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빛의 도시 베니스, 그 이국적 일상에 예술을
담다!
한국화를 그리는 화가가 쓴 남다른 베니스
일기!
심상을 읽어내는 화가, 전수민
‘심상(心象)’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으로 풀이하자면, 감각에 의하여 획득한 이전의 경험이나 현상이 마음속에서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인상을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를 맡음으로써 알게 되는 모든 자극을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란, 바로 이 심상을 표현하는 매우 인상적인 작업이다. 그리고 화가는 심상을 자유로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멋진 예술가인 듯하다. 이런 이유로 나는 늘 화가를 동경해왔다. 기술적인 부분을 차치하고서라도 예민한 감각으로, 사물과 풍경의 이면에
어른거리는 심상을 읽어낼 줄 아는 화가만의 정서를 닮고 싶었다. 노력으로 다할 수 없는 이 아름답고도 놀라운 특권을 가질 수만 있었다면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 믿어왔을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나는 화가 자신만의 고유한 심상을 화폭에 담아낸 작품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
중에서도 전수민 화가의 작품은 이 심상을 잘 녹아내어 관람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자아내게 하는 매우 감각적인 화풍을 지녔다.
내 그림들은
깊은 그리움과 오랜 기다림으로 완성된 것들입니다.
한지 위에 켜켜이 색을 쌓아올려,
가슴 안에 층층이 포개진 그리움을 나만의 속도로 표현합니다.
‘느림’이란 이름의 그림들이, ‘빠름’이란 이름의 시름들을 거짓말처럼 거둬가요. /
225p
그녀는 ‘인류 최초의 그림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있어 그리는 일이란 그저
보이는 것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이 아니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오직 마음으로만 보이는 것들을 조심스레 세상에 내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화를
그리는 화가답게 우리의 전통 한지를 선택해 그 위에 채색하는 형식을 사용한다.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성으로 색채를 덧입히고, 자연스럽게
스미어드는 ‘느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 그녀의 이러한 수고로운 작업은 이역만리 베니스에서 더욱 빛이 난다. 가장 이국적인 곳에서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하려는 그녀. 천 년 이상 보존이 되는 우리 종이만의 경이로운 힘을 믿으며 특유의 재질이 주는 까다로움을 고스란히 품는
그녀. 참 매력 있다.
돗자리를 펴고 한지를 펼쳤다.
긴 여정에도 지치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우리의 한지,
그 위로 자연스러운 얼룩이 번져나간다.
이역만리 베니스에서도 한지의 매력과 위력은 고스란하다.
은근한 빛을 뽐내지 않고 뿜어낸다. / 30p
물과 빛의 도시, 마주하는 모든 순간이
그림이다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은 바로 예술가의 고장 베니스로 떠난 그녀가 한 달 동안 머무르며 보고 느낀
심상들을 써낸 일기이자,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한 여정을 담은 에세이다. 서른 한 편의 일기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 독특한 화가의 보다 특별하고
유별난 정서에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다니던 회사에서 승진한 날 사직서를 내고, 늘 ‘죽음’을 가까이 느끼며 유서 쓰기를
취미로 삼을 뿐만 아니라 농민의 자손이랍시고 베니스에서도 현지 음식이 아닌 매번 손수 차린 쌀밥을 고집한다. 지독한 길치라서 줄곧 ‘직진
산책’만 해야 했으며, 유년 시절에 목욕탕에 빠져 죽을 뻔했던 일을 계기로 정작 물의 고장인 베니스에 와서 물을 겁내는 참 재미있는 이력을
지녔다.
그래서일까, 베니스의 한 스튜디오에 입주 작가로 선정된 일을 계기로 낯선 베니스에서 머무르게 된 그녀는 마치 새로운
우주 속에 몸이 내던져진 듯 불안하고 조심스러워 보인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가질 법한 설렘, 두근거림, 흥분된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마음을 나직이 써내려 간다. 베니스의 스튜디오에 도착해 마치 ‘최초의 인간’이 된 것 같다던 그녀의 고백은 늘
‘죽음’을 유예하며 살아온 입장에서 남다른 감정을 느끼게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그녀는 단출하게 준비해온 옷을 꺼내 옷걸이에 걸고,
몇 자루의 붓과 팔레트와 종이, 물감과 같은 최소한의 도구로 스튜디오의 한 공간에 스스로를 안착시키면서 차분하게 새로운 세상과 마주할 준비를
해나간다.
“세상천지 내 돗자리 펼치는 곳이 다 내 작업실이다.”
흠… 과연 이렇게 말해도 괜찮을까요? 아마 괜찮을 거예요.
계속 기운 내서 그럴게요.
생각은 진작부터 그랬고,
이미 아무 데서나 잘도 그려요.
평생 붓을 들겠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라도’가 포함되는 다짐이 아닐까 해요. / 32p
산타루시아 역 부근의 오래된 건물 사이 낮은 차양을 친 상점들, 일상이 녹아들어 있는 시장, 베니스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대운하와 리알토 다리, 바스텔 톤의 아기자기한 건물들, 소박한 메스트레의 화방, 천사 같은 꼬마들을 만난 리도 섬, 종소리로 가득찬
베니스 중심가 뒤편의 작은 광장, 오페라의 도시 베로나에서 만난 야경 등. 그녀는 베니스의 아름다움을 과하게 수식하지 않는다. 은은하고,
담담하게 글로 써내려간다. 물과 빛의 도시라 불리는 베니스의 풍경이 책의 곳곳에서 잔잔하게 너울거린다. 특히 짧은 여행이나 관광이었다면 알지
못했을 이탈리아의 종잡을 수 없는 매력과 산 경험들이 빛을 발한다. 무엇보다 스튜디오 내에서 함께 머무르며 새로운 친구들과 공유한 소소한
일상들이 베니스에서의 생활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것이 한 데 어우러져 그녀는 한 폭의 동화 같은 작품들을
완성해낸다.
베니스에서 본 풍경들은 마치 동화와 같았지요.
이탈리아 물감은 그래서 좀 다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캔버스라는 문이 있는데, 색깔은 약간의 물과 함께 통과하게 돼요.
초록이었는데 그 문을 통과하면 짙은 녹색이 되는 것이죠.
진한 분홍이었는데 그 문을 통과하면 빨강이 되고요. / 170p
오래오래 들여다보는 사람
때로 우리는 가장 낯선 곳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민낯과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되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베니스의 풍경이 보고 싶어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그녀가 이 먼 거리를 떠나왔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완성된
그림과 마찬가지라서 베니스의 풍경을 사진처럼 그림에 담는 작업이란 그녀에게 중요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책은 다양하고도 이국적인 풍경을 잘 찍은
사진처럼 애써 담아내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베니스의 풍경들을 가이드처럼 상세하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보다 그녀는 낯선 베니스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에 보다 마음을 두고 있었으리라. 자신의 작업에 가장 영향을 끼치는 것은 역시 ‘나 자신의 문제’라던 그녀의 글처럼 심상을 통해
심연을 마주하는 일, 그 자체가 그녀에게는 예술이었을 것이다.
마음을 진정시킬 때 색연필을 깎는다.
나무 꺼풀이 얇게 벗겨지고,
색색의 심지들이 천천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내 마음의 심지는 어떤 것일까.
색연필을 깎으면서 내 마음을 추스른다.
자주 깎지는 않는다.
마음에 늘 진정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 42p
나는 평생 꼭 예술가로 살아가고 싶어요.
언젠가 엄마에게 힘들다고 했더니,
“그럼 너무 애쓰지 말고 형편이 나아지면 그림을 그리는 게 어때.” 말씀하셔서
겁에 질리고 말았어요.
나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지금 여기를 살고 싶습니다.
바로 지금, 이곳에서, 물러나지 않고,
나 자신이 주인이 되어 완전히 연소하면서. / 205p
에피소드 중, 한 그림 앞에서 그것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을 찍은 사진이 인상적이다. 세상의 모든 경이로운
것들은 오래 들여다보게 하는 힘을 지닌 듯하다. 거꾸로 말해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야 말로 세상을 경이롭게 느낄 수 있는 게 아닐까. 이 땅의
모든 것들, 사람도, 나도. 결국엔 오래 들여다보아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