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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평점 :
90년대 여성 작가들의 우울한 소설에 지쳐 있을 때 나를 구원해준 작가 중 한 명이 성석제다. 그의 소설이 전해주는 해학과 풍자는 소설 읽는 즐거움을 되찾아줬다. 그의 글에 묻어 있는 인간들의 모습은 약간 과장된 듯하지만 현실의 또 다른 모습을 잘 보여줬다. 문장 또한 차지어 읽는 재미가 좋았다. 그러니 그의 소설을 찾아 읽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 이전에 고 이청준과 이문열 등의 소설을 찾아 읽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다 한동안 그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장르 소설에 빠졌고, 새로운 작가들을 한 명씩 알아가는 중이라 우선순위가 살짝 뒤로 처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로 다시 그의 매력과 재미를 만끽하게 되었다.
투명인간하면 가장 먼저 미국 영화 속 투명인간이 떠오른다. 그 다음으로 한때 유치한 남자들의 질문인 투명인간이 되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하는 질문이 생각난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성행하지 않았고 여성의 신체에 대한 사진이나 정보가 풍부하지 않았던 때라 꽤 많은 남자들이 여탕을 몰래 들어가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대부분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나 다른 좋은 일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겠지만. 그런데 이 소설 속 투명인간은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투명인간이 된 후의 활약에 중점을 두지 않고 왜 그들이 투명인간으로 변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보여줄 뿐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은 김만수다. 첫 장면에 투명인간인 남자가 자신의 삶을 간단히 보여주면서 마포대교 위에서 김만수를 보게 된다. 자살 다리로 유명한 그곳에 나타난 김만수다. 그리고 바로 김만수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태어났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여준다. 결코 유쾌하지 않은 출생을 보여준 후 그의 가족이 어떤 역사를 가지고 그 마을로 오게 되었는지 간략하게 요약해서 알려준다. 부자 할아버지의 몰락과 깊은 산골 화전민들과 함께 사는 삶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들려준다. 일제 당시 한학을 배웠고 대학까지 나온 할아버지의 삶은 아들이 바라는 바가 전혀 아니다. 그래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은 농사꾼의 삶을 선택한다. 아버지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작용한 것이다.
자손이 귀한 집에 만수 아버지는 아들 셋과 딸 셋을 낳았다. 첫째아들은 백수, 둘째가 만수, 셋째가 석수다. 딸은 금희, 옥희, 명희다. 만수는 이중에서 셋째다. 만수 아버지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 아버지의 삶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첫째 백수가 학교에서 항상 수석만 차지한다.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그런데 대학은 사립으로 갔다. 이때 이 집안의 불행이 시작된다. 사립대학의 학비가 비싸고, 부모는 이 돈을 대 줄 충분한 재력이 되지 않는다. 한때 유행했던 우골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해서 그가 힘들게나마 계속 학교에 다니게 놓아두지 않는다. 그 다음 선택이 군입대고, 그 당시 베트남 참전은 그 중에서 최상의 선택이다.
가족들의 모든 기대를 받던 큰형이 갑자기 베트남에서 죽는다. 바로 고엽제 때문이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룰 것으로 기대했던 손자의 죽음, 공부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지만 자신의 첫 아이의 죽음은 이 가족의 기대를 다른 쪽으로 돌리게 만든다. 그가 바로 만수다. 할아버지는 아들 가족을 서울로 보낸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도시 하층민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제 장남이 된 만수는 열심히 학교를 다니지만 그의 머리는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다. 좋은 것이 있다면 좋은 인간관계와 성격이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다. 이 책임감은 그를 지탱하는 힘이다. 이후 보여주는 그의 삶은 바로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이다. 한때 우리 사회를 힘겹게 끌고 나갔던 우리 부모 세대의 모습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이 소설은 투명인간으로 변한 김만수를 보여준다. 그런데 김만수의 목소리는 없다. 그를 만났던, 살았던, 같이 회사를 다녔던, 친구였던, 가족이었던 사람들의 시선으로 풀어낼 뿐이다. 그리고 화자로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도 직접 말하지 않는다. 문장 속에서 그들이 누군지 간접적으로 알려줄 뿐이다. 이 파편적인 모습 속에 김만수의 삶이 그대로 드러난다. 읽으면서 왜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마지막에 왜 죽지 않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지만 죽는 것이 더 힘들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다. 사람 좋고 착하고 열심히 일한 김만수 씨에게 우리 사회가 돌려준 것은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고 노력하라는 것이다.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밝은 미래도 희망찬 미래도 아니다.
솔직히 읽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이전 같은 해학이 넘쳐나지도 않고 풍자가 가득하지도 않다. 아니 블랙유머는 가득하다. 그가 한때 성공한 듯한 삶을 살 때도, 힘겹게 살 때도 다음에는 어떤 불안이 다가올지 두려웠다. 그가 살아온 70년대, 80년대, 90년대, 2000년대의 삶은 바로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다. 곳곳에 심어져 있는 당시 풍경은 아련함보다 오히려 힘겹게 산 그 시대 사람들의 고단함과 암울함이 더 먼저 다가온다. 불편한 현실은 곧 불안으로 바뀌었다. 그 흔한 해피엔딩조차도 이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만약 내가 이런 사람을 만났다면 과연 그를 어떤 사람으로 말했을지 거듭 생각하게 된다. 단편적으로 알 수밖에 없으니 결코 좋게만 말하지 않을 것 같다. 김만수 씨와 같은 시대를 힘겹게 불안하게 고단하게 슬프게 보낸 모든 부모에게 힘내시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