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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는 아니지만 - 구병모 소설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구병모의 첫 소설집이다. 온라인서점에 접속해 책 정보를 먼저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지만 서점에서 그냥 책 표지를 봤다면 장편으로 착각할 수 있다. 표지 어디에도 소설집이란 문구가 없기 때문이다. 가끔 이런 책들을 만난다. 요즘은 대부분 인터넷서점에서 주문을 하기에 단편집임을 알지만 오프라인에서 사거나 이벤트 등으로 받을 경우 첫 단편에서 호흡을 놓치고 재미가 반감되는 경우가 많다. 언제부터인가 책 표지에 이런 문구가 사라지고 있다. 단편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지기에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뒤에 수록작품의 발표지면을 표기한 것은 반갑고 고맙다. 가끔 어느 단편이 먼저 발표되었는지 궁금한 소설집을 만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모두 일곱 편이다. 이중 두 편은 신작이다.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는데 서평으로 먼저 만난 적이 있다. 특히 <위저드 베이커리>의 호평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다음 작품 <아가미>도 호평을 받았고, 이 두 작품 때문에 이 작가에 대한 호감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물론 더불어 선입견도 생겼다. 처음 이 책을 받았을 때 위에서 말한 장편 착각을 했다. 목차를 보면서 확인하니 단편임을 알게 되었는데 자칫 잘못했으면 장편의 호흡을 읽을 뻔 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가 만들어낸 확인 작업이지만 그래도 가끔 놓치는 경우가 있다.
선입견과 첫 작품이 이 소설집이 어떨 것이란 첫 인상을 심어줬다. 물론 다른 단편을 읽으면서 이런 선입견들은 깨어졌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한 것은 한참 한국 단편소설을 읽을 때 느꼈던 누군가의 흔적들이다. 당연히 부정확하고 저질인 기억력은 명쾌하게 답을 내놓지 않는다. 최근에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아쉬움 중 하나다. 분명 어딘가에서 비슷한 분위기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하는 감이 오기 때문이다. 이것을 단순히 기시감으로 치부하면 간단하지만 그 동안 읽은 내공이 있어 이것을 거부한다. 그렇다고 이 소설의 재미를 방해한 것은 아니다.
<마치 ……같은 이야기>는 비유가 사라진 도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문장이 간결하고 사실적인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딱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아니다. 비유가 사라졌다고 문장이 더 사실적이고 간결해지는 것은 아니다. 상상력이 고갈되고 삶이 건조해질 뿐이다. 인간이 사라지고 기계로 대체된 도시라고 해야 하나. 점점 더 많은 효율이 우리 사회에 자리를 차지하면서 인간성이 어떻게 메말라 갔는지 생각하면 마치 미래 사회 같은 이야기다. 언론 통제로 인한 현재도 물론 가능하다.
<타자의 탄생>은 어느 날 알 수 없는 금속에 갇혀 땅에 묻힌 남자 이야기다. 밖으로 드러난 것은 상반신 일부와 한 판이다. 처음에는 누가? 왜?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이야기는 그를 끄집어내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순간 그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에 눈길이 간다. 호기심의 대상에서 연민의 대상으로, 점점 더러워짐에 따라 혐오의 대상으로 변한다. 이 변화가 우리의 심리 변화 과정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마지막 장면의 다음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다.
표제작 <고의는 아니지만>은 지독한 현실 앞에 놓인 한 유치원 교사 이야기다. 그녀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만 그 선의 뒤에 숨겨진 본심과 힘겨움과 지겨움은 어느 순간 폭발한다. 그녀의 폭발에 공감대가 형성되지만 그렇게 만든 사회 구조에 더 눈길이 간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가족의 일상이 자신의 직업 테두리 밖에 있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잘 보여준다. 그녀의 폭발을 참았어야지라고 말 못하겠다. 이기적인 학부모의 행동은 며칠 전 회사 동료가 말해준 한 어머니의 반응이 생각난다. 담임이 공차다가 늦게 들어온 아이에게 발로 흉내 내면서 가볍게 툭 댄 것을 ‘그 선생 미친 거 아냐!’ 하면서 교육청에 신고하니 마니 했다는 엄마다. 물론 발로 찼다면 다른 문제겠지만 그것을 본 동료의 딸 이야기는 흉내 정도였다. 지독한 과잉보호와 이기주의가 교육계 비리에 대한 방패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조장기>는 제목만 보아서는 티벳의 조장 풍습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새들에게 공격을 받아 죽는다. 히치콕의 <새>라는 영화가 연상되지만 실제는 그런 공포 소설이 아니다. 못생겨서 제대로 된 아르바이트도 직업도 구하지 못하는 한 20대를 통해 절망으로 가득한 현실의 풍경을 보여준다. 새들이 공격하는 사람이 바로 이 절망 가득한 사람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그런데 현실의 힘겨움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한 이들에게는 마지막 장면처럼 부러운 현실인지도 모른다.
<어떤 자장가>는 대필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 엄마의 아이 잠재우기 사투 이야기다. 끔찍한 상상과 현실이 교차하는데 그녀의 고통이 조금은 이해된다. 조금만 이해되는 것은 얼마 전 이 사투를 직접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출근 전 남편이 잠자는 아이를 보면서 “세상 모든 아이들의 얼굴은 잘 때가 제일 예쁜 법”(172쪽)이라 맘속으로 말하는데 그 처절했던 아내의 사투가 겹쳐지면서 후배 아내가 남편이 아는 것은 극히 일부라는 말이 갑자기 떠오른다.
<재봉틀 여인>은 옛 기억을 되살려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교사의 폭력이다. 이 교사 똑똑하다. 그 장면을 촬영할 수 없게 휴대폰을 모두 압수했다. 현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학생들의 증언으로 문제가 되겠지만 말이다. 이 폭력 때문인지 학생은 만물수선집에서 재봉틀 여인을 만나 감정을 꿰매어버린다. 감정이 메말라버린 청년에게 벌어진 현실은 또 다른 88만원 세대의 은유다. 연애도 사랑도 결혼도 할 여유도 기대로 사라진 그들의 초상화다.
<곤충도감>은 성범죄자에게 전자발찌를 채우면서 생기는 부작용을 말한다. 그 어떤 성욕도 용납되지 않는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감정은 거세당한다. 인간성이 사라진 곳에 감정이 제대로 남아 있을 리 없다. 이성은 작용을 하지만 삶의 의지는 꺾여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전자발찌를 찬 남자가 성욕이 과다하게 발생하면 몸에 심어져 있는 생명체에 의해 죽게 된다는 것이다. 범죄예방에 좋을지 모르겠지만 인권을 생각하면 다르다. 물론 누구의 인권이 더 중요하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현실에서 전자발찌와 성욕억제 약물 투여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에 대한 작가의 답인 것 같은데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