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의 죽음은 죽은 사람 본인 외에는 그누구의 것도 아닌데. - P178

같은 주제에 각자 얼마나 다르게 접근했는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종이에 적힌 단어들을 보았지만, 같은 곳에서 친구는 망설임을, 블랙홀을, 말과 말 사이의 가능성이 펼쳐진 들판을 보았다. 친구는 어룽거리는 빛, 비상의 희열, 중력의 슬픔을 보았지만, 같은 곳에서 그는 평범한 참새의 구체적인 형태를 보았다. 리트비노프의 삶은 실재하는 것들의 무게를 느끼며 기뻐하는 것이었으나, 친구의 삶은 지척거리는 무거운 사실들로 무장한 현실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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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은 점점 더 말을 잃어가 하루 종일 사람들 틈에서 일을 하면서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그는 현재로부터 과거로, 현실로부터 꿈으로,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이미 사라진 것으로, 사람들간의 대화와 교통으로부터 혼자만의 고독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 P251

춘희 또한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 안에 머물러 있었다. 이즈음 그녀가 새로 흥미를 가진 놀이는 죽은 곤충이나 동물들을 외진 벽돌더미 아래 모아놓는 일이었다. 그것은 점보의 죽음으로 인해 그녀가 새로 인지하게 된 낯선 세계에 대한 그녀 나름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 P251

두 사람은 곧 팔씨름을 하기 위해 마당 한복판에 마주 앉았다. 춘희의 손을 맞잡는 순간, 소년은 알 수 없는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마주 앉은 소녀가 언젠가 자신의 운명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수컷으로서의 본능적인 예감이었다. - P252

-그런데 그 공산주의라는 게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이죠?
그러자 정치가가 대답했다.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생각의 이름이죠.
-생각에도 이름이 있나요?
-당연히 있죠. 세상에 이름이 없는 건 없어요. 사회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실용주의, 고전주의,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실존주의,
표현주의, 물신주의, 개인주의, 사실주의, 초현실주의, 배금주의, 물질만능주의, 한탕주의, 맹견주의... - P261

끝없이 상실해가는 게 인생이라면 그녀는 이미 많은 것을 상실한 셈이었다. 유년을 상실하고, 고향을 상실하고, 첫사랑을 상실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젊음을 상실해버려 그녀에게 남아 있는 것은 모두가 빈 껍데기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싱그러운 수련의 육체 앞에서 뼈저리게 확인해야 했다. - P264

그날 이후, 소녀를 지배한 건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그리고 인생의 절대 목표는 바로 그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거였다. 그녀가 좁은 산골마을을 떠난 것도, 부둣가 도시를 떠나 낙엽처럼 전국을 유랑했던 것도, 그리고 마침내 고래를 닮은 거대한 극장을 지은 것도, 모두가 어릴 때 겪은 엄마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고래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려움 많았던 산골의 한 소녀는 끝없이 거대함에 매료되었으며, 큰 것을 빌려 작은 것을 이기려 했고, 빛나는 것을 통해 누추함을 극복하려 했으며, 광대한 바다에 뛰어듦으로써 답답한 산골마을을 잊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바라던 궁극, 즉 스스로 남자가 됨으로써 여자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 P271

사진 속에 담긴 금복의 얼굴엔 부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배타적인 아집과 거만, 자신 안에 있는 여성을 채 다 지우지 못한 당혹스런 혼돈과 퇴폐적인 분위기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긴 모습이었다. - P286

끝없이 달아나고자 했던 과거는 다시 고스란히 그에게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금복도 달아나지 않았다. 대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에 취하면 그는 죽은 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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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아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행복한 기분이 심장을 살짝 찔렀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 뜨거운 찻잔에 손을 덥힐 수 있다는 것이.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인생의 끝자락에서 브루노가 날 잊지 않았다는 것이. - P144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빠의 직업인 ‘엔지니어’가 기차를 운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때만 빼고. 그때 나는 번쩍거리는 객차를 뒤에 매단 석탄 색깔 기관차engine car에 앉아 있는 아빠를 상상했다. 어느 날 아빠는 웃음을 터트리더니 내 생각을 정정해주었다.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순간들 가운데 하나다. 세상이 내내 나를 속이고 있었음을 발견하는 그런 순간. - P146

"너 자신은 네가 지켜야 해" - P146

때로는 공손한 것이 공손하지 않은 것보다 더 나쁘니까. 예를 들어학교 강당에서 그레그 펠드먼이 내 앞을 지나다가 "야, 앨마, 별일없냐?" 해서 내가 "다좋아고마워너는어때?" 하자 그애가 발걸음을 멈추고, 내가 낙하산을 타고 화성에서 막 내려온 것처럼 쳐다보다가 "넌 왜 그냥 별일 없어, 라고 하질 못하는 거냐?" 하고 말했을 때처럼. - P164

엄마가 번역한 『사랑의 역사』를 읽었다. 사람들이 손으로 말했던 시절에 대한 장과 자신이 유리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 남자에 대한 장, 그리고 아직 읽지 않은 ‘감정의 탄생‘이라는 장이 있었다. 감정은 시간만큼 오래된 것이 아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 P165

사람들이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느끼고 싶은 욕망도 커졌다. 이따금 심하게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들은 더 많이, 더 깊이 느끼고 싶어했다. 사람들은 감정에 중독되었다. 새로운 감정들을 발견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예술은 바로 이런 식으로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종류의 기쁨이 새로운 종류의 슬픔과 함께 만들어졌다. 예컨대, 있는 그대로의 삶에 대한 영원한 실망, 예상치 못한 유예가 주는 안도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 - P166

아무리 긴 끈이라 해도 말해져야 하는 것들을 말하기에 충분히 길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끈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어떤 형태의 끈이든, 사람의 침묵을 전달하는 것이다. - P172

침묵의 죄로 그들에게 기소당한 뒤에야 바벨은 얼마나 많은 종류의 침묵이 존재하는지 깨달았다. 그는 음악을 들으며 이제는 음이 아니라 음과 음 사이의 침묵에 귀기울였다. 책을 읽으며 쉼표와 세미콜론에, 마침표와 다음 문장 대문자 첫 글자 사이의 빈칸에 전적으로 집중했다. 방에서 침묵이 모이는 곳을 발견했다. 그곳은 늘어진 커튼의 주름 속,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온 은식기의 오목한 대접 속이었다. - P176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그는 말해지는 것은 점점 더 적게, 말해지지 않는 것은 점점 더 많이 듣게 되었다. 그는 특정한 침묵의 의미를 간파하는 법을 익혔는데, 이는 어려운 사건을 아무런 단서 없이 직관으로만 해결하는 것과 흡사했다. 그가 자신의 천직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날마다 그는 침묵의 서사시들을 써냈다. 처음에는 힘들었다. 아이가 신이 존재하는지 물을 때나 사랑하는 여인이 당신도 날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침묵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힘들지 상상해보라. 처음에 바벨은 ‘그래‘와 ‘아니‘ 딱 두 마디 말만은 쓸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단 한마디 말만 내뱉어도 침묵의 섬세한 유창함이 무너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 P177

마지막 순간에 총살 집행단을 마주보고 나서야 작가 바벨은 자신이 실수했을 가능성을 감지했다. 소총들이 그의 가슴을 겨누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이 침묵의 풍성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아무에게도 가닿지 않은 말의 빈곤함은 아니었나 의문이 들었다. 그는 인간의 침묵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소총에서 총알이 터져나왔을 때 진실은 그의 몸에 벌집을 만들었다. 그의 마음 한편에서 씁쓸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왜냐면, 어쨌거나, 늘 알고 있었던 사실을 그는 어떻게 깜빡 잊을 수 있었을까. 신의 침묵에는 그 무엇도 대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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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엑스레이 사진을 통해 발견한 것은 바로 죽음 뒤에 남게 될자신의 모습이었다. - P216

춘희는 비로소 생전의 점보가 말하던 죽는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것은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거였다. 파리가 눈에 앉아도 눈을 깜박여 쫓지 못하는 거였고 차가운 비가 내려도 피하지 못하는 거였으며 다리가 아파도 앉아서 쉴 수 없는 거였다. - P218

춘희가 느낀 슬픔은 쌍둥이자매만큼 강렬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상실감은 그네들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훗날 그녀가 공장에서 홀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 P218

춘희가 되는 대로 이겨놓은 진흙을 본 文은 그녀에게 남다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춘희가 비록 말은 못 하지만 물상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독특하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그녀에게 벽돌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춘희의 나이 열두 살이었다. - P228

文도 처음에는 춘희와 어떤 방식으로 대화를 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녀가 말도 못 할뿐더러 사람들이 하는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그녀가 여느 사람들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구태여 언어가 아니더라도 서로 주고받는 미묘한 느낌과 감정을 통해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文에게도 분명 새로운 경험이었다. - P228

춘희는 곧 文이 한없이 고독하고 슬픈 감정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이를 의아하게 여겼다. 그녀는 끝내 文의 슬픔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 때문에 文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점보와 함께 공유했던 일종의 연대감과 같은 것이었다. 두사람 사이에선 말이 없는 가운데 그렇게 차츰 독특한 부녀관계가 형성되었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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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위해 양복을 사야 한다. 그것이 그로첸스키의 유령이 내게 하는 말 아니었을까? 나는 아이작을 창피하게 할 수 없었고 날 자랑스럽게 여기게도 할 수 없었다. 그애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 P129

새 양복을 차려입고 선반에서 보드카를 꺼냈다. 한 모금을 마시고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알코올의 예리함이 슬픔의 예리함을 대체하는 것을 느끼며, 내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눈을 반쯤 감고서 백 번은 했을 그 몸짓을 반복했다. 그러다 술병이 비고 나서는 춤을 추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하지만 점점 빨리. 발을 쿵쿵 굴렸고 관절에서 뚝뚝 소리가 나도록 발길질을 했다. 내 아버지가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춘 춤을 나도 추며 발을 쾅쾅 차고 쭈그리고 다리를 내뻗었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웃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또 추어서 발이 까지고 발톱 밑에 피가 맺히는데도,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대로 춤을 추었다. 삶을 위해, 의자에 부딪히고 빙글빙글 돌다가 쓰러지면 일어나 다시 춤을 추었다. - P129

나는 세상이 날 맞을 준비를 못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어쩌면 내가 세상을 맞을 준비를 못했다는 게 진실일 것이다. 나는 인생의 현장에 항상 너무 늦게 도착했다. - P130

우리에게 가능했던 인생과 우리의 지금 인생 사이에 놓여 있던 문은 우리 눈앞에서 닫혀버린 후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눈앞에서 내 삶의 문법은 이렇다. 경험 법칙에 따라, 복수형이 나오면 항상 단수형으로 고친다. 그 고귀한 우리라는 말이 무심코 흘러나오더라도 신속히 머리에 일격을 가해 비참함에서 벗어난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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