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후드 - Robin H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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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그렇듯 가진 자들이 문제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들의 희생에 아랑곳하지 않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의적의 탄생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가치 역시 더욱 커보인다. 의적이든 민주주의든 결국 하나다. 모두 가난하고 힘든 서민들을 위한 것들이란 점이다. 그리고 특정세력만이 아닌 모든 이들을 위한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돌봐주지 않기에 역사의 희생을 거의 담당하고, 그에 대한 열매는 가장 적게 향유하는 자들, 그들을 위해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
  [로빈 후드], 영화는 과거의 먼 시간 여행으로 관객들을 이끈다. 십자군 전쟁과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그리고 그의 동생이자 다음 왕인 존 왕, 그리고 필립 왕 등 무수히 반가운 역사적 인물들이 나온다. 여기에 로빈 후드라는 영웅적인 의적까지 말이다. 과거의 먼 시간은 현대인들에겐 큰 낭만적인 시대다. 감독, 리틀리 스콧은 그런 낭만적인 시대 속에서 현대적 의미를 되새김질하는 신선한 작업을 한다. 과거 속에서의 현대성 찾가, 어쩌면 역사에서의 인간의 고민은 시공간을 초월하나 보다. 마치 쌍둥이처럼 같은 고민과 내용을 갖고 그 시대를 살아가나 보다. 왕의 폭력과 그에 대항하는 국민, 이런 이분법적 구도가 12세기에도 현재와 같은 모양새를 공유하면서 영화에서 진행되고 있다.
  분명하지 않은 역사의 시간과 상대한 느낌이었다. 역사적으로 귀족들과 서민들에 의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는 굴욕을 당한 영국의 왕인 존 왕의 시대에 로빈 후드가 활약한다는 설정은 역사의 진위를 떠나 인상적이다. 이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약자를 위해 목숨을 건 어느 의적이 영화에서 결국 큰 결과물을 선물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실정에 대한 댓가를 치루지 않고 어떻게서든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무모하고 무가치한 왕의 작태가 모든 원인의 시작이란 점이다. 인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위해 타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강요하는 그의 모습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있어왔다. 그것이 왕의 신분으로만 국한된 것은 결코 아니다. 대통령이든 총리이든, 독재자는 다양한 직함과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그다지 크게 볼 필요도 없이 회사든 조그만 마을이든 이런 불손한 지배자들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있어 왔다.
  그래서 의적이 영웅으로 되는 것인가 보다. 의적, 이 단어 자체는 역설적이다. 도적이라는 존재는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반사회적 집단이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 상징성을 지닌 존재라도 시대에 따라 달리 평가될 수 있고, 사회적 인식도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존재도 없다. 한국에서 홍길동이나 장길산, 그리고 임꺽정 등 도적이란 지배계층의 폄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새로이 조명받고 억울하게 살아간 많은 이들에 의해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런 존재들이 바로 의적이다. 도적이지만 그들이 의로운 존재로 추앙받는 것은 시대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로빈 후드도 이런 범주일 것이다. 도적이 되고 싶은 이들은 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역사적 현실 앞에서 인간은 무력해진다. 결코 폄하할 수 없지만 과거의 모든 도적들이 그렇듯 태생부터 도적인 것은 없다. 태생부터 누군 귀족이나 왕이 아니듯 말이다. 역사적 무게 앞에서 나약해진 수많은 인간들을 보면, 인간에게 과연 선택의 여지는 남아 있는지 의심도 된다.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 그들은 사회에서 가장 냉대받는 방식을 선택했을 뿐이다. 비록 도적들이 잘 했다고 할 수 없지만 무조건적인 비판은 위험한 것이다. 그렇게 그들을 몰아세운 것은 분명 당시 사회의 이익 대다수를 독점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더욱 타인에게 사회적 짊을 지도록 강요한 기득권 세력임을 인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도적이 의적이 된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차지한다. 도둑질하고 공격하는 대상이 바로 사회적 권력을 독점하고 악용하는 그들이며, 그들에게서 빼앗은 이익을,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사용한단 점이다. 의적은 사회적 여론을 대변하며, 공익을 우선시하며, 민초들의 솔직한 심경을 대변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방식에선 다르지만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의회의 의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그들의 의견표현에 귀담지 않은 권력자들이 바로 사회적 문젯거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영화 [로빈 후드]의 시작에서 주인공 로빈 후드가 의적이 되고자 하는 분위기는 처음부터 없었다. 소위 이런저런 사연으로 존 왕에 대항했고, 그는 자신들의 동료와 함께 산속으로 가서 의적, 아니 현대적 표현으론 반정부 세력이 된다. 그런 상황의 반전 속에 그는 사회적 문제를 느끼게 되고,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병폐와 지도자의 탐욕과 무능에 의해 붕괴되는 사회를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그 자신이 그것을 직접 체험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존 왕에 대항하는 존재가 되며, 또한 민중의 편에 서게 된다. 귀족도 아닌 한 사나이가 국민 전체의 의견을 몸으로 표현하는 그의 모습은 한 개인의 성장기와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부당한 권력에 맞서지 않는다면 결코 건강한 삶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그 자체의 구성을 통해 앞으로 2부와 3부 등의 연작 시리즈로 기획된 것임을 보여준다. 로빈 후드의 인생과 활약을 통해 오늘날을 살고 있는 민주주의 시대의 현대인들에게 부당한 권력에 대한 도전이 왜 필요한가를 분명히 보여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특히 한국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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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의 왕자 : 시간의 모래 - Prince of Persia: The Sands of Tim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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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를 돌릴 수만 있다면…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동화다.
  누구나 바꾸고 싶은 과거는 있다. 그만큼 인생이란 성공적인 것도 있지만 실패도 있고, 그래서 후회도 있다. 인간의 욕망, 과거를 바꾸고 싶은 그것이 이 영화에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모든 것이 동화다. 페르시아란 시간과 공간, 왕과 왕자, 그리고 선과 악이란 이분법 등,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에서 풍부하게 재생된 즐거움거리들이다. 또한 주인공의 신나는 액션과 활약, 그리고 아크로바트한 모습들은 이 영화의 즐거운 소재거리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어른들이 나오는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와도 같다.
  하지만 영화 속 갈등은 어른들의 탐욕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그 와중에 보이는 신뢰의 붕괴, 그에 따른 폭력과 가족의 해체 등은 어른들이 빚어낸 추악한 점이다. 그나마 선과 악의 대결에서 선이 승리한 것으로 마무리 짓기는 했지만 말이다. 현재에도 가장 관심이 대상이 된 가족의 우애와 신뢰, 그리고 그에 대한 붕괴들은 너무나도 현대적인 것이다. 동화 속에서의 갈등이 매우 현대적인 이유다.
  페르시아, 왕자, 암살자, 공주 등 어릴 때의 신화와 환상을 일으키는 어휘들이다. 또한 영화의 배경이 된 사막과 궁전들은 어릴 때 듣고 보던 그 환상들 그것이었다. 기묘함과 신선함이 결합된 구성은 관객들에게 과거로 돌아가는 기쁨을 전달해주고 있다. 그리고 신묘한 칼의 마력은 이 영화의 백미일 것이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신비함, 영화는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과거의 그 모습들을 바꾸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형상화한 것이다.  

  우리들의 과거는 우아할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바보 같은 질문처럼 보인다. 어떻든 완벽한 모습들은 아닐 것이다. 아니 아니다. 그런 과거이기에 바꾸고 싶은 욕망, 그것은 현재의 자신에 대해 만족한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다. 과거는 오늘의 자신을 만든 원인이자, 바꿀 수 있는 나사나 부품이 아니다. 바꿀 수 없다는 한계, 인간은 그런 과거로 인해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바쁘게 살고 힘들게 견디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과거는 불만스런 현실의 답답함을 만든 자궁이다. 그러나 벗어나고 싶은 갈망은 있지만 바꾸기가 불가능한 그것이다.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 어쩌면 과거를 바꾸지 않는 한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일 것이다. ‘만약’이란 말로 시작되는 과거에 대한 아쉬움은 현대인의 고달픔을 대변한다. 투자한 부동산이나 펀드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탄식하듯, 언제나 현재에 대한 불만은 과거에 대한 아쉬움으로 시작하는 것이 현대인의 타령이 되고 있다.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행복으로 변할 것만 같다. 정말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신비한 칼의 마력으로 주인공인 페르시아의 셋째 왕자는 다행히 모든 신뢰를 회복시킨다. 심지어 과거의 그 때로 돌아가 모든 문제와 불행이 시작되기 전으로까지 돌아간다. 그 속에서 현대인의 바람처럼 불안해 보이기만 했던 가족애와 신뢰, 그리고 위험천만한 위기 자체를 겪게 되는 위험도 제거하기까지 한다. 정말 가장 처음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것을 통해 그가 원했던 것은 물론, 감히 생각도 못 했던 그 모든 것들을 다 얻게 된다. 즉 완벽한 행복을 거머쥔 것이다. 현대인들이 그렇게 원하는 그것을 말이다.  

  유쾌했다. 즐거운 액션과 신나는 볼거리가 풍성한 이 영화는 본질적으로 현대인의 갈망을 채워준 영화다. 과거에 대한 반성보다 쉽게 그냥 과거의 잘못을 모두 바꿀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줬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 과거에 대한 것들을 바꿀 수 있는 마법의 칼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질없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 부질없는 갈망, 영화는 사실 그런 것들을 충족시키는 매체다. 그래서 즐거운 것이다. ‘만약’이란 것을 채울 수 있는 영화는 그렇게 행복을 전달해 준다. 그리고 과거의 그 때의 나를 생각하도록 해줬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과거를 다시 하지 않았으면 하는 다짐도 자연스레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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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깡패 같은 애인 - My Dear Desper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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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그래서 동료애도 느꼈고, 가슴이 찡했다.
  이젠 Loser들의 생활을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것도 어쩌면 진부하고 흔한 것이 되고만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문학작품과 그 후손이라 할 수 있는 영화는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믿음은 언제나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오늘을 살고 있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래서 매번 재생되고 반복되는 내용이지만 모든 이들이 공감하는 내용은 다시 반복되고, 그리고 흥미롭고 감동을 준다.
  3류 깡패와 직장을 잃고 방황하는 여자, 그들의 만남은 오늘날에도 결코 현실적이지도, 그리고 평범한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를 시작으로 영화를 진행시킨다. 세계가 다른 이들이 함께 이웃으로 산다는 것은 설사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는 존재라 하더라도, 결코 만나고 접촉하고, 그리고 사귄다는 것은 그렇게 쉬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만났다.
  그들이 만난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갈 곳이 없어졌고, 버림받았고, 그런 사정이 이상하게도 그들을 하나로 묶는 연대감을 만들었고, 기이한 사건에 힘을 얻었지만 그들은 소위 연인으로 발전한다. 반지하방이란 공간에서 각자 방 하나씩을 얻게 된 그들은 절망이란 열매를 자양분으로 서로간의 서글픈 인생사를 느끼며, 서로 돕게 됐고, 상대를 위해 거짓된 모습이나마 보여주려 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위하게 된 것이다.  

  여자, 세진은 소위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는 취직 못하는 지방대학교 졸업생이고, 잠시나마 취직했지만 회사는 부도가 나고 만다. 그렇게 그녀의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다. 결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에 어떻든 도시란 공간에서 취직하고 계속 남고 싶은 그녀의 소망은, 그러나 현실이란 벽 앞에 무력하기만 하다. 결코 그녀는 반지하방에서라도 그런 꿈을 이루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지만 말이다. 그녀의 비현실적인 현실감을 비웃기 앞서 현실 속에서 꿈을 키우고 살아가면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이 무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유감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불쌍했다.
  남자, 동철은 소위 생명이 다한 깡패다. 조직의 목적에 따라 소비되고 버려진 그는 명색이 깡패지만 사는 행색도 그랬고, 허탈한 위협이 일상인 그런 깡패일 뿐이다. 자신을 버린 조직이 약속했던 막연한 미래를 믿으며, 그는 하루하루를 그저 그런 생활로 소비하고 있다. 조직의 서열이 단순하게 나이 순으로만 인정받았을 뿐, 결코 조직의 후배로부터 능력도, 또한 권위도 인정받지 못한 그는 분명히 그 누구도 원하지 않은 조직의 일원일 뿐이다. 조직을 위해 희생한 그를 위해 오직 조직의 동기만 신경을 써주었지만, 그 이유는 결코 순수할 수만은 없는 처지, 동철은 알지도 못하면서, 동시에 아는 것을 부정하고 살고 있었다. 어떤 방향으로든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것이니까. 

  여자, 세진과, 남자, 동철의 만남은 시작부터 삐걱거렸고, 통념상 그런 그들이 좋은 관계를 맺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동화다. 사사건건 부딪힌 그들의 이야기를 즐거운 에피소드로 포장하며, 그들은 좋은 만남을 갖게 되고, 해피엔딩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보이는 그들의 우울한 현실은 웃기지만 역시나 썼다. 그들의 과거는 언제나 그들의 우아한 결말에 대해 장애물로만 기능했고, 소위 영화의 긴장과 갈등을 전개시키는 원인이 됐다. 그 과정에서 버림받아야 할 상황이 또 한 번 전개될 때의 동철의 모습은 처량함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했다. 한 번 버림받은 자들은 다시는 결코 정상으로 복원되지 못하는 모습을 느끼는 것 같아 씁쓸할 뿐이었다. 정말 씁쓸한 인생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마지막에 그려진 행복한 그 모습들 말이다. 감독의 위로가 감사했고, 영화는 슬픔과 즐거움의 조화 속에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도, 그리고 행복하게도 했다. 무엇보다 88만원 세대들도, 그리고 사회의 음지에서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Loser들도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느끼게 했다. 행복이 대단한 성공을 통해 얻어지는 것보다 자신이 살고 있고, 그리고 자신들의 생활을 하고 있고, 그리고 자신이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위로이고, 또한 행복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줬다. 영화의 마지막은 어떻든 가슴 편하게 해줬다. 영화는 그렇게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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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폴 :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 The F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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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 같은 화면과 영상, 과연 the Cell (2000)의 화려하면서도 신비로운 영상을 만든 감독, Tarsem Singh 이었다. 그가 만든 영화 속의 세상은 관객의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그런 신비한 매력의 화면만을 갖고 있진 않았다. 본질적으로, 보고자 하는 세상과 그 뒤에 숨쉬고 있는 냉혹한 현실의 이중성, 그것을 품고 있는 영화는 그렇게 관객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슬프게 했다. 어딘지 모를 신데렐라적인 분위기가 있었지만 그러나 감독은 결코 현실을 버리지 않았다. 가난한 환경 탓으로 캘리포니아의 오렌지 농장에서 일해야 하는 어린 소녀의 거짓된 행복을 위해 마련된 멋지고 아름다운 동화 뒤에 있는 세계는 냉혹했다. 그것은 동화였고 희망으로 거짓 포장된 신화였다. 언제나 거짓을 동반했고, 또한 누군가의 희망을 무너뜨릴 잔인함도 있는 그런 것을 의미한다.
  느린 흑백화면으로부터 시작한 이 영화, 시작부터 기이했다. 그래서였던 것 같다. 어린 소녀의 순수함을 이용, 자신의 고통을 끝내려는 스턴트맨 출신의 음모는 환상적인 동화의 이중적 의미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동화의 결말을 자연스런 이야기의 흐름이 아닌 타협과 거래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구조는 보는 내내 가슴을 멍하게 했다. 그래서 긍정적인 결말은 더욱 비극을 심화시켰다. 영화 내용이 아닌, 보는 관객들의 마음 속에 있는 비극 말이다. 아무도 영화의 결말을 개연성이 있다고 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아팠다. 시작부터 기이한 모습의 흑백의 활동사진과 같은 모습이 아우성치면서 영화는 누군가의 상처를 기반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런 시작과 함께 미국 LA의 어느 조용한 병원엔 힘든 고통 속에서도 앞으로 생을 살아야 할 환자들과 어느덧 죽음을 앞둔 환자들도 있었다. 그 중 스턴트맨을 하던 중 큰 부상으로 세상에 대한 환멸과 함께 자살을 하려고 마음먹은 젊은 사내 ‘로이’는 자신의 계획을 이룰 수 없는 자신의 몸을 자책하기만 한다. 그는 몸만 아픈 것이 아니었다. 마음도 동시에 상처를 당했다. 그런 절박함 과정 중 나타난 귀여운 히스패닉계 소녀, ‘알렉산드리아’는 캘리포니아의 어느 대농장에서의 힘든 노동에 지친, 그리고 생활고에 지친 소녀일 뿐이다. 그녀의 과거엔 아빠도 있었지만 불의의 습격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래서 그녀는 의지할 곳 없는 고아였다.
  그런 둘이 만났다. 막연하지만 미래의 희망만을 품길 원하는 어린 소녀와 절망을 끝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전직 스턴트맨, 그 둘은 자신의 마음을 달래고 또한 자신의 목적을 위해 기묘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동화라는 수단은 일치했지만 마음 속의 의도는 달랐고, 이것이 이 둘의 관계를 위험하게 만들었다. 어른의 마음 속에 담겨 있는, 불운한 의지로 인해 만든 어느 신비한 이야기는 어린 소녀에겐 현실에서 맛볼 수 없는 즐거운 동화였다. 소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젊은 사내의 멋진 입담은 생활고에 지쳤고 슬픈 과거를 가진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소녀에겐 더 없는 즐거움이 됐다. 힘든 세상과 전혀 다른 모험의 세계 속에서 어느덧 자신의 모든 관심을 이 동화에 주고 있었다. 동시에 관객 역시 동화에 취했을 것이다.
  매력적인 영상미, 영화는 그런 아름다움을 갖췄다. 아름다운 화면과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화면을 만드는 이야기의 마력은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어린 소녀의 만족을 위해 꾸며낸 새로운 세상의 모험은 매우 유쾌했고 즐거웠다. 그러나 그것은 마약과도 같은 허상, 즉 신화였을 뿐이다. 힘들게 살고 있고, 그 생활이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은 어린 소녀의 소망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마련된 그런 동화였을 뿐이다. 그래서 오직 소녀의 소망으로만 움직여지고 제작됐고, 그리고 비현실적인 내용으로만 된 것이다. 소녀의 바람은 그만큼 거짓된 것이다. 그리고 그 동화의 이면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아픈 세상의 한 단면이 보이고, 동시에 그 동화를 만들어준 어른의 아픈 인생이 들여다 보였다. 무엇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어린 소녀를 이용하기 위해, 그런 동화가 제작됐고, 또한 손님을 대하는 직원처럼 그는 거짓으로만 이루어진 세상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현실, 점점 무서워져만 갔다.
  즐거운 이야기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려는 어린 소녀와 그녀를 이용해서 자신의 의도를 실행하려는 스턴트맨과의 아슬아슬한 관계는 상황적 아이러니의 구도 속에서 영화의 이중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치 마약과도 같이 동화에 취한 어린 소녀는 그 위험한 동화에서 벗어나질 못한 체, 점점 위험한 곳으로만 향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 보게 되는 현실의 우아하지 않은 모습들은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서글픈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동화 속에서야 만 행복해질 수밖에 없는 불행한 인간들의 우울한 자화상이 보였다. 원하면 원하는 데로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던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동화는, 그러나 불순한 의도로 인해 점차 소녀가 원하는 아름다운 신화와는 거리가 먼 세상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바꾸기 위해, 그리고 상상에서라도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길 원하는 어린 소녀는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부탁을 들어주게 되고, 점점 더 위험한 곳으로 가고 만다. 마치 마약에 취한 마약환자처럼 말이다. 그 속에서 파괴되는 동심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절망을 불행으로 끝내려는 남자와 그것을 들어주는 어린 소녀의 기이한 관계는 위험한 기쁨과 슬픔의 이중적인 서술 속에서 힘들어하고 표류하며, 희생당하고 또한 파괴된다.
  영화 후반부에서 파괴되는 두 영혼의 대면하는 모습은 절정이었다. 현실을 들려주고 싶은 스턴트맨 ‘로이’와 그런 현실을 모면하기 위해 아름다운 끝마무리를 원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애절한 부탁은 현실을 살고 있는 관객들에겐 더 없는 갈등의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누구나 ‘알렉산드리아’의 소망이 실현되길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화 같은 거짓말 속에서도 현실의 냉혹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현실감, 이 두 가지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알렉산드리아’와 휠체어에 앉아 고뇌하는 ‘로이’의 모습에서 두드러진다.
  영화에선 결국 ‘알렉산드리아’가 이긴다. 그리고 그녀의 소망이 영화 후반부를 지배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마무리가 진행됐다. 그것을 본 관객들 역시 마음은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관객을 알았을 것이다. 감독의 배려로 인해 마련된 동화일 뿐이라고. 마지막에서의 극적인 반전을 통해 동화 이야기는 Happy Ending으로 종결을 맺는다. 그런 속에서 행복해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현실에서의 고통을 꿈과 같은 동화 속에서라도 이루려는 가엾은 인간들의 모습이 보였다. 거짓으로라도 행복을 잠시나마 찾고자 하는 불행한 인간들의 군상을. 그래서 이 영화는 모순형용인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영화의 구성 속에서 영화가 들려주고 있는 현실감은 매우 뼈저리게 다가온다. 과연 현실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는 고민에 빠져드는 것이다. 영화는 비록 현대를 살아가는 불쌍한 영혼을 위해 위로를 선택했지만 영화를 본 관객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의 동화를 쫓는 어린 소녀와 불구자가 된 스턴트 맨, 둘 다가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뜻한 진실, 그것은 멀고도 험한 세상이다. 냉혹과 희생, 그리고 악용으로 점철된 사회에서의 삶은 결국 모두가 파멸을 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구성이 비록 비현실적이지만 그래도 인간은 그 비현실적인 신화를 계속 추구해야 한다. 신뢰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지 않는다면, 영화를 통해 보게 된 불운은 계속 인간 주변에서 기생할 뿐이다. 이런 면이 영화의 진정한 가치로 보인다. 안 될 수 있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것, 그것이야말로 현실 속에서 행복을 찾는 유일한 길일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역설일 것이다. 영화 속의 동화는 그렇게 현대인들의 미래가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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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5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novio 2010-06-17 03:17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그런데 리뷰는 제가 글을 검은 색으로 써도 자체적으로 화면하고 글의 색을 바꿔 보기가 좀 번거로운 경우가 있습니다. 그나저나 글을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합니다. ^^
 
노스페이스 - North 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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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여인이 펼치는 노트 속에 담긴 어느 남자들의 사진을 보면서 비극임을 눈치챘다. 자신이 직접 적은 내용이 아닌 노트를 펼치는 모습은 영화가 비극을 시작할 때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니까. 낯선 여인의 독백으로부터 시작하는 독일영화 [North Face (Nortwand)]에 대한 내 예측은 그리 빗나가지 않았다.
  [North Face], 평범한 나에게도 이상한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단순한 표현으론 ‘북벽’이란 표현인 이 단어는 사실 어느 산악의류용품의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지금까지 수많은 산악인들의 도전을 무참히 짓밟은 알프스 북쪽 면의 [아이거 북벽]을 의미한다. 전설 속의 괴물의 이름을 딴 이 알프스 북면은 산악인들에겐 공포를 느끼게 했지만 동시에 그만큼 많은 이들의 환상과 정복이라는 염원의 대상이란 역설적인 상징을 담고 있는, 매력적인 정복지인 곳이다. 위험한 산이 도리어 매력으로 다가오도록 하는 산, 그런 표현 속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공포와 위험이 존재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도전적이고 모험에 찬 인간들의 도전을 이끌기도 한다. 특히 첫 등정이란 최고의 영예는 1936년, 수많은 산악인들의 유혹이기도 했다. 이런 유혹에 빠진 이들 중 토니 (벤노 퓨어만)와 앤디(플로리안 루카스)이란 독일인도 있었다.
  산 타기를 좋아한 이들은 평범한 산악인이었다. 산 정상에 오르는 것, 산악인에겐 당연한 목표다. 산이 있으니 산에 오른다는 것은 선문답과 같지만 삶 자체가 그런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살았다.  ‘아이거 북벽’은 그들의 평범한 즐거움과 용기로는 쉬운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취미를 넘어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그들의 산 타기는 결국 그들을 위험한 매력으로 이끌었다. 문제는 그들의 순수한 정열을 시대적 분위기는 객관적이고 평범한 눈으로 보지 않았던 것에 문제가 있었다. 그들의 열정을 두고 당시 시대의 인간군상들은 다양한 잣대를 대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되고 만다.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시기, 세상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활개를 쳤다. 개인의 승리가 집단과 민족, 그리고 체제와 국가의 우월을 상징해주는 세상에서, 소소한 욕심은 과대 포장되기 일쑤고, 그렇게 해야만 좋은 신문사에겐 상업적 정보가 됐다. 이런 조류가 ‘아이거 북벽’과 관련된 산악 등정에까지 미쳤다. 스위스에 있는 ‘아이거 북벽’을 처음 등정하려는 자들의 도전정신과 운명은 시대적 환경으로 인해 민족의 우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사례로 이용되기 시작했으며, 신문의 좋은 기사거리로 취급 받게 됐다. 그들의 감상적 열정이 많은 이들에겐 좋은 수단과 방법으로 악용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순수했던 산악인의 열정인 산의 정상을 차지하고자 하는 열정은 그렇게 상품화되고 도구화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의 Gossip거리 기사로서 관심이 받게 되면서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특파된 기자들에게 주목을 받게 됐고, 그들의 요구에 맞출 수 있도록 정상을 꼭 정복해야 했다. 이런 과도한 취재경쟁과 독일에 의한 오스트리아 합병, 거기에 베를린 올림픽 개최 이전에 벌어진 과도한 민족주의는 순수한 열정의 산악인들을 과도한 열병으로 몰아넣으면서도 위험한 산악 등정에 위험한 투기적 열병까지 가세, 시작부터 위험한 등정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고 말았다. 토니와 앤디는 위험한 산악등정을 그런 환경 속에서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그 둘의 등정은 무조건 성공해야만 할 대업이 되고 말았다. 이제 순수했던 두 명의 독일 산악인들의 열정은 작아지고 점차 탐욕으로 일그러진 채로 타인들의 탐욕은 물론, 위험한 상황을 무릅쓰고라도 오르려는 탐욕을 품게 됐다. 과도한 경쟁으로 일그러진 채, 독일 산악인 둘은 오스트리아 산악인과 위험천만한 경쟁을 하며, 위험한 등정을 시작한다. 그 등정 속에 담긴 과도한 경쟁의식과 탐욕은 위험한 등반을 더욱 위험하게 하면서, 인간적인 면의 파멸조차도 보였다. 그들은 이제 순수한 열정만으로 등정하지 않게 된 것이다.
  위험한 산악 등정에서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이들은 다름아닌 산악인들, 그들 자신이었다. 국가가 달라서 경쟁해야 했던 두 팀은 위기 상황이 전개되면서 위기에 처한다. 그나마 타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정상에 서는 것을 포기하는 순간이 오게 됐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위험한 상황을 무릅써야 하는 하산이었다. 인간이기에 외면할 수 없었던 생명의 가치를, 어쩌면 수많은 등반 속에서 깨우쳤으리라. 하지만 ‘아이거 북벽’은 객관적일 뿐이고, 냉정한 돌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 속에서의 아름다운 인간미도 알프스의 ‘노스 페이스’는 알 리 없고, 또한 외면했다.
  이런 자연물의 냉정함은 인간에겐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에서의 더욱 비극적인 것은 기사거리가 없어지고, 더 이상 상품성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순간에서의 기자들과 관람객들의 외면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산악인들이 등정을 포기하고 고귀한 생명을 구하고자 하산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그들에겐 가장 허탈하고 자신이 소비한 시간과 돈이 낭비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등정을 포기하고 인간의 순수한 면을 지키기 위해 내려오는 그들을, 기자와 관람객들은 철저히 외면하고 버렸던 것이다. 인간 관계의 비극의 한 단면을 가장 비극적으로 형상화한 순간이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 1936년 당시엔 그것만이 정의였고 옳았다. 그렇다고 지금의 이 시점에서도 그런 세상의 법칙이 달라졌다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은 변한 것이 있나 보다. 1936년 산악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도, 남의 위한 배려도, 지금까지 주목 받지 못하고 나서 거의 80년 이후에 그들의 이야기는 작품화됐고, 그들을 기리는 영화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런 활동 역시 또 다른 소비와 상품화를 위해 1936년의 ‘아이거 북벽’의 비극을 이용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 이용된 이야기는 어느 산악인들의 슬픈 이야기였고, 패배자들의 이야기였고, 또한 인간의 자성을 이끌어내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인간의 반성을 이야기하는 시대이고 그것이 환영 받는 시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오늘이라도 그런 이야기들이 이야기되는 것, 분명 우리 인간은 조금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은 그렇게 성숙해가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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