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상상이라는 세계는 언제나 문제투성이였다. 어린 시절에는 이 모든 것에 대한 느낌이 극단적일 정도로 깊숙이 다가왔다. 너무 깊고 좁고 강했다. 이 거리의 껄끄러운 현실들, 공기마저 하얗게 느껴지는 약국, 도서관 원목 바닥의 입자들, 식료품점 냉장고의 치즈 조각들을 내 세계의 전부라 여겼다. 이 모든 현실의 조각을 너무 진지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상상력이라고는 없었다. 이 모든 사물과 외관과 감회에 바보처럼 열중했고 그것이 세계의 전형적인 얼굴이라고 여기며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 거리가 세상의 다른 모든 거리였고 이 건물이 세상의 모든 건물이었으며 이 여자 남자들이 세상의 모둔 여자 남자 들이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것 외에는 상상하지 못했다. - P198

결혼은 집과의 이별이자 새 출발을 알리는 소란스런 서약식이었다. - P199

우리는 예술에 대한 사랑이라는 공통 관심사 때문에 서로에게 끌렸으나 그는 시각이 중요한 화가였고 나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문학이 키운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었고 나는 말밖에 없었다. 억압된 감정은 그에게 내면의 어두운 힘이었고 나에게 그것은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 P199

직접 불행을 살아내야만 서로를 원하지 않았다는 그 단순한 사실이 밖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 P207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하게 부끄럽지 않고 두렵지 않은 고백이었다. 이 약점을 서로에게 털어놓음으로써 우리는 공통으로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좀더 우월한 종류의 무능력으로 끌어올렸고 서로에게 절대 당하고 싶지 않은 판단으로부터 벗어날수 있었다. 일이라는 미명 아래 괴로워하는 건 서로에게마음을 열지 않고도 다가갈 수 있는 절대적인 방패가되었다. - P235

행동하기 위해, 살기 위해, 존재하기 위해 이해해야 할 모든 것을 이해한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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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보이는 벽에 에밀 놀데의 커다란 수채화 두 점이 걸려 있었다. 그 유명한 꽃그림이었다. 나는 놀데의 꽃 그림을 전에도 여러 번 본 적이 있지만 이건 난생 처음 보는 그림들 같았다. 발산하듯 넓은 붓질로 두껍게 칠한 강렬한 색채의 꽃에 어떤 의도가 있음을 그제야 느닷없이 깨달았다. - P157

놀데의 의도는 꽃이 선사한 타오르는 열정을 진지한 인내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자신의 주제에 명확하고 완고하게 천착하는 예술가가 있었다. 그림의 의미가 그제야 보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작품에 힘을 주는 건 집중력이구나. 내 안의 공간이 넓어진다. 내 안의 직사각형 공간 속으로 빛과 공기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그곳에서 사고가 명장해지고 언어가 풍부해지고 지성이 작동을 개시한다. 외로움, 불안, 자기연민으로 가득했던 내면의 공간이 놀데의 꽃을 보며 점점 확장된다. - P158

그 공간이란 뭘까. 내 이마 한복판에서 시작돼 가랑이에서 끝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 공간은 내 몸만큼 넓기도 하고 화살 구멍만큼 좁아지기도한다. 생각이 자유롭게 흐르는 날이면, 그리고 더 깊이 생각할수록 명확해지는 날이면 감사하게도 이 공간은 무한히, 아름다운 날씨처럼 확장된다. 그러나 불안과 자기연민이 치고 들어오는 날이면 쪼그라든다. 얼마나 삽시간에 쪼그라드는지! 이 공간이 넓어져 완전히 자리를 잡으면 나는 그 안의 공기를 맛보고 또 느낀다. 나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호흡한다. 마음은 평화롭고 기대감에 차서 사는게 즐겁고 어떤 영향력이나 위협에서도 놓여난다. 그 어떤 것도 나를 건드릴 수 없을지니. 나는 안전하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생각과의 전쟁에서 지면 경계선은 좁아지고 공기는 오염되고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사방이 수증기와 안개뿐이다. 숨쉬기가 어려워진다. - P159

우리는 속으로 숨기는 생각과 겉으로 표현하는 생각의 차이를 처음 소개받았고 하나씩 익혀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각자의 집안에서 불순분자가 되어갔다. - P162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엄마를 분노로 떨게 하고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건 내가 생각하는사람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엄마는 학교에 간다는 게 곧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는 뜻이라는 것, 조리 있고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표현하게 된다는 뜻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 P166

눈앞에 있는 경험에만 집중하게끔 생겨먹은 나는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미래의 가능성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 그런데 따져보자. 우리 중에 그렇게 미래를 내다보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따라가는 존재이지 어느 누구도 유예된 만족과 희열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 P176

우리는 모두 생긴 대로, 자기 욕구에 따라 살 뿐이다. - P176

삶에 대한 확신이 약하면 약할수록 자기 방식이 옳다고 독단을 부리게 된다. 우리 각자는 자기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더 숭고한 목적에 헌신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서로를 분리시키면서 연민도 함께 거둔다. - P177

나는 사랑의 경험이란 이전과 비슷하지만 점점 더 실망스러워지는것, 그러면서도 동일한 열병과 환멸과 걱정과 부정으로가득하다는 것을 배워야만 하는 저주를 받은 현대여성이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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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에겐 아빠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그다지 생생한 존재는 아니었다. 언제나 모호하고 알 수 없는그림자 같은 사람, 유순하고 늘 웃는 사람, 아내의 결혼 예찬과 지극한 사랑 뒤에 필요한 배경처럼 서 있는사람이었다. 그러다 이제는 엄마의 영원한 절망에 꼭필요한 도구 같은 느낌으로 존재했다. 마치 아빠와 같이 산 이유가 오직 이 순간에 도달하기 위해서였던 것처럼. 정신적 고뇌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 이렇게 된 게 예정된 운명인 듯 보일 지경이었다. 이 일은 나에게도 세상을 완전히 달리 보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 P119

이튿날 나는 깨달았다. 내가 데이비를 깔아뭉개기 직전 ‘말도 안 돼‘란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지만 도러시는 그 말을 들었다는 걸. 그의 속에 있던 엄마가 내 안의 엄마를 들었다. - P134

나는 1번 애비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사랑했고 이 안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느꼈다. 사람들은 창가에 앉아서 온종일 이웃들을 바라보곤 했다. 매장 직원들은 가게 앞을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누가 동네 사람이고 누가 외지인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이곳의 등식은 간단하다. 익명성을 잃는 대신 보호를 받는다. - P136

거리는 인간들의 상호 교환이 이루어지는 곳, 사람들의 지혜가 있는 곳이었고 그곳에서 나만의 세계를 만들 수도 있었다. - P143

자전거 타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한 즐거움 그 자체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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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예측 없이 내 안에서 막연한 기대감이 솟구쳐 올라오지만 언제나그렇듯 기대감이란 녀석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대로 곧장 또렷하게 올라오지 않고 무엇 때문인지 중간에 모양을 바꿔 다시 안으로 방향을 틀더니 시들시들해지다 명을 다해 버린다. 우울하게도 내게는 참으로 익숙한 과정이다. - P71

우린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자기만의 세상에서 고립된 채 살아온 사람들, 평생 서로의 생활 반경에서 벗어나지 못해 닮아버린 두 여자다. - P72

우리는 엄마와 딸이 맞고, 거울처럼 서로를 반영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혈연이니 효도니 하는 단어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반대로 가족이라는 개념,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 가족의 삶이라는 것 모두 해석이 불가능한 세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 P72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와 인생을 어떻게든 이치에 맞게 끼워 맞추면서 수긍하려고 한다. - P73

난생 처음 외로움이란 감정이 나의 의식을 장악한 채 놓아주지 않았고 그럴 때면 나는 고개를 바깥세상의 거리로 돌려 구슬프고 몽환적인 내적망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것만이 언제나 손에 잡힐 듯 감지되던 상실감과 패배감에서 빠져나와 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 P85

모든 일은 언제나 나쁘게 끝나지만 그 비극 안에도 위엄이란 게 있지 않을까. 내가 쓰는 이야기의 요점은 명확하다. 인생은 비극이라는 것. ‘비극 안에‘ 머물면 인생이라는 지루하고 빈곤한 고통에서 구출될 수 있다. 사실 인생이란 게 전부 무의미해 보이기도 했다. 무의미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내가 알기론 가장 중요했다. 의미를 찾는 게 곧 구원이었다. - P87

가끔 이렇게 한발 떨어져서 보는 순간에 우리 인생도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 P93

"사람들은 각자 자기 삶을 살 권리가 있지." - P95

아빠를 애도하는 일은 엄마의 직분, 엄마의 정체성, 엄마의 페르소나가 되었다. - P118

엄마가 볼 때 당신은 남편을 잃었기에 더 차원 높은 인간, 정신적으로 우월한 사람이 되었고 감정은 더욱 심오해졌으며 수사는 더 풍부해졌다. 아빠의 죽음은 의식과 신조를 제공하는 하나의 종교였다. 일생에 단 하나뿐이던 사랑은 정통파 유대교와도 같았고 엄마는 탈무드를 기록하듯 그 안에서 율법과 유산을 찾아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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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공기와 그림자 한 점 없는 쨍한 햇살 속에서 여자들은 서로의 이름을 불렀고 그들의 목소리는 햇볕에서 바짝마르는 빨래 냄새와 섞이며 이 열린 공간의 다양한 질감과 색감을 만들어냈다. - P23

창문 바깥쪽 삶에 대한 엄마의 끊임없는 평가는 내가 처음으로 맛본 지성의 열매라 할 수 있었다. 엄마는 세간에 떠도는 말을 정보로 변형시킬 줄 알았다. - P24

엄마가 그 골목에서 일어나는 세상사를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하는 걸 듣고 있으면 인생은 조금 더 풍부해지고, 다채로워지고,
더 흥미로워졌다. 나는 우리 모녀와 창문 밖의 세상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곤 했다 - P25

우리 부모님은 내가 생각해도 행복한 부부였고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품위 있으면서도 애정이 넘쳤다. 결혼의 행복이야말로 천상의 행복이라는 엄마의 이상은 엄마와 내가 숨 쉬는 공기마다 들어차 있었고 엄마는 그로 인해 엄연히 있을 수 있는 현실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로만 들어버렸다. 문제는 엄마가 당신의 결혼 생활에 내려진 축복에 대해 거의 종교적인 믿음을 갖는 바람에 그에 조금이라도 못 미치는 세상의 모든 결혼을 무시하고 폄하했다는 점이다. 엄마가 나에게 백 가지 방식으로, 천가지 방식으로 가르쳐 준 유일무이한 교훈이란 여자의 삶에선 사랑만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점이었다. - P36

우리 엄마의 존재감은 강력했지만 커너 아줌마의 존재감은 부드러웠다. - P41

얘들아, 감정이 모든 걸 좌우한단다. 무엇을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인생이 풍족할 수도 빈곤할 수도 있어. 감정을 고양시키면 큰 재산이 되기도 하고 그게 싹 사라져버리면 길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인생이 되기도 하는거야 - P44

나는 애착이 절대적이지 않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속성을 지녔다는 걸 아주 어린시절에 알게 되었다. - P51

엄마가 바라는 것들은 단순하지만 절대 타협할 수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엄만 그것들을 물이나 공기처럼 필수 불가결한 무언가로 여긴다. - P64

엄마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안다. 세상 살면서 늘 혼란스러운 건 엄마가 아니라 나다. - P68

"요즘에는 사랑도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 거야.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 해도"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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