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은 점점 더 말을 잃어가 하루 종일 사람들 틈에서 일을 하면서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그는 현재로부터 과거로, 현실로부터 꿈으로,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이미 사라진 것으로, 사람들간의 대화와 교통으로부터 혼자만의 고독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 P251

춘희 또한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 안에 머물러 있었다. 이즈음 그녀가 새로 흥미를 가진 놀이는 죽은 곤충이나 동물들을 외진 벽돌더미 아래 모아놓는 일이었다. 그것은 점보의 죽음으로 인해 그녀가 새로 인지하게 된 낯선 세계에 대한 그녀 나름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 P251

두 사람은 곧 팔씨름을 하기 위해 마당 한복판에 마주 앉았다. 춘희의 손을 맞잡는 순간, 소년은 알 수 없는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마주 앉은 소녀가 언젠가 자신의 운명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수컷으로서의 본능적인 예감이었다. - P252

-그런데 그 공산주의라는 게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이죠?
그러자 정치가가 대답했다.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생각의 이름이죠.
-생각에도 이름이 있나요?
-당연히 있죠. 세상에 이름이 없는 건 없어요. 사회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실용주의, 고전주의,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실존주의,
표현주의, 물신주의, 개인주의, 사실주의, 초현실주의, 배금주의, 물질만능주의, 한탕주의, 맹견주의... - P261

끝없이 상실해가는 게 인생이라면 그녀는 이미 많은 것을 상실한 셈이었다. 유년을 상실하고, 고향을 상실하고, 첫사랑을 상실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젊음을 상실해버려 그녀에게 남아 있는 것은 모두가 빈 껍데기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싱그러운 수련의 육체 앞에서 뼈저리게 확인해야 했다. - P264

그날 이후, 소녀를 지배한 건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그리고 인생의 절대 목표는 바로 그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거였다. 그녀가 좁은 산골마을을 떠난 것도, 부둣가 도시를 떠나 낙엽처럼 전국을 유랑했던 것도, 그리고 마침내 고래를 닮은 거대한 극장을 지은 것도, 모두가 어릴 때 겪은 엄마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고래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려움 많았던 산골의 한 소녀는 끝없이 거대함에 매료되었으며, 큰 것을 빌려 작은 것을 이기려 했고, 빛나는 것을 통해 누추함을 극복하려 했으며, 광대한 바다에 뛰어듦으로써 답답한 산골마을을 잊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바라던 궁극, 즉 스스로 남자가 됨으로써 여자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 P271

사진 속에 담긴 금복의 얼굴엔 부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배타적인 아집과 거만, 자신 안에 있는 여성을 채 다 지우지 못한 당혹스런 혼돈과 퇴폐적인 분위기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긴 모습이었다. - P286

끝없이 달아나고자 했던 과거는 다시 고스란히 그에게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금복도 달아나지 않았다. 대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에 취하면 그는 죽은 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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