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짱의 연애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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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도 '수짱의 연애'건만, 이책 생각보다 삶에 대한 성찰이 많다.

아직 서른일곱이 안 됐지만 어쩐지 내가 하는 고민들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엄마가 되는 길을 선택하든, 아니든.

우리는 모두 나답게 살다 죽는다.

아니....다.

모두 나답게 살고 싶어한다.

어쩌면 지금 나답게, 자유롭게 사는 건 감동스러울 정도로 행복한 일이 아닐까?

감사할 일이다.

바라는 대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건.

잠깐. 근데,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나?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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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책 - 파블로 네루다 시집
파블로 네루다 지음, 정현종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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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135
나는 때때로 악한가
아니면 언제나 선한가?


파블로 네루다는 아마 성선설을 믿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때때로' 악할 수도 있지만, '언제나' 선할 수도 있다.

그의 질문에 답이 나와 있다.

악함은 예외적 행동이다.

흰머리가 익숙해진 작가에게 이제 열정은 없다.
삶에 던지는 물음은 차분하다.

그는 조용히 묻고 조용히 대답한다.

바닷물에 밀물과 썰물이 있듯이,

우리의 삶에 탄생과 소멸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시각적 자극은 '노랑'이었다.

노랗게 변한 자연이나 마음, 사물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노랑의 가장 대표적인 뜻은 '새로움'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삶을 관조하며 쓴 시의 색채 감각이 '새로움'이라니.

삶은 변화하고 약동하며 의미를 쓴다.

인간의 의미는 끊임없이 새롭고자 하는 점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 착하지만 어눌하지 않은 작가의 시선 74개가 모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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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미래 - 2013년 제3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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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적이다. 「침묵의 미래」를 읽으며 내가 내내 되뇌던 말이다.

‘관념’이란 말도 제대로 모르면서 말이다.

소설을 읽고 함께 실린 평론들을 읽었다.

나는 그 속에서 이 소설이 관념적이라 이야기한 몇 명의 전문가들의 생각도 읽을 수 있었다. 얼마간 안심이다.


*관념(觀念)- 1. 어떤 일에 대한 견해나 생각.
2. 현실에 의하지 않는 추상적이고 공상적인 생각.
3. <불교> 마음을 가라앉혀 부처나 진리를 관찰하고 생각함.
4. <심리> 사고(思考)의 대상이 되는 의식의 내용, 심적 형상(心的形象)을 통틀어 이르는 말.
5. <철학> 어떤 대상에 관한 인식이나 의식 내용.


내가 생각한 이 소설은 2번 해석쯤 되겠다.

우리나라 소설을 많이 못 읽은 내가 단행본으로 나온 단편집은 모두 읽었다는 사실부터가 작가가 내게 주는 의미가 남다름을 알려준다.

'침묵의 미래'를 읽으면서 어디선가 박민규 작가의 냄새가 났다.

현실과 조금 거리가 있는 우주적 감수성을 지닌 작가.

나는 박민규 작가의 상상력이 지구보다 좀더 멀리 볼 수 있어 좋다.

지금껏 내가 본 김애란 작가의 작품은 추상보다 구체에 가까웠다.

방이 없어 시달리고, 취직자리가 없어 고민하며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물들 말이다.

‘소수언어박물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구체적이며 특별한 이름은 필요치 않아 보인다.

그들은 다만 소수언어를 박물관에서 읊조리다 주어진 시간이 끝나면 ‘멸’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다.

그 존재란 것이 하는 이야기는 슬프다.

‘없어지기 위해 수집되었다’는 말, '새로운 인생'을 찾아 떠났다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일.

억압된 구조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사회가 파괴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나무에 그려지고 돌에 새겨지며 태어났다. 내 첫 이름은 '오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나를 점점 '이해'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내 이름이었거나 내 이름의 일부였을지 모르는 그 단어를 좋아했다. 나는 복잡한 문법 안에 담긴 단순한 사랑, 단수이자 복수, 시원이자 결말, 거의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노래였다. 하루치 목숨으로 태어나 잠시 동안 전생을 굽어보는 말이었다. -33p 5-11

언어는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몸짓이 아닌 글자로 소통한다.

이 소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글자로 새로운 미래를 상상한다.

소수언어가 아닌 단 하나의 언어만 살아남은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같은 언어를 쓰는 문화권이니 세계가 한 나라를 이루어 모두 합심해 밝은 미래를 만들어 갈까?

이쯤에서 딴지를 걸지 않으면 아마 나다운 화법이 아닐 것이다.

나는 많은 이들이 같은 언어를 써야만 하는 사실을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하나다.

(물론 내가 영어 등 기타 언어에 소질이 없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흠흠-)

『1984』에서 윈스턴 스미드가 지겹도록 하는 일은 '단어를 줄이는'일이었다.

언어를 줄인다, 단어를 줄인다, 생각을 줄인다, 생각을 통제한다.

다양성이 존중되지 못한 사회가 인간에게 살기 좋은 때는 없었다.

어쩌면 세계의 대표들이 커다란 원탁에 마주앉아 세계경제를 하나로 모으자고 했을 때부터 불행이 시작됐을지 모른다.

침묵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 어쩌면 우리는 나라별 인터넷을 끊고 각자 원시시대처럼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인가? 맞다.

그리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감시역을 꾸준히 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아직 침묵의 미래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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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2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 도전 미생 2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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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하고 싶다면 일단 너만 생각해.

모두를 만족시키는 선택은 없어.

그 선택에 책임을 지라고.


품을 좁혀서는 비겁한 모습이 된다.

실리에의 미련은 이미 오래전에 버렸지 않은가.

큰 꿈을 품고 드넒은 중앙에서 승부를 보기로 결심하지 않았던가.


지금 하지 않으면 어디에서도 똑같을 거다.


들어오라며 넓게 벌렸으므로 무심히 쳐들어간다.

허허실실이다. 마음을 비우고 거친 파도에 몸을 맡긴다.

사실은 이 장면에서 이 한 수뿐이라는 것을 상대도 알고 나도 안다.

이 한수로부터 이 판의 골격과 상이 결정된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떨린다. 이젠 돌아갈 수 없다.

묘수 혹은 꼼수는 정수로 받는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망설임 없이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당신이 내 가난한 껍질을 벗겨줬어.

그냥이란 건 없어.

어떤 수를 두고자 할 때는 그 수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계획이 있어야 해 그걸 '의도'라고 하지.

우연은 기대하는 게 아니라 준비가 끝난 사람에게 오는 선물 같은 거니까.

세상의 고수 중에 초식동물은 없다. 고수는 본능적으로 평등과 평화를 거부한다.

요석과 폐석을 한눈에 알아보는 것이 안목이다.

판 전체의 상을 볼 줄 알면 안목도 깊어진다.

폐석을 살리고 요석을 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를 하수라 부른다.

후회를 남기진 않았는지,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게......


새벽에 미생2권을 다 읽었습니다.

2권에서는 장그래가 드디어 원 인터네셔널의 사원이 됩니다.

존중받으며 일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그 곳에서요.

최종 pT를 마치고 합격한 인원은 네 명.

저 같았으면 일찍 결혼한 아기 아빠도 붙여줬을텐데, 아무래도 이야기의 진행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네 명만 뽑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길을 지나가면 지나가는 사람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배울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뭘 배워야 할까요?

배울 점은 옆에 있어야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진득하게 보고, 감동 받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볼수록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저는 아직 그렇게까진 되지 못했나 봅니다.

장그래도 이제 주위사람들에게 하나 둘 배워가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누구나 자기만의 바둑이 있지요.

자신이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받아들인다고 다른 사람의 바둑은 아닐겁니다.


아직 바둑을 두어가는 과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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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눈사람 - 1992년 제23회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
최윤 지음 / 조선일보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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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밖에 눈 왔어. 미끄러우니까 연탄재 있으면 밖에 좀 뿌려줘.”

이런 말을 듣게 된 학생은 아마 연탄재를 잘게 부수어 미끄러운 골목길에 뿌릴 것이다.

그리고 그 골목을 끼고 사는 아이들이 나와서 연탄재가 덕지덕지 묻은 눈으로 공을 굴려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할 것이다.

물론 흰 눈으로 만든 눈사람처럼 예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힘든 삶을 살아내는 우리의 아픈 모습일지 모르며, 누군가가 만들었다는 자체로 의미가 생긴다.

흰 눈처럼 예쁘던 회색 눈처럼 예쁘지 않던 우리는 모두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삶을 산다.

그러므로 마흔한 살에 혼자 살며, 노 교수의 조수로 일하는 ‘강하원’의 인생도 가치가 있다.

왜 우리 소설에는 이다지도 기구한 운명을 가진 사람이 많아야 하는지 알 수 없고 다소 불만이기도 하지만 「회색 눈사람」 속 주인공이 그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근대사회까지 우리사회를 점하고 있던 전쟁 때문일까, 아니면 이념전쟁의 산물인 분단의 역사 때문일까.

이도저도 아니면 무엇 때문에.

‘희망’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일까?

어둠 속 촛불이 더 밝아 보이듯, 절망적인 상황일수록 희망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과외를 하고 학기가 지나면 공부하던 책마저 팔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 하원은 육체적, 정신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다.

그때 ‘안’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난다.

그는 동화 속 마법사 같다.

일거리를 해결해 육체적 곤궁을 채워주는가 하면, 그에 대한 사랑을 품게 해 정신적 곤궁까지 해결해준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 밝혔듯이 짝사랑은 때로 사랑이라는 단어보다 ‘희망’이라는 단어로 더 잘 설명된다.

그 사람이 나를 봐줬으면 좋겠고 좀 더 잘 해줬으면 좋겠지만 그저 이편에서만 애가 닳을 뿐, 내색도 못하고 냉가슴만 앓기 십상이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돌아서서 상대의 행동이나 말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고 되새기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삶에 기쁨이 되기도 하고 괴로움이 되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한 가지 이름으로만 정의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짝사랑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이번 경우처럼 가끔 삶의 의욕이 없던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어주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하원은 결국 도움 받던 ‘안’에게 이용당했으나, 그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온정을 통해 새 삶을 얻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항상 성마르고 거칠게 대하던 세상에서 자신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인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가.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안’이 하원의 여권을 요구하는 일이 처음에는 너무 심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우스운 건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하원이었더라도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는 것 이상으로 주는 대상에 애착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하원은, 받은 온정을 되돌려 줄 수 있어 기쁘지 않았을까.

그녀는 그 ‘희망’의 기억을 안고 다시 시골로 내려간다.

결실을 맺진 못했지만, 사랑을 하기도 하고,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해 줄 정도로 한 사회에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

소설의 마지막에 그녀가 말한다.

동네 아이들을 모아 눈사람을 만들어봐야겠다고.

동경이건, 감사건 어떤 단어로 표현되는 감정인지 확실치 않지만 그녀가 ‘안’을 사랑했다는 것은 진실이다.

연적이라 짐작되는 김희진이라는 여성을 위해 자신이 힘든 와중에 돈과 노력을 쏟아 만든 여권을 줄 정도로 하원은 안을 사랑했다.

이제 그녀는 희진의 부고를 접하며 청년시절 풋사랑과도 작별을 고한다.

연탄재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회색 눈사람이 아니라 깨끗하고 아름다운 흰색 눈사람을 만들면서.

‘아픔은 늙을 줄 모른다’고 그녀는 얘기한다.

천만에, 아픔은 늙는다.

‘아프게 사라진 모든 사람이 그를 알던 이들의 마음에 상처와도 같은 작은 빛을 남긴다’고 작가는 말한다.

상처는 아물게 마련이다.

또한 ‘작은 빛’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결국, 아픔은 늙어 희망이 된다.

하원에게 그랬고, 안에게 그랬듯이.

작가는 독자에게도 그러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쓰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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