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작 <간과 쓸개>는 2009 황순원 문학상에서 먼저 읽었다. 그 후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에서 다시 만났다. 솔직히 한 번 읽었는데 예전 서평을 찾아보니 감정이입이 잘 되었다는 문구가 보인다. 아마 김숨이란 작가를 처음 만난 것도 <간과 쓸개>였을 것이다. 이 단편을 읽기 전 다른 사람들이 그냥 일상을 그려내는 작가는 아니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것이 선입견처럼 작용했기에 감정이입이 더 잘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런데 이후 나오는 단편들은 다른 사람들의 평이 결코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사실 <모일, 저녁>만 해도 일상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결혼식 때문에 내려왔다가 집에 다니러 온 화자의 시선을 통해 한 가족의 저녁 풍경을 그려낸다. 어떻게 보면 비루하지만 일상의 대화가 오고 간다. 단지 아버지가 뱀장어를 잡는 일을 하는 것을 통해 살짝 뒤틀린 현실을 보여주지만 말이다. <사막여우 우리 앞으로>는 버스 정류장 간이 매표소와 동물원을 배경으로 현실 그 너머의 풍경을 그려낸다. 마지막에 현실에서 그녀가 선택한 코끼리처럼 제자리걸음 걷기는 최후의 희망이자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다. <북쪽 방>은 한 전직 지구과학 교사 곽노의 퇴락한 삶을 보여준다. 북쪽 방은 아내가 그를 유폐시킨 공간이자 안식처다. 그가 가장 황홀했던 순간이 퇴적암의 단면과 마주하던 그 순간이다. 곽노의 삶이 유기질보다 무기질에 더 흥미를 가졌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자신의 몸무게가 자꾸만 줄어드는 것을 걱정하는 것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이미지와 단상들이 교차한다. <흑문조>는 단층 양옥을 장만한 아내의 시선으로 삶의 한 면을 그려낸다. 이 부부의 삶은 너무 건조하다. 보일러 배관 공사 현장이 이 부부의 현재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디가 문제인지 알 수 없어 여기저기를 파헤치고, 다시 덮은 그 모습 말이다. <룸미러>는 참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끝난다. 뒤끝이 찝찝하다. 어떻게 보면 종말의 한 순간을 보여주는 것 같고, 아이들이 깨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왜? 라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마지막 장면은 황당하다. 수많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아직은 그 어떤 이미지도 연상되지 않는다. <육의 시간>은 예상한 결말이지만 그 진행이 너무 메말라 있다. 남편이 데리고 들어온 여자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이 기묘한 동거는 기이한 방식으로 이어진다. 변하지 않는 육체가 만들어낸 균열이 조금씩 자리를 잡을 때 시간마저 정체된 듯하다. <내 비밀스런 이웃들>은 정말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나온다. 남편이 늘 말하는 그들이 간 곳이 광화문 어디인 것 같은데 결코 도달하지 못하거나 되돌아오지 못할 공간처럼 보인다. 평범해 보이는 화자의 시선이 닿는 곳과 사람들이 결코 범상하지 않다. 일상이 비일상으로 변하는 것은 이웃들에 의해서임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럭키슈퍼>는 동네 구멍가게가 어떻게 몰락하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동시에 그 시절 그 공간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삶을 밑바닥부터 보여준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위조밖에 없다. 그것이 성공할지는 둘째 문제고 말이다.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많이 곤혹스러웠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과 문장들이 불쑥 나오면서 혼란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이나 가족관계는 보이지 않고 병들거나 지리멸멸하다. <흑문조>의 부부가 늙으면 <북쪽 방> 노부부처럼 되지 않을까 생각되고, <룸미러> 속 아내의 불안이 <내 비밀스런 이웃들>이 그대로 이어지는 듯하다. 어쩌면 이런 연결이 억지일지 모른다. 현실을 뒤흔들고 뛰어넘은 장면들과 묘사가 이런 상상을 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아직 김숨이란 작가에 대해 그 어떤 평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잠시 유보하고 다른 소설을 몇 권 더 읽고 판단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