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키 - Ri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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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 목말라하면서도 솔직함을 잃어버린 Cool한 도시민들, 그들은 분명 불행한 사람들이다. 이 영화는 그처럼 사랑하는 마음에 대해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의 불운과 외로움을 사실대로 그려내면서도 동시에 그런 불행을 극복하기 위한 도시인들의 노력을 담고 있다. 그런 노력 속에서 정직함이 갖고 있는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도시인들이 부족한 부분이면서 이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라는 가족관계를 만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본임을 이 영화는 기이한 사건을 갖고 이야기한다.
  현대의 도시인들에게 가족이란 너무 어려운 관계 맺기가 되고 있다.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가족이 형성됐으면서도, 그 가족에 있는 구성원들은 그러나, 슬픈 우울함이 존재한다. 즉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졌지만, 언제 올지 모를 이별을 예상하며 사는 불안하기만 한 가족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가족 속에서도 겪게 되는 외로움을 들여다보면서 사랑에 대해 차라리 정직하지 않고 이별에 대해 Cool하게 대처하는 허위의식을 고발한다. 사랑하면서도 언젠가 이별이 찾아올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나쁜 습성은 곧 이별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며, 그러기에 언제나 가족이면서도 안 보이는 내면의 담을 쌓고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비극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속에 있는 비극과 소외라는 불편한 의식이 내면화된 처량한 모습을 이 영화는 고발하고 새로운 마음가짐과 관계를 만들기를 종용하는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가족은 싱글맘과 그녀의 딸로 구성된 프랑스의 어느 가족으로부터 이 영화는 시작한다. 7살짜리 딸 '리자(멜루지네 메이앙스)'와 싱글맘 ‘케이티(알렉산드라 라미)’로 구성된 단출한 가족은 이미 사회적 Loser의 전형적인 모습이리라. 그러나 행복해야 할 가족의 구성원들은 안타깝게도 혹시 모를 이별과 소외로 두려움에 떨고만 있었다. 과거의 버림받은 마음은 결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함께 있으면서도 헤어짐을 미리 생각하면서 그에 대한 대처만을 고민하는 기막힌 형국으로만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아빠 '파코(세르지 로페즈)’의 등장은 이런 위기감을 더욱 고양시켰다. 언젠가 새아빠가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함은 딸 리자는 물론 그와의 사랑을 즐겼던 싱글맘 케이티조차 갖고 있었다. 함께 살아도 같은 가족이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이런 기막힌 구조는 어쩌면 도시생활에선 이제 당연한 생활태도인 것만 같다. 이런 생활은 도시인들에겐 익숙하고 이별에 대한 충격을 내적으로 가다듬기 위해 Cool한 자세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날개, 많은 이들에겐 천사의 이미지로, 그래서 축복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러나 ‘리키’라는 프랑스 영화에선 이런 고정관념을 깨듯 언젠가 떠날 이별을 상징하는 듯하다. 영화는 적나라한 사실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날개 달린 아기가 태어나는 환타지적인 요소로 영화의 반전의 준비를 한다. 오해로 비롯된 사건을 통해 쉽게 깨지고 마는 가족의 허약한 관계를 보여주면서 Cool한 대처법 뒤에 숨겨진 어리석은 도시인의 상황대처를 고발한다. 날개가 점차 성장하면서 날고자 하는 의지가 계속 강해지고 있는 아기는 분명 이중적이다. 영화에서 아기 리키는 가족의 사랑을 회복시키는 강한 힘을 발휘하지만 동시에 날고 싶은 그의 욕구는 이별을 동시에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기는 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순간, 하늘로 날아가버리고 만다. 이런 이별에 방황하는 엄마 케이티의 모습은 Cool한 도시인의 대처법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기를 찾아 고민하고 방황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사랑은 결코 Cool한 자세로 세상에 대처하는 식으론 결코 얻을 수 없음을 이 영화는 날아가고자 하는 아기 리키 앞에서 사랑과 정직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케이티의 이야기를 통해 분명히 밝혀진다. 솔직함의 힘을 믿지 못하는 도시인들에게 그녀의 이야기는 가슴이 아픈 정직함이며, 사랑하는 관계의 생성과 복원에서 정직의 힘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도시인들에게 자존심은 어쩌면 도시를 사는 행복을 위한 지혜로서 군림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떠나는 사랑에 대해 자존심을 앞세운 Cool한 대처만을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그런 마음 뒤에 있는 불행과 소외를 생각해본다면 결코 현명한 대처법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자존심을 위해 이별을 정당화하는 도시인의 어리석은 허위의식은 언제나 사태를 악화시켰을 뿐, 그 어떤 때에도 좋은 결말을 이루지 못했다. 프랑스 사회에서 빈번히 벌어지는 이별과 그에 대한 거짓되고, 말뿐인 Cool한 자세는 이별하는 사람도, 이별을 당하는 사람에게도 불행을 안겨줄 뿐이다. 그렇다고 이런 대처하는 자세가 프랑스에만 국한되진 않을 것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한국사회 역시 예외는 아닌 듯 하다. 그런 점에서 영화 ‘리키’가 갖고 있는 주제의식은 무척 강하게 다가온다. 거짓된 행동보다 솔직한 마음의 표현이야말로 이 세상의 행복의 원천이자, 아름다운 가족의 탄생을 이루는 기본적인 토대다. 우린 너무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었고 그래서 언제나 불행한 것만 같다. 정직함, 이제 사전에만 있는 용어가 된 것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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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 Avata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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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은 화려했다. 그러나 뻔한 이야기였다.
    어디선가 본듯한 내용들이 많이 배치돼서 이해하기 편했다. 공감도 갔다. 어쩌면 미국이 저지른 본토 인디언이나 흑인들에 대해 미안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한 것도 같고, 환경피해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제작된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흥행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이해가 좀 힘든 3D라는 영상기술을 사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설프게 만든 것은 아니다. 정말 화려하게 만들었다. 아름답기도 하고, 공중장면에선 내가 마치 하늘을 날고 있다고 생각조차 들었다. 정말 대단한 장면이다.
    그런데, 좀 아쉽다. 그렇게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겠지만 일본만화영화인 ‘바람의 계곡 나오시카’나 ‘원령공주’의 어떤 것들이 계속 연상이 됐다. 하긴 영화 치고 어떤 부분을 copy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리라. 그러나 어떤 이는 ‘Mission’이란 영화의 어느 부분이 생각난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이 영화의 구성은 너무 흔한 것들을 차용한 것만 같다. ‘제임스 카메론’ 정도의 감독이라면 그런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말은 하지 못하리라. 이 점에서 창조성은 너무 떨어진다. 설사 copy 안 한 작품이 어디 있겠냐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래도 어딘지 모를 새로운 Version으로 보이도록 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베끼는 것이 아닌 좀 더 upgrade된 그 무엇이 있었어야 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담고 있는 주제의식과 철학 역시 비판 받을 수밖에 없다. 자연으로 좀 더 가까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왜 지구인이 나비족의 새로운 대안이어야 하냐는 점이다. 영화는 결국 이해 못할 선택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우주를 넘나드는 첨단무기를 자랑하는 지구인이 거의 원주민 수준의 나비족과의 대결에서 멋지게 실패한다. 과거 본토 인디언이 그랬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을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다. 이건 과도한 환상이고 자기만족일 뿐이다. 마치 지금의 아마존 지역주민이 정부 주도의 개발을 막은 사례와 같다고 할까? 그런데 과연 이것이 성공하고 있을까?
    사실, 지구인들이 과연 나비족과 좋은 유대관계를 애초부터 생각했었을까 하는 의심조차 든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영화의 주제나 목적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했기에 만든 장치 정도로만 생각하면 될 것도 같다. 인간이 그나마 희망이 있는 편이 낫다는 점은 부인 못하겠다. 역시 동화로만 끝나고 있다. 차라리 나비족이 인간이었던 주인공의 뛰어난 기술을 받아들여서 강해졌다면 그나마 낫지 않았을까?
    결국 영화에서 남는 것은 뛰어난 영상이다. 앞으로 어떤 영화가 나오더라도 ‘아바타’는 그 시작을 알리는 영화로서 평가될 것이고, 많은 이들이 이 부분을 지적하고 주장한다. 나 역시 그 부분에 동의한다. 그리고 바로 이 영화가 왜 성공을 거두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미국자본주의의 승리를 의미하고 앞으로 미국이 열망하는 사회가 결국 기술발전에 의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사회이다.
    이것은 심한 모순이다. 현대문명의 발전이 자연환경 파괴와 함께 가는 상황에서 문명의 발전으로 자연환경보호운동을 하자는 것이다. 의도는 좋다. 홍보용으로 좋은 영상과 기술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쩌면 인류의 미래를 위해 좋은 일이다. 다만 상업성을 위해 주제를 단순히 최근 애용되고 있는 주제를 차용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든다. 또한 현대문명을 이끄는 것은 서민도, 대중도, 심지어는 환경단체도 아닌 자본가들이며, 그들의 탐욕이야말로 현대문명을 발전시키고 있는 주체이다.
    무기의 발전이 타인의 자본을 뺏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 못하리라. 과연 기술문명을 이끄는 자본가의 탐욕을 자연보호든 환경보호든, 아니면 어려운 서민들이나 공동체를 위해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하는지 궁금하다. 영화는 너무 심한 모순을 갖고 제작된 영화이기에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씁쓸함은 지워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영화가 타당한 제안을 하고자 했다면 자본의 탐욕을 막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지, 대충 내쫓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이끌고 있는 미국이라서 그런 용기를 보여주지 못했다. 도리어 영화가 돈을 벌기 위해 자연환경이란 테마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너무 자본가를 불신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진실이 아니길 빈다. 그러나 우린 이렇게 모순적인 구도 속에서 산다는 사실이 너무 슬프다. ‘아바타’는 그렇게 나에게 왔다.

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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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인 : 최후의 결사단 - Bodyguards and Assasin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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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척 오랜만에 본 애국의 영화였다.
  한국영화에서, 아니면 소위 선진국이란 국가에서 만든 영화들 속엔 사회나 집단을 우선시하는 분위기나 주제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집단수준이라 봐야 가족단위를 넘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지금, 영화의 주제나 소재는 개인적 고민을 넘지 못하고 있고, 혹여 나온 사회라도 강압적인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이 부각되기 일쑤다. 어떤 의미에서 사회는 거부해야만 될 폭력의 기제로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서구의 영화나 일본, 혹은 한국영화조차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조국에 대한 애정이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그것이 또한 대세다. 그나마 남은 가족조차도 종종 그 가치가 의문시되곤 한다. 현대는 집단의 부정적 측면이 부각되는 시대다.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현실은 확실히 개인주의가 대세인 세상이다. 경쟁을 우위에 둔 신자유주의가 대세이다 보니, 상대와 더불어 아름다운 공동체를 구현하려는 목표보단 자신의 이익 극대화를 지향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지금은 일반적이다. 이런 분위기가 영화에 반영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인지 최근 영화들은 개인적인 문제의식이나, 집단과 개인과의 거리감을 주로 이야기한다. 즉, 집단과 개인은 서로 필요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영화의 목적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영화에만 국한되진 않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 쉽게 볼 수 있는 개인과 사회의 거리감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져만 간다. 이럴 때 이 중국영화는 이런 분위기에 역행하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무척 낯설다. 무엇보다 개인의 희생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다. 서구사회는 물론, 어쩌면 일본을 포함해 한국까지도 개인이 왜 사회를 희생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개인주의적 분위기에 대해 이 중국영화는 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을 포함해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여건만 된다면 언제든지 바꿀 용의가 되어 있다. 현대인에게 태어난 고향은 있을지언정 평생 살고 싶은 마음의 고향은 없어졌다. 태어난 곳과 국적이 불일치하는 그런 시대다. 그러기에 사회를 위한 개인의 희생은 인생을 살면서 어느덧 사라진 어휘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영화엔 그런 어휘들이 보인다.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격동의 시기인 20세기 초의 중국이 배경이다. 당시의 중국은 반식민지에 처한 힘든 시기이고, 외세에 시달리면서도 국내적으론 망해가는 청나라가 통치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중국민들의 고민을 아우르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착한 정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청나라 정부는 그러나 특권은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는 모순의 상태, 그것이 곧 영화의 배경이다.
  영화는 이런 모순되고 불운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나선 인물인 ‘쑨원’보다 그를 보호하는 자들에 초점을 맞춘다. 쑨원, 대만이나 중국본토나 모두가 존경하는 중국 최고의 인물이다. 좌우익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그를 지키는 자들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뼈대다. 그리고 그런 일은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중국의 미래를 위해 목숨을 걸고 홍콩에 입항한 쑨원을 보호하기 위해 역시나 목숨을 걸고 그를 지키기 위한 보디가드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선 이름없는 희생이 될 수 있지만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조국인 중국을 위해 헌신한다. 영화 속에서 전부라고 할 수 없지만 그들 대다수는 자신이 아닌 중국을 사랑하고 기꺼이 희생할 인물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목적을 위해 희생한다.  

  그들의 희생에 대한 심심한 위로는 그들의 마지막 순간에 보이는 그들의 짧은 약력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그들은 각양각색의 계층과 계급을 담고 있는 인물들이며, 그들은 모든 중국인들의 전형을 의미한다. 쑨원을 보호하기 위해 희생된 인물들 중, 어는 누군가는 과거의 장군이었으며, 누군가는 상인의 아들이었으며, 누군가는 하루하루를 벌어 살고 있는 시장의 어느 조그만 가게 주인이다. 그 중 허드렛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 자도 있었고, 심지어 그런 인물들 중 부패하고 도박에 빠진 관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소 비약은 있겠지만, 중국의 미래를 짊어질 위기에서 자신들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지막 소망이 비록 중국 전체를 위한 희생이라 단정할 수 없지만 어느 순간에도 그들은 자신만을 위해 산 자들이 아니라, 남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면들은 한국인들에게 사라진 그 무엇이었다.
  국가도 이젠 국제시장에서 선택되는 시기가 되고 있다. 마치 직장처럼 말이다. 서로가 능력만 있다면 자국의 국가대표자리라도 타국의 선수들에게 서슴없이 내주고, 그들이 큰 성과를 거두기만을 고대한다. 거꾸로 능력이 있는 개인은 자신의 재능에 대해 아낌없이 보상해주는 국가만 있다면 기꺼이 국적을 바꿀 생각에 오늘도 피땀을 흘리고 있으며, 다른 국가들의 Offer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희생에 대한 이야기는 100년 전 이야기가 되고 있다. 그래서 국가에 대한 충성은 사라졌고, 국민의 보호는 그 국민의 능력 여하에 따라 결정되는 시기가 되고 말았다. 능력만 있다면 보호되지만 반대로 능력이 없다면 폐기될 수 있는 슬픈 현실이 우리들의 시간인 것이다.
  이런 정글의 시대에 이 영화는 마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고향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만 같다. 한국에도 한때, 자신을 희생하면서 사회와 조국을 위해 달린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그런 존재들이 한국 내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런 아쉬움에 대한 보충이라도 하듯 맘껏 희생하고 있다.  

  영화의 화려한 무술과 액션을 보면서 과연 중국의 무술영화를 따라올 수 있는 나라가 있을까 의심하게 된다. 견자단의 무술은 정말 환상적이기 그지 없다. 또한 중국에서의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마음껏 이미지 변신을 하며 영화에 혼신을 다하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여자의 마음을 끄는 수려한 외모의 배우인 사정봉이 인력거를 끌며 사회의 하층민을 연기한다는 것은 그에겐 큰 부담으로 작용했겠지만 용기를 냈고, 역시나 멋진 외모로 알려진 여명 역시 초라해진 모습의 걸인과 무사역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중국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판빙빙이 중년 부인의 역할을 하는 것 역시 눈 여겨 볼 내용이다. 그렇다고 다른 배우들이 이런 모험을 기피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내가 알고 있는 고정된 이미지를 탈피, 영화에서 달라진 모습으로 도전했다. 배우라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기존의 이미지가 갖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한 그들은 분명 영화인으로서 앞선 사고를 지닌 것이다.  

  이 영화를 보는 많은 관객들은 분명 영화 뒤에 중국정부의 요구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설사 아니더라도 사회와 국가를 위해 희생한다는 내용은 확실히 진부한 서사인 것도 사실이다. 너무 교과서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이어서 그렇겠지만 관객들은 그러나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즉 공동체의 가치를 우린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을 지금 얼마나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문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더 이상 관심을 끄는 주제가 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야 하지 않을까 질문을 해야 한다. 우린 너무 개인적이고 타산적이면서, 혼자만의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 말이다. 그 속에 우리들의 소외와 고독이 또한 숨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도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중국영화는 우리들에게 과거의 우리들의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감정을 다시 일깨우는 조용하지만 의미 있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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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10-01-28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놉만 봤을 때는 프로파간다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액션은 정말 뛰어난가 봐요. 무협영화를 좋아해서 보고 싶기는 한데.. 혼자 보러갈 것 같아 좀 꺼려집니다. ^.^;

novio 2010-01-28 14:27   좋아요 0 | URL
정부의 영향력이 작용한 영화라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사실 이 영화 본 사람들 대개가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다만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높이는 정도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혼자 봐도 괜찮을 것입니다. 영화는 혼자 보는 재미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빠가 여자를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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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나영은 기묘한 매력을 지녔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에서 이나영은 언제나 개성적인 캐릭터를 갖고 있었다. 도시의 화려한 빛을 발하는 여자도 아니고,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그런 여자도 아니다. 도리어 여자지만 어딘지 무뚝뚝한 남성적인 특색을 지닌 그런 연기자, 아마도 중성적인 매력을 지닌 그런 여배우다. 그것을 나만 느끼진 않을 것이다. 그런 여배우가 이번에도 역시나 하는 캐릭터를 보여주고, 아니 그녀 아니면 다른 여배우를 생각할 수 없는 그런 배역을 또한 열연했다.
  아마 감독의 입장에서 ‘아빠는 여자를 좋아해’라는 영화에서의 주인공을 생각할 때, 이나영이란 연기자를 제외하고 제대로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 정도로 이 영화의 주인공은 무조건 이나영이다. 그녀의 중성적인 매력은 이 영화에 가장 적합한 것이다. 과거, 그녀의 연기력을 멋지게 보여줬던 ‘아는 여자’에서도 이나영은 평범한 여성캐릭터를 보여주지 않고 맹하면서도 헌신적인, 그렇다고 새침데기 여성이 아닌, 좀 더 친근한 친구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어쩌면 그녀의 성 정체성엔 남자가 있는 것만 같다. 하나의 몸에 두 가지 캐릭터가 존재하는 이나영, 그녀에겐 트랜스젠더가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감독의 구성력은 정말 뛰어났다. 상황이 전개되면서 관객들은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차분하게 알게 됐고,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내용을 즐거운 과정 속에서 큰 무리 없이 받아들이도록 했다. 민감한 문제를 유쾌하게 풀어간 영화에서 감독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상황적 아이러니 속에서 영화는 관객을 수긍을 이끌어내도록 치밀한 계산과 기획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대사다. 대사는 정말 맛깔졌다. 짧지만 유쾌하고 의미심장한 대사가 연이어 튀어나왔으며, 선입견과 상징, 그리고 소통부족에 의해 벌어지는 다양한 오해들은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내게 했고, 동시에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했다. 대사 몇 마디로 인물들의 입장과 상황, 그리고 오해의 내용들이 기막히게 표출됐다. 영화가 아닌 소설로 나와도 전혀 문제되지 않을 기막힌 대사였다.
  사회, 혹은 공동체가 사회구성원들의 어떤 면을, 그리고 어느 수준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확신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이 영화는 유쾌하면서도 직설적으로 다가선다. 성전환자들을 받아들이는 것, 어려운 문제이고 한국에서 그런 사회구성원들이 계속 커밍아웃하는 이 시점에서 한국사회는 아직 그들에 대해 낯설어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영국 등이 과연 그 문제를 쉽게 받아들이고 있을지는 회의가 든다. 차라리 무관심하고 개인주의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알고는 넘어가야 할 문제이고 이런 문제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믿기지 않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또한 영화에서 벌어질 상황이 전혀 근거 없거나 동화 같은 상황이라고 이야기하긴 힘들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실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만 할 것이고, 영화는 즐거운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영화는 설득을 무척 담담하게 한다. 또한 과감하게 다가서고 있다. 아들에게 지금 아버지의 성전환을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장면은 결국 남자에서, 여자로, 다시 남자로 변신해야만 하는 갈등을 야기한다. 지금까지 아빠는 남자였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그 때의 고통과 번민은 분명 우리들도 알아야 할 사안인 것이다.
  인간으로서 자신의 성까지 선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변하고 있다. 그런 변화에 대한 사회의 냉정한 반응에 자의적으로 살기 힘든 우리사회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의도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이 사회는 분명 어떤 자들에겐 가혹한 정글과도 같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원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자유의 본질이 그냥 뜻풀이 정도로만 이 사회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도 든다. 자신만의 독선적인 마음으로 살 수는 없지만 자신의 선택에 대해선 타인도 평범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하단 생각엔 공감하는 편이다. 분명 이 영화는 그런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용감한 영화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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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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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극의 끝은 없었다. 그냥 끝까지 비극으로만 가고 있었다. 그나마 마지막 희망이 위안이었다. 그러나 아마도 영화나 서사적 장치라고 느껴서인지 위안이 되지 못했다. 결국 슬펐다.
  기대가 컸고 그 기대에 부응한 작품이었다. 어쩌면 지루했을지 모르는 로드무비였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긴장이 줄지 않았다. 언제나 다가올지 모르는 위험이 영화 곳곳에 산재하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위기를 느끼게 만들었고 안타까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영화는 마치 비극 꾸러미를 풀어헤치듯 그렇게 힘들게 진행됐다. 이런 위험 한가운데 위치한 불행을 짊어진 아빠와 아들의 머나먼 행로는 그래서 슬펐다.
  영화 속에 나온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자연의 보복은 냉정하기만 하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에서의 배경은 추운 겨울이나 아니면 화산재로 뒤범벅이 된 것처럼 보였고, 시시때때로 비가 내렸다. 화면은 회색을 덧칠한 듯 보였고 머나먼 길을 갈 때의 길의 끝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인류에겐 지구의 최악의 사태 이후의 생활이 결코 편안하거나 안락할 수 없다. 또한 위험하기조차 하다. 

  인류의 문명은 끝났다. 영화는 그 이후의 생존자들에 관한 영화다. 단 둘이 주인공이지만 결코 둘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시간은 영원하겠지만 인류의 문명은 언젠가 끝일 것이며 바로 인류의 문명이 끝난 것이 영화의 시작이었다. 문명의 끝, 바로 그 순간 인류는 문명인이 더 이상은 아니다. 영화는 그런 인간의 야만성을 슬프게 담았다. 그 속에 있는 가족의 사랑은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가족 중 한 명인 아내는 인류문명의 멸망 이후 자살을 선택한다. 최소한의 우아함을 지키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낳을 아이를 거부했다. 그 아이가 인류 최후가 된 시점에서 결코 문명인으로 살 수도, 살 기회도 없을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 바로 반대편에 있는 아빠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최소한 아이의 생명만이라도 지키고 싶은 부정은 결국 아들을 데리고 기약 없는 남쪽으로의 여행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들의 여정이 이 영화의 전부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볼 수 있는 인간들의 모습은 더 이상은 문명인이 아니었고, 원시적인 그 어떤 모습이었을 뿐이다.  

  인류의 어리석음에 대한 결과로 지구의 마지막 시간을 살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런 와중에서 생존한 인간들이 선택한 선택은 많을 수 없다. 주인공인 부자가 선택한 것이라곤 남쪽의 어느 바다로 가는 정도. 그러나 간다고 해서 어떤 희망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은 아빠도 알고 있고 아들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문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했던 남쪽으로의 여행은 뚜렷한 목적도, 그에 대한 기대도 없었던 막연한 여행이었다. 그런 여행을 지탱한 것은 아빠의 아들 사랑이었을 뿐이고, 그게 전부였다.
  막연한 희망이나마 그런 희망을 붙잡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을 통해 아들의 생존을 보장받고 싶었을 것이고, 최소한이나마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을 이룰 수 있는 확률이 얼마이든 아빠로선 포기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다. 무모한 여행, 그 여행 속에 담겨있는 아빠의 부정은 절실함으로 나타난 것이다.  

  소설가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는 언제나 극단적인 상황을 묘사한다. <핏빛자오선(Blood Meridian)>이 그랬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도 그다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더 로드(the Road)>에서 보인, 그에 의해 구체화된 생존을 위해 마지막 극단까지 가고 있는 식인종의 모습은 예상은 했지만 충격적이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모습은 어느 식인종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문명 붕괴 이후의 현실이었다. 인간다움이 사라진 잔인한 배경은 위험하고 막연한 남쪽으로의 절실한 여행은 너무나 위태롭다.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여행, 바로 이 영화의 비극성이 더한층 강해지는 이유다. 그러기에 더욱 절박한 아버지의 행동은 처절했다. 
  여행하는 과정에서 갈등하는 부자의 마음의 핵심에도 이 절실함이 담겨있다 아빠로서의 포기할 수 없는 열망, 그런 마음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인간들을 향해 칼날을 세웠고, 총을 쏠 준비를 언제나 하게 했다. 아들을 천사로 만들기 위한 아버지의 사탄의 모습은 어쩌면 부모라면 다 갖고 있는 모습이리라. [The Road]에서의 아빠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그런 절박함을 이해 못한 아들의 행동은 철없는 행위라고 볼 수는 없는 것으로 이해되면서도, 아빠에 대한 가슴 아픈 질책으로만 보였다. 아빠의 공격성은 책임감에 비롯된 것이었을 것이다. 오늘의 아빠들 역시 사회적 공격성을 갖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리라. 다만 아빠에 대한 아들의 몰이해와 비판은 영화의 비극성을 더욱 높이고 있었다.   

  현실과 꿈이란 이중적 서사 구조는 이상향이 되어 버린 멸망 이전의 과거와, 끔찍한 상황만 전개되는 현실을 대비한다. 그 속에서의 불안하고 희망 없는 미래의 비극성은 더욱 높아만 간다. 또한 아빠의 불행 앞에서, 과연 고난의 끝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바닷가에서의 슬픈 상황 전개는 그래서 괴로웠다. 그런 과정에서 작은 희망의 싹을 봤지만 그러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런 희망찬 결론은 결코 영화 구성상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나마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최악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아름다움 결말처리라는 것을 잘 안다. 어쩌면 영화 [판의 미로]의 마지막과도 같다. 죽고 나서야 환상과 희망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기막힌 역설처럼 영화는 아들의 불안한 미래를 위로하듯 비논리적인 구성으로 마무리한다. 어쩌면 영화감독에게 감사해야 할 끝이었다. 그래서 그냥 위로 정로로만 보인다. 그러나 그런 위로와 위안이라도 받고 싶다. 영화를 만든 자들의 염원이 현실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사실 나 역시 공유하고 싶다. 기약 없는 희망, 그것이라도 있다면 문명 이후의 세상은 그나마 행복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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