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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철학의 풍경들
진동선 글.사진 / 문예중앙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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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는 이에게는 그리고 사진을 읽는 이에게도, 각 사진은 제각각의 의미가 있다. 프로 사진가에게도, 아마추어들에게도 그 직업적 의미와, 성취감, 미적 생산에 대한 욕구 등으로 인한 '사진함'이 있을 것이고 아마도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나와 같은 다수의 미디어 생산/소비자에게도 자신의 '사진함'의 의도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감상자에게 또한 누군가에게는 가슴 저릿한 감동을 줄 수도 있고 일상적이거나 정보를 제공받거나 하는 등의 의미 또한 있을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가장 근원적이면서 궁극적인 사진의 의미는 기술의 차이에서 오는 노련함의 정도가 아닌 '사진함'과 사진이 (감상자를 포함하여)그 '누군가의 의미'라는 데 있다.
저자의 사진에 대한 깊은 애정과 수많은 철학적 사유들의 이갸기가 접점을 이루면서 우리는 렌즈를 통해 선택되는 이미지들과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때론 영감을 받게 된다. 저자의 <사진철학의 풍경들>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이의 선택된 이미지에 대한 의미에 대한 사유이다. 그러한 사진에 대한 사유는 박제된 이미지가 기억을 통해 시공간을 부활시키고, 실재와 상상이 결합해 자신만의 빛과 어둠의 조형을 이루고, 시선에 대한 사유를 통해 아픈 성장통을 겪다보면 결국 자신만의 의미창출과 끊임없이 세상을 보는 가장 근원적인 예술로서의 시선을 남게 한다. 카메라를 손에 들고 있는 한 프레임을 선택하는 사진을 하는 이에게 피사체 선택과 그 의미에 대한 딜레마 혹은 매너리즘을 극복할 수 있는 여러 지점들을 제시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 책은 저자가 시도하는 철학을 통한 ‘사진함’의 정리이기 이전에 또, 저자 자신의 사진집이기도 하다. 종종 다른 작가의 사진이 실리기도 하지만 텍스트의 사례로 생각해볼 수 있는 저자의 컷들이 실려있다. 이 중 나는 ‘하야리아 부대’(2011)이 인상적이었는데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려 받는 듯하면서도 그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맥없음이 손의 제스처와 타이틀이 만나(저자는 사진의 타이틀을 결정짓는 데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충분히 전달된다. 그 많은 역사와 시간을 누군가의 손짓 하나가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사진의 미니멀이 주는 큰 파장력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저자가 인터뷰내용을 실은 보드리야르의 사진은 (책에 실리진 않았지만) 현재의 우리에게 현실 모든 것의 오브제화라는 영감을 주고 있기도 하다. 모든 것이 오브제이자 피사체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이를 어떻게 해석할지, 어떤 시점에서 재현해낼지, 그래서 어떤 공감을 불러일으킬지가 바로 사진찍는 이들 각각의 선택이자 차이가 된다.
차이를 통해 개성과 자신만의 의미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는 이러한 사유와 여러 시도에서만 창출된다. 시간이 흐른 지금 보면 영화의 필름과 차이가 없어 보이는 듀안 마이클의 시퀀스 포토그래피 또한 당시에는 ‘사진적 행위를 언어적 행위로 치환하’는 지금의 여러 유수와 같인 포토그래퍼들의 내러티브 있는 작업들을 이끌어냈다. 그렇다면 한 장의 사진이라는 의미를 넘어선 시리즈 작들의 의미작용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볼만 하다. 소피 칼과 같은 이들의 작업에서 우리가 받는 감동은 기록의 산실같아 보이지만 감상자로 하여금 새로운 상상을 하게 한다는 데 그 출발점이 있다. 사진이지만 순간을 넘어선, 누구에게나 다르게 해석이 가능한 내러티브, 주어진 스토리텔링을 넘어서는 작가와 감상자의 인터랙티브의 확장에 바로 그 의미가 있다. 나는 영화의 필름과 같이 연속적이거나 누구에게나 같은 정보를 주는 사진보다는 점프컷이 된 시리즈의 시퀀스 포토그래피가 훨씬 더 흥미롭다. 그 내러티브는 현실을 넘어서 환타지가 되기도 하고 때로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SF 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스릴러가 되면서 사진이라는 장르를 넘어선 문학과 영화에 다름아닌 몇장의 컷이 된다. 이것은 우리의 기억과 접속하면서 무한한 해석을 이끌어내는 데 각각의 해석까지를 예술작품의 마지선으로 본다면 하나의 작품은 무한히 많은 작품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저자의 말대로 연출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텔링이 있는 사진의 경우에 쉽게 감동하게 된다. 사진에 함축된 시공간과 감상자에게 내재된 의미가 상호작용하는 순간이다. 현대사진작가의 작품들은 오브제를 직접 설치 및 제작한 후 철저한 의도에 의한 사진작업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연에 기인한 작품들이 큰 감동을 주기는 하지만 현대사진은 사진의 우연성을 뛰어넘어 의도와 사회적의미를 강렬하게 전달하는 데 그 목적을 두는 작품이 많다. 그들의 작품은 우연이라기 보다는 (세팅된 피사체와 후반디지털작업으로 이루어지는) 만들어진 사진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의견이 설득력을 얻는 부분은 마이클 케나의 사진과 작가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마이클 케나의 작업은 오랜 시간 노출작업을 통한 사진작업이 많은데 변화무쌍한 환경에서의 그 사진이 꼭 케나의 의도대로 나오는 경우는 없다. 그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의도한 그대로를 얻을 수 없는 것이 사진이라는 측면이 내게 굉장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 우연성이란 자연과 함께 했을 때 더 큰 시너지를 발휘하는 듯 하다. 휴머니티가 범접할 수 없는 자연만의 순간, 말그대로 사진이 찰나의 예술이 되는 순간은 이러한 사진이 탄생했을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담고 우리에게 그만으로도 감동을 주는 사진들은 오랜 세월 그 자연이 간직한 신비로움 때문일 것이며 그 오랜시간과 변화하는 공간이 (마치 인간의 주름처럼) 한 컷에 담겨 있음에 그 감동이 배가 되는 것일게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사진을 순간을 담는다고 절대 말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피사체 혹은 배경의 무엇인들, 그리고 그 빛과 어둠의 순간인들, 시간을 머금지 않은 컷은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사진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책과 더불어 읽는다면 더 좋은 독서가 될 듯하다. 또, 사진을 대하는 철학계의 반응에 대한 심도있는 독서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이러한 심도 있는 독서로 가는 가이드가 될 것이다. 가령 수전손택의 사진의 폭력성이라는 의미에 대한 고찰이 있기까지 어떤 사진들이 평단에 오르내렸으며 우리는 어떤 사진을 읽을 때 이러한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는가에 대한 고민을 위해서이다.
나는 모든 예술은 의미의 투쟁에서 새로움을 창출시킨다고 믿는다. 지금의 현대사진의 표현법이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실험과 의미분쟁이 있어왔다. ‘사진철학의 풍경들’은 그런 의미에서는 온건한 가이드이다. 사진을 하는 이들에게 어떤 사진이 이러한 철학적 논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이는 사진을 읽는 이들에게도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진의 사회적 실천의 의미에 대해 좀더 부가적인 설명과 사회적 의미에 대해 언급되길 바랬으나 피사체 혹은 대상, 주제 등의 표현적 의미에 대해 더욱 저자가 공감하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리처드 볼턴의 ‘의미의 경쟁’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사진적 진실의 정치학을 넘어서서 사진의 정치학사를 들여다보는 것이 사진과 이미지를 소비하는 독자들에게는 더 필요한 지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사진을 하는 이를 더 염두해 두고 씌여진 책으로 느껴진다. 사진을 읽기만 하는 감상자보다는 직접 표현하는 이에게 좀 더 공감과 도움을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이미지에 대한 사유에서 비롯된 철학과 사진과의 접점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공부가 다양한 주제와 방법의 사진을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랬던 듯 하다. 사진한장을 찍기까지, 그리고 그 사진을 읽으면서 수없이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의미를 찾아가는 예술로 인식하게 하는 저자의 사유의 과정이 긴 여행과도 같다.   

이 책은 사진이라는 텍스트를 중심으로 철학의 여러 흐름을 이해하는 데도 또 다른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미지와 철학의 접점에 대한 고민을 하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내게는 저자가 제시한 레지스 드브레, 폴 리쾨르, 수잔 손택, 존 버거의 부가적인 독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이미지에서 사진이라는 구체적인 텍스트로 나아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저자의 사진에 대한 의견에 많이 공감하고 있다면 로버트 헨리의 ‘예술의 정신’을 추천하고 싶다. 또한 저자의 블로그를 (http://blog.naver.com/sabids?Redirect=Log&logNo=150095384058)통해 저자의 현재 사진작업을 엿볼 수 있었고 끊임없이 렌즈 안과 밖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는 저자의 노고를 알 수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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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다다오의 도시방황]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안도 다다오의 도시방황
안도 다다오 지음, 이기웅 옮김 / 오픈하우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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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다다오의 여행서라고 해야할까. 안도다다오의 건축철학서라고 해야 할까. 이는 안도다다오의 건축에 대한 열정에서 시작된 여행들을 소재로 한 그의 에세이라고 하는 게 좀 더 구체적이고 내용에 가까운 설명이 될 듯하다. 물론 그의 여행이 건축에 대한 욕망 때문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여행에는 당시만의 시공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환경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자신만의 상념을 발전시킨 안도다다오가 있었다. 특히 인도의 타지마할 여행이 그러했는데 이러한 건축물들의 이야기와 여행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건축을 설명하는 이음새 없는 솜씨 또한 유려하다. 타지마할의 대칭성에서 자신의 동형이상성을 가진 건축을 설명하고 또 여기에서 동시대의 다른 건축 혹은 건축가, 그도 아니면 문화예술가의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말그대로 계획되고 스케쥴표대로 움직이는 여행이 아니니 그의 여행은 방황이 맞고 근,현대 건축을 보려하니 도시를 중심으로 이동하는 그의 방황은 도시방황이 맞다. 그러고보니 제목이 참 걸맞다. 처음에는 그저 조금은 그럴 듯해 보이는 제목으로만 여겼는데 말이다. 
 

책 표지에서부터 구조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던 책이지만 은빛배경의 흰 글자들은 정말 읽기 힘들었다. 그 노고를 상쇄시켜주는 것이 그 글자만큼 반짝거렸던 안도다다오의 건축가로서의 신념과 열정이었으니 그로 만족해야 할 듯 하다. 일본의 무작위적 현대건축의 양적 증대와 그 설계들에 대해 회의도 가지고 있고 일본이 지향했던 유럽의 문화와 지배주의에 대해 잠깐씩이지만 예술가로서의 자국에 대한 생각도 엿볼 수 있었다. 
저자의 말 중 곳곳에서 일본전통 건축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는데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세계적으로 균일화되고 있는 건축양식들과 현대 일본 건축에 대한 거부감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종종 그런 언급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주 깊게 그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다거나 과거 일본의 잘못된 정치적 지향점에 대해서 대대적으로 비판하지는 않고 있는 걸 보니 그 또한 일본인으로서 자아비판으로 그치느니 건축가로서의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정도를 지키려 한 듯 하다. 생각해보니 (그의 표현대로) 단순화시키는 미의식을 가진 다분히 일본적 특성과 자연에 끼워져있는 듯한 일본의 전통건축에 대한 그의 감동이 지금의 그의 건축양식을 있게 한 것 같고 그도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 하다.(그의 이세신궁에 대한 이야기들이 특히 그렇게 느껴졌다.) 

안도다다오뿐 아니라 건축가들의 작업이란 매우 수학적인 미학활동일 뿐 아니라 예술가의 작업에 다름 아닌, 의미를 대지와 재료, 공간에 부여한 매우 형이상학적 표현임을 알 수 있었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일본경제가 지향하는 소비문화의 탐욕에 대항하는 지하건축에 대한 의미가 인상깊었으며 안도다다오의 건축 뿐 아니라 모든 지하건축양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저항자들의 도피처 겸 활동처로서의 공간 지하의 건축들의 의미가 더 이상 게릴라성 저항의 현대건축으로 이어지고 있는 듯 해서 여러 상념을 던지는 듯 하다.

나는 무엇보다 (교회건 절이건) 공간의 성격과 자신의 건축양식, 그리고 자연을 끌어들이는 그의 건축은 그만의 개성과 건축의 목적, 그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지지 않는다는 점이 나는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폴록과 같은 무질서와 즉흥성, 폭발적인 예술가의 고뇌와 광기와 악의(여기에서의 악의, 그의 악의라는 표현은 강력한 저항과 같은 의미도 보인다), 개인의 외침으로서의 과정의 건축이라고 와츠타워를 칭하는 그의 반대편의 열정이 단단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자. 이 반대편의 힘이 그의 구성적 건축을 지탱하는 힘과 같다고 보인다. 완전한 정과 동의 사이에서 균형을 이룬다고나 할까. 여행과 그의 상념으로 차 있는 에세이에서는 그의 완전한 반대편들이 보여서 흥미롭다. 그리고 그 균형의 사이에 있는 그의 건축물들을 보는 것은 더욱 흥미롭다.

사실 빛과 그림자, 자연과 건축의 형태가 중요시된 그의 건축에서 색감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책의 흑백사진들이 특별히 아쉬운 것은 아니었으나 보다 그의 건축을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은 그의 건축물 컬러사진을 검색하게 했다. 안도다다오의 모던함은 변형을 이루며 오히려 약간 그로테스크 해보이기도 하고 초현실주의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안과 밖의 경계의 모호함과 무의식적으로 빛과 그림자로 주로 표현되던 표현주의의 영향 때문에 독자인 혹은 건축을 예술로 감상하는 수용자로서 오히려 반모더니즘적인 해석을 하게 되는 듯 하다. 아마도 그가 소개한 많은 건축물들과 그의 건축물들, 아니 모든 건축물과 건축현장을 보는 시선이 조금은 달라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러한 시선은 독자의 여행을 더욱 풍부하게 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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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x_konii 2011-08-23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날...퇴근길에 만난 폭우에 나와 함께 험난한 고난을 겪은 책이다. 책이 마르면 괜찮으리라 생각했지만 완전히 표지가 물에 녹아버리는 바람에...아쉽게도 표지를 포기해야만 해서 마음이 아팠던 책...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7
제러미 시프먼 지음, 김형수 옮김 / 포노(PHONO)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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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라는 작곡가란 우리에게 굉장히 익숙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만나고 보니 그건 내 협소한 시각이었을 뿐이었다. 익숙한 멜로디 몇 몇 구절과 교과서의 교육만으로 상상해 온 차이콥스키를 그의 일상과 더불어 일대기를 들여다보고 음악의 배경에 대해 이야기 듣고, 그의 많은 곡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그의 이미지는 지금껏 상상해왔던 차이콥스키와는 차이가 있다.
음악가로서의 번민도 많았겠고 그의 주변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음악에도 그 영향이 많았겠지만 한 사람으로서 태어나고 사랑하고 몸와 마음의 숱한 변화를 겪는 차이콥스키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아마도 음악가의 삶을 안다는 것은 그의 음악을 의도와 탄생의 배경을 더 실제에 가깝게 이해할 수는 있을 듯 하다. 이는 여느 예술가의 작업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술의 생산과 수용이 시간을 넘어서 좀 더 가까운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수용자만의 또 다른 창작으로서의 감상을 유도하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테지만 말이다.
이 책을 만나면서 차이콥스키 이외의 작곡가들의 음악을 들으면서도 창작자의 캐릭터를 알고 싶은 마음이 든다. 삶을 알고 싶고 그가 주변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왔는지 어떤 삶의 굴곡의 지점에서 당시의 음악이 탄생했는지...
그의 알려진 삶을 총망라하고 편지 등을 통해 다시금 차이콥스키를 재조명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느껴진다. 경건한 삶만이 위대하다거나 또 꼭 그러한 생활에서 위대한 예술이 창작된다고는 할 수 없다. 여느 예술가처럼 마음의 번민을 수백번 오르내리며 차이콥스키의 음악도 탄생되었다. 물론 저자의 이야기를 듣자면 음악교육을 정식으로 받지 않았을 때조차 아름다운 노래를 작곡한 차이콥스키의 음악적 재능은 어느정도 타고 난 듯 했다.

그의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인데 차이콥스키의 유명발레곡 이외에도 귀에 익숙한 멜로디들이 있어서 반갑기도 했다. 피아노 연주곡을 주로 듣던 취향에서도 조금은 더 나아가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 Op.35 피날레를 듣는 기쁨도 알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보고 생각하는 즐거움에서 나아가 음악에 관한 책들은 듣는 즐거움을 알게 하고(실제로 음악을 부록하지 않더라도) 음악을 듣는 귀를 발전시키는 듯 하다. 이는 청력이라기보다는 마음으로 음악을 읽는 법에 대해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에 리듬과 멜로디를 싣는 차이콥스키의 작곡을 듣고 있자면 사실 저자가 들려주는 이상의 차이콥스키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훨씬 더 많은 그의 이야기가 물론 있을 것이다. 오네긴을 듣고 들으면 우리가 알 수 있는 차이콥스키의 말과 생각과 행동과 또 다른 차이콥스키가 느껴진다.

부록은 때때로 또 하나의 단행본만큼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바로 이 책이 그렇다. 19세기의 배경, 러시아의 문화적 배경과 책에 나오는 문화예술계의 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음악용어설명, 2장의 CD 수록곡 설명은 기본인데 내가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바로 연표이다. 저자는 연표에 차이콥스키의 생애 연표 뿐 아니라 각 시기의 문화예술의 주목할 만한 뉴스, 서양사를 보기 좋게 배열하고 있다. 이는 차이콥스키의 삶과 음악 뿐 아니라 우리가 같은 시기의 다른 문화예술가를 읽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이 책의 부록은 책과 CD로만 그치지 않고 웹사이트의 자료를 이용할 수 있게도 하는데 차이콥스키의 연표와 음악외에도 동시대의 러시아의 다른 음악가의 대표곡을 감상할 수 있는 페이지도 있어서 차이콥스키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을 음악을 들을 수 있고 또 그 음악들이 문외한인 내가 들어도 굉장히 아름답고 멋지다. 글린카에서부터 ‘강력한 소수’ 일원들과 알렉산드르 다르고미슈스키까지 책에 나왔던 인물들을 그들의 음악으로 다시 읽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러시아의 민족주의 음악에 대해서도 공부하면서 조금이나마 글이 아닌 귀로 이해하는 독서의 시간이 된다. 특히 차이콥스키에게 작곡을 가르쳤다는 안톤 루빈슈타인의 곡도 접할 수 있는데 그의 많은 곡들이 궁금해질 정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작곡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 밀리 알렉세예비치 발라세예비치의 피아노곡은 예노 얀도의 연주인데 또 그 연주가 감동적이다. 많은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과 음악가, 그리고 또 다른 연주자들의 발견은 이 책이 차이콥스키에 그치지 않고 19세기 후반의 러시아 음악에 대한 많은 이야기의 서두를 열어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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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볼프강 카이저 지음, 이지혜 옮김 / 아모르문디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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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비(非)자연적인 것, 형태의 왜곡이 가져오는 그로테스크라는 예술의 성격은 이제는 그 생경함이 주는 공포, 낯섬의 정도로 파악하는 의미로 그 탄생 이래 변화해 왔다. 그로테스크한 예술작품이 먼저 있었고 그 이후 변화해 온 이 용어의 변천을 듣다 보면 그 정도와 의미가 크게 변화된 것 같지는 않다. 아직도 우리는 15세기에 그로테스크 예술작품으로 간주되었던 것을 그로테스크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거나 새롭게 발생하는 현대예술의 다양한 표현방식 안에서 그로테스크라는 의미의 범위는 어떻게 한정지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신화 속에서 흔히 반인 반수의 그로테스크의 전형을 보게 된다. 이는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의 저자 볼프강 카이저의 표현과 역자의 번역에 의하면 ‘생경함’을 주는 그로테스크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로테스크의 전형들은 흔히 애니메이션 속에서 동화적으로 미화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아는 배우(사람)의 모습의 변형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이는 관객에게 오히려 너무 큰 낯선 효과를 주어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너무나 진짜 같은 그림이 된 배우들의 모습 또한 뭔가 이질적인 피부의 질감 등 생경함을 일으키는 요소를 갖게 되고 이것이 트랜스포머의 옵티머스가 지지를 받고 ‘퍼시잭슨과 번개도둑’의 케이런(피어스 브로스넌 역) 의 반인반마가 코미디로 보여 그 리얼리티를 조롱받는 것의 원인을 증명한다.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적정 수준의 생경함, 혹은 완벽한 리얼리티를 구사함에서 대중의 선호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는 익숙한 것들의 변형과 왜곡이 주는 효과로 문학과 미술에서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있었으며 카이저가 제시하는 예시들에서 당시의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개념사적으로 그로테스크를 둘러싼 사회적 배경 혹은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 대한 해석과 연구는 독자의 몫이다.
엄연히 말하면 브레히트의 소격 기법과 다른 것으로, 미학적 측면의 새로운 표현이지만 그로테스크가 가진 저항적 가능성은 존재한다. 몰입을 방해하는 브레히트의 연극이 자꾸 자신의 매체성을 드러낸다면 그로테스크 예술 또한 자연모방의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자신의 매체성을 강조하고 있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그로테스크가 아방가르를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고 그 아방가르 형식이 여성주의 미술 등에서 큰 부분의 형식적 측면을 담당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현대 여성주의 미술에서의 화두는 남성적인 미술작업에서 벗어나 여성들만의 이미지 언어를 발전시킨 데 있다. 아방가르드한 표현방식은 관객에게 생경함을 주면서 작가와의 소통을 유발시킨다.  


우리가 흔히 보는 공포 영화 속의 캐릭터(인체의 변형이 주는 공포), 혹은 풍경(익숙한 도시의 모습이지만 뭔가가 부재하거나 특이한 것의 존재로 변형된 공간)이 주는 익숙한 것의 낯섬이 주는 그로테스크의 일환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즉 (저자가 잘 설명하고 있듯) 고대 동굴의 벽화라는 시각적인 대상에서 시작된 그로테스크라는 어휘는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것들에게서 무언가는 부재시킬 때, 시각적인 대상의 등장이 아닌 소멸로도 발생할 수 있는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저자가 렌츠의 작품에서 말했 듯 인형극 그 자체가 그로테스크하지 않지만 인물이 마리오네트가 될 때 그로테스크가 되는 것에서 우리는 현대 그로테스크의 성격을 가장 크게 결정짓는 것이 일단 시각적인 기괴함이라는 데 접근할 수 있다.


삶의 질서가 적용되지 않을 수 있는 그로테스크의 성격을 생각할 때 이는 그 표현의 무한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저자가 제시한 그림들처럼 사후의 세계가 그려질 가능성도 (그로테스크를 예술의 한 사조로 간주할 때) 매우 유효한 표현방식일 수 있으며 종교적인 세계와 같이 경험적 세계에서 벗어난 소재를 이끌어낼 가능성이 있다. 이는 지금의 판타지 문학과 영화, 미술 등 다양한 문자매체와 미술매체에서 확인 할 수 있으며 경험적 세계에 존재하는 것의 왜곡과 변질을 통한 생경하거나 혹은 다르다고 표현할 수 있는 존재와 세계를 그려낼 예술매체로서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비자연적이고 생경한 존재와 세계가 과연 상상 속의 세계만을 그려낸 것이라기 보다는 현실의 나와, 우리와, 여기를 다르게 혹은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데 이렇게 본다면 크로테스크 예술의 풍자성이 매우 설득력 있어진다. 저자의 말대로 허상의 무엇을 그려낸 그로테스크의 세계는 그 허상이 실재일 수 있는 수용자의 태도에서 현실에 대한 자각와 거울역할을 하게 되고 허위의식의 세계 속에 진정한 실재를 그로테스크예술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로테스크와 풍자에 있어서는 저자가 예로 든 독일문학가 모르겐슈테른이 이 둘의 별개성을 강조했듯 역사 안에서 구분지어 사용하려 했지만 현대예술세계에서는 그로테스크는 풍자가 가능하고 풍자가 그로테스크 적인 미학적 면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이 둘이 같다고 말할 수는 전혀 없다. 그로테스크는 매우 주관적인 예술적 감상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어떤 수용자에게는 그로테스크로 느껴질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보편적인 그로테스크의 개념을 정의한다는 것은 이제는 불가능하도 그 기준과 범위를 설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만큼 예술에서의 표현은 다양하며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이 창작에서부터 수용에까지 각각의 감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저자의 의견을 수용해도 그 개념은 여전히 주관적이다. 창작된 작품에서는 보편적인 그로테스크적인 미학적 측면을 전혀 느낄 수 없다 하더라도 창작과정에서의 그로테스크적인 기법이 있을 수 있으며 이는 이 창작과정이 관객에게 공유되었을 때 비로소 그로테스크 예술이 된다. 이처럼 다양해진 현대예술의 창작과정과 수용과정의 그로테스크라는 의미는 모호한 채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저자가 연구해 온 것처럼 지금까지의 그로테스크 예술의 발전과 그 역할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다양한 예술의 표현이 발생하면서 늘 그로테스크적으로 예술계에서 읽혀졌지만 지금은 보편적인 여러 연극과 미술의 전파는 단지 표현의 차이로 인정되어 왔다. 이렇게 생각하면 새로운 표현의 탄생, 늘 그 지점들이 그로테스크와 예술의 개념 변화를 이끌어 온 포인트가 되었으리라 예상해볼 수 있다.
저자의 이 책은 1957년작으로 당시까지의 독일문학에서의 그로테스크가 중심이며 우리가 쉽게 그로테스크와 연결지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미술작품의 예 정도이다. 그 이후로도 그로테스크의 개념은 늘 변화해왔으며 명확한 그로테스크의 이미지적인 요소는 저자가 제시한 몇몇의 그림들처럼 전형적인 형태의 왜곡과 비자연적인 것의 배치이다. 현대의 이미지에서 수용자는 판타지라는 장르로 비자연적인 것에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 나머지 저자가 그로테스크의 가장 독특한 감상으로 말해진 ‘생경함’만의 그로테스크를 더 이상 과거와 같게 감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오히려 ‘비천함’으로 표현되는 ‘좀비’ 식의 호러 표현법 정도가 당시의 그로테스크 예술에 가까우며 왜곡이 아닌 완전히 ‘드러냄’으로 충격을 주거나 창작 기법에서 기존 예술의 아우라를 파괴하려는 벤야민 식의 ‘거리 두기’ 기법들이 현대예술의 그로테스크 성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여성미술에서는 ‘드러냄’의 표현기법들은 전혀 왜곡되지 않았는데도 숨겨진 욕망 혹은 사회적 억압 속에 가려진 몸을 드러냄으로서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는 여성주의적 미술이 주도적이었는데 이는 기존의 풍자시와 연극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현실에 대한 저항적일 수 있는 그로테스크의 면모는 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로테스크는 이미지로 그 범위를 한정짓기 보다는 잠시라도 수용자로 하여금 그로테스크로 감상된 예술에 있어서 그 수용효과, 예술의 저항적 힘으로 그 성격과 개념을 정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저자는 우리가 지금 판타지로 말하는 과거 그로테스크의 면과 문학에서의 풍자적인 그로테스크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고 있다. 말했듯 사상과 문화와 예술적 경험과 표현의 충격의 개인차에 따라 표현과 수용의 다양성이 일어나고 그로테스크의 개념은 이제 개인적인 판단이지 더 이상 시대적 해석으로 일반화, 즉 개념사적인 측면을 논하기는 어려워졌다.
저자에 의하면 과거 그로테스크는 신과 같은 경외감의 존재, 심판과 처벌의 주체인 종교적 존재들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에서 동물과 결합하거나 형태의 왜곡으로 어느 정도의 생경함을 준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종교가 가진 공포의 힘, 공포의 정치에 가까웠으리라 생각하며 적어도 그로테스크적인 미술적 표현에 있어서는 당시 인간의 욕망을 풍자하고 종교적인 공포의 결합이 가져온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연구해온 그로테스크를 넘어서서 현재를 사는 독자인 우리는 좀 더 다양한 것에서 그로테스크를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전혀 그로테스크라고 여기지 않았던 현실세계라고 믿었던 세계가 오히려 그로테스크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하다, 기괴하다는 표현에 시각과 청각적인 표현의 차이가 없는 것처럼 이제는 시각적인 것에서 뿐 아니라 청각적이고 촉각적인 감상을 시도하는 예술이나 일상에서도 그로테스크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예술적 감상은 수용자의 몫이니 보다 다양한 그로테스크에 대한 수용자의 해석들이 논의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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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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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한 장 한 장에 저자의 시적인 에세이가 곁들여진다. 아마도 저자의 에세이가 시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오감을 표현하는 의성어 의태어들과 아름다운 우리 옛말들이 함께여서 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시를 쓰듯 저자는 그림을 읽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따라 자연과 사람과 현 세계와 다른 세계를 오가며 짤막짤막한 동화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의 이야기가 그림에 대한 심도있는 해석의 성격이 아니라서인지, 아니면 감각적인 우리말들때문인지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옛 그림과 어울려 옛 구전노래처럼 리드미컬하게 들리는 듯 할 것이다. 내게 저자의 우리말들은 매우 이미지적이면서도 노래와 같았다. 그래서 그림 안의 소리와는 또 다른 오감의 그림읽기가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괘꽝스럽다’일지, ‘사랑옵다’와 같은 순 우리말들을 읽는 즐거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현대어에 익숙해지다 못해 자고 나면 늘어나는 신조어들 사이에서 우리의 옛말들의 아름다움이 빛을 발한다. 듣기에도 재미난 옛말들은 우리에게 우리 옛말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느끼게 해줄 뿐 아니라 어린이나 청소년 교육에도 일말의 힌트를 제공할 것이라 생각된다. 한자어를 넘어서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과 신조 줄임말 등을 사용하는 우리에게 감각적인 순 우리말 표현들은 그저 언어가 아닌 그 자체로 오감을 자극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림 읽기로 유명한 저자인 만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거나 혹은 숨은 작가의 이야기까지 들려주고 있긴 하지만 전작과 그의 강연에 비해서라면 이 저서만큼은 읽는 이의 다양한 그림 읽는 감각을 일깨우는 데 자극을 주는 데서 멈추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래서 그림을 읽고 생각하는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모처럼의 휴가들을 앞두고 휴식을 함께 할 책을 찾는다면 추천하고픈 책이다. 조영석의 <탁족>과 같은 옛 그림들과 상큼한 우리말이 가득한 동화 같은 에세이들을 읽노라면 휴식의 시간을 더 편안하게 이끌어줄 듯 하다. 요사이 몇몇의 옛그림이 등장하는 책을 만나면서 오래된 그림을 들여다보는 일은 빛바랜 종이처럼 내 시야를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휴가를 기대하고 있어서일까. 책 속의 그림들을 실물로도 만날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즐거워진다. 저자가 잘 메모해준 그림 목록의 소장처를 찾아 도시의 박물관과 미술관들에서 휴식을 옛그림을 직접 만나보는 기회로 삼아도 좋겠다. 저자가 알려주는 이름 몰랐던 옛 그림의 작가 소개를 읽으며 말이다.  

사진 혹은 영화 속의 이미지들처럼 과거의 시공간, 그 순간의 박제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를 재현하지 않고 해석되거나 온전히 작가의 역량으로 해석되는 그림들 속의 모두는 나이 들어버리거나 이미 박제된 과거일 뿐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아마도 그림 속의 모델이 된 자연과 인물들은 대를 거듭해가며 대체되고 변화한 모습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겠지만 사진처럼 그림 속 인물과 자연은 그때 그대로의 순수성을 가지고 있다. 때로 상상의 세계가 그림 속에 등장하더라도 당시의 세계관의 바탕이 되었을 그 시공간의 모습을 닮아 있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현재를 사는 우리의 희노애락과 삶과 피안에 대한 상상을 보게 된다. 
 옛 그림 하면 수수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떠올리기 쉽지만 때로 익살스럽고 때로 힘이 넘친다. 18세기 이인상의 그림 <소용돌이 구름>은 마치 현대미술가 김중섭의 ‘소’들처럼 역동적이어서 감정분출의 대리만족이 느껴지기도 한다. 또 내가 옛그림에서 매번 가장 감동하는 것은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묘한 기운을 느껴진다는 것인데 저자 또한 <계산포무도>의 글에서 ‘소리가 들리는 그림’이라고 소개한다. 저자의 표현대로 ‘인간의 속기마저 털고’ 가는 바람, 그 바람의 소리가 들리는 그림은 눈 뿐 만 아니라 귀마저 개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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