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따라 피부색을 바꾸는 도마뱀처럼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슷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남들과 닮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가 결국 나를 보호해 주리라는 것을 아주 이른 나이에 깨우친 편이었다. 나는 결코 남과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 P114

세계를 향한 최초의 발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알아차린 것은 어쩌면 그 무렵인지도 몰랐다. - P121

세상으로부터 미끄러진다는 느낌을 더이상 받지 않기 위해 서로에게 뿌리를 내렸다. 어둠을 움켜쥐고 자라는 음지식물처럼. ‘우리‘라는 견고한 껍질 안에서 우리는 그 누구보다 안전했다.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었고 모든 것은 공유되었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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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도 그리 크지 않은 남자가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어딘가로 바삐걸어가는 모습을 보다보면 마음이 아플 때가 많았다. 분초를 아끼며 뛰어다녀도 언제나 시간이 모자란 삶. 그게 바로 그의 삶이었다. - P77

그녀는 그의 뒤를 따르기만 하면 됐다. 그것이 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그가 즐겨 찾는 술집과 밥집에 이끌려 다녔고, 그의 친구들을 만났으며, 그가 읽으라는 책을 읽었다. - P80

물론 그들에게도 고민이나 괴로움은 있었겠지만 그녀는 그들의 삶이 부러웠다. 그들에게는 신념이 있었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 P80

간혹 술에 취한 그를 바래다줄 때 보았던 자취방은 몹시 비좁았고, 책장이 모자라 아무렇게나 쌓여 있던 책들 탓에 미로 같았다. 그렇지만 그는 그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을까봐 단 한 번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 P80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삶이 송두리째 변했을 어떤 사람들의 절망감과 두려움이 서서히 그녀 안에서 출렁이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에 그토록 무감해지도록 그 사회를 도취시켰던 감정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 P83

만약 정말 바그너가 파쇼의 아버지고 그의 반유대주의가 나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면, 수많은 죽음이, 엄청난 비극의 씨앗이 한 인간의 병든 마음을 토양 삼아 자라났다는 말인가. 그것은 너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도대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 P89

그는 때때로 그가 믿는 정의에 취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눈 속에서 빛나던 차가운 불꽃. 그렇지만 옳고 그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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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우리는 타인과 조우하고,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착각하며, 그 착각이 주는 달콤함과 씁쓸함 사이를 길 잃은 사람처럼 헤매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 P37

역사와 시대를 탓하지 않고서는 삶에서 맞닥뜨리는 고비들을 지나올 수 없을 만큼 인생이 고단했던 한 남자. 그러나 나는 폴에게 아버지를 이해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왠지 폴도 사실은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폴 역시 아버지를 탓하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순간들을 통과해온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을 테니까. - P51

"나는 결코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한국에 온 것이 아니었어요. 내가 한국말을 배우겠다고 결심한 것도 아버지와 communicate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나는 나를 이해하고 싶었어요. 내가 벗어던지려 해도 절대, 절대 벗을 수 없는 내 피부색의 역사를 말이에요." - P58

교포들의 역사는 narrative적으로 진부하죠. 모든 집의 역사가 다 다르지만 이야기로 만들고 나면 결국 모두 cliché예요. - P59

누군가에게 가장 절실한 사연이 왜 타인 앞에서는 진부해지고 마는 걸까. - P59

설혹 그림책의 한 장면처럼 달빛 아래 함께 오줌을 눌 수 있었다 해도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바람과 달리 아름다운 엔딩을 갖고 있지 않은 법이니까. - P64

수많은 취객들 사이에 마주앉아, 폴이 들려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지금, 삶이란 신파와 진부, 통속과 전형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말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에 의해 지속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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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문학동네 첫번째 이달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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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여름은, 내가 자라온 곳의 여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 P10

이곳에 온 지 몇 달 만에 깨닫게 된 사실은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은 상대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떠날 사람들은 보여줄 수 있는 만큼, 아니 보여줘도 되는 만큼, 아니 보여주고 싶은 만큼만을 드러낸 채로 제한된 삶을 살았다.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온 이래 나에게는 거짓말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 P15

엄마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사실, 거짓말은 엄마의 소통방식이었다. 엄마의 거짓말은 내가 하는 것들과는 무언가 달랐다. 거짓말에 생동감이 넘친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엄마는 언제나 거짓말을 했다. - P16

나는 집 번호를 천천히 눌렀다. 여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엄마에게 일주일에 한 번쯤 전화를 했었다. 그렇지만 막상 전화를 걸어도 우리는 서로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우리 사이에는 일곱 시간의 시차보다 더 먼 거리가놓여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 좁혀야 하는지 둘 다 알지 못했다. - P21

입학 허가서 없이 나는 내 행방을 알 수 없었다. - P23

한두 문장으로 요약한 타인의 삶이 얼마나 진부해질 수 있는가를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무수한 시간들이, 기억들이, 몸짓들이, 지극히 통속적인 한 문장으로 완결되었다. - P25

우리 이혼하자. 내 말에 남편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 끊고 나니까 우습더라고요. 휴대전화 액정에 4월 1일 저녁 다섯시 반이라고 찍혀 있었거든요. 한국은 만우절이 지나갔겠구나, 하고 깨달으니 뭔가 상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그 순간, 그는 진실을 말하는 날에, 나는 거짓을 말하는 날에 서 있다는 것이 말이에요. - P26

알고 있는 단어가 한정되어 있었고, 만들 수 있는 문형이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우리는 종종 설명해야만 하는 많은 부분들을 생략하거나 변형시켰다. 우리가 주고받는 말 속에서 고향에 흐르던 실개천은 강물이 되기도 하고, 미처 외우지 못한 8월이라는 단어는 3월로 대체되기도 했다. 내가 묘사한 나의 과거 역시 실제의 내 과거와 같지 않았다. 내가 그려내는 내 미래가 그러하듯이. - P31

우리가 하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에 진실한 것이 하나라도 존재했다면 그것은 다만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행위.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 P31

엄마는 이 세계가 그럴듯한 거짓말들에 의해서 견고히 다져질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려 했던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어쩌면 거짓말이야말로 엄마가 나에게 가르쳐주려 했던 가장 건전한 소통 방식이었는지도.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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