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아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행복한 기분이 심장을 살짝 찔렀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 뜨거운 찻잔에 손을 덥힐 수 있다는 것이.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인생의 끝자락에서 브루노가 날 잊지 않았다는 것이. - P144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빠의 직업인 ‘엔지니어’가 기차를 운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때만 빼고. 그때 나는 번쩍거리는 객차를 뒤에 매단 석탄 색깔 기관차engine car에 앉아 있는 아빠를 상상했다. 어느 날 아빠는 웃음을 터트리더니 내 생각을 정정해주었다.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순간들 가운데 하나다. 세상이 내내 나를 속이고 있었음을 발견하는 그런 순간. - P146

"너 자신은 네가 지켜야 해" - P146

때로는 공손한 것이 공손하지 않은 것보다 더 나쁘니까. 예를 들어학교 강당에서 그레그 펠드먼이 내 앞을 지나다가 "야, 앨마, 별일없냐?" 해서 내가 "다좋아고마워너는어때?" 하자 그애가 발걸음을 멈추고, 내가 낙하산을 타고 화성에서 막 내려온 것처럼 쳐다보다가 "넌 왜 그냥 별일 없어, 라고 하질 못하는 거냐?" 하고 말했을 때처럼. - P164

엄마가 번역한 『사랑의 역사』를 읽었다. 사람들이 손으로 말했던 시절에 대한 장과 자신이 유리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 남자에 대한 장, 그리고 아직 읽지 않은 ‘감정의 탄생‘이라는 장이 있었다. 감정은 시간만큼 오래된 것이 아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 P165

사람들이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느끼고 싶은 욕망도 커졌다. 이따금 심하게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들은 더 많이, 더 깊이 느끼고 싶어했다. 사람들은 감정에 중독되었다. 새로운 감정들을 발견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예술은 바로 이런 식으로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종류의 기쁨이 새로운 종류의 슬픔과 함께 만들어졌다. 예컨대, 있는 그대로의 삶에 대한 영원한 실망, 예상치 못한 유예가 주는 안도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 - P166

아무리 긴 끈이라 해도 말해져야 하는 것들을 말하기에 충분히 길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끈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어떤 형태의 끈이든, 사람의 침묵을 전달하는 것이다. - P172

침묵의 죄로 그들에게 기소당한 뒤에야 바벨은 얼마나 많은 종류의 침묵이 존재하는지 깨달았다. 그는 음악을 들으며 이제는 음이 아니라 음과 음 사이의 침묵에 귀기울였다. 책을 읽으며 쉼표와 세미콜론에, 마침표와 다음 문장 대문자 첫 글자 사이의 빈칸에 전적으로 집중했다. 방에서 침묵이 모이는 곳을 발견했다. 그곳은 늘어진 커튼의 주름 속,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온 은식기의 오목한 대접 속이었다. - P176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그는 말해지는 것은 점점 더 적게, 말해지지 않는 것은 점점 더 많이 듣게 되었다. 그는 특정한 침묵의 의미를 간파하는 법을 익혔는데, 이는 어려운 사건을 아무런 단서 없이 직관으로만 해결하는 것과 흡사했다. 그가 자신의 천직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날마다 그는 침묵의 서사시들을 써냈다. 처음에는 힘들었다. 아이가 신이 존재하는지 물을 때나 사랑하는 여인이 당신도 날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침묵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힘들지 상상해보라. 처음에 바벨은 ‘그래‘와 ‘아니‘ 딱 두 마디 말만은 쓸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단 한마디 말만 내뱉어도 침묵의 섬세한 유창함이 무너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 P177

마지막 순간에 총살 집행단을 마주보고 나서야 작가 바벨은 자신이 실수했을 가능성을 감지했다. 소총들이 그의 가슴을 겨누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이 침묵의 풍성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아무에게도 가닿지 않은 말의 빈곤함은 아니었나 의문이 들었다. 그는 인간의 침묵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소총에서 총알이 터져나왔을 때 진실은 그의 몸에 벌집을 만들었다. 그의 마음 한편에서 씁쓸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왜냐면, 어쨌거나, 늘 알고 있었던 사실을 그는 어떻게 깜빡 잊을 수 있었을까. 신의 침묵에는 그 무엇도 대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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