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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평점 :
집 책장에 편혜영의 책이 몇 권 있다. 그런데 한 권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한참 한국 소설을 모을 때 산 책들이다. 최근 십 년 동안은 장르소설에 빠져 한국 문학을 열심히 읽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는 몇 번이나 말한 지극히 사적이고 감상적인 문학들에 지쳤던 기억도 한몫했다. 그 사이에 좋은 작가들이 계속 등장했고, 어떤 문학상은 거의 끊었다. 좋아하는 문학상 작품은 비교적 열심히 읽었다. 그 사이에 편혜영의 작품은 없었다. 어딘가에서 읽은 듯한 자극과 엽기란 단어가 왜 이 작가에게 붙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늘 순서가 뒤로 밀렸다. 그러다 처음으로 이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장편소설이라고 하지만 겨우 200여쪽에 불과하다. 한쪽의 분량도 다른 책의 삼분의 이 정도다. 시간이 나면 단숨에 읽을 수 있는 분량이란 말이다. 개인적인 일이 바빠 며칠 동안 읽었는데 가독성이 좋았다. 문장은 간결했다. 헤밍웨이의 소설을 읽을 때 받았던 느낌이랄까.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은 주인공 오기의 몸 상태와 잘 맞다. 불필요한 대사나 묘사를 제외한 건조한 문장은 오기의 일인칭 서술을 통해 그 힘을 발휘한다. 처음 예상했던 몇 가지 추측은 뒤로 가면서 바뀐다. 그 사이를 채워주는 것은 흔한 장애인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들의 욕심이다. 하지만 이 욕심이 주된 내용은 아니다.
오기는 아내와 여행을 가다 교통사고를 당한다. 아내는 죽고, 그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았지만 몸은 마비상태다. 안면은 재건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고, 손발은 움직일 수 없다. 눈을 움직일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 자신의 의사를 완전히 표현하는 것은 좋은 의사나 간호사를 만나는 영화나 소설 속의 환상적인 경우에만 해당된다. 눈꺼풀을 움직여 간단하게 예, 아니오 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그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한다. 그의 비극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생긴다.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그의 의견은 하나도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
마비상태의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에게는 가족이 없다. 부모는 모두 죽었고, 자식도 없다.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장모뿐이다. 처음 그의 사고를 듣고 나타난 장모의 모습은 보통의 장모와 다를 바가 없다. 아내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욕심낼 때도 그 소박함에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장모가 그의 법적 대리인이자 보호자 역할을 하면서 그의 주변에 비이성적인 일들이 벌어진다. 그 첫 번째 일이 사이비 목사가 나타나 그의 완치 기도를 한 것이다. 적지 않은 금액의 기도비를 받아가면서. 이 정도는 소설 속 간병인과의 대화를 통해 흔히 일어나는 일들임을 알 수 있다. 의학보다 신앙의 힘에 기대 병을 완치하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늘 있기 때문이다.
간병인의 아들이 나타나 집에서 술을 마시고, 그를 병신이라고 부를 때 감정이입되었다. 흔한 감상이다. 장모가 집에서 술 냄새를 맡고, 간병인이 딸의 보석들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내쫓는다. 흔한 반응이다. 그리고 장모가 간병인 역할을 한다. 역시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이 간병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장모는 사위의 자산을 관리하면서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고 말하고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숫자를 휙 하고 보여주지만 그 숫자를 볼 수가 없다. 겨우 왼팔을 조금 움직일 수 있게 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흔했던 일들이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난다. 감상은 사라지고, 어느 순간 추리로 바뀐다. 한 편의 스릴러를 보는 것 같다.
장모가 간병인이 되면서 그에게 일어난 최악의 일은 외부와의 단절이다. 어둠이다. 외로움이다. 병원도 제대로 데리고 가지 않는다. 물리치료사도 그가 쓴 단어를 장모에게 보여준다. 상상력은 이때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장모는 아내가 애써 가꾼 정원을 뒤엎고 구멍을 판다. 무슨 용도일까? 정원수를 옮긴다. 그의 시선을 외부와 차단시킨다. 이제 오기의 생각은 과거의 한 지점으로 향한다. 이 회상 속에서 독자는 이 구멍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된다. 사고의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질 때도 오해와 사실은 미묘하게 뒤섞여 있다. 오기가 장모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 따라 상황의 분위기가 바뀐다. 어떤 때는 연민과 동정이, 어느 순간은 한편의 공포물 같다. 이 모든 것들 중에서 시선을 끄는 문장이 하나 있다. 마지막 문장이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209쪽) 삶의 한 모습을 아주 잘 표현한 문장이다. 여운을 남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