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큐리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나에게는 작가에 대한 편견이 있다.

편견은 좋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머릿속에 각인되고 마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내게 그런 작가 중 한 명이 바로 ‘아멜리 노통브’이다.

내 머릿속에는 ‘노통브=천재’라는 말이 마치 공식처럼 존재한다.

언어의 연금술사, 타고난 이야기꾼, 창의적인 소재, 실랄한 비평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내게 주는 의미는 매우 생소했다.

노통브의 소설은 대개가 대화로 진행된다.

4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작가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한 언어유희들은 작가의 박식함을 읽는 것만으로도 독자의 지적 만족을 채워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재미있다는 게 강점이다.

어떤 책에서든 통통 주고받는 탁구게임 같은 대화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탁구는 복식조도 있지만, 노통브식 대화는 대개 개인전이다.

『적의 화장법』에서도 분열된 자아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자아가 분열되어 있기에 두 사람과 다름없다.

‘이 책’ 역시 푸랑스아즈와 하젤이라는 두 주인공의 대화가 주를 이룬다.

더불어 특이하게도 ‘롱쿠르 선장’이라는 제 3의 인물도 대화에 참여한다.

이 인물은 사실 제 3의 인물이라고 말하기 미안할 정도로 ‘푸랑스아즈’와 대립을 이루며, 마지막에는 ‘하젤’과 3자 대화까지 성사시킴(!)으로써 배경이 아닌 주인공으로 격상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때문에 노통브식 대화가 갖는 장점은 그만 사라지고 만다.

탁구를 셋이 치는 경우는 드물다.

한쪽이 둘을 모두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세다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푸랑스아즈는 둘 모두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온실을 사랑하는 화초인 하젤에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허약의 산이 가로막혀 있다.

롱쿠르 선장이 둘을 다 받아쳤다면 좀 나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는 작가가 설정한 ‘죽음의 경계’ 즉, ‘모르트프롱티에르’에 모두 갇히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책의 종반부에 삼자대화가 진행된다는 사실이다.(사실 결말이 황당하고 재미가 없다)

그 전까지는 재미있었으니까 말이다.

이 책은 내가 여태까지 읽었던 노통브의 책(몇 권 없어 감히 다작가인 그녀 책들의 평균치를 내지는 못하겠다)과 다르게 결말이 두 개다.

작가는 스스로 쓰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며 새로 결말이 시작되는 부분을 이야기해 주고, 이어 쓰는 기법으로 두 개의 결말을 보여준다.

그러나 솔직히 둘 다 실망스러웠다.

첫 번째 결말은 아주, 완전한 해피앤딩이다.

상대를 가두던 사랑만 하던 롱쿠르 선장이 자신에 대한 하젤의 사랑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놓아준다.

롱쿠르의 유산을 받아 하젤은 엄청난 돈을 가진 거부가 되어 프랑수아즈와 뉴욕에서 즐겁게 산다.

오, 제발! 노통브가 이런 시시한 결말을 쓰리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소공녀도 아니고……)

두 번째 결말이라고 딱히 감동적이지는 않다.

하젤이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확신한 롱쿠르 선장이 그 자리에서 자살하는 것이다.

그 집요의 화신(책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롱쿠르 선장이 말이다!

본인에게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해보지 않고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책에서 그가 보여준 성격에 의하면 나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그나마 좀 의외성 있었던 것은 프랑수아즈의 취향(?)정도랄까.

한 작가에게 가졌던 기분 좋은 편견이 물론 이 책 한 권으로 깨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동안 노통브의 책이 읽고 싶어질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이 내게는 매우 생소하고, 슬픈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힌트는 도련님
백가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꽤 오래됐다.

이 책이 2011년 파주북소리에 갔다 사온 책이니 말이다.

작가에게 관심이 생긴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작년 여름쯤 알게 된 사람이 워낙에 이 작가를 좋아하는 통에 나는 드문드문 작가의 소식과 함께 그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나는 『나프탈렌』을 먼저 읽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면서는 ‘이 작가 성장했구나!’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나프탈렌의 글이 훨씬 안정적이고, 작가의 모습 또한 객관적으로 형상화 되어있다.(힌트는 도련님- 「그래서」의 백, 「힌트는 도련님」의 도련님, 「P」의 P. 나프탈렌- 백용현 교수. / 그의 책을 두 권밖에 읽지 않은 나로서는 짐작하는 일이지만, 채플린만큼은 아니더라도 히치콕처럼 카메오로 자신의 작품에 들어 가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뭐 아직 싹도 못 틔운 습작생 주제에 기성작가에게 되바라진 얘기일진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나도 성장해야지’라며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한 작품집이었다.

내가 무엇보다 작가를 높이 사게 된 건 ‘평론과 후기’였다.

대개의 경우, ‘사람’은 하는 만큼 받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칭찬일색인 평론 따위 어느 순간부터 신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글을 받는 작가는 그런 글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류일 가능성이 높다.

대신, 책에 대한 조망과 함께 작가에 대한 넘치지 않는 기대와 조용한 응원을 보내는 평론에 주목한다.

그런 글을 받는 작가는 자신을 겸허히 돌아볼 줄 알기 때문에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도가 지나친 추측이라 할 수도 있지만, 진시황의 진나라도 결국 신하의 사탕발림에 넘어갔다.

언젠가 내가 기성작가가 되었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하고 있다.

먼 미래의 일이긴 하지만. 아무튼 백가흠 작가는 내가 주는 평론 점수에서 합격점이다.

후기에서 담담히 말하는 부모님과의 얘기는 사랑 받으며 참 잘 자란 사람이란 생각이 들게 한다.

돈이 생기면 천천히 집을 짓고, 상대를 꼼꼼히 배려해 집을 짓는 부모를 둔 사람이니 ‘인간에 대한 사랑이 담긴 글을 쓸 수 있겠다’라는 짐작이다.

대개의 경우,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할 줄 안다.

(작가는 소설 쓰기에 대해 말하기 위해 사용한 일화지만 독자는 이렇게 읽고 있다. 역시 독자에 의해 책이 다시 써진다는 말이 옳다!)

하지만, 힌트가 도련님이라니…….

‘힌트’건, ‘도련님’이건 둘 다 별로 친한 단어는 아니다.

책을 사면서도 디자인이 잘 된 책이라 하여 산 것이지 솔직히 내용을 염두에 두고 산 책은 아니었다.

그게 300쪽 남짓인 책을 1년 반 동안 숙성시켜 읽은 까닭이다.

소문, 가난, 폭력, 문학, 소설가, 소외, 강압, 전쟁, 자유, 속박, 왜곡, 사회, 운동 그리고 소설.

하나의 이야기가 하나의 시사점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읽을 가치가 있는 이야기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왜곡된 사회의 모습이 현실과 좀 떨어져 있는 주인공이 아니라 주위에서 친숙하게 만날 수 있는 주인공의 이야기로 형상화된 것이 의미있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요즘 관심 있는 ‘소문’이란 소재와 ‘동물원’을 배경으로 한 작품(그때 낙타가 들어왔다)이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담담한 묘사와 서술 시간의 변주(통痛) 등은 공부하는 입장에서 따라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가의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오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총 8편의 단편 중에 3편이 소설과 문학, 소설가에 관한 얘기다.

소설에 관한 이야기가 일반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종종 글쓰기의 어려움에 대해 써진 에세이나 소설들을 읽게 된다. 물론 글쓰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무엇을 쓸까 생각하는 과정부터 시작해, 다듬고 다듬는 퇴고의 과정까지 어느 하나 쉽게 넘어가는 부분은 없다.

그러나 세상에 어려운 일이 어디 글쓰기뿐일까.

글 쓰는 사람은 대개 누가 시켜서 한다기보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은 쓰기 힘들다’라고 써진 글을 볼 때면 지식인의 ‘자아도취’나 ‘허영’으로 읽히는 경우가 많다.

일반 독자 중에 뒤에 말을 하는 독자가 없으란 법이 없다. ‘그렇게 힘들면 쓰지 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지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
펄 벅 지음, 안정효 옮김 / 문예출판사 / 200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국, 메뚜기, 굶주림, 남쪽나라, 여자아이.

......

중국에서 배가 고프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을 들은 건 어떤 역사 수업에서였다.

물론 들을 당시 나는 무척 놀랐다.

저기 머나먼 아프리카라면 모를까.

내가 사는 이 유라시아, 아시아 대륙에도 식인풍습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전까지 모르고 있었다.

'대지'에는 그 식인풍습이 나온다.

없어지는 사람들과 피둥피둥 살이 찌는 놈들.

먹을 것이 없어 인륜이 땅에 떨어지는 시점에도 세상의 수레바퀴는 꾸준히 굴러간다.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죽을 위험을 무릎쓰고 남쪽으로 기차를 타고 간다.

'아란' 역시 그때 남의 집에 팔린 여자아이였다.

무잣집 종으로 팔렸지만, 얼굴이 못생겨 순결을 유지한 그녀.

아란은 자신을 사준 남편 왕룽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 한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할까 싶을 정도로 아이도 혼자서 낳고, 그 뒤처리까지도 스스로 한다.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선 동냥으로라도 끼니를 채우지만, 굶어죽기 직전에 여자아이를 파는 방법밖에 수가 없다고 냉정하게 말하지만 뒤돌아 우는 인물이다.

아란은 소처럼, 그저 쉴새없이 일해 왕룽의 재산을 불려주고는 그만 힘을 다해 죽는다.

아란이 왕룽의 부인이므로 그녀의 재산이기도 한 것이 당연하지만, 그녀 스스로 주인된 의식이 부족했기에 나는 왕룽의 재산이라 여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읽은 소설이기에 할아버지-아버지-손자에 걸친 삼대의 모습으로 비춰보는 중국의 격동기건 뭐건 '아란을 생각한다'.

그녀는 바보같이 왜 그렇게 살다갔을까?

옛날 여성이란 성을 지닌 사람들은 왜 이다지도 바보같이 살다 갔던 걸까?

어우동이나 황진이를 기꺼워히지 않는 만큼,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도 가슴 아프다.

아란을 보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평생 이룩한 재산은 누리지도 못하고, 보석이라곤 기껏 콩알만한 진주 두 알이 전부였지만 그마저도 빼앗긴 지주의 첫 번째 부인.

6개월도 더 된 이 책의 잔상은 고스란히 우리집에 녹아있다.

뼈빠지게 일해 집안을 일으킨 내 어머니.

내 어머니가 좋아하는 TV속 인물은 그저 시부모님께 효도하고 귀엽고 착한 며느리다.

바깥 일에서 성공해 남편보다 조금이라도 잘난 부인이 나오면 바로 흥분이 이어진다.

"여~자가 말이야!"

여자가 대체 어쨌다는 건가?

나는 내 성격 형성의 많은 부분을 우리 부모님이 담당했다는 것을 이제 안다.

명절 내내 먹을 것을 해치워야 하고, 여자는 그저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으며 나는 자꾸만 아란이 떠올랐다.

아란, 그녀도 그렇게 살았던가?

아니다.

돈이 없어 일손이 부족할 때, 가뭄으로 굶주릴 때, 동냥을 해야만 먹을 수 있을 때, 다시 집안을 일으킬 때......

그녀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삶의 길을 궁리했다.

내 어머니 또한 그렇다.

실제로 집을 사고 학비를 낸 원동력은 어머니가 가게를 운영해 번 수입이었다.

아버지도 왕룽처럼 부지런히 일 했지만 시대를 읽고 알맞은 가게를 택한다거나 경쟁 가게를 이기기위해 새벽부터 저녁까지 문을 열어두는 악착은 몰랐다.

퇴직한 아버지와 한 발 먼저 가게를 접고 재테크의 세계로 나온 어머니는 요즘 집에만 계신다.

연휴 내내 집에서 요리를 거들고, 밥을 먹으며 대화를 하고, TV를 함께 보며 나는 불편했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아빠 같은 사람이랑은 절대 결혼 안 해'

나는 시쳇말이라도 내 부모님과 마음이 잘 맞는 편은 아니다.

내 쪽에서도 맞추려 무던히 애쓰고, 부모님 쪽에서도 받아주려 노력하셨지만 이젠 30년 가까이 해 온 이 노력에 서로 신물이 날 지경이다.

다른 사람들은 귀염성있다는 내 행동이, 내 부모님에게는 언제나 어색하고 싱겁다.

부모님과 내가 다시 살가운 관계가 될 수 있을까?

아마 힘들거다. 나도 내 속을 모르지만 결혼하고 싶은 이유 중 8할 이상이 부모님과 떨어지고 싶어서다.

슬픈 일이다. 부모님과 헤어지고 싶어서 결혼하고 싶다니 말이다.

그런데 살가워질 순 없어도 이해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란을 그 시대 사회 풍토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며 안타깝게 바라봤던 것처럼 말이다.

다행인 것은 내 아버지는 바람을 필 위인도 아니거니와 내 어머니가 그리 애교가 없는 성격이 아니란 사실이다.

두 분은 요즘 매일이 신혼처럼 즐거우신가 보다.

맛있는 걸 먹고, 즐겁게 놀 생각만 하시니 그러신가 보다.

나도 요즘 잔소리들은 시간이 없어 사실 좀 즐거웠다.

두 분과 대화할 시간도 없이 새벽에 나가 12시가 넘어야 들어오는 삶은 내게도 행복이었다.

조연은 살짝 빠지면 그만이다.

아마 역사 속 인물로 3인칭 시점에서 두 분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더 이상을 바라는 건 서로 지나친 욕심이 아닌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니. 서른은 어떤 느낌이에요?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두근두근 내인생, 비행운.

처음 언니 책을 본 건 도서관에서 였어요.

'뭐 읽을 책 없나~'하고 열람실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는데 언니 책이 눈에 띄더라고요.

앞장을 읽으며 '오~'하고 속으로 놀랐어요.

여태껏 봤던 소설들과 뭔가 달랐거든요.

제가 그 뭔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으면 평론가가 되었겠지만 평론가는 아니니까 그냥 편안히 쓸게요.

혹시 건전가요 아세요?

80년대 가수들이 음반을 내면 앨범에 꼭 한 곡씩 들어가야 했다고 하는 건전가요.

제가 좋아하는 그룹 중에 '전람회'가 있어요.

전람회는 90년대 나왔는데 꼭 건전가요 분위기가 났어요.

자기네들도 라디오에 나와 웃으면서 건전가요 같다고 웃기도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언니 글에선 꼭 그런 느낌이 나요. 건전가요.

한국소설의 지나친 무거움도 없고, 일본소설의 가볍고 퇴폐적인 면도 없어요.

사실 전 한국소설은 많이 읽지 않았어요.

안 그래도 심각쟁이인 제게 매번 깊고 침울하게 파고 들어가는 한국소설은 너무 힘들었거든요.

고등학교때 채만식의 '탁류'를 읽으며 몸서리쳤던 기억이 나요.

꼭 그 책이 아니더라도 한국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그리 모진 고통의 세월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됐던 걸까요.

저는 그런 책들을 읽으면 저도 그렇게 될 것 같아서 읽기가 겁났어요.

물론 언니 소설의 주인공들도 제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아녜요.

구질구질 쓰러지기 직전의 집에 사는 것도 싫고, 가족을 잃고 헤매기도 싫어요.

무엇보다 출산을 앞두고 벌레가 득시글대는 숲 속에 갇히는 건 정말이지 상상하기도 싫었어요.

그런데 언니, 옛날 소설들과 달리 언니 글을 읽는 건 몸서리쳐질 만큼 괴롭지는 않았어요.

슬픈 상황을 담담하게 그리지만 언제나 언닌 그 다음을 생각하며 쓰잖아요.

상황은 암울하지만 주인공들은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언젠가 그 상황을 벗어날 것 같아요.

전 그게 참 좋더라고요. '나도 이렇게 힘들지만 언젠가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이런 안도감이 들어요.

사실 구질구질한 청춘은 언니 작품에 신발 바닥에 붙은 껌딱지처럼 붙어다니잖아요.

'달려라 아비'에서도 '침이 고인다'에서도 방이 없어서 엉덩이 한쪽을 들고 방귀를 뀌어야 하는 그 구차함 속에서 살아야 하잖아요.

비가 오면 물이 차는 지하층 집에서 물을 퍼내고, 대책 없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말예요.

이번엔 좀 더 청년문제에서 가족의 문제로 관심이 이동했구나~ 하고 느끼기도 했어요.

가족에 대해 쓰긴 했지만, 여태까진 선택받은 입장이었다면 이번엔 선택한 느낌이 들었어요. 부부고, 엄마니까 말이에요.

단칸방에 살던 청춘들이 언니가 결혼을 하며 함께 결혼하고 가족에 대해 생각하게 된 느낌이랄까요.

이 가족들도 어찌나 힘든지, 마음이 슬펐지만요.

언니, 서른이 되면 어떤 느낌이에요?

이제 저는 한 달 좀 넘게 남았어요.

회사에선 좀더 능글거리게 됐고, 남들 말에 상처를 덜 받게 됐어요.

그러면서 싫어하는 사람도 생겨 뒤에서 살짝 욕하기도 하게 됐고요.

다단계로는 안 빠져서 천만다행이긴 하지만요.

언니, 서른이란 나이가 두려워요.

저도 어른은 어른인데 저보다 더 어른인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게다 그들과 싸워서 이겨야 돼요.

사실 사회초년병이라 스스로 어른이란 생각도 별로 없는 제가요.

어린아이 같다고 분명 다들 비웃겠지만, 가끔 생각해요, '모두 잘 사는 세상은 없는걸까' 하고요.

언제부터 사회가 모두를 경쟁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살다보니 이렇게 각박한 사회네요.

고등학교 입학식때 우리 담임선생님이 시를 한 편 읽어주셨었어요. "함께하는 우리가 보고싶다"고요.

전세계 사람들이 다들 자기네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며 물건을 만들어 놓고 사라고 해요.

그런데 물건이 너무 많아요.

팔리는 물건만 팔리고 안 팔리는 쪽은 파리만 날리고 있어요.

함께 살기 힘든 사회네요. 덜 만들고 나눠 사가면 안 되겠지요?

그래도 사회에서 만난 어른들이 모두 나쁘진 않았어요.

존경하는 사람도 있고, 본 받을 만한 점도 모두 뜯어보면 한 가지씩은 있더라고요.

언니, 그래서 희망은 언제나 있는 건가 봐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현재도 미래도 다르게 보이니까요.

그렇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쪽 숲에 갔다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숲 같은 사람들

스무 걸음만 들어가도 한치 앞을 분간 할 수 없는 숲.

숲에는 연구소가 들어서고 관광명소로 인기를 끌며 시골 작은 동네는 숲으로 먹고살게 되었다.

숲으로 먹고 산다? 어쩐지 건강하고 힘찬 분위기지만 빛 뒤에 그림자가 따라다니듯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그림자는 숲이 있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숲이 떠나고, 평범해 보였던 마을 사람들은 살 길을 찾기 위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환경에 걸맞게 변화하는 것이니 진화라 표현해야 할까?

그러나 아무리 환경에 맞추어 변화하는 것이라 해도 변화를 즐기는 인간은 드물다.

평범한 인간은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얼핏 보면 등장인물들은 지극히 평범해 보인다.

누구보다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들.

그러나 때로 안정을 위해 그것과 거리가 먼 일을 때때로 해치우기도 한다.

그런 때 그들은 대개 수동적이다.

마치 숲의 나무들처럼 말이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숲과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

숲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숲과 함께 동네에 뿌리 내린다.

역설 혹은 모순

“건강은 곧 균형이오. 명심하시오.” -218

모든 소설에 들어가는 것이라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주된 심상은 역설과 모순 속에 감겨있다.

2부 끝에서 박인수는 사무장과 ‘산불 대피요령’에 대한 이야기로 통화를 한다.

“피하는 겁니다.”

“피해요?”

“마구 달리는 겁니다. 이미 산불이 지나간 자리로요. 산불은 지나간 자리로는 다시 오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박인수 씨는 산불이 지나간 자리를 찾기만 하면 됩니다. 그거야 간단히 찾을 수 있죠. 잔뜩 그을려 있을 테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240

그러나 박인수는 사무장의 친절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산불이 지나간 자리로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이 활활 타들어 가는 불구덩이로 몸을 던진다.

벌이 꽃을 찾아가듯, 술중독자는 술을 찾아 나선다.

그렇게 사건이 시작된다.

공포는 만들어진다

“유령의 정체를 보니 마른 억새풀이었네.”

사무장은 박인수까지 이하인의 뒤를 따를까 궁금했는지 바쇼라는 시인의 말을 빌려 이런 말까지 주워섬긴다.

‘어렸을 때 무서운 소리에 놀라 귀신인줄 알았는데, 실은 아무것도 아니더라!’

어린 시절, 한 번도 이런 일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밤에 주위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큰 소리에 놀라 허둥대던 일.

날이 밝으면 아무것도 아닌 풀들의 춤사위가 밤에는 공포로 변신하곤 한다.

작가는 이렇게 공포가 만들어진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가장 큰 공포는 잊혀지는 것이라 한다.

“……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박인수 씨를 모른다고 하면 박인수 씨도 없는 사람이 됩니까?” -318

책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는 것으로 나온 ‘진’이란 인물이 박인수라는 산지기를 몰아세우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만,

내게는 결국 자신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시인하는 것으로 보였다.

사람들은 여러 번 들으면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에도 진짜라고 생각하고 넘기곤 한다.

옛날에 만화책 ‘20세기 소년’을 보며 그 구체적인 모습을 처음 접하고 놀랐던 것이 기억난다.

사이비 교주 ‘친구’는 대중을 속이기 위해 밧줄을 이용해 공중부양하는 쇼를 벌인다.

그러나 어느 순간 ‘친구’를 들어 올리는 사람들조차 밧줄을 손에 쥐고도 그에게 홀려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어떤 정보에 노출되느냐에 따라 많은 경우 생각이 달라진다.

“나만 보고 나머지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지, 반대로 세상은 다 봤는데 나만 못 보는 건 무엇인지 알아야겠죠. 모두 알 수는 없어요. 누구나 깨닫지

못하는 걸 어느 정도 갖고 있게 마련이니까요.”-319

나만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결정짓고 보지 않는다’는 어떤가?

단적인 예로 ‘에이즈 보균자’에 대한 태도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에이즈는 손을 잡는 것만으로는 감염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 옆에 가까이 가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에이즈 보균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어떨까.

그 사람이 특별히 다른 사람과 다른 행동이나 외모를 가지고 있지 않을 경우 그런 행동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을 읽을 당시 함께 읽던 책이 조지오웰의 ‘1984’였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 조작하며 장악하는 빅브라더는 한 명이 아니다.

영원불멸하게 이어질 것 같은 단체이다.

그러한 단체가 만들어져 소수의 인권을 짓밟는 일은 어쩌면 우리가 파리 한 마리를 죽이는 것보다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정보의 교류가 늘어나고 정보가 돈이 되고 힘이 되는 사회.

그러나 정보에 민감하지 않고 다루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무서운 사회가 될 것인가.

‘공포는 만들어진다’

나는 이것이 정보화 사회를 사는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함께 읽었던 책이 공교롭게도 ‘1984’였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 주위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보를 왜곡하고 있는 ‘빅브라더’가 현재도 꽤 많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잊고 무비판적으로 활자를 읽는다면 어느 순간 ‘빅브라더’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상황설명> 성격정리

다른 등장인물에게서 이전의 등장인물을 묘사할 수 있음.

복선 깔기_ 잘못 짚고 있다. 그러나 말해주지 않는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조연/ 날씨와 감정의 교차/ 명언 인용

주인공의 느낌, 생각 나열.

한 사람의 특징을 쓰고, 다른 사람의 특징을 나열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비교 효과.

속말> 내면묘사> 행동묘사

필요한 부분만 묘사_ 독자에게 한정된 정보만 제공하게 되는 한계점 제시.

‘단어’에 천착하는 심리묘사.

자신의 생각을 밝힘으로써 자기 자신을 묘사.

치통, 중독, 거짓말.

무엇보다 일상을 담담하게 풀어낸 담백한 문체가 마음에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