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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틴 피스토리우스.메건 로이드 데이비스 지음, 이유진 옮김 / 푸른숲 / 2017년 3월
평점 :
식물인간으로 병상에서 생의 모든 것을 잃은 남자,
절망을 딛고 빛나는 생의 의지로 다시 태어난 위대한
실화!
읽고 싶은 책을 선정할 때 저마다 특정한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저자, 책 소개, 표지 디자인 등 독자를 유혹하는
책의 매력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수많은 페이지의 모든 정보를 하나로 압축해 오롯이 담아내는 그릇, 바로 ‘제목’을 꼽을 수 있다. 어떤
분야의 책인가에 따라 제목의 형태는 제각각이지만 이토록 직관적이고도 숨이 덜컥 막히게 하는 제목이 또 있을까.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라니. 나는 책의 제목을 마주하는 순간, 머릿속에 불편하고 어둑한 그림들로 가득차서 속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 누구도
아닌 엄마라는 생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자신에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무엇인지 궁금하거니와 그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큰
공포와 좌절감을 느꼈을지는 감히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였다. 그만큼 자극적이고, 그래서 더욱 궁금했지만 책속에는 이보다 더한 충격적인 실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이라는 탈출할 수 없는 감옥에 갇힌 남자
책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유령 소년, 소리 없는 목격자, 정신이 유일한 소유물이 된
남자가 등장한다. 이 모두는 바로 열두 살이 되던 해에 갑자기 알 수 없는 병으로 사지가 마비되어 식물인간이 된 남자, 마틴 피스토리우스가
스스로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도시 근교에 있는 돌봄시설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의식 불명의 상태에서 깨어나
정신이 돌아왔지만 움직일 수 없는 몸 안에 갇힌 채 목소리를 낼 수도, 깨어났다고 신호를 보내거나 알릴 수 없는 상태로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다시 살아나고 있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늘 가족과 요양사들에게 ‘나 여기 있어요, 안
보여요?’ 하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애쓰지만 소리 없는 절망만이 심연으로 파고들 뿐이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게 한 것은 그가 마치 아무런
감정도,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투명인간 취급을 당할 때였다. 어떤 이들은 화가 났을 때 그의 옷을 평소보다 거칠게 벗기거나,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등 차마 입에 담기에도 죄스러운 불경한 짓을 저지르기도 한다. 자신의 몸을 가리켜 ‘어두운 욕구를 마음껏 칠할 수 있는 빈 캔버스’나
다름없다고 자조하는 그의 표현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이들에게 무례하고 교만한 지 반성하게 하는 대목이다.
나를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는 그저 일거리였다. 요양사들에게는 수년간 같은
곳에 머물러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익숙한 붙박이 가구였다. 부모님이 집을 떠나 있어야 할 때 나를 보냈던 돌봄 기관의 복지사들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환자였다. 나를 진료한 의사들에게 나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대상이었다. 어느 의사가 동료에게 엑스레이 촬영대에 누워 있는 내
모습이 마치 불가사리 같다고 말했듯이. / 31p
나는 무엇보다 누구든 나를 좀 바라봐주길 바랐다. 나를 본다면 내 얼굴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분명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공포였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고 있었다. 나에게도 감정이
있었다. 나는 그저 유령 소년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바라봐주지 않았다. / 211p
그의 불행은 주변 사람들에게 단순히 가엾고 불편한 존재로써 끝나지 않는다. 장애와 질병의 불행이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아빠에게서는 진급의 기회를 앗아감과 동시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았고, 엄마에게서는 정규직을 포기하는 것은
물론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안겨줌으로써 자살시도라는 극단적인 선택에 미치게까지 했다. 그들의 고립감은 마틴의 동생들에게도 전염되었다.
마틴으로서는 가족의 꿈과 희망을 앗아간 것에 대한 회한과 자책으로 되돌아옴으로써 그를 더욱 좀먹게 했다.
내가 결코 잊지 못할 다툼이 있다. 아빠가 나가버리자 홀로 남은 엄마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던 날이다. 엄마는 손을 부르쥔 채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가슴속에서 날것으로 흘러나온 슬픔을 느꼈다. 엄마는 너무나
외롭고, 혼란스럽고, 절망적으로 보였다. 나는 엄마를 위로하고 싶었다. 휠체어에서 일어나 이렇게 크나큰 고통을 초래한 육신의 껍데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엄마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네가 죽었어야 해.” / 86p
위로, 위로, 다시 떠오르기 위한 도약
이대로 몸에 갇혀 죽을 것만 같았던 그에게 뜻밖의 기적이 찾아온다. 그가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이는 간병인
버니로, 그녀는 마틴의 부모에게 그가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는 것 같다고 말하며 검사를 해보자는 제안을 한다. 그녀는 가족을 제외하고 마틴에게
생의 의지를 북돋아 준 가장 첫 은인이 된 셈이다. 의사소통센터에서 그의 인지 기능을 테스트해 본 것을 계기로 마침내, 그는 의사소통 기기를
이용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상황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그리드를 만들어내 컴퓨터에 입력하면 그가 여러 스위치
가운데 하나를 손으로 눌러 하고 싶은 말을 고르는 방법이다. 이를 음성으로 변환하는 작업을 통해 그는 마침내 ‘대화’라는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시도들을 하게 된다.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여기에 전념하는 필사의 노력을 거듭한다. 이후 그는 몸을 전보다 더 많이 사용하게 되면서 몸
구석구석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을 느낀다. 또한 컴퓨터 시스템을 이해하는 특유의 직관력을 지니고 있었던 탓에 이와 관련된 업무를 맡아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기도 한다. 곳곳에서 그의 기적과도 같은 일들을 들어보고자 강연 요청도 끊이지 않는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큰 희망을 얻게 된다. 이렇듯 그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엿한 사회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헌신과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얻은 사랑이라는 위대한 힘이었다. 특히, 그의 아버지가 보여준 굳건한 사랑과 믿음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비롯된
유산과도 같아서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 우리의 빈약하고 얄팍한 감정의 울타리를 견고하게 만드는 것은 역시 가족 안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아빠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남녀 간의 사랑에 관한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사랑의 모습은 때로는 헹크와 애리에타의 경우처럼 유희에 가까울 때도 있고, 잉그리드와 데이브의 사례처럼 평화로울 때도 있다. 그러나 정말 운이
좋다면, 지디와 미미처럼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을 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랑은 한 사람에게서 또 다른 사람에게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누구에게나 포근한 위안을 주는 생명의 힘처럼, 두 사람을 굳건하게 해준 숱한 풍파 속에서 빚어진 기억을 어루만지고 새로이 피어나게
한다. / 235p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극복할 수 있는
그는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여인 조애나를 만나 가정을 이루며 독립의 길로 나아간다. 이 기적적인 스토리는 언뜻 보면
희망만을 담고 있는 듯하지만, 여전히 그는 갈등을 야기하는 내면의 두 세계와 맞서야 하는 기로에 서곤 한다. 항상 타인의 도움을 받아 살아온
탓에 선택이라는 것을 해야 할 때면 늘 망설이게 되고, 여전히 신체적인 한계에 부딪혀 수동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표출할 수
없어 늘 짓누르며 살아옴으로써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의사소통을 할 때 필요한 노트북이 없으면 다시 유령 소년의 그림자가
드리울 것이라는 공포감도 감출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도와주는 이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된 이 모든 기회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한다. 의사소통을 시작한 이후로 줄곧 일과 공부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애써왔지만 뭔가를 보여줄 필요가 없는 유일한 존재, 조애나를
만나면서 타인과 똑같은 사람으로 스스로를 껴안는다.
인생은 흑백이 아니라 무수한 회색 그림자로 이루어졌음을 깨달으면서 나는 때로
틀릴지언정 점차 나의 판단을 믿는 법을 배웠다. 내가 배운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하는 일이었다. / 286p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가 장애를 다룬 기존의 작품들과 차별화되는 것은, 장애를 겪고
있는 이가 직접 목소리를 내고 의식을 흐름을 쫓아 기술하는 진정성에 있는 듯하다. 짖거나 물리지 못하게 중성화 수술을 한 개가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던 그의 말처럼, 사랑에 대한 열망과 감정을 가진 똑같은 인격체로써 진심 어린 메시지를 전한다. 제목은 자극적이지만 그 어느 책보다 따뜻한
희망을 얻을 수 있는 책이었다는 점에서 나름 반전이라면 반전이랄까. 이 책을 읽으며 장애를 지닌 이들을 고립시키는 건 아무 기회도 주지 않는
사회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들도 사회에 영감을 줄 수 있는 소중한 인격체이자 존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우리 모두가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