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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화사 - 조몬 토기부터 요시모토 바나나까지
폴 발리 지음, 박규태 옮김 / 경당 / 2011년 3월
평점 :
대학교재로 널리 사용되는 이책은 제목 그대로 일본문화사를 다룬다. 그러나 사학과나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생활양식이란 말에 더 가까운 문화보다는 예술, 학문과 같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일본문화를 다룬다.
이책의 내용은 책표지에도 소개되어 있듯이 조몬토기부터 요시모토 바나나까지 일본의 시작부터 지금까지를 한권에 포괄한다. 그 내용은 조소, 건축, 문학, 미술, 음악, 공연예술, 영화에서 만화와 대중문화까지 광범위하다.
한 이책이 얇은 책이 아니지만 한권에 다루기에는 결코 만만하다 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러다보니 읽다보면 주마간산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책 한권 분량으로도 모자랄 내용이 2-3페이지로 메워지니 그런 느낌은 어쩔 수없다. 더군다나 시대도 분야도 그렇게 방대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책이 수십년을 살아남아 교과서로 쓰이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조몬시대라든가 야마토 조정, 에도시대와 같은 일본사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더라도 일본문화의 흐름을 개관할 수 있게 정치사와 문화사가 유기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둘째 워낙 긴 시대에 걸친 방대한 내용을 다루다 보니 설명이 간략할 수 밖에 없지만 요점을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고 짧은 내용들이 어울려 각 시대별 문화의 이미지를 그리는데 성공하고 있다.
셋째 각 시대의 이미지를 관통하는 일본성을 설명하면서 전체적으로 일본문화의 특징을 그리고 있다. 특히 이 부분이 저자가 중점을 두는 부분이다.
“이책의 중심주제는 전근대시대에는 중국으로부터, 그리고 근대에는 서양으로부터 풍부한 문화적 차용을 해온 역사적 맥락 안에서 일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핵심적인 사회적, 윤리적, 문화적 가치를 유지하고 보존해왔으며 그럼으로써 일본인들은 항상 외국으로부터 차용한 것을 자신의 취향과 목적에 맞도록 응용해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 있었다.”
저자가 일본문화의 특징이라 말하는 것은 미적 감수성이다. 일본의 미적 감수성은 선사시대부터 나타난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몬 토기와 야요이 토기의 가장 현저한 차이는 전자가 장식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후자는 형식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많은 야요이 토기는 장식이 전혀 없다.” 일본사회의 원형이 만들어진 것도 조몬시대보다는 농경이 시작된 야요이 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저자는 문화 역시 야요이 시대가 원형이 된다고 본다.
“야요이 토기는 그 고유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일본의 미학전통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가치에 기초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도기제작술이 유약을 바르지 않은 단순한 형태의 토기로부터 세련된 자기로 이행되면서 초창기의 도기들은 그저 과거의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까지도 원시적인 도기에 대한 사랑을 간직해왔다. 원시적인 도기에 대한 일본인의 애정은 자연스러운 것을 가치있게 여긴다든지 혹은 본래적인 것, 변하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태도에서 기인한 듯하다. 자연스러움은 원재료에 충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원시적인 도기의 제작자는 자신이 사용하는 진흙을 가지고 꾸리며 하지 앟는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질감뿐 아니라 자신이 ‘원시적으로’ 만든 도기의 불완전성을 사랑한다.”
자연스러움에 대한 사랑은 일본에만 특이한 것은 아니다. 물론 재료 자체의 맛을 살리는 일본요리가 한국, 중국의 요리와는 다르지만 동북아 3국에서 자연스러움은 공유된 가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문화에서 자연스러움이란 특별하다. 그것은 단지 예술의 원칙이 아니라 일본인이 세상을 보는 감수성 자체라 저자는 보는 것같다.
신도를 예로 들 수 있다. “신도는 항상 ‘마코토(誠, sincerity)라는 관념과 연관성이 있다. 이 마코토라는 관념은 일본역사상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되어 왔다. 천근대 일본에서 가장 대표적인 종교 및 신앙체계로 신도와 불교 그리고 유교를 들 수 있다. 이 중 불교와 유교는 6세기 중엽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인데 비해 신도는 일본 고유의 종교이다. 후대에 사람들은 이 세가지 종교시스템을 도식적으로 예컨데 불교가 ‘타계지향적(other-worldly)’ 혹은 ‘형이상학적’이라면 유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이에 비해 신도는 ‘감성적’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17세기 말에서 18세기의 학자들은 일본인의 ‘본래적인’ 특성은 신도적, 감성적이라고 규정하는 반면, 불교의 형이상학 및 유교의 합리성을 외해적인 것이라 하여 부정했다ㅓ. 이와 같은 네요-신도학차의 주장을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일본인들이 항상 인간본성의 감성적 차원을 중시해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본인들은 종종 ‘진리’라든가 ‘정의’ 또는 ‘선’과 같은 가치들보다도 그때그때의 느낌과 행위에 충실한 삶을 더 추구해온 것이다. 물론 일본인들에게 진리, 정의, 선 등의 가치가 마코토와 양립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일본인의 정조가 오랫동안 주로 감정의 윤리라 할 만한 마코토에 지배받앗다는 것을 시사한다.”
마코토는 윤리를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감수성의 문제로 보는 태도이다. 다시 말해 세상을 원칙에 따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미학적으로 느끼는 문제이다. 무엇을 느끼는가가 일본문화의 자연스러움을 정의한다.
마코토의 윤리가 미학적 원리로 발전한 것을 저자는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라 말한다. 모노노아와레란 “’사물이나 사건 등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수성’ 혹은 ‘사물이나 사건에 감동할 줄 아는 능력’”이라 정의된다. “예를 들자면 기노 쓰라유키는 ‘고킨슈’ 서문에서 ‘꽃들 사이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하며 고요한 연못에서 노니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때 과연 누가 노래나 시를 짖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묻는다. 그러면서 쓰라유키는 사실상 인간이란 정서적 존재라서 어떤 사물을 지각하고 마음이 동하게 되면 이에 반응하여 자연스럽게 직관적으로 노래와 시를 짓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모노노아와레의 가장 핵심적인 감수성은 바로 자연의 아름다움이건 사람의 느낌이건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접하여 감동할 줄 아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모노노아와레가 미학의 중심원리가 된다면 아름다움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게 된다. “일본의 전통에서 모노노아와레란 오직 인간이 사물 안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지각’함으로써ㅓ 비로소 성립되는 그런 것이다. 일본인들은 전통적으로 아름다움이란 대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즉 지각하는 인간)에 의해 환기되는 것으로 여겨왔다.”
모노노아와레는 미학은 마코토의 윤리에서도 동일하다. 국학의 대성자인 모토오리 모리나가는 겐지 이야기의 “지극히 여성적인 남자주인공 겐지의 성격규정과 관련하여 유교 및 불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겐지는 ‘말도 안되는 부도덕한 부정을 저지른’ 죄인이다. 그러나 노리나가는 겐지는 ‘선한 자’라 말한다.
“겐지 이야기가 지향하는 주제는 연꽃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것을 가꾸고 키우기 위해 탁하고 지저분한 흙탕물을 일부러 모으고 저장하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니까 겐지 이야기에 묘사된 부정한 불륜의 사랑이라는 더러운 흙탕물은 그것을 찬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인간존재의 근원적 슬픔을 아는 것의 비유라 할만한 연꽃을 키우기 위한 목적을 ㅅ설정된 것이다. 요컨대 겐지의 행위는 지저분한 흙탕물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아름답고 향기로운연꽃 같은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겐지 이야기는 그런 흙탕물의 부도덕하고 불순한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것은 인간존재의 근원적 슬픔을 아는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부드러운 심성을 지닌 자들 안에 자리잡고 있기 ㄸ개문이다. 겐지 이야기는 그와 같은 감성이야말로 선한 인간의 토대이자 기준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선과 악을 나누는 것은 감수성의 문제이며 악은 감수성이 메마른 ‘못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일본의 소설은 서구식의 주제의식이나 플롯에 따르는 탄탄한 구조를 그리 중시하지 않았다. 모노노아와레의 미학 때문이다. “사실 일본인들은 이야기의 전개라든가 주의 깊게 구성된 서사적 측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예를 들어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자연세계 및 그 안에서의 삶은 그 자체의 움직임과 기능을 가지고 잇다. 우리에게, 또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무한히 다양하며 부단히 변한다. 그런 것들에 대해 너무 과도하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해석을 가하게 되면 실패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예술가의 경우 그것은 오류이거나 부정직함이 될 수도 잇다. 바로 이와 같은 관점을 통해 가와바타는 ‘사물에 대한 탁월한 감수성’ 즉 다니자키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매우 익숙하고 친밀했던 고전문학에 널리 깔려 있는 모노노아와레를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다니자키가 ‘세설’에서 주로 인간관계의 친밀성을 탐구햇다면 가와바타는 그의 작품에서 사람들이 살고 잇는 자연환경에 대한 미묘한 반응을 다루고자 모노노아와레적 감각을 활용햇다.”
그러나 세상은 덧없다. 눈앞의 현상 너머의 세계에 무심한 모노노아와레의 세계에선 모든 것은 덧없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 덧없는 것에 피어나는 아름다움 역시 덧없다. 그렇기에, 덧없기에 그 아름다움은 더욱 가치가 잇다는 벗꽃의 미학이 일본문화를 지배했다고 저자는 본다.
“일본인들은 지속적이거나 영원한 것이 아닌, 깨어지기 쉽고 빨리 지나가버리며 사멸하기 쉬운 것 안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고래로 자연에 대한 그들의 감정은 무엇보다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사계절 가운데 그들은 특히 봄과 가을을 선호했다. 일본인들에게 봄은 생명의 시작 혹은 재생을 기념하는 계절로, 그리고 가을은 모든 생명과 아름다움의 궁극적인 소멸을 예감하는 계절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봄과 가을에 대한 일본인의 선호는 일견 엇비슷해 보이기는 하지만 사물이 소멸해가는 계절인 가을 쪽이 더 강렬한 매력으로 일본인들을 사로잡았다. 많은 일본인들은 그들의 감수성을 ‘아름다움의 피안’에까지 밀어붙여 외로움과 차가움과 시듦의 영역에서 미적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다.
사멸하기 쉬운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일본인의 감수성에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깔려 있다. ‘시간의 전제적인 폭압성’이야말로 줄곧 일본문학과 예술사에 편만한 주제엿다. 일본인들은 상식적인 아름다움의 범주를 넘어서서 문자 그대로 시간에 의해 황폐화되고 시들어 소진된 것들에까지 이런 주제를 확장햇다.
스러져가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일본인들이 가지는 특별한 취향으로 인해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일본인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인해 모노노아와레는 항상 슬픔과 멜랑콜리의 색조를 띠어왔다.”
논리적으로 모노노아와레는 무상의 미학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모노노아와레와 흔히 결합되었던 불교의 세계관이 멜랑콜리의 색조를 띠지는 않는다. 그러면 왜 일본인의 미학은 그런 방향으로 향한 것일까?
모노노아와레는 아와레로 줄여 말하기도 한다. 아와레는 슬픔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처음부터 모노노아와레란 감수성에는 멜랑콜리가 주조를 이룬 것이다. 중세일본문화에서 특히 이 부분을 “슬픔의 뉘앙스가 함축되어 있는 ‘쓸쓸함’ 곧 사비의 미학”이라 말햇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그런 외로움에 시달리면서도 중세의 일본인들은 사비의 아름다움 안에서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앞의 와카에 나오듯이 황량한 들판이나 혹은 단색의 빛바랜 늪지에서 이와 같은 사비의 미학을 발견했던 것이다.”
호지키의 유명한 모두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잇다. “호조키에는 전편에 걸쳐 움막(호조)이라는 말이 불교적 무상의 메타포로 더 나아가 모든 것이 덧없이 지나가버리는 불확실한 인생 그 자체에 대한 세련된 메타포로 주의 깊게 선택되어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우리는 천하고 초라한 움막에서 아름다운 어떤 것을 찾아내려는 경향을 엿볼 수 잇다. 그것은 중세에 전개된 ‘빈곤’의 미학에 기초한 아름다움이다. 움막이라는 중세적 이상은 15, 16세기에 창안된 다도에서 정신적, 미학적으로 그 정점에 도달한다. 불교 특히 선불교의 영향 아래 다인은 농가의 움막을 모델로 삼아 다실을 세웠다. 다도는 정신적일 뿐만 아니라 철저히 미학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