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문화사 - 조몬 토기부터 요시모토 바나나까지
폴 발리 지음, 박규태 옮김 / 경당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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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재로 널리 사용되는 이책은 제목 그대로 일본문화사를 다룬다. 그러나 사학과나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생활양식이란 말에 더 가까운 문화보다는 예술, 학문과 같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일본문화를 다룬다.

이책의 내용은 책표지에도 소개되어 있듯이 조몬토기부터 요시모토 바나나까지 일본의 시작부터 지금까지를 한권에 포괄한다. 그 내용은 조소, 건축, 문학, 미술, 음악, 공연예술, 영화에서 만화와 대중문화까지 광범위하다.

한 이책이 얇은 책이 아니지만 한권에 다루기에는 결코 만만하다 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러다보니 읽다보면 주마간산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책 한권 분량으로도 모자랄 내용이 2-3페이지로 메워지니 그런 느낌은 어쩔 수없다. 더군다나 시대도 분야도 그렇게 방대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책이 수십년을 살아남아 교과서로 쓰이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조몬시대라든가 야마토 조정, 에도시대와 같은 일본사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더라도 일본문화의 흐름을 개관할 수 있게 정치사와 문화사가 유기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둘째 워낙 긴 시대에 걸친 방대한 내용을 다루다 보니 설명이 간략할 수 밖에 없지만 요점을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고 짧은 내용들이 어울려 각 시대별 문화의 이미지를 그리는데 성공하고 있다.

셋째 각 시대의 이미지를 관통하는 일본성을 설명하면서 전체적으로 일본문화의 특징을 그리고 있다. 특히 이 부분이 저자가 중점을 두는 부분이다.

“이책의 중심주제는 전근대시대에는 중국으로부터, 그리고 근대에는 서양으로부터 풍부한 문화적 차용을 해온 역사적 맥락 안에서 일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핵심적인 사회적, 윤리적, 문화적 가치를 유지하고 보존해왔으며 그럼으로써 일본인들은 항상 외국으로부터 차용한 것을 자신의 취향과 목적에 맞도록 응용해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 있었다.”

저자가 일본문화의 특징이라 말하는 것은 미적 감수성이다. 일본의 미적 감수성은 선사시대부터 나타난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몬 토기와 야요이 토기의 가장 현저한 차이는 전자가 장식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후자는 형식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많은 야요이 토기는 장식이 전혀 없다.” 일본사회의 원형이 만들어진 것도 조몬시대보다는 농경이 시작된 야요이 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저자는 문화 역시 야요이 시대가 원형이 된다고 본다.

“야요이 토기는 그 고유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일본의 미학전통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가치에 기초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도기제작술이 유약을 바르지 않은 단순한 형태의 토기로부터 세련된 자기로 이행되면서 초창기의 도기들은 그저 과거의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까지도 원시적인 도기에 대한 사랑을 간직해왔다. 원시적인 도기에 대한 일본인의 애정은 자연스러운 것을 가치있게 여긴다든지 혹은 본래적인 것, 변하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태도에서 기인한 듯하다. 자연스러움은 원재료에 충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원시적인 도기의 제작자는 자신이 사용하는 진흙을 가지고 꾸리며 하지 앟는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질감뿐 아니라 자신이 ‘원시적으로’ 만든 도기의 불완전성을 사랑한다.”

자연스러움에 대한 사랑은 일본에만 특이한 것은 아니다. 물론 재료 자체의 맛을 살리는 일본요리가 한국, 중국의 요리와는 다르지만 동북아 3국에서 자연스러움은 공유된 가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문화에서 자연스러움이란 특별하다. 그것은 단지 예술의 원칙이 아니라 일본인이 세상을 보는 감수성 자체라 저자는 보는 것같다.

신도를 예로 들 수 있다. “신도는 항상 ‘마코토(誠, sincerity)라는 관념과 연관성이 있다. 이 마코토라는 관념은 일본역사상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되어 왔다. 천근대 일본에서 가장 대표적인 종교 및 신앙체계로 신도와 불교 그리고 유교를 들 수 있다. 이 중 불교와 유교는 6세기 중엽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인데 비해 신도는 일본 고유의 종교이다. 후대에 사람들은 이 세가지 종교시스템을 도식적으로 예컨데 불교가 ‘타계지향적(other-worldly)’ 혹은 ‘형이상학적’이라면 유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이에 비해 신도는 ‘감성적’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17세기 말에서 18세기의 학자들은 일본인의 ‘본래적인’ 특성은 신도적, 감성적이라고 규정하는 반면, 불교의 형이상학 및 유교의 합리성을 외해적인 것이라 하여 부정했다ㅓ. 이와 같은 네요-신도학차의 주장을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일본인들이 항상 인간본성의 감성적 차원을 중시해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본인들은 종종 ‘진리’라든가 ‘정의’ 또는 ‘선’과 같은 가치들보다도 그때그때의 느낌과 행위에 충실한 삶을 더 추구해온 것이다. 물론 일본인들에게 진리, 정의, 선 등의 가치가 마코토와 양립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일본인의 정조가 오랫동안 주로 감정의 윤리라 할 만한 마코토에 지배받앗다는 것을 시사한다.”

마코토는 윤리를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감수성의 문제로 보는 태도이다. 다시 말해 세상을 원칙에 따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미학적으로 느끼는 문제이다. 무엇을 느끼는가가 일본문화의 자연스러움을 정의한다.

마코토의 윤리가 미학적 원리로 발전한 것을 저자는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라 말한다. 모노노아와레란 “’사물이나 사건 등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수성’ 혹은 ‘사물이나 사건에 감동할 줄 아는 능력’”이라 정의된다. “예를 들자면 기노 쓰라유키는 ‘고킨슈’ 서문에서 ‘꽃들 사이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하며 고요한 연못에서 노니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때 과연 누가 노래나 시를 짖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묻는다. 그러면서 쓰라유키는 사실상 인간이란 정서적 존재라서 어떤 사물을 지각하고 마음이 동하게 되면 이에 반응하여 자연스럽게 직관적으로 노래와 시를 짓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모노노아와레의 가장 핵심적인 감수성은 바로 자연의 아름다움이건 사람의 느낌이건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접하여 감동할 줄 아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모노노아와레가 미학의 중심원리가 된다면 아름다움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게 된다. “일본의 전통에서 모노노아와레란 오직 인간이 사물 안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지각’함으로써ㅓ 비로소 성립되는 그런 것이다. 일본인들은 전통적으로 아름다움이란 대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즉 지각하는 인간)에 의해 환기되는 것으로 여겨왔다.”

모노노아와레는 미학은 마코토의 윤리에서도 동일하다. 국학의 대성자인 모토오리 모리나가는 겐지 이야기의 “지극히 여성적인 남자주인공 겐지의 성격규정과 관련하여 유교 및 불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겐지는 ‘말도 안되는 부도덕한 부정을 저지른’ 죄인이다. 그러나 노리나가는 겐지는 ‘선한 자’라 말한다.

“겐지 이야기가 지향하는 주제는 연꽃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것을 가꾸고 키우기 위해 탁하고 지저분한 흙탕물을 일부러 모으고 저장하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니까 겐지 이야기에 묘사된 부정한 불륜의 사랑이라는 더러운 흙탕물은 그것을 찬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인간존재의 근원적 슬픔을 아는 것의 비유라 할만한 연꽃을 키우기 위한 목적을 ㅅ설정된 것이다. 요컨대 겐지의 행위는 지저분한 흙탕물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아름답고 향기로운연꽃 같은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겐지 이야기는 그런 흙탕물의 부도덕하고 불순한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것은 인간존재의 근원적 슬픔을 아는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부드러운 심성을 지닌 자들 안에 자리잡고 있기 ㄸ개문이다. 겐지 이야기는 그와 같은 감성이야말로 선한 인간의 토대이자 기준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선과 악을 나누는 것은 감수성의 문제이며 악은 감수성이 메마른 ‘못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일본의 소설은 서구식의 주제의식이나 플롯에 따르는 탄탄한 구조를 그리 중시하지 않았다. 모노노아와레의 미학 때문이다. “사실 일본인들은 이야기의 전개라든가 주의 깊게 구성된 서사적 측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예를 들어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자연세계 및 그 안에서의 삶은 그 자체의 움직임과 기능을 가지고 잇다. 우리에게, 또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무한히 다양하며 부단히 변한다. 그런 것들에 대해 너무 과도하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해석을 가하게 되면 실패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예술가의 경우 그것은 오류이거나 부정직함이 될 수도 잇다. 바로 이와 같은 관점을 통해 가와바타는 ‘사물에 대한 탁월한 감수성’ 즉 다니자키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매우 익숙하고 친밀했던 고전문학에 널리 깔려 있는 모노노아와레를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다니자키가 ‘세설’에서 주로 인간관계의 친밀성을 탐구햇다면 가와바타는 그의 작품에서 사람들이 살고 잇는 자연환경에 대한 미묘한 반응을 다루고자 모노노아와레적 감각을 활용햇다.”

그러나 세상은 덧없다. 눈앞의 현상 너머의 세계에 무심한 모노노아와레의 세계에선 모든 것은 덧없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 덧없는 것에 피어나는 아름다움 역시 덧없다. 그렇기에, 덧없기에 그 아름다움은 더욱 가치가 잇다는 벗꽃의 미학이 일본문화를 지배했다고 저자는 본다.

“일본인들은 지속적이거나 영원한 것이 아닌, 깨어지기 쉽고 빨리 지나가버리며 사멸하기 쉬운 것 안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고래로 자연에 대한 그들의 감정은 무엇보다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사계절 가운데 그들은 특히 봄과 가을을 선호했다. 일본인들에게 봄은 생명의 시작 혹은 재생을 기념하는 계절로, 그리고 가을은 모든 생명과 아름다움의 궁극적인 소멸을 예감하는 계절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봄과 가을에 대한 일본인의 선호는 일견 엇비슷해 보이기는 하지만 사물이 소멸해가는 계절인 가을 쪽이 더 강렬한 매력으로 일본인들을 사로잡았다. 많은 일본인들은 그들의 감수성을 ‘아름다움의 피안’에까지 밀어붙여 외로움과 차가움과 시듦의 영역에서 미적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다.

사멸하기 쉬운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일본인의 감수성에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깔려 있다. ‘시간의 전제적인 폭압성’이야말로 줄곧 일본문학과 예술사에 편만한 주제엿다. 일본인들은 상식적인 아름다움의 범주를 넘어서서 문자 그대로 시간에 의해 황폐화되고 시들어 소진된 것들에까지 이런 주제를 확장햇다.

스러져가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일본인들이 가지는 특별한 취향으로 인해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일본인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인해 모노노아와레는 항상 슬픔과 멜랑콜리의 색조를 띠어왔다.”

논리적으로 모노노아와레는 무상의 미학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모노노아와레와 흔히 결합되었던 불교의 세계관이 멜랑콜리의 색조를 띠지는 않는다. 그러면 왜 일본인의 미학은 그런 방향으로 향한 것일까?

모노노아와레는 아와레로 줄여 말하기도 한다. 아와레는 슬픔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처음부터 모노노아와레란 감수성에는 멜랑콜리가 주조를 이룬 것이다. 중세일본문화에서 특히 이 부분을 “슬픔의 뉘앙스가 함축되어 있는 ‘쓸쓸함’ 곧 사비의 미학”이라 말햇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그런 외로움에 시달리면서도 중세의 일본인들은 사비의 아름다움 안에서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앞의 와카에 나오듯이 황량한 들판이나 혹은 단색의 빛바랜 늪지에서 이와 같은 사비의 미학을 발견했던 것이다.”

호지키의 유명한 모두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잇다. “호조키에는 전편에 걸쳐 움막(호조)이라는 말이 불교적 무상의 메타포로 더 나아가 모든 것이 덧없이 지나가버리는 불확실한 인생 그 자체에 대한 세련된 메타포로 주의 깊게 선택되어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우리는 천하고 초라한 움막에서 아름다운 어떤 것을 찾아내려는 경향을 엿볼 수 잇다. 그것은 중세에 전개된 ‘빈곤’의 미학에 기초한 아름다움이다. 움막이라는 중세적 이상은 15, 16세기에 창안된 다도에서 정신적, 미학적으로 그 정점에 도달한다. 불교 특히 선불교의 영향 아래 다인은 농가의 움막을 모델로 삼아 다실을 세웠다. 다도는 정신적일 뿐만 아니라 철저히 미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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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페리움 - 제국-권력의 오만과 몰락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외 지음, 박종대 옮김 / 말글빛냄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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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란 제목이 붙은 이책은 말 그대로 제국을 다룬다. 제국들 중에서 고대 지중해세계의 이집트, 페르시아, 카르타고, 그리고 로마가 그 대상이다.

이책이 다루는 네 문명은 로마를 빼면 그리 알려진 것이 없다. 우선 기록이 별로 남은 것이 없기도 하지만 그들이 ‘패자’이기 때문이다. 이집트와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멸망했고 페르시아는 알렉산더에게 망했다. 언제나 패자의 역사는 승자의 영광에 희생되기 마련이며 패자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게 마련이다. 패자의 역사는 그렇기에 거의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

이책의 목적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네 문명이 어떤 문명이었는가 그리고 그 문명들이 왜 사라져야 했는가에 있다.

저자의 답은 간단하다. 군사적으로 무너졌기 때문에 그 문명들은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야나 잉카의 경우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금속무기와 병균이란 생물학 병기 이외엔 두 문명이 무너져야 할 이유는 달리 없었다.

페르시아의 멸망이 그런 경우라 저자는 말한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했을 때 페르시아는 절정기에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페르시아는 당시 2백년이 넘도록 불변의 세계 질서를 구축한 세계의 중심축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첫째 오늘날에야 그 구조를 이해하기 시작할 정도로 진보적이었던 그들의 행정 제도를 들 수 있다. 둘째 막강한 군대가 있었다. 전투 경험이 많은 노련한 전사와 현대식 무기, 그리고 전투 코끼리와 바퀴에 낫 모양의 칼이 달린 전차들이 상대방을 압도했다. 셋째 탁월한 인프라 시설과 소중한 수자원이 있었다. 방대한 제국 곳곳에 파 놓은 운하와 도랑들을 통해 충분한 물이 비옥한 밭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것은 부의 영원한 원천이었다.”


그러나 “이 제국은 한 한 차례의 전쟁으로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도 국력이 최고의 전성기에 달했을 때였다.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은 2백여년전부터 역사가들에게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한가지 설명은 폴 케네디 식의 overstretch 이론이다. 페르시아가 하나의 제국으로 묶은 지역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포함한 중근동의 전부였다. 당시 알려진 세계의 전부로 최초의 세계제국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제국이 무너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라는 것이다. “페르시아의 중앙 집권자들은 수많은 민족과 부족들을 서로 융합하고 끊임없이 중앙에서 멀어지려는 그들의 봉건적 원심력을 제어하는데 실패했다.” 페르시아의 적이었던 그리스인들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페르시아에 대한 기록을 독점하다시피 한 그리스인들의 관점이 페르시아에 대한 정통이 되었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그리스의 연대기 저자들은 페르시아를 평가함에 있어서 오랫동안 감탄과 혐오감 사이에서 흔들렸다.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 직전, 그리스 작가들은 페르시아를 철저한 악의 제국으로 잔인한 폭군이 백성과 신하를 노예처럼 학대하는 상극의 세계로 폭력과 야만이 판치는 불의 국가로 묘사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설명은 일방적인 선전에 불과한 왜곡일 뿐이라 말한다. 오늘날 발굴된제국의 행정문서들은 “확고한 체계를 갖춘 현대풍의 관료 제도가 페르시아 제국을 지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문서들은 그리스인들의 악의에 찬 선전처럼 “허약한 국가 조직, 무절제한 방탕과 사치, 그리고 계획된 잔인성에 대한 흔적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저자는 페르시아 제국을 지탱한 것은 로마제국 처럼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지배와 인프라 덕분이었다고 본다.

파라다이스란 말의 어원이 된 “파사르가다에의 관개 시설은 페르시아 제국 전 역사의 본보기가 되었다. 후세의 페르시아인들은 위대한 왕들이솔선수범한 예를 따라 황량한 대지 곳곳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했다. 오늘날에는 뙤악볕 아래 먼지만 폴폴 날리고 있지만 페르시아 대왕들이 다스린 시대에는 그곳에 갖가지 작물과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관개시설이 이루어진 정원에는 유리처럼 투명한 물이 수로를 따라 흘러들어왔다. 농부들은 세심하게 설계된 물길을 이용해서 소중한 물을 밭으로 끌어들였다. 그렇게 자라난 푸른 식물들이 비옥한 대지 위에 그늘을 드리웠다. 고대 페르시아 사람들은 메마른 대지 한가운데에 생겨난 이러한 기적들에 대해 스스로 놀라워했다. 지칠줄 모르는 노동과 잘 조직된 행정 체계가 있었기에 가능한 기적이었다. 소중한 물을 한치의 낭비없이 체계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풍성한 수확을 위한 전제조건이엇고 그거쇼이 페르시아 부의 밑거름이 되었다.”

페르시아의 멸망은 그런 원심력 때문이 아니라 군사적 문제였고 정치 시스템의 문제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는 그리스 군의 전형적인 전투 대형을 한 단계 발전시켜 팔랑크스를 만들어 냇다. 팔랑크스 부대는 장창 덕분에 거의 모든 적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적의 기병과 보병, 심지어 전차 부대에도 팔랑크스는 그 자체로 가공할 무기였다. 적의 정면 공격은 팔랑크스 태형에서 수 미터씩 앞으로 튀어나온 장창의 뾰족한 칼날에 막혀 무력화되었다. 팔랑크스 부대가 이런 밀집 대형으로 진격하면 16줄 혹은 그 이상의 열로 빽빽하게 줄지어 선 장정들이 밀어붙이는 엄청난 압력 때문에 그 어떤 적진도 버텨 낼 수 없었다.”

알렉산더는 팔랑크스와 중기병을 활용한 전술과 나폴레옹에 비견되는 전술적 유연함으로 무적이 되었다. 당대 최고의 군사적 혁신에 페르시아의 군대는 대처할 수 없었고 알렉산더란 군사적 천재의 맞수로 페르시아의 유약한 황제는 적당하지 않았다.

“페르시아 제국의 그늘에 있는 모든 민족과 부족들은 ‘다리우스’라는 한 사람의 이름으로 통합될 수 있었다. 그는 대왕으로서 전 페르시아 권력의 구심점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이처럼 국가의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제국을 몰락으로 이끈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만일 왕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겨 왕좌가 비게 되면 페르시아 제국은 갈가리 찢겨져 나갈 것이다. 이처럼 그의 생명과 생존은 제국의 존속을 위한 선결조건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왕이 사라진 왕좌에 알렉산더가 그렇게 쉽게 앉을 수 있엇고 제국을 물려받을 수 있었던 이유이다.

저자는 카르타고가 로마에 의해 무너진 것도 시스템의 문제였다고 말한다. 저자의 카르타고에 대한 설명은 시오노 나나미의 포에니 전쟁 서술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으므로 다음의 인용구만으로 넘어가겠다.

“북아프리카 해안의 대도시가 로마를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한니발이라는 전설적 명장ㅇ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개인이 아닌 국가 대 국가로서는 도저히 로마를 당해낼 수 없었다. 로마 공화국은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조달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정치 시스템도 카르타고보다 훨씬 현대적이었다. 시민들은 각자 자신의 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군대에 들어가 싸웠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보자면 용병 부대보다 우세한 전투력을 낳은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로마의 ‘동맹 정치’의 우수성을 빼놓을 수 없다. 로마의 지도부는 정복한 이탈리아의 다른 민족들에게 의무만 부과한 것이 아니라 권리도 함께 인정함으로써 한니발이 도저히 와해할 수 없는 안정된 정치 조직을 구축했다. 포에니 전쟁은 서부 지중해권으로 진출하려던 로마인들에게 빌미를 제공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이 그들에게 시련을 안김으로써 오히려 로마는 세계권력으로 부상하는 전기를 맞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로마와의 시스템 경쟁에서 졌기 때문에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의 문제는 이집트의 멸망에도 마찬가지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집트의 문제는 내향성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위는 바다로 막히고 삼면은 사막과 산맥으로 막힌 이집트는 외침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한 조건이 수천년의 수명을 보장했다. 더군다나 “이집트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 즉 물, 비옥한 땅,. 따사로운 햇빛 등을 무한정으로 갖춘 나라였다. 이집트인들은 매우 보수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문명의 건설에 원동력이 되는 자원이 어디에나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외침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지리적 요건, 탁월한 농업 기반, 신에 대한 강한 믿음, 그리고 역사적 연속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민족성이 3천년동안 이집트 문명을 하나로 묶고 꽃피우게 한 접착제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 조건은 이집트를 내향적 문명으로 만들었다. 파라오들은 인간에겐 영원에 가까운 천녀동안 ‘피라미드들을 짓게 했다.” 그 시간동안 주변의 다른 민족들은 “전쟁에 집착하고 생존 그 자체를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지만 파라오들은 “신에 좀더 가깝게 다가가려는 교만한 생각에 푹 빠”질 수 있었다.

이 세계를 하나의 완결된 시스템으로 만든 것은 종교와 정치의 일치였다: 신의 대리인으로서의 파라오. 그 시스템의 완결성은 막강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민족이 이집트를 지배한 기나긴 역사의 마지막 군주였다. 후기 왕조 시대의 파라오들은 더 이상 이집트 출신이 아니었다. 리비아족, 쿠시트족, 페르시아인, 마케도니아인 들이 각각 시대를 달리하며 나일 제국을 다스렸다. 그런데 이들 모두에게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파라오 제국에 도착하자마자 자신들의 출신을 모두 잊어버린 거시다. 이집트에 왔던 모든 이민족은 즉시 이집트화되었다. 이것은 당시 이집트 문명의 엄청난 영향력을 말해 준다. 이집트는 모든 이질적인 것을 거부했다. 이집트인들은 무엇보다 자신들을 뺀 나머지 세계에 대해 차단막을 치고 그들과 스스로를 구분하여 자의식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그 자의식은 종교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 자의식을 철저히 내면화할 수 없었던 “이방의 지배자들은 항상 권력의 틀 안에서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쳤고 비싼 급료를 주고 고용한 용병들의 도움으로 나라를 통치했다. 사실 심각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프톨레마이오스 왕가가 의지할 곳은 용병들뿐이엇다. 어느 이집트인이 이민족 지배자들을 위해 칼을 들고 목숨을 내놓겠는가?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집트의 전력은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강한 군사력을 갖춘 로마는 이미 기원전 168년부터 나일 제국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집트는 로마의 곳간이 되었다.

그러면 그 로마는 왜 멸망했는가? 저자는 로마라는 존재가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었을 때 로마는 멸망했다고 말한다. “로마는 원래 존재하는 세계였다. 하나의 자연현상처럼, 그리고 신에 의해 주어진 현실처럼. 그렇기에 후기 고대의 사람들은 로마의 종말을 곧 세계의 종말로 인식할 정도엿다. 로마는 사계절처럼 분명하고 선연한 실체였다. 일체를 포괄할 권리가 있는 세계 그자체였다.”

그렇기에 군인황제 시대의 무질서에서도 로마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게르만족 출신 지휘관들이 “로마 제국의 영토 안에서 제멋대로 지방 왕국을 선포하고 제국의 경계를 기분내키는대로 무시하곤” 했어도, 로마제국이 제국이 아니라 “별다른 결속력이 없는 군 연합체”로 전락해버렸어도 “로마 제국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몰락하지 않는 영원한 제국으로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로마는 지탱할 수 있었다.

로마제국에 최후의 일격을 날린 것은 민족 대이동이었다. 그 일격은 허약해져 있었던 로마를 무너트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면 왜 로마는 허약해졌던 것일까?

그리스도교의 번성은 로마, 세계 자체였던 로마가 무너져가는 상황이 아니엇다면 있을 수 없는 일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결코 영원할 수 없다는 비관주의” 그 위에서 기독교가 번성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위로의 복음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궁핍한 상황에 처해있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교가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로마가 서서히 죽어간 이유를 저자는 정치시스템의 문제라 생각한다. 헤르더의 말마따나 페르시아 제국과 마찬가지로 “’100여 민족과 120개 속주를 강제로 통합시킨 제국은 국가가 아니라 괴물이다.’ 이러한 괴물을 길들이려면 강철 같은 주먹과 고대 후기의 나약한 황제들에겐 없었던 강력한 권력 의지가 필요했다. 나약한 황제들의 등장과 함게 로마 제국의 이념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국가의 행정과 조직은 여전히 건재했지만 로마 제국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우구스트;라고 불리며 중앙집권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황제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좌지우지되었다.”

그런 상황을 개선해보려는 최후의 시도가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이엇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새로운 혁명적 이념들 속에서 고대의 견고한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이 서서히 붕괴되어 갔다. 근본적인 가치의 변화로 야기된 이러한 징후들은 ‘사회적 불안감’이라는 말로 특징 지울 수ㅜ 있을 듯하다. 그래서 일부 역사가들은 4세기를 ‘불안의 시대’라 말한다. 당시는 옛것이 붕괴되었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결실을 맺지 않은 시대였다. 극도로 불안정한 과도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제국을 수호하는 옛 신들이 없는 로마는 과연 무엇일까? 과거에 로마를 위대하고 강하게 만든 모든 것들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사라진 지금, 천년을 이어온 모든 전통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신전에 세워져 있는 수많은 동상들과 영광스런 과거를 증언하는 신격화된 황제들의 조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선택받았다는 절댖2ㅓㄱ 특권 의식, 세계의 다른 모든 민족에 대한 우월감, 그리고 로마의 시민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은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새로운 고리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어느날 갑자기 서로 형제가 되었다. 지금가지 언제나 칼의 힘을 신뢰하며 세력의 확장과 안정에만 노력을 기울여 온 나라가 ‘자선’과 ‘사랑’으로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과도한 요구였다. 새로운 종교와 그 종교의 혁명적 가치관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정치시스템은 여전히 과거와 동일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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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2
박해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1993년 처음 서울을 방문해 아파트단지의 거대함에 충격을 받은 이후, 나는 어떻게 이런 대단지 아파트가 양산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박사 논문의 주제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프랑스인들에게 아파트는 부정적으로 보일 뿐이다. “그들에게 이 아파트단지들은 관리부실, 볼품없는 건축미, 저급한 생활환경을 연상테 한다. ‘대단지 아파트=도시문제 발생지역’이라는 단순도식은 서구도시의 상징체계 안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발레리 줄레조)

코 크고 파란 눈의 아가씨가 아파트에 대해 묻고 다닐 때 사람들은 당연한 것도 모르는 ‘순진한 외국인’이란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사람은 많고 땅은 이리 좁은데 어디다 집을 짓자는 말인가? 위로 올릴 수 밖에. 살기 편하니 또 좀 좋은가? 아파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프랑스와 달리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1970년, 정부 주도로 건설된 몇몇 소형 아파트단지는 20여군데였고 모두 강북에 위치했다. 당시 서울시에서 아파트는 전체 세대의 4%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 서울에는 아파트가 없는 지역이 없고 주택 수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5년 현재 52.&%로 상승했다.” (줄레조)

어떻게 이런 급팽창이 가능했는가? “1970년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에게 아파트는 그다지 각광받지 못햇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땅이 좁고 사람이 많다고 해서 고층의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불가피한 것도 아니다. 협소한 영토에 인구밀도가 높은 네델란드나 벨기에에서는 도시로의 집중화가 대규모 주택단지 건설을 가져오지 않았다. 이들 나라에서 건설된 대규모 주택의 수는 영토가 훨씬 넓은 프랑스보다도 적다.” (줄레조)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줄레조가 던진 질문에 대해 이책의 저자는 문화적 헤게모니라 답한다. 프랑스나 미국에서 대규모 주택단지는 서민을 위한 주거공간으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처음 들어선 아파트의 포지셔닝은 중상류층 이상을 위한 공간이엇다.

물론 한국이라고 프랑스와 같은 부정적 인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가 “마치 단층 운동에 의한 지각의 융기처럼 솟아오르던 30여년전에도 부정과 부패의 악취를 풍기는 투기의 온상이라니, 사회 구성원의 공동체적 유대감을 해체하며 인간 소외를 가속화하는 끔찍한 벌집이라니, 비판의 화살들이 수북이 박혀 생매장의 말무덤을 만들지만” 아파트라는 “불도저는 막지 못한다.” 아파트는 “담론의 가상세계에선 언제나 패배하지만 물질의 현실세계에선 백전백승이다.” 비판의 무기를 휘두르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그것뿐이다. 무기의 비판은 그들이 아니라 아파트의 몫이다. 왜 이런 일이 몇십년동안 반복되는가? 저자의 물음이다. 그답은 욕망의 정점에 아파트가 있기 때문이다.

1962년 ‘단지 개념으로 건설된 한국 최초의 아파트 단지’였던 마포아파트는 ‘도시 중산층의 주거 모델’로 제안되었다. 아직 전근대적 생활방식이 지배적이었던 당시엔 아파트가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서구식 가정행활을 꾸리려던 서울 토박이의 젊은 중산층들’이 이 아파트에 주목했고 “자유분방함을 선호하는 소설가, 화가, 영화감독, 연극인등 저명 예술가들의 이름이 마포아파트의 초기 입주자 목록에” 남는다. 그후 미국인들이 대거 입주하면서 이 아파트가 일반인들에게 주목을 받고 ‘일반 회사의 중견 간부급들도 이곳으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파트의 “주거 모델로서의 타당성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했지만 주말만 되면 아파트의 집치레와 세간살이를 구경하려고 방문한 주변 친지들로 현관 문턱이 닳을 지경이었다. 그들에겐 아들과 손자가 거주하는 이 아파트가 박람회에 전시된 미래의 견본주택이나 다름없었다. 현대적 일상생활의 실험실이자 구경거리로서의 마포아파트,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대한주택공사 총재 장동운이 본래 의도했던 바였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대한주택공사는 마포아파트의 실험을 통해 아파트 보급의 타당성을 확인했고 본격적인 도입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저자는 마포아파트에서 그리고 이후 쏟아진 아파트에서 당시 정부가 의도했던 것은 ‘조국 근대화’의 생활측면, ‘생활의 혁명’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저 잘 먹고 잘 입는 것처럼 별다른 매력을 지니지 못한 현대화도 너무 추상적이어서 체감이 힘든 막연한 현대화도 아니었다. 그것은 구체적인 질감을 지닌 또 다른 현대화였다.” 그리고 그 현대화의 질감은 ‘선진 외국에서나 볼 수 있는 대중사회의 면모’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서울시 전체 가구의 아파트 보급률은 1972년에는 4%, 1977년에는 7%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수치를 무시할 수 있을만큼 아파트는 ‘현대적인 문화생활’의 상징으로 자리를 굳건히 다져갔다. ‘매일 저녁 우리를 찾아오는 기라성 같은 탤런트’, ‘부의 상징으로 꼽히는 사장’, ‘출세의 부러움을 사는 고급관리’, ‘서울 명문대의 교수’등 이른바 사회지도층 상당수가 아파트로의 이사를 서둘렀고 대중 산업사회의 인간소외에 비관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문인들조차도 아파트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햇다.

1977년 대학생 500명을 상대로한 설문조사에서 아파트에서 신혼 살림을 차리겠다고 응답한 대학생이 81%에 달했다. 특히 여학생이 선호도는 91%에 달햇다.”

아파트가 부정할 수 없는 실세로 등극한 것은 강남개발부터였다. 강남개발의 설계자들이 염두에 둔 것은 “당시 새롭게 등장하던 인구통계적 집단이었다. 이후에 ‘신중산층’이라는 이름을 얻게 도리 그들은 1970년대 압축적인 경제성장의 인적 견인차이자 실질적 수혜자로 부상하던 ‘조국 근대화’의 자식들이엇다. 1940년애에 지방에서 태어나 이제 막 출세의 초입에 들어서려는 찰나에 있던 이들, 그들은 경제성장의 격랑으로 극대화된 사회적 이동성을 십분 활용해 정부 관료와 대기업 관리직, 고소득 전문직과 자영업자로 성공신화를 써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주로 출신대학의 인근지역이나 사대문 밖에 머물며 아직 서울의 구도심으로 진입할 만큼의 경제적 여력을 갖추지 못햇다. 그곳은 여전히 뜨내기들이 넘보기 힘든 토박이들의 거처였다.”

설계자들은 이들을 주목한다. “이들을 집장사 집들이 점령한 서울 변두리에 방치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 질서로 끌어들여 입신과 출세의 기회를 제공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이들을 위해선 역사, 관습, 제도들이 퇴적되어 봉건 질서의 악취를 풍기는 장소에서 벗어나야 했다. 설계자들은 한강 이남에 위치한 무색무취의 턴 빈 공간을 눈여겨보았다.”

강남은 주류로 성장해가는 베이비부머들과 함께 신도심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강남의 얼굴을 도배한 아파트의 요새는 그 주류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규정했다. 저자는 아파트가 정의한 것은 단순히 수세식 화장실과 중앙난방시설 같은 것만이 아니라 말한다.

아파트는 “감각의 생산양식을 구축해 거주자들이 특정한 시각성의 논리를 체화하도록 독려했고 일상성의 프로그램을 제공해 독특한 구별짓기의 인지적 알고리즘을 내면화하도록 만들었다. 아파트는 그들 내면의 윤곽을 주조하는 거푸집이엇다. 독특한 감각과 인지의 공간적 매트릭스로 인간 거주자들의 습속을 분절하면서 그 결과로 ‘신중산층’의 독특한 정체성을 생산해냈다. 비판자들의 생ㄱ각처럼 신중산층이 아파트를 쌓아올린 것이 아니다.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아파트가 그들을 빚어냇다. 그들의 욕망은 아파트의 피조물이엇다. 바로 이것이 아파트의 콘크리트 육신에 적재된 매혹의 실체다.”

거창하게 들린다. 그러나 저자의 말은 거창하지 않다. 저자는 욕망의 구체적인 대상들을 나열하면서 전혀 그말이 거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아파트 평형으로 사람의 신분이 결정되는 것, 아파트 거실에 놓이는 가구들과 인테리어의 변천사를 살펴보며 농업사회의 ‘촌스런’ 취향이 어떻게 아파트라는 모더니티의 공간에 맞춰 재조형되는가, 예를 들어 자개장이 사라지고 원목이 뜨는 미시사, 꽃무늬나 에이프릴과 같은 장식이 어떻게 아파트라는 공간에 의해 사라지고 재등장하게 되는가, TV의 외장이 원목장에서 검정 플라스틱으로 왜 바뀌게 되는가, 아파트 대단지가 소매유통망을 제조직하면서 어떻게 소비사회를 만들어가는가 등을 자세히 분석한다.

이책의 주제는 그리 특별한 것은 없다. 앞에서 인용한 발레리 줄레조의 책만 하더라도 마찬가지 질문에서 시작해 비슷한 답을 내린다. 그러나 다른 책들과 달리 이책은 아파트가 우리의 욕망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란 재미있는 주제를 건드리고 있고 그 주제를 구체적이면서 재미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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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텐의 엘레오노르 - 중세 유럽을 지배한 매혹적인 여인
앨리슨 위어 지음, 곽재은 옮김 / 루비박스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이책은 12세기 남프랑스에서 태어난 어느 여인의 일대기이다. 여인의 지위가 한없이 낮았던 중세유럽에서 이 여인의 지위는 범상치 않았다. 프랑스의 1/4에 달하는 남프랑스 대영지의
유일한 상속녀로서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고 다시 영국의 왕비가 되어 플랜태저닛 왕조의 시작을 알렸던 여인. 이 책이 다루는 것은 평범할 수 없었던 여인의 삶이다.

거의 500 페이지에 육박하는 이책은 그러나 평전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엘레오노르라는 여인을 중심에 놓고 그녀를 중심으로 일어낫던 12세기 프랑스와 영국 왕실의 역사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저자가 계속 푸념하는 것처럼 엘레오노르란 여인에 대한 기록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시대 때문이기도 하지만 천년 가까이 지난 시간의 간극을 메울만큼 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그 부족분은 저자의 상상력으로 메워야 한다. 그러나 그 불충분함을 견디면서 이 두꺼운 책을 쓸 이유는 충분하다.

우선 12세기는 프랑스로선 카페왕조, 영국으로선 플랜태저닛 왕조가 시작된 시기이고 엘레오노르는 왕비로서 두 왕조가 시작되는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결혼으로 남서 프랑스와 북서 프랑스가 결합되어 프랑스의 절반이 영국왕실의 소유가 되면서 영국세력을 프랑스에서 몰아내는 것이 카페왕조의 사명이 되면서 두 왕조의 갈등의 원인이 되었고 이후 중세를 끝장낸 백년전쟁의 서전이 되엇다.

이책은 중세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12세기를 한 여인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이후 프랑스와 영국 왕정의 뿌리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이후 두 나라의 뿌리깊은 반목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제목에서 기대되는 것처럼 엘레오노르라는 한 여인의 내면을 안다든가 중세를 살아간 귀부인의 내밀한 삶을 아는데는 그리 큰 장점이 없는 책이다. 그보다는 남프랑스 아키텐 궁정과 파리 궁정, 런던의 궁정을 아는데는, 그리고 그 세 궁정의 관계가 어떻게 이후 양국의 역사를 만들었는가를 아는데는 쓸모가 많은 책이다.

그외에 이책에서 얻을 수 잇는 것은 플랜태저닛 왕조의 개창자이며 엘리오노르의 남편인 헨리 2세와 그 두 아들인 사자왕 리처드, 존왕의 초기 플랜태저닛 왕조의 세 왕의 연대기로도 꽤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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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생태보고서 - 먹고, 싸우고, 사랑하는 일에 관한 동물학적 관찰기
한나 홈스 지음, 박종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내용이 새롭거나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재미있다. 이 책의 내용이라고 해봐야 진화생물학자들이 인간을 다룰 때면 다들 말하는 주제들이다. 내용 상으로 이책이 뛰어난 점이라 해봐야 다양한 논문들을 요약해 보여준다는 정도인데 그것도 논문 하나에 짧막하게 반 페이지 정도이거나 길어야 한 두 페이지 정도 할애되는 정도이고 ‘카더라~’ 투로 정리하는 정도다. 물론 다루는 분야가 생물학부터 인류학, 고고학, 의학까지 걸치니 저자의 전공인 동물학을 넘어서 있고 전문가로서 논평을 하기는 힘든 일이니 당연하긴 하다. 그 정도로 방대한 논문을 정리할 능력이 된다는 자체가 평가받을 점이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이라는 것이 범위는 넓지만 새로울 것은 없다.

그러면 이책의 가치는 무엇인가? 관점이다.

저자는 아이가 없지만 아이를 잘 다룬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어린 인간은 동물과 같기 때문이라 말한다. 부모 역시 동물학자였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동물들과 살아온 저자는 동물과 어린 인간을 마찬가지로 다룬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어린 동물과 같아서 본능과 충동을 숨기지 못한다. 만일 어떤 동물이 나에게 선뜻 다가오지 않는다면 나는 구태여 억지로 붙잡으려 들지 않는다. 왜냐하며녀 내 몸짓을 공격으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나는 눈을 돌리고 뭔가 관심을 끌 만한 것을 보여준다. 어린 ‘인간’에게 접근할 때도 겁먹지 않게 하면서 무너가 긍정적인 느낌을 투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는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서 망설임, 의심이나 위험의 신호를 감지한다.”

물론 인간과 동물, 특히 성인 인간은 동물처럼 다룰 수 없다. “성인 인간의 행동을 조종하고 싶다면 동물적 본능보다는 그들이 가진 ‘합리성’을 이용해서 일을 풀어가는 편이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신들이 나머지 동물들과는 다른 특별한 생물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무엇인가? 동물학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 차이는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저자의 질문이다. 동물학자가 동물을 연구하듯 인간을 동물로서 다루어보자는 것이 이책의 목적이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인간이 까마귀와 달리 영역에 집착하지 않는 유형리라면 삶이 어떻게 진행될지 생각해보자. 어느 누구도 영역에 대한 권리가 없다. 우리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근거지로 돌아올 때 다른 사람들 또한 은신처를 찾아 미친 듯이 밀려들 것이다. 당연히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영역을 원한다. 경비가 있는 높이 솟은 현관문으로 한 때의 영장류들이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각축전을 벌일 것이다. 영역에 대한 점유를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서 괜찮은 거주 장소를 찾으려면 이렇듯 몇 시간을 헤매야 한다. 낮에도 이런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사무실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인간이 그날 가장 많은 액수가 적힌 임금수표를 거머쥘 것이고 늦게 온 영장류는 뭐 쓸만한게 없나 쓰레기통을 뒤져 동전 몇 푼이라도 주워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는 결코 효율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불완전하더라도 확고한 자신만의 영역에 정착하고 싶어한다.”

채식주의니 콜레스테롤이 해롭니 섬유질을 먹어야 하느니 등등 식단을 둘러싼 논쟁에 대해 동물학자인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동물이 ‘난 뭘 먹어야 해?’라고 물어야 한다면 그건 참 서글픈 일일게다. 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다. 인간들 중에는 그런 일로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거의 미칠 지경이 되어 아무거나 몸이 원하는 것을 먹어야 한다고 부르짖는 사람도 있다.”

“이 운전이라는 일은 내가 속한 종이 가지고 있는 협력적인 천성의 결과물이다. 만일 오소리가 차를 몰고 있다면 정지 신호에서 기다리지 않으리라. 단독으로 생활하는 동물들은 상대를 신뢰할 필요가 없다. 윤리적으로 행동하려고 허비할 에너지가 없는 것이다. 오소리라면 교차로를 그냥 통과할 것이다. 이에 항의하는 동족 오소리를 그대로 깔아뭉개고.”

재미있다. 이책의 내용이 대부분 그렇다. 익숙한 경험을 동물학자의 논리로 보니 새로운 읨가 드러나고 재미있게 보인다. 그러나 새로울 것은 없다. 이책이 ‘벌거벗은 원숭이’가 나왔던 시절에 나왔다면 참신한 관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관점에서 인간을 다루는 책은 그 책 이후 많이 나왔다.

그러면 이책의 가치는 무엇인가? 우선 앞에서 말했듯이 다루는 범위가 넓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다. 이책만큼 넓은 범위를 커버하는 책은 그리 흔치 않다. 그러나 그 약점은 앞에서 지적한대로이다. 그보다 이책의 장점은 역시 관점이다.

저자는 동물학자가 다른 종을 관찰하듯이 인간을 기술하지 않는다. “한 종은 궁극의 대원숭이로 진화했다. 그게 바로 나다.” 이책은 저자 자신의 생태를 동물로서 기술한다. 저자는 자신이 과체중인 이유를 동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속한 인간이란 종은 왜 특출한 장거리 선수가 되었는가? 나는 왜 화장하는 동물인가? 내 남편과 나는 왜 뇌 구조가 다른가? 나는 왜 당분과 지방질에 사족을 못쓰는가? 등등 자신을 동물학자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러다보니 이책의 문체는 사적으로 치우치며 수다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이런 식이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누군가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은 전부 내 환경의 미비함에 대한 것 아니었던가? 커서도 아주 편안한 상태에 있으면 수다가 많이 줄어들곤 했다. 요는 이렇다. 나는 엄마 품 속에서의 의사전달을 통해 엄마가 나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더 잘 이해하게끔 하고 엄마를 움직여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확보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동물학자로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이런 식이다.

“오호라 잠시 생각을 해보자. 총을 가진 침팬지 군단이 불구대천 원수의 영역으로 이주할 때 적들을 쏘아 죽이는 일을 거부할 수 있을까? 아니 범고래는 그럴까?/ 음, 아니. 늑대는 어떨까? 그럴 리 없음. 아니다, 오직 우리 종만이 위험한 포식자들을 쓰러트릴 수 있음에도 ‘도덕적인 근육’을 동원해서 살려 보낸다. 이런 태도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로 잘 사는 문화권들에서 보이는 태도다. 많은 인간들은 자신들의 서식처를 그 동물들과 공유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잇다. 그러나 어떤 인간들이 자신들과 경쟁하는 포식자들의 편을 든다는 사실은 경이로운 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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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1-04-18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도 가끔 인간이란 동물의 생태에 대해 궁금해하곤 했어요.
'본능'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의 인간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가끔 들었구요.

친절하고 상세한 소개글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Lulu 2011-04-19 16:34   좋아요 0 | URL
얼마만의 댓글인지 기억도 아나는군요. 감사합니다. ^^

진화심리학이나 행동학 서적들이 많이 읽히는데 그런 재미가 잇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본능대로라면 사람 사는게 비참할겁니다. 그게 순자의 성악설의 요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