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 개정판
필립 얀시 지음, 윤종석 옮김 / IVP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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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으며 일찍이 교회가 내 고민이기 이전에 필립 얀시라는 사람의 고민이었다는 사실에 나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모이면 여러 사건과 사고 그리고 소문이 난립하기 쉽다.

하기 쉽다? 아니 ‘한다’라는 단정적 표현을 써도 무방하리라.

그리고 교회도 결코 그런 이름에서 놓여난 공간은 아니다.

이 사실은 내게 교회에 대한 회의를 가져다주었다.

머리가 좀 굵어지고 나서부터 나는 줄곧 생각했다.

과연 교회를 다녀야 하는 것인가? 혼자 집에서 성경책을 보는 것은 어떨까?

어렸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뭔가 받는 것이 기뻐서 다녔던 것 같다.

먹을 것. 놀잇감. 친구. 염려와 걱정.

그러나 나이가 한두 살 나이를 먹어 가면서 이제 내가 그런 것을 줄 입장이 되었을 때 나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 같다.

여전히 이해와 공감을 받기만 원했다.

그러면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실망하며 교회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이 책에는 저자 ‘필립 얀시’가 좋은 교회를 찾아다닌 이야기가 나온다.

그 또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었던 것 같다.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 소문의 온상이며 이기주의의 근원이지만, 내 마음에 드는 걸 내 놓아야 하는 곳.

저자는 ‘비판적인 소비자 정신’으로 교회를 대했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아쉽지만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가진 것을 모두 퍼주는 곳이 교회다.

다양한 직업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무지막지하게 기괴하고 힘든 동네다.

“‘교회는 비조합원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세상 유일의 협동조합 조직’(28p)”이라는 말을 윌리엄 템플 대주교가 괜히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뭘 바라고 교회에 가지만 제대로 다니자면 실상 내가 받을 것보다 나서서 해내고, 해줘야 할 것이 더 많다.

나는 책 속에 나오는 ‘라살 스트리트 교회’ 이야기를 읽으며 감동 받았다.

그 교회는 시카고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와 가장 가난한 동네의 중간에 있었다. 동쪽으로 두 블록만 가면 평균 연봉 5만 달러가 넘는 골드 코스트가 있고, 서쪽으로 두 블록만 가면 평균 연봉이 3만5천 달러 이하인 캐브리니 그린 공영 주택단지가 있었다. 라살은 두 지역을 잇는 ‘다리 교회’의 역할에 힘썼다.

교회의 위치적 특성에 따라 거리의 부랑자부터 고액연봉자까지 모두 한 교회에 다녔고, 그들은 서로 어울렸다.

‘끼리끼리 논다’가 통용되는 것이 사회라면 ‘모두 함께 논다’가 통용되는 것이 교회였다.

여러 가지 사례가 있었지만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기도시간에 이상한 소리를 하며 스트레스를 풀던 ‘아돌퍼스 버스비’라는 인물에 대한 예화였다.

그는 다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상의 평화, 병자의 자유 등을 위해 기도하는 ‘회중의 기도’시간에 “주여, 휘트니 휴스턴과 그 기막힌 몸매를 지으심에 감사하나이다!”라던가 “이 교회 흰둥이 목사들의 집이 이번 주에 다 불타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했다.

사람들은 당황했고 난감했지만 그를 교회에서 내쫓지는 않았다.

대신 의사와 정신과의사를 비롯한 전문가 집단이 그를 ‘부적절하다’라는 단어로 설득하는 특수 사역을 맡게 되었다.

아돌퍼스, 자네의 분노는 정당할 수 있지만 분노를 표현하는 데는 적절한 방식이 있고 부적절한 방식이 있는 거라네. 목사의 집이 불타게 해 달라는 기도는 부적절한 것이지

그리고 교인들은 그를 차로 데려다 주기도 하고, 집에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이 헛된 것이었을까? 정식 교인이 아니었던 그는 세 번의 시도 끝에 정식 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물론 나도 모른다.

다만 아직도 그 미담이 현재진행형이길 바랄 뿐이다.

비신자에게 엄청난 반발을 살 말이겠지만 결국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삶이 예배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리지 못할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내 몫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교회가 필요하다.

앞에서 교회를 제대로 다니려면 뭘 바라기보다 할 일이 많다고 이야기 했다.

이것은 반대로 말하면 나는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만 다른 사람도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봉사할 의무를 지게 되므로 나 역시도 혜택 받게 된다.

물론 자신이 실천하지 않으려는 이기주의 속에서 이것은 요원한 일이다.

거듭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뭉쳐서 노력하자고 말 할 수밖에 없다.

가시에 찔릴까봐 혼자서 벌벌 떠는 고슴도치는 얼어 죽을 수도 있지만,

가끔 따끔한 가시에 찔려도 함께 붙어있으면 추위 속에서도 서로의 체온으로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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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
천운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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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업시간에 배운 ‘신경숙, 은희경, 공지영’을 잇는 차세대 여성 작가는 누굴까.

나는 ‘김애란, 김려령 그리고 천운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대작가를 논하는 이 수업에 참 잘 어울리는 작가로 천운영을 선택하게 되었다.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읽을까 뒤적거리다 집어 온 것이 계기였다.

그때 나는 작가가 유명한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읽으면서 ‘어, 이 작가 누구지?’ 했던 감상을 확인해봤더니 ‘정말 괜찮다더라’ 하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내 안목에 잔을 높이 들었다.

작가가 주목받는 신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는 내 안목이 높다고 우쭐했었다.

그러나 나는 어두운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현실도 충분히 어두운데 꼭 소설을 읽으면서까지 튼튼하지 못한 내 심장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로맨스 소설을 좋아한다.

아름다운 캐나다의 자연을 그려낸 ‘루시 모드 몽고메리’나 탁월한 심리묘사로 정평난 ‘제인 오스틴’이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다.

그러나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두운 내용에서도 인생의 지혜를 발견하곤 하게 되었다.

이 책도 그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명랑하지 못한 인생들을 그리는 명랑.

반어법이 제목이 된 것은 첫 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명랑하지 못한 인생들 속에 그것을 바라는 우리의 모습이 담겨있어 책 속으로 내 마음은 한 없이 끌려 들어갔다.

이제 내 심장도 조금 튼튼해진 것이리라.

주인공들의 결핍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그렇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 알 수 없는 고독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딘가에 속하고 싶어 하지만 그것이 허락되는 경우는 드물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은 사람들.

그렇게 버림받은 기억들은 ‘늑대가 왔다’의 주인공을 자신이 에스키모라는 환상의 세계에 가두기도 한다.

‘낫’의 주인공처럼 스스로 세상을 버리는 것으로 삶을 매듭짓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그림자 상자’의 주인공은 죽음에 대한 가상 체험을 통해 새로 태어나고자 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몸짓들은 세상에서 떨어져 나온 외로운 영혼들의 처절한 몸짓이라는 것을 떠오르게 한다.

작가는 책을 통해 아무 갈 곳 없는 이 영혼들을 위로하자고, 손을 내밀자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독자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이런 일도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관찰자의 입장만을 고수하지는 않지만, 내용이 주관적으로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해 작가는 보여주기 기법을 많이 이용한다.

주인공의 목소리를 내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이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이야기 해준다.

그리고 그것을 기름기 적은 담백한 문체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라고 하는 이 책에 과함이나 지나침은 찾기 힘들다.

사실 이야기 속 상황은 ‘자살’이나 ‘죽음’ 그리고 ‘죽음에 대한 가상 체험’과 같이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내가 독자로서 글을 읽으며 그 결말들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나는 이것이 작가의 문체 덕분이 아닌가 한다.

꾸미기를 최대한 배제하고 그려주기나 보여주기의 방식을 선택.

감정을 행동으로 말해주는 이 방법이 독자에게 침착한 마음으로 등장인물의 심리를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두 줄을 넘지 않는 건조체 속에 녹아든다.

감정의 과잉 없이 독자에게 내용을 전달해준다.

또한 닳고 닳은 소재들을 다루지 않아 좋았다.

이 책에 어둡고 고리타분한 사랑 이야기는 따위는 없다.

대신 삶을 고민하는 안타까운 영혼들이 있었을 뿐이다.

명랑하지 않은 세상을 명랑하게 살고 싶은 소망.

나는 이 소설집을 통해 작가의 소망, 그리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소망과 마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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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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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는 기획물이다.

‘작가의 삶’과 ‘작품들’을 연관 지어 이야기한다.

이 기획물의 목적은 작품 뒤에 숨어있는 작가의 내면과 외면을 들여다보도록 하여 문학과 일상인의 거리를 좁히려는데 있다.

이번 작가탐구의 작가는 박부길이다.

화자인 ‘나’는 독자와 비슷할 정도로 자신이 쓰게 될 작가를 잘 알지 못하는 인물로 독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대상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작가 박부길은 ‘15년 동안 열 권의 장편소설과 일곱권의 중‧단편집, 그리고 세 권의 에세이집을 냈다’(16쪽)고 밝히고 있다.

‘1년 평균 한 권 이상의 책을 냈으므로 아주 과작은 아닌 편’이라는 평도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소설 속에서 책 속의 내용들을 인용하며 작가의 삶을 파헤쳐 나간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은 작가의 모습이 투영된 것이라고 한다.

또는 자신 안의 괴물이나 천사가 와서 대신 써주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가설 중에 이승우 작가는 전자의 생각으로 이 소설을 집필하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이 소설은 박부길이라는 작가의 작품 내용보다 그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듯 박부길 작가의 작품은 그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성장과정에서 어떤 경험을 통해 작가가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이야기해준다.

그렇게 중간 중간 삽입되는 이야기는 장면이 생생히 그려지는 영화 같기도 하고, 회상 장면 같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서술 방식은 작품과 작가 사이의 연결성을 알린다는 차원에서 필요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책의 인용부분은 대화체가 현재 시제를 사용했기 때문에 현장감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 둘 사이의 교집합에만 집중하느라 여집합에 소홀했다는 생각도 든다.

과연 모든 작품은 작가의 ‘경험’만으로 이루어지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 전세계를 집시처럼 떠돌며 여러 가지 경험에 목메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작가는 ‘상상력’이라는 재료를 이용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인 봉평은 그가 묘사한 것만큼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지닌 곳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상상속 이야기였다.

더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남성작가들의 소설에서 그토록 비일비재하게 등장하는 ‘몸 파는 여성’의 생각이나 감정을 작가들이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남성작가들이 그녀들의 이야기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그녀들의 이야기를 쓸 수 있는 방법은 대화나 전문 등을 통해 ‘의사체험’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 예가 주인공인 박부길 씨의 예와 구별된다고 할 수도 있다.

어떻게 ‘주역과 조역의 역할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하면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한다.

모노드라마가 아닌 이상 모든 이야기 속에는 주역과 조역이 존재한다.

하지만 작가의 경험만을 강조한다면 모노드라마만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예전에 내가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 없이 이 소설을 읽게 되었다면 ‘그래, 소설에는 역시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게 마련이지’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소설의 마지막 장까지 읽어 가면서 ‘작가의 내면과 외면’을 아는 것과 작가가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 과연 얼만큼 의미 있는 일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소설에 있어서 경험보다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로봇 산업을 이끈 것은 일본의 유명 만화 ‘아톰이나 마징가Z’ 등을 보고 자란 세대라고 한다.

그들은 그것을 보며 ‘앞으로 나도 저런 로봇을 만들어야지’라는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들을 작가의 상상력을 경험하며 자랐다.

작가의 작품 안에 들어 있는 화자를 살펴본다는 액자식 구성은 흥미롭고 신선한 접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박부길이 자신의 경험에만 기초한 것이 아니라 상상을 통해 새롭게 창조한 세계도 있었음을 보여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이렇게 그의 경험을 통해 나온 작품도 있지만 그의 새로운 사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장애인으로 태어나서 불평만 해대는 많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희아, 닉 부이치치, 오토다케 히로타다 등’앞의 사람들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인생 자체가 다른 이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다.

박부길은 슬픈 어린 시절을 겪었다.

그는 성격적 결함으로 연애에도 실패했다.

그렇게 끝없이 침잠하던 어둠 속에서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리고 그 충동은 그를 ‘15년 동안 열 권의 장편소설과 일곱 권의 중‧단편집, 그리고 세 권의 에세이집을 낸’ 중견작가로 만들어 주었다.

이것이 실화였다면 어둠을 뚫고 작가로서 성공한 이야기만으로도 의미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소설이기에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다.

현실같은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는 이런 길을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행복한 결말도 많지만 슬픈 결말도 많다.

책을 읽으며 결말을 바꾸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나는 앞에 경험과 상상력에 대해 주절거렸지만, 사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은 경험이나 상상력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단지 내가 행복한 결말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나는 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크다면 큰 깨달음이었지만, 해결책이 쉽게 눈에 띄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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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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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 손 안에 들어오는 가격 착한 책이 대세인가 보다.

그런데 이 책은 착하게만 있지 말고 분노하라고 말한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화가 나고 속상하니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마 오늘날의 분노는 MBC파업 사태나 대기업 담합 사태, 비정규직 철폐 등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분노는 전쟁과 같이 전 국민이 겪는 아픔이 아니라, 한정된 집단에게만 영향력을 미치는 것 같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뉴스 진행자가 파업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그 이유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나는 심지어 YTN파업 사태 당시 도서관에서 국민의 볼 권리를 침해 한다는 이유로 파업하는 사람들을 욕하는 말도 들었다.

과연 우리는 무엇에 분노해야 할까?

지금 2-30대 무직 또는 비정규직의 분노는 이것이 아닐까?

부모님이 여태껏 키워놨는데 밥벌레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속상해 하시는 부모님께 면목이 없다.

그렇다고 이윤 추구가 목적인 기업에다,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사원을 안 뽑았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요즘은 내는 것도 같다.)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중고등학생은 어떤가? 어느 누구 하나 편들어 주지 않고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문제는 사회 문제라고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아직 개인의 문제다.

그러니 가장 크게 남는 분노는 자신과 사회 전체에 대한 반감뿐이다. 이것은 때로는 ‘악플’로 때로는 ‘묻지마 범죄’라는 슬픈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더 나은 것도 아니다.

밤늦도록 야근에 휴일 출근도 비일비재 하다.

저자인 스테판 에셀은 말한다.

“비폭력이란 손 놓고 팔짱 끼고, 속수무책으로 따귀 때리는 자에게 뺨이나 내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 그다음에 타인들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나는 당최 그 방법을 모르겠다. 앉아서 면벽수도 하면 비폭력적 분노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억압에 시달려도, 끈기 있게 비폭력으로.

우리는 다시 간디의 시대로 돌아간다.

그런데 의문이다. 과연 그게 현대사회에 얼마나 통용될까?

무시당하기도 했지만, 부모님 밑에서 실컷 누리고 온 세대다.

이 말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을까?

비폭력을 위해 얼마나 뭉칠 수 있을까?

나는 현재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그럴 수 있을까?

글쎄……. 나는 자꾸 자신이 없어진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가진 자들이 못 가진 자들을 포기시키는 방식일 것이다.

금전적 압박으로 위협하는 일.

동전이 떨어지면 한쪽 면으로 떨어지기가 쉽지, 세워지긴 어렵다.

아예 저항을 포기하던지, 불을 품고 거리로 나서던지 하지 않을까?

저항을 포기하면 옛날에 정체성을 빼앗긴 식민지 국가의 국민이 되는 것이고, 불을 뿜는 사람은 알카에다의 성향으로 옮아갈 성향이 높다고 본다.

나처럼 뒷방에 앉아 글을 쓰는 것일까?

그러나 가진 자들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희망이 없으면, 분노도 없다.

3무세대, 3포세대가 정말 세대명답게 자손을 남기지 않고 죽으면 어떻게 될까?

그 때는 재벌들이 공장에서 자동차를 만드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로봇을 움직이더라도 작동은 직접 해야 하니까.

뭐 운동이라며 즐기시면 다행이겠다.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고 싶어 한다.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 과연 잘 굴러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긍지와 투지가 엿보이는 얼굴이라고 할 게 분명한 노학자의 얼굴.

이 사진이 왜 내게는 해골 장난감 같이 무시무시한 얼굴로만 보이는 걸까?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아저씨가 말하는 이야기와 내가 이번에 편집자로 참여한 첫 책의 저자와 생각이 같아, 앞에 투덜댔을지언정 읽으면서 참 반갑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남아있다.

‘폭력은 효과적인 수단이 아니고, 폭력적인 희망은 없다.’

“현실에 대한 냉소, 무관심, 거리두기만으로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의 정당한 분노와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 바꾸기에 나서자.”

결국 실천 방법은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는 얘기다.

어제 프랑스에서 총기 난사를 일으킨 사람은 왜 그랬을까?

알카에다가 나쁘다고 욕하기 전에, 유럽에서 받았을 이슬람인의 차별을 먼저 보도해 주었으면 어땠을까?

그들이 받은 차별과 울분이 알카에다에 가입하고 싶은 마음을 낳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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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울지 않아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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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런 단편 모음이라 해도 될 것이다. 삶을 돌아보게 해주는 작은 소품집이라 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글들이 이렇게 내 마음에 남는 건 아마 여성으로서 일에 대해 고민하는 이야기가 나와 있어서가 아닐까?

짤막하게 정리한 세 가지 이야기뿐만 아니라 책에는 여러 가지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옮긴이의 말_ 각각 다른 직업을 가진 여성 열여섯 명)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직업전선에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눌러 앉게 되었다.’ 식의 전개가 많았다. 아마 작가는 여성이 일하는 것이 보편화 되었다고 하더라도, 남성보다 보편적이지 않아 그런 식으로 일하게 된 경우가 많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들 속에는 분명히 ‘현실감’이 있다. 그래서 내가 ‘플로리스트’가 된 것 같고, 주류회사의 ‘영업 사원’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예전에 차였던 남자를 찰 수 있는 능력 있는 ‘백화점 사원’이 된 것도 같다. 아직 우리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중 많은 부분이 ‘사원’에 한정지어져 있어서 일까? 그게 한편으론 슬프면서도, 사실 다른 한편에선 다른 누구도 아닌 ‘사원’들이 책에 많이 나와서 더 동질감이 느껴졌다.

스물아홉. 서른 줄에 들어서면 적은 나이라고 느껴지겠지만, 지금 내가 느끼기에는 조금 버거운 나이다.

숫자를 몇 개만 떨어뜨려 스물여섯이나 스물일곱 정도면 정말 감사할 텐데 말이다.

남들은 결혼한다고 설치는 나이에 자꾸 일 한다고 설치고 다니니 부모님 눈에 곱게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묻기가 두려워 묻어 두기로 한다. =_=;;)

뭐 일도 결혼도 잘하면 되지! 마음을 다잡지만, 가끔 미끄럼틀 앞에서 언제 내려갈지 모르는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된다.

그런데, 사실 아직 올라온 게 없으니, 미끄럼틀을 내려올 수도 없다. 다만 올라갈 미끄럼틀 자체가 없어질 까봐 조바심 내고 있는 것이다.

‘절대 울지 않아’ 라고 외치지만, 어딘가에서 혼자 울기로 정해진 것이 ‘사회인’이란 세 글자에 담겨있는 논리가 아닐까 싶다. 남성도 아마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오늘도 현실에 발을 디디고 ‘절대 울지 않아’라고 외치며 아마 악착을 떨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잘하게 되겠지! 낙천적인 사람인양 나를 포장해 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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