또한 검사라는 직업의 비애다. / 49p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

 

 

   저자는 한때 공황장애를 겪기도 했다. 검사 경력을 한창 꽃피우려고 하는 시기에 찾아온 불행이었다. 완벽주의적인 성격이 문제였다고 한다. 지적받지 않도록 완벽하게 하려다 보니 일하는 내내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지적을 받으면 자존감이 무너져 내리는 악순환을 반복하다가 탈이 난 것이다. 주말을 반납하고 아이들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사무실에 나가 일처리에 몰두하고, 자신을 사정없이 몰아붙이는 업무의 강도에 체력적인 한계를 느꼈다. 아마도 오늘날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이와 같은 고충을 겪고 있으리라. 저자는 이를 헤쳐 나가기 위해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특히 나는 더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려고 했다. 때마침 지도부에서 강력부의 수석검사를 제의해왔지만, 그는 감당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반려했다. 이 때문에 뒤에서 ‘건방진 놈’이란 말까지 들어야 했지만 그는 몰아붙이듯 살아왔던 인생을 재정립하고 자신과 맞지 않는 과거의 프레임에서 빠져나오는 게 더 중요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스스로와 대화를 나누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개인사의 아픔까지 담담하게 서술한 그의 이야기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큰 위로가 되는 듯하다.

 

 

뭔가를 시작하기 전부터 정답이나 결과를 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결과를 구하는 여정에서 모든 것을 확신하기에는 우리가 너무도 불완전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그저 완전함에 다가가기 위해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할 뿐이다. / 131p

 

나는 검사가 ‘되려고’ 했던가? 검사를 ‘하려고’ 했던가? 나는 검사를 ‘하려’ 했던 것이다. 검사를 하면서 나를 성장시키고 그곳에서 보람을 찾으려 했었다. 커다랗고 시커먼 건물 앞 계단에서 잠시 쉬면서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다. 역시 문제가 생기면 문제에서 약간 떨어져 쉬어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 말했다. 인생은 주스 같아서 흔들어서 밑에 깔린 알갱이들을 섞어야 맛있다고. 가끔씩 흔들리는 내 삶 역시 그 맛을 더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 280p

 

 

  끝으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한 아내의 남편이자, 아이들 아빠로써의 모습이었다. 아이들을 홀로 키워내느라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온 아내가 우울증에 걸리면서 그는 자신을 자책했다고 한다. ‘다음에’라는 말로 아이들과 놀러가기를 약속한 일은 제대로 실천한 적이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이 든 그는 주말 근무는 하지 않고 낮 시간에 업무를 집중적으로 처리하고 일찍 귀가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나 단기적 처방에 불과하다고 여긴 그는 국외 훈련을 신청했고, 가족과 함께 하겠다는 일념으로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냈다. 덕분에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한결같이 가족의 소중함을 잊지 않는다. 아플 때 절망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희망을 보려고 애쓴 저자의 경험이 여타의 많은 자기계발서와 희망에세이보다 진솔하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올봄부터 퇴근해서 현관에 들어서면 먼저 아들의 운동화를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끈이 풀어져 있거나 느슨하게 죄어 있으면 바로 앉아서 그것들을 고쳐 맨다.

어차피 아들은 머지않아 신발 끈을 단단히 묶는 방법에 익숙해질 것이다. 주위 사람들도 아들의 신발 끈보다는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는 품성을 보려고 할 것이 분명하다. 그냥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 229p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사건 사고 속에서 빛을 발휘한 검사의 활약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에 녹아 있는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메시지들이 뜻밖의 감정들을 선물해주었다. 냉혹한 세계 속에서도 사람을 먼저 보려고 했던 그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깊은 애환과 격려를 느낄 수 있어서 매우 뜻 깊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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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거 - 행동의 방아쇠를 당기는 힘
마셜 골드스미스.마크 라이터 지음, 김준수 옮김 / 다산북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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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행동하게 만드는 인생의 방아쇠를 당겨라!

긍정적인 삶의 변화를 이끄는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다!

 

 

 

   2017년도 벌써 두 달이 흘러 3월에 이르렀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새해인 1월 1일보다 3월 1일에 보다 새로운 시작과 변화를 다짐하게 되는 나로서는 자기계발서의 힘을 빌려 자기변화의 강력한 동기를 찾아볼 시도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단순하지만 매우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표지의 <트리거>에 주목했다. 그도 그럴 것이 1회에 2억 5000만원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며 구글도, 골드만삭스도, 보잉도 이 책의 저자인 골드스미스 박사에게서 자문을 구하였다 하니 그 어떤 자기계발서보다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비싼 수임료를 지불하지 않고도 이 세계적인 리더십 구루의 담론과 통찰을 한 권의 책을 통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무엇보다 계획이 해마다 제자리걸음인 상태를 반전시킬만한 아주 강력한 조언들이 담겨있을 것만 같아 기대가 되는 책이었다.

 

 

나를 흔드는 심리적 방아쇠, 트리거

 

   트리거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심리적 자극을 말한다. 일종의 ‘동기’와 유사한 느낌이지만, 우리가 깨어 있는 매 순간 우리를 바꿀 수 있는 사람, 사건, 환경 등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주는 모든 자극이라는 점에서 보다 다면적이다. 트리거는 매우 사소한 순간들, 나를 유쾌하게 만드는 것들, 해가 되게 만드는 것들 등 우리 주변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트리거로 인해 각종 변화를 계획하고 실행하려고 하지만, 또한 트리거로 인해 체념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트리거라 할 수 있는 주변 환경에 쉽게 휘둘리기 때문이다. 다이어트를 방해하는 음식 냄새, 아이 엄마이기 이전에 여자로써의 삶을 살고 싶지만 여의치 않는 육아 환경, 사랑하는 여인과의 데이트를 방해하는 휴대폰 알림음 등 주변 환경은 항상 우리 편에 서주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환경을 대부분 통제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하거나 자신은 환경의 희생양일 뿐이라 변명한다. 이런 점에 근거하여 우리 행동은 환경에 지배를 받으며 이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이 마셜 골드스미스가 이 책을 통해 주장하는 바이다.

 

 

우리가 환경을 마치 사람처럼 생각했으면 한다. 테이블 너머 마주앉은 현실의 적이라고 말이다. 환경은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 무정형의 공간이 아니다. 우리 주변의 환경이란, 우리의 행동에 지속적인 자극을 주며 멈추는 법이 없는 트리거 메커니즘이기에 결코 간과할 수 없다. / 46p

 

 

   권투선수이자 철학자인 마이크 타이슨이 “누구나 얼굴에 한 방 맞기 전까지는 계획을 갖고 있다.” 하였듯, 우리가 인생이란 길을 헤맬 때 우리의 얼굴을 수없이 두들기는 상대는 바로 우리가 처한 환경이며 이를 제어하지 못하면 환경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변 환경에 대한 세밀한 이해는 반드시 필요하다. 변화하려는 결심, 변화 과정에 대한 이해와 능력뿐 아니라 정말 자신이 변할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도 극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환경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우리가 우선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바로 ‘예측’이라고 말한다. 위험한 환경에 대한 예상, 환경에 대한 가장 현명한 대처가 될 수 있는 회피, 환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응을 하는 단계를 통해 우리 내부의 계획가와 실행가 사이의 갈등을 해소해나가는 첫걸음으로 삼으라고 말한다.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한 첫걸음

 

   1장에서 원하는 내가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트리거들을 살펴보았다면, 2장에서는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한 방법의 트리거들을 일러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능동적 질문을 트리거로 활용하는 방법이다. 그는 세 가지 그룹으로 나눠서 실시한 연구를 통해 수동적인 질문과 능동적인 질문이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는지 살펴보았다. 이를 테면 ‘당신은 오늘 얼마나 행복했습니까?, 당신의 하루는 얼마나 의미 있었습니까?’ 와 같은 수동적인 질문 보다 ‘당신은 행복하려 최선을 다했습니까?, 당신은 의미를 찾으려 최선을 다했습니까?’ 와 같은 능동적인 질문들이 놀라울 정도로 행동 촉구를 일으켰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1. 나는 명확한 목표를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가?

2. 나는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데 최선을 다했는가?

3. 나는 의미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가?

4. 나는 행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가?

5. 나는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는가?

6. 나는 완벽히 몰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가? / 281p

 

 

   수동적인 질문들은 결국 환경을 탓하며 면죄부를 주지만 ‘~에 최선을 다했는가?’ 와 같은 능동적인 질문들은 내 노력을 스스로 측정함으로써, 이 평가를 의미 있게 하기 위해 보다 뚜렷한 노력을 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고작 질문에 변화를 주었을 뿐인데 노력의 트리거, 행동하게 만드는 강력한 트리거를 만든 셈이다. 저자는 이러한 능동적인 질문들을 반드시 매일, ‘하루 질문’의 형태로 실천한다면 누구든지, 그것이 무엇이든 변화하고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단, 이 목록들이 내 인생에서 중요한가, 이 목록에서 성공을 거두는 게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일에 도움이 되는가는 하루 질문을 하는 데 있어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체계가 필요한 이유

 

   내가 처음으로 취직을 한 회사에서는 매주 월요일 아침에 주간 일정표를 작성하게 하고, 매월 1일에는 월간 일정표를 작성하게 했다. 직원이 스스로 일정을 짜고, 자발적으로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이 시스템은 오너가 크게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꽤 합리적인 시스템인 것은 분명했다. 다만, 융통성이 없다는 것이 흠인데 미리 계획을 설정하다보니 당일에 일어나게 되는 다양한 변수들이 불쑥불쑥 업무를 차지해 목표했던 일자의 계획을 반드시 처리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직원들 사이에서는 늘 불평불만이 잇따랐다. 하지만 회사의 입장에서는 제멋대로인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스템으로 이와 같은 ‘체계’가 필요했다. 그저 그날그날의 업무에만 충실해서는 목표하는 업무에 대한 큰 그림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책의 저자 역시 개인의 목표이든, 조직의 목표이든 체계 없이는 나아갈 수 없으며, 긍정적인 책임감과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체계의 특성을 반드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사회심리학자인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자아강도’과 ‘자아고갈’라는 용어를 통해 유혹에 저항하고, 균형을 유지하고, 욕망을 억누르고, 생각과 표현을 조절하고, 타인의 규칙을 지키는 등 자기를 규제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 우리의 자아가 점차 약해져 고갈되어 간다고 설명한다. 실제 사례로 2011년 이스라엘의 가석방 위원회가 내린 1100건의 결정을 조사한 연구를 드는데, 연구자들은 이 위원회가 아침 일찍 내린 가석방 승인률은 70퍼센트에 달하는 반면, 오후에는 승인률이 10퍼센트로 떨어진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는 신체, 결정, 유혹, 인간관계 등 다양한 방면에 영향을 미친다. 이때 체계야말로 우리가 고갈을 극복하는 방법이 된다. 저자는 여기에서 앞서 밝힌 하루 질문을 변용하면 간단한 체계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단기적 과제가 주어졌을 때는 하루 질문이 아니라 ‘매시간 질문’으로 실천해보자. 가기 싫은 행사에 가야 한다거나 동료들과 억지로 친한 척 어울려야 하는 회사 야유회, 또는 온갖 친척들이 다 모여 스트레스를 받는 명절 등과 같이 정해진 제한 시간 동안만 우리의 충동을 제약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매시간 질문으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극복할 수 있다.

 

 

서로가 상대의 트리거가 되어라

 

   이렇듯 <트리거>는 우리의 행동 변화를 촉구하는 자기계발서이다. 우리의 행동 변화를 제약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어떤 변화라도 아예 변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점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 그가 바라는 점이다. 그는 마지막 장에 이르러 딱 하나의 변화, 딱 한 가지 트리거가 될 수 있는 행동을 떠올려보라고 말한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일 말이다. 잔인하게 굴었던 친구에게 사과하거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지속가능하고 서로가 상대의 트리거가 되어 내가 바뀐 덕분에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나아지게 하는 자발적인 변화가 중요하다.

 

 

자신의 행동 변화에 모든 걸 걸고, 100퍼센트의 집중력과 에너지를 투입한다면 제아무리 요지부동인 상대라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이다. 환경에 의해 변하기 전에 환경을 먼저 변화시켜야 한다.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그걸 느끼게 될 것이다. 바로 우리 자신이 변화의 트리거가 되는 것이다. / 273p

 

가장 긍정적인 형태는, 서로가 상대의 트리거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참여의 순환고리를 계속 돌리고, 그럼으로써 그 순환고리는 더욱 단단해진다. / 288p

 

 

   이 책은 육아 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 꽤 실용적이라고 할 만한 책은 분명 아니었다. 저자가 언급하는 여러 사례로 비추어볼 때 비즈니스와 리더십,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는 사회적 입장에서 보다 효율적일 듯하다. 그럼에도 이제껏 환경을 탓하고,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스스로 만족해하며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나의 태도를 반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했는가?’라는 질문을 함으로써 ‘몰입’이라는 행동의 방아쇠를 당길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2017년을 되돌아보았을 때,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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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틴 피스토리우스.메건 로이드 데이비스 지음, 이유진 옮김 / 푸른숲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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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인간으로 병상에서 생의 모든 것을 잃은 남자,

절망을 딛고 빛나는 생의 의지로 다시 태어난 위대한 실화!

 

 

   읽고 싶은 책을 선정할 때 저마다 특정한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저자, 책 소개, 표지 디자인 등 독자를 유혹하는 책의 매력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수많은 페이지의 모든 정보를 하나로 압축해 오롯이 담아내는 그릇, 바로 ‘제목’을 꼽을 수 있다. 어떤 분야의 책인가에 따라 제목의 형태는 제각각이지만 이토록 직관적이고도 숨이 덜컥 막히게 하는 제목이 또 있을까.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라니. 나는 책의 제목을 마주하는 순간, 머릿속에 불편하고 어둑한 그림들로 가득차서 속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 누구도 아닌 엄마라는 생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자신에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무엇인지 궁금하거니와 그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큰 공포와 좌절감을 느꼈을지는 감히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였다. 그만큼 자극적이고, 그래서 더욱 궁금했지만 책속에는 이보다 더한 충격적인 실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이라는 탈출할 수 없는 감옥에 갇힌 남자

 

 

   책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유령 소년, 소리 없는 목격자, 정신이 유일한 소유물이 된 남자가 등장한다. 이 모두는 바로 열두 살이 되던 해에 갑자기 알 수 없는 병으로 사지가 마비되어 식물인간이 된 남자, 마틴 피스토리우스가 스스로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도시 근교에 있는 돌봄시설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의식 불명의 상태에서 깨어나 정신이 돌아왔지만 움직일 수 없는 몸 안에 갇힌 채 목소리를 낼 수도, 깨어났다고 신호를 보내거나 알릴 수 없는 상태로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다시 살아나고 있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늘 가족과 요양사들에게 ‘나 여기 있어요, 안 보여요?’ 하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애쓰지만 소리 없는 절망만이 심연으로 파고들 뿐이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게 한 것은 그가 마치 아무런 감정도,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투명인간 취급을 당할 때였다. 어떤 이들은 화가 났을 때 그의 옷을 평소보다 거칠게 벗기거나,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등 차마 입에 담기에도 죄스러운 불경한 짓을 저지르기도 한다. 자신의 몸을 가리켜 ‘어두운 욕구를 마음껏 칠할 수 있는 빈 캔버스’나 다름없다고 자조하는 그의 표현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이들에게 무례하고 교만한 지 반성하게 하는 대목이다.

 

 

나를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는 그저 일거리였다. 요양사들에게는 수년간 같은 곳에 머물러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익숙한 붙박이 가구였다. 부모님이 집을 떠나 있어야 할 때 나를 보냈던 돌봄 기관의 복지사들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환자였다. 나를 진료한 의사들에게 나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대상이었다. 어느 의사가 동료에게 엑스레이 촬영대에 누워 있는 내 모습이 마치 불가사리 같다고 말했듯이. / 31p

 

 

나는 무엇보다 누구든 나를 좀 바라봐주길 바랐다. 나를 본다면 내 얼굴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분명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공포였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고 있었다. 나에게도 감정이 있었다. 나는 그저 유령 소년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바라봐주지 않았다. / 211p

 

 

   그의 불행은 주변 사람들에게 단순히 가엾고 불편한 존재로써 끝나지 않는다. 장애와 질병의 불행이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아빠에게서는 진급의 기회를 앗아감과 동시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았고, 엄마에게서는 정규직을 포기하는 것은 물론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안겨줌으로써 자살시도라는 극단적인 선택에 미치게까지 했다. 그들의 고립감은 마틴의 동생들에게도 전염되었다. 마틴으로서는 가족의 꿈과 희망을 앗아간 것에 대한 회한과 자책으로 되돌아옴으로써 그를 더욱 좀먹게 했다.

 

 

내가 결코 잊지 못할 다툼이 있다. 아빠가 나가버리자 홀로 남은 엄마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던 날이다. 엄마는 손을 부르쥔 채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가슴속에서 날것으로 흘러나온 슬픔을 느꼈다. 엄마는 너무나 외롭고, 혼란스럽고, 절망적으로 보였다. 나는 엄마를 위로하고 싶었다. 휠체어에서 일어나 이렇게 크나큰 고통을 초래한 육신의 껍데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엄마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네가 죽었어야 해.” / 86p

 

 

 

 

 

 

위로, 위로, 다시 떠오르기 위한 도약

 

 

   이대로 몸에 갇혀 죽을 것만 같았던 그에게 뜻밖의 기적이 찾아온다. 그가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이는 간병인 버니로, 그녀는 마틴의 부모에게 그가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는 것 같다고 말하며 검사를 해보자는 제안을 한다. 그녀는 가족을 제외하고 마틴에게 생의 의지를 북돋아 준 가장 첫 은인이 된 셈이다. 의사소통센터에서 그의 인지 기능을 테스트해 본 것을 계기로 마침내, 그는 의사소통 기기를 이용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상황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그리드를 만들어내 컴퓨터에 입력하면 그가 여러 스위치 가운데 하나를 손으로 눌러 하고 싶은 말을 고르는 방법이다. 이를 음성으로 변환하는 작업을 통해 그는 마침내 ‘대화’라는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시도들을 하게 된다.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여기에 전념하는 필사의 노력을 거듭한다. 이후 그는 몸을 전보다 더 많이 사용하게 되면서 몸 구석구석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을 느낀다. 또한 컴퓨터 시스템을 이해하는 특유의 직관력을 지니고 있었던 탓에 이와 관련된 업무를 맡아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기도 한다. 곳곳에서 그의 기적과도 같은 일들을 들어보고자 강연 요청도 끊이지 않는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큰 희망을 얻게 된다. 이렇듯 그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엿한 사회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헌신과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얻은 사랑이라는 위대한 힘이었다. 특히, 그의 아버지가 보여준 굳건한 사랑과 믿음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비롯된 유산과도 같아서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 우리의 빈약하고 얄팍한 감정의 울타리를 견고하게 만드는 것은 역시 가족 안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아빠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남녀 간의 사랑에 관한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사랑의 모습은 때로는 헹크와 애리에타의 경우처럼 유희에 가까울 때도 있고, 잉그리드와 데이브의 사례처럼 평화로울 때도 있다. 그러나 정말 운이 좋다면, 지디와 미미처럼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을 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랑은 한 사람에게서 또 다른 사람에게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누구에게나 포근한 위안을 주는 생명의 힘처럼, 두 사람을 굳건하게 해준 숱한 풍파 속에서 빚어진 기억을 어루만지고 새로이 피어나게 한다. / 235p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극복할 수 있는

 

 

   그는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여인 조애나를 만나 가정을 이루며 독립의 길로 나아간다. 이 기적적인 스토리는 언뜻 보면 희망만을 담고 있는 듯하지만, 여전히 그는 갈등을 야기하는 내면의 두 세계와 맞서야 하는 기로에 서곤 한다. 항상 타인의 도움을 받아 살아온 탓에 선택이라는 것을 해야 할 때면 늘 망설이게 되고, 여전히 신체적인 한계에 부딪혀 수동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표출할 수 없어 늘 짓누르며 살아옴으로써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의사소통을 할 때 필요한 노트북이 없으면 다시 유령 소년의 그림자가 드리울 것이라는 공포감도 감출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도와주는 이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된 이 모든 기회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한다. 의사소통을 시작한 이후로 줄곧 일과 공부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애써왔지만 뭔가를 보여줄 필요가 없는 유일한 존재, 조애나를 만나면서 타인과 똑같은 사람으로 스스로를 껴안는다.

 

 

인생은 흑백이 아니라 무수한 회색 그림자로 이루어졌음을 깨달으면서 나는 때로 틀릴지언정 점차 나의 판단을 믿는 법을 배웠다. 내가 배운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하는 일이었다. / 286p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가 장애를 다룬 기존의 작품들과 차별화되는 것은, 장애를 겪고 있는 이가 직접 목소리를 내고 의식을 흐름을 쫓아 기술하는 진정성에 있는 듯하다. 짖거나 물리지 못하게 중성화 수술을 한 개가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던 그의 말처럼, 사랑에 대한 열망과 감정을 가진 똑같은 인격체로써 진심 어린 메시지를 전한다. 제목은 자극적이지만 그 어느 책보다 따뜻한 희망을 얻을 수 있는 책이었다는 점에서 나름 반전이라면 반전이랄까. 이 책을 읽으며 장애를 지닌 이들을 고립시키는 건 아무 기회도 주지 않는 사회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들도 사회에 영감을 줄 수 있는 소중한 인격체이자 존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우리 모두가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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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
김진명 지음, 박상철 그림 / 새움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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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진실은 무엇인가?

왜곡과 의식 부재에 정면으로 맞선 김진명의 날카로운 역사추적기!

 

 

 

  E. H. 카의 유명한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또는 ‘과거의 사실과 현재 역사가의 대화’라고 정의하였다. 다시 말해 지나간 과거는 현재의 바로미터가 된다는 뜻으로, 이는 현재의 역사가들을 통해 생산된 역사담론과 지식이 현실 사회에 반영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 있어서 과거의 사실 그 자체만큼이나 역사가들은 물론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대중들의 역사의식이 무엇보다 중요해 보인다. <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의 저자 김진명 역시 <황태자비 납치사건>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통해 ‘과거에 눈을 감는 자는 현재에도 장님이 된다’고 말했다. 작가라면 시대의 현안을 외면해서는 안 되며 바로 시대의 현안은 역사를 통해서만 드러내기 때문이다. 역사의식에 대한 부재, 왜곡된 사실과 가치관, 반성 없는 과거사 앞에 진화란 있을 수 없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부터 <고구려>까지 소설가 김진명이 끊임없이 ‘역사’에 천착한 글쓰기를 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역사 속에 숨겨진 비밀과 진실을 추적한 작가, 김진명

 

  알다시피 작가 김진명은 역사학자가 아니라 소설가이다. 투철한 사명감으로 우리 역사에 담긴 비밀과 진실을 소설의 감각을 빌어 대중들에게 전달한다. 그간 출간된 작품들을 쭉 살펴보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경계를 알 수 없기는 하나, 분명한 것은 역사 앞에 날카로운 칼날을 드리우고 뚜렷한 문제의식과 예리한 논증을 통해 우리 시대에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특히 역사 앞에서 보다 진실에 다가가려는 그의 진정성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 가령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숨겨진 참혹한 죽음의 진실에 다가가려 했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통해 한반도의 핵문제를 제기하였으며 <1026>을 통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 뒤에 감쳐진 내막들을 파헤침은 물론, <몽유도원>을 통해 광개토대왕비에 숨겨진 비밀을 모티브로 임나일본부설의 조작된 역사적 허위를 고발하기도 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이후 20년 넘게 소설을 써보면서, 두 가지를 놓지 않았습니다. 제 작업의 두 축이라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와 취재입니다. / 4p

 

 

  김진명은 거대하고 오래된 우리 역사 앞에서 단순히 책만으로는 역사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역사의 현장을 찾아 원하는 자료를 발굴하고, 관련 인물들을 만나 취재하는 과정에 보다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했다. 그가 부단히 진실에 접근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자신의 민낯을 내보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은 바로 이러한 25년에 걸친 취재 과정에서의 노력과 그 속에서 발견하게 된 갖가지 한국사의 비밀을 담은 만화책이자 또 다른 형태의 역사책이다. 그가 특별히 만화의 형식을 선택한 것은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쉽고 재미있게 읽힘과 동시에 역사를 주제로 다양한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장점을 지닌 셈이었다. 덕분에 2015년 새로운 국정 역사교과서를 만들겠다는 정부의 발표로 온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역사의 진실을 아는 일, 그리고 그것을 바로 세우는 일’을 목표로 카카오에서 진행한 스토리펀딩이 무려 3천여 명의 독자 후원을 달성하였고, 당시 연재 내용이 이 책으로 탄생하게 됨과 동시에 전국 도서관으로 무료 배포되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의지에 독자들이 기꺼이 화답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사 7대 미스터리로 본, 역사는 무엇을 말하는가?

 

  책은 총 7가지의 화두를 내던진다. 첫 번째는 ‘대한민국 국호 한(韓)의 비밀’로 이 나라의 이름이 왜 한국인지, 우리가 왜 한국인인지, 한(韓)이라는 글자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추적해나간다. 한(韓)의 근원을 쫓는 일이란 우리 민족의 근간을 이해하는 일이며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가장 선행되어야 할 주제였음에 틀림없다. 두 번째는 ‘광개토태왕비의 사라진 세 글자’를 통해 일본의 임나일본부 조작의 역사를 파헤친다.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며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작한 임나일본부는 과거 진위를 의심받는 역사책 속에나 존재했던 나라, 임나가 한반도 안에서 백제, 신라와 함께 어우러져 있었고, 일본이 임나에 ‘일본부’라는 관청을 두어 관리했다는 설이다. 일본은 이 설을 광개토태왕비 속 흔적이 사라진 세 글자에 자의적으로 뜻을 끼워 맞춰 정당성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억지 주장에 대해 한국의 학자들이 반대 의견을 내면서 정설로 받아들인 것이 ‘석회도말론’인데 작가 김진명은 이 석회도말론을 비상식적인 논리로 규정하였다. 자국의 학자들의 주장이라 할지라도 분명한 근거와 규명을 할 수 없다면 찬성할 수 없었던 그는 집념을 발휘한 끝에 마침내 사라진 세 글 자 중 한 글자인 동(東)자를 찾아내게 되고, 이러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몽유도원>이라는 소설을 쓰게 되었음을 밝힌다. <황태자비 납치사건> 또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밝혀진 일본의 잔혹한 행위와 무자비한 역사 조작이 지닌 위험성을 알리려한 끝에 탄생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임나일본부와 같은 역사 조작은 단순한 학문의 영역에 머무르는 게 아니다. 역사 조작이 무서운 것은, 이것이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결국은 침략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당시 군국 일본은 광개토태왕비를 악용해 임나일본부라는 말을 만들어 냄으로써 자기 땅을 되찾는다는 명분을 세웠고, 이에 따라 많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침탈하면서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으니 말이다. / 7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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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 ‘박정희 죽음의 진실’ 편에서는 대통령의 죽음 뒤에 숨겨진 존재를 추적해나간다. 단순히 김재규의 우발적 살인으로 규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의문들을 재구성해가며, 한미 관계의 은밀하고도 거대한 그림자를 들춰낸다. 이는 개인적으로 김진명 소설에 입문하게 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통해서 제기되었던 핵개발 문제로 이어지고 있으니 보다 궁금한 사항이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게 좋을 듯하다. 뿐만 아니라 <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에서는 최근 김정남 살인 사건으로 다시 이슈화되고 있는 북한 문제와 밀접한 주제도 다루고 있어 흥미롭다. 즉, 김정은이 과연 북한의 실질적인 일인자가 맞는 것인가 의문을 품음으로써 북한 권력구조에 대한 나름의 분석을 해나간다. 철옹성과 같은 북한의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볼 방법은 없지만 그간의 숙청과정과 권력다툼을 통해 결코 김정은을 절대권력자로 볼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현재 김정남을 살인한 배후 세력에 북한 당국자가 있다는 사실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는 마당이라 그의 추리가 꽤 설득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책은 ‘이성계의 함흥차사 속에 숨은 사연’을 통해 권력이 어떻게 진실을 막고 역사를 왜곡하는가를 보여준다. 이어 ‘문자의 기원을 둘러싼 역사 전쟁’ 편을 통해서는 한자의 기원이 우리나라에 있음을 알리는 놀라운 설을 통해 중국 고대사에 대한 재해석과 공자의 춘추사관으로 왜곡당한 우리 한국사의 모습을 조명한다. 이렇듯 <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은 작가가 그간 의문을 품고 추적해온 한국사의 숨겨진 비밀과 그것을 취재하는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이면의 조각들을 독자들에게 내던진다.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가 과연 진짜 역사일까, 그간 우리가 알고 있었던 역사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가 밝히는 비밀들이 모두가 진실이라고 할 수 없고 이 조차 하나의 가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승자에 의해 기록된 역사 뒷면에 무엇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인지 의문을 품는 그의 자세를 통해, 왜곡된 진실을 바로잡으려는 역사의식과 아울러 민족에 대한 주체성과 자긍심을 부단히 지녀야 할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나는 우리 역사의 진정한 문제점은 과거의 기록을 상실했다는 사실에 못지않게 이 사회의 역사의식 부재에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 500년간 이웃 나라인 중국을 하늘로 보는 춘추사관, 이어진 일본의 지배와 식민사관, 그 후 군사독재를 겪으며 우리는 성숙한 문화적 내면적 의식을 크게 상실하고 현실적 가치에만 눈이 먼 채 인간을 너무나 왜소하게 보도록 길들여져 있다.

“돈이 최고”라든지 “돈 없으면 죽는다”는 등으로 표피적 현실에만 눈을 뜨고 있다 보니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와 역사는 눈앞의 물질보다 오히려 삶을 훨씬 가치 있게 하고 자신감을 북돋운다. 또한 사물을 정확하고 본질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힘이다. / 2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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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를 읽으며 김진명 작가가 지닌 역사에 대한 소명 의식을 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그의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계기도 되었다. 때로는 역사에 지나치게 천착한 그의 글쓰기가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사명감을 갖고 대중들에게 과거와 현재를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내려는 그의 시도에 많은 독자들이 화답하고 더욱 응원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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