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 문학동네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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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우체국에 가면 떠난 그 사람이 내게 보낸 편지가 있을 것 같다.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잡히지 않았던 파도같은 사람.

에이헙 선장처럼 목적이 있는 고래잡이도 아니면서 먼 바다만 고집한 사람이었다.

왜 그런지 물으면 기억 날것 같으냐?

아니요,

아니.

나는 모르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큰 파도에 실려 찾지 못할 바다로 떠나버렸다.

왜 그런지 물으면 생각 날것 같으냐?

아니요,

아니.

나는 모르오.

바닷가 우체국에 가면 떠난 그 사람이 내게 보낸 편지가 있을 것 같다.

그가 왜 그 밤에 배를 타고 떠났는 지 나는 모른다.

노른내 풀, 풀 나는 김 영감 말에 혹한 게지.

연락하겠다던 말, 나는 믿지 않았다.

배는 마지막이라는 말, 나는 믿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났지만 연락은 오지 않는다.

석 달이 지났지만 연락은 오지 않는다.

아마 전파가 닿지 않는 곳일 게다.

그러니 그의 소식은 우체국에서 전해줄 것이다.

왜 그런지 물으면 얘기할 수 있느냐?

아니요,

아니.

나는 모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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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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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상화에서 세밀화로

『카스테라』 속의 세계가 친숙하지만 낯설었다면, 『더블』속의 세계는 낯설지만 친숙하게 느껴진다.

『카스테라』에서 작가는 문득 등장한 기린이나 펠리컨, 광활한 냉장고로 환상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 세계는 감히 환상이 아니라면 적용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아버지가 갑자기 기린이 되어 나타나거나 냉장고에 부모님과 여러 중요한 책들, 그리고 두 명의 중국인만을 빼고 넣는다는 것은 문학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더블』로 넘어가며 이야기는 좀 더 실제에 가까워진다.

‘루디’에 등장한 용역 청소부도 정신이상자가 판치는 세상이기에 현실성이 없지 않다.

무작정 가게나 대학 강의실에 들어가 사람을 쐈다는 기사는 이제 뉴스의 단골소식이 되어버렸다.

‘비치보이스’의 짝퉁 크라잉넛과 ‘별’의 연주와 같은 사람들도 많지는 않을지언정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한다.


『카스테라』가 어설픈 그림을 그리듯 상상을 늘어놓는데 불과했다면 『더블』에서 작가는 구체적인 사건을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서 일상성을 획득한 것이다.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카스테라』-53p)에서는 너구리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끊임없이 강조함에도 작가의 말에 손을 들어주기 힘들다.

또한 농경사회의 즐거움은 토끼였을 수도 다람쥐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서울에는 73층을 넘어가는 고층빌딩이 있고, 뉴스에서 직경 십 킬로라고 했다는 몇 줄의 대화가 도심 상공에 아스피린이 떠 있다는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거대 아스피린을 실제로 느끼게 한다.(『더블』-151p)

소설은 구체화된 만큼 실체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도심 한복판에 나타난 ‘아스피린’이 지하철에 등장한 ‘기린’보다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2) 미국과 외계, 그리고 세계시민

21세기 들어서면서 큰 인기를 끈 것은 외계인에 대한 영화와 드라마였다.

외화시리즈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엑스파일.

생쥐를 잡아먹던 다이애나(V-1984년 작)가 아닌, 말끔하게 차려입고 언론을 쥐락펴락하는 외계인 애나(V-2009년 작)의 등장.

‘디스트릭트9’의 보호구역에 살며 지능은 높지만 인간의 감시를 받으며 시달리는 외계인과 ‘트랜스포머’의 외계 로봇 세계까지.

이러한 상상 속 외계 생물체는 화면 속에서 지구의 권력과 결탁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거나 그 권력에 이용당하기도 한다.

점점 노출 빈도수도 높아질 뿐더러 인간과 비슷한 습성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동질감마저 느끼기에 이른다.

21세기 최대의 히트작 ‘아바타’가 대표적이다.

주인공 제이크는 결국 외계 생물체인 ‘나비족’의 일원이 된다.

이제 외계 생명체는 살면서 한 번 만나 볼 수도 있는 대상이지, 절대 먼 존재로 느껴지지 않는다.


예전의 상상력이 ‘쥐를 잡아먹는 것을 엿보는 데’(V-1984년 작) 그쳤다면, 이제 ‘언어학자들을 모아 외계 언어를 만들 정도’(아바타-2010년 작)로 상상이 적극적이며 구체적으로 변했다.

그만큼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외계’를 ‘세계’로 치환해 생각해보면 어떨까? 『80일간의 세계여행』이 등장했던 초기산업사회만 하더라도 여행이나 무역은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한정된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세계는 가까워졌고 우리는 다른 나라에 좀 더 쉽게 갈 수 있게 되었으며, 그들에 대해 좀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민규 소설에는 유독 미국, 외계 등의 우리가 잘 모르는 세계가 많이 등장한다.

아무리 여행이 일반화된 오늘날이라고 하더라도 편도로 백만 원을 넘기는 미국여행을 해본 사람이 많을 리 없으며 우주여행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카스테라』나 『더블』 속에서 미국이나 외계는 생소한 존재가 아니다.

‘책을 읽다보면 이 사람은 언제 동물로 변하나, 미국 말고 다른 나라는 안 나오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세계는 이제 경제로 급속도로 단일화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나라에만 산다고 해도 싫든 좋든 세계시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작가는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미국과 외계를 통해 이야기 해준다.


등장인물들은 점심시간에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사오고 새로운 ‘호올스’의 맛에 집착한다.

맥주도 카스나 OB가 아닌, ‘코로나’가 그들의 메뉴다.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UFO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같은 것을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세계를 더 가깝게 느끼게 된다.



3) 청년세계에서 어른세계로

『카스테라』에서 작가가 끊임없이 이야기 하는 것은 청년실업과 그들의 꿈, 암담한 현실 등의 청년 문제다.

그러나 『더블』의 이야기는 더 이상 ‘청년’에 국한되지 않는다.

카스테라의 주인공들은 취업을 하고 싶은 고등학생과 대학생, 졸업생 등 취업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특이한 양력을 찾자면 ‘헤드락’의 유학생이나 ‘대왕오징어의 기습’에 나오는 소년들 정도일 것이다.

『더블』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있다. 주인공들은 이미 거의가 직장인이거나 사회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또 가난한 공장 노동자부터 외국의 미치광이, 그리고 마지막을 양로원에서 보내는 노년의 삶까지 작가는 인생의 폭넓은 분야를 다룬다.

이것은 등장인물 유형의 다양화로 설명할 수도 있다.

그리고 조금 비틀어 보면 다양화를 추구할 수 있을 만큼 작가가 보는 눈이 넓어졌다는 이야기도 된다.

세상에는 취업을 하지 못해서 속상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더블』에서는 이제 취업이라는 청년 문제에서 벗어나 ‘사람’이라는 존재의 문제를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이 엿보인다.

자기만 생각하는 ‘우물 안 개구리’에서 ‘어른의 시각’으로 한층 성장한 것이다.


『카스테라』에서 인간적인 것은 달에서 소변을 본 최초의 인류쯤이다.

이때 작가는 소소한 것에 대한 반항, 즉 찌질함이 인간적인 것이라 생각했다.(『카스테라』-110p)

그러나 『더블』에서 말하는 인류는 이제 세상을 좀 아는 고층빌딩 회사원이다.

그는 답답한 현실에 짜증나고 답답하면서도 ‘아스피린’을 탓할 수 없다.

그것 때문에 답답하고 화가 나는 건 사실이지만, 그런 걸로 탓해 봤자 자신만 바보가 될 뿐이라는 것을 안다.

결국 그는 현실에 적응해버린다.(『더블』-167p)

이것이 현실을 보여주기만 하는 것일 뿐일지라도 의미는 있다.

현실을 제대로 알아야 미래의 대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카스테라』가 박민규 작가의 ‘현실적응기’라고 한다면, 『더블』은 ‘현실관찰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현실을 접수한 작가가 말하는 미래를 기대할 차례다.

물론 나는 그것이 『핑퐁』에서처럼 세계를 떠나는 상상력으로 표현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건 자조 섞인 울음에 불과할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데스카 오사무의 『아톰』을 보고 일본의 어린아이들이 과학자를 꿈꾸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소망이 있다면 이런 것이겠다.

박민규의 소설을 읽고 한국의 청년들이 공평한 세상을 꿈꾸는 것.

이제 다시 근대문학을 꿈꾸어도 좋을 시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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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의 시대 - 강준만이 전하는 대한민국 멘토들의 이야기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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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 멘토……, 멘토가 과연 뭘까?

지난해에는 삶의 지침을 전해주는 멘토들의 ‘말’이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이것도 비슷한 책인가? 했지만 이 책은 좀 다르다.

이 시대의 멘토가 어떻게 ‘멘토’로 인정받을 수 있었는지 이야기하는 책이다.


그러나 솔직히 처음엔 대선 이야기가 하도 많이 나와서 다시 표지로 가서 제목을 찾아 볼 정도였다.

책의 성격과 제목이 좀 동떨어진 것 같아 불만이었다.

모르던 그들에 대해 알게 되어 유권자로서 고민이 줄어들었으니 주고받은 셈이라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그러나 저자가 책에서 밝혔던 ‘멘토의 제도화’ 시도에는 반대한다.

제도는 자의보다 타의가 많이 개입되게 마련이다.

대표적으로 봉사활동의 점수화가 많은 학생들에게 위법의 짜릿함을 맛보게 하는 제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취지는 좋지만 의지가 없는 사람들까지 껴안기를 ‘멘토’는 싫어할 것 같다.

‘멘토와 멘티의 사회화’는 어떨까?

사회적으로 자신보다 미성숙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힘이 되어주는 것을 사회적 기본 도덕률 같이 만드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예전에 받았던 도움을 아래로 흘리는 것이다.

도움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멀어져 가는 세대 간의 간극을 좁히는 사회 통합의 의미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 나오는 멘토는 총 12명이다.


1. 비전‧선망형 멘토 안철수


2. 인격‧품위형 멘토 문재인

3. 순교자형 멘토 박원순

4. 교주형 멘토 김어준

5. 선지자형 멘토 문성근

6. 멀티‧관리자형 멘토 박경철

7. 상향 위로형 멘토 김제동

8. 자유‧개척형 멘토 한비야

9. 경청‧실무형 멘토 김난도

10. 열정형 멘토 공지영

11. 자유‧도인형 멘토 이외수

12. 재미‧계몽형 멘토 김영희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멘토를 위한, 멘토에 의한, 멘토의 시대’쯤 되지 않을까?

책은 이 시대에 멘토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그가 자신의 삶을 토대로 어떻게 멘토링 해왔는지 이야기 해준다.

그리고 이것이 시대의 어떤 흐름과 결부되어 나왔는지와 그래서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도 이야기해 준다.


그리고 정치와 생활이라는 1부와 2부로 나누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비야 씨와 김제동 씨는 묶일 수 있다.

김제동 씨와 박경철 씨도 묶일 수 있다.

그러나 김제동 씨와 안철수 씨는 묶을 수 없다.

아니, 묶으면 안 된다.

너무 강한 표현인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책의 앞부분 반은 정치적 성향이 너무 강하다.

문재인, 박원순, 김어준, 문성근 씨를 나는 멘토로 생각하지 못하겠다.

그들에게 굳이 배울 점이 없다는 점이 아니다.

각광받는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왜 이 사람들을 멘토로 삼아야 하는가?

여러 멘토들을 이야기하는 책이라 함께 묶어 두었다고 생각하지만 내 속에 작은 거부감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이 책의 좋은 점은 그 한 명 한 명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있다는 점이다.

평범한 시민에 불과한 나로서는 알기 힘든 그들의 과거부터 그들이 한 말, 그리고 결정적으로 멘토들의 행보를 통해 그 사람을 비판적으로 보게 해주었다.

아마 그들이 지금이 지나 인기 없고, 별 영향력 없는 사람들이었다면 나는 작가가 보여준 통찰에 지금의 3분의 1정도만 고마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사회를 선도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나는 작가에게 온전한 1만큼 고마웠다.

나도 너무 정치 얘기만 했나?

이 책의 8장부터 13장까지는 내가 생각하는 진짜 멘토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도 사람이기에 넘어지고, 고민하고, 잘못을 시인하고, 때로 불의한 세상에 답답해하기도 한다.

하루에 몇 천, 몇 만 명이 그들의 하루 일과를 궁금해 하는 유명인이다.

그만큼 자유롭지 못하고 하는 일이 만천하에 공개되어 정신적 압박도 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을 관철해 나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 감동적이었다.


사실 나도 제 밥벌이도 제대로 못하고 서른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새로운 일을 하겠다고 부모님께 붙어 사는 기생충 같은 존재다.

그러나 나도 세상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 살고 싶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것과 공생을 위한 꿈을 꾸는 것 아닐까? 물론 아예 세상을 등지고 살라는 말이 아니다.

나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연명하며 계속 꿈을 꾸고 있다.

다만 멘토들의 말대로 그들처럼 꿈을 꾸되 모두와 함께 잘 사는 꿈을 꾸자는 것이다.

세상에서 잘났다고 추앙받는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만 가지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들은 아래를 보고 우리가 내려가서 밧줄을 내려줄 테니, 잡고 위로 올라오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이들이 멘토가 될 수 있는 건 잘 살았다기보다, 함께 사는 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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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균형 아시아 문학선 3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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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도의 현실은 옛날 우리의 이야기

인생 이야기를 하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도와주니까 매우 중요한 겁니다. 그래야 항상 변화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죠.(859p)

책 속의 삶들을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던 시절 우리나라가 떠오른다.

언론은 통제되었으며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어두운 곳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미디어가 국민의 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할을 잘 할 수 없었기에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목소리는 책으로 많이 등장했다.

이는 당시 출판계인사들이 다수 감옥에 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다.

이때 여러 인문, 사상서들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필두로 한 여러 근대소설들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근대소설이란 사회의 변화를 위해 잘못된 점을 고발하는 데 초점을 둔다’고 가라타니 고진은 말한다.

“문학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과 문학이 도덕적 과제를 짊어지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는 이야기 한다.

그러나 지금 대개의 경우 우리에게 문학은 그저 문학일 뿐이다.

문학은 순수문학을 표방하며 이제 더 이상 사회 변혁을 조장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러한 책임회피 덕분에 독자들로부터 소설 자체의 효용성을 의심받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적절한 균형’은 근대소설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책의 배경은 그야말로 ‘현대 인도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에는 네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결혼 3주년 기념일에 남편을 잃고 미망인이 된 디나.

불가촉천민인 차마르 카스트로 태어나 아버지의 이슬람 친구 밑에서 도제 생활을 하여 재봉사가 된 이시바.

이시바의 동생인 나라얀의 아들로 아버지가 직접투표하려 했다는 이유로 삼촌과 자신을 제외한 온 집안이 몰살당한 옴프라카시(이하 옴).

뛰어난 자연환경이 있는 휴양지에서 태어났지만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냉장고와 에어콘을 배우기 위해 도시로 온 마넥이다.

가끔 듣던 월드뉴스의 참혹한 일상이 지금 인도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작가는 담담한 문체 속에 날카로운 비유를 집어넣어 인도의 아픈 현실 상황을 이야기해 나간다.

그들이 겪는 부당함은 위정자들의 횡포에서 칼날 위를 걷듯 살았던 우리 옛 조상들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나라의 백정이 차마르 카스트 정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노예제도는 영미권 나라라고 없었던 것이 아니며, 여성이 독립하여 살기 힘든 구조도 온 세계에 퍼져있는 좋지 못한 습관이다.

부당한 삶의 모습은 인도만의 것 같지만, 실은 온 세계의 공통된 사항이며 그중 인도의 특수성을 보여준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말하는 아픈 현실이 전 세계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리라 생각한다.

2. ‘건강한’ 하층민의 삶

이 세상에는 많은 불행이 있지만 기쁨 또한 충만하다. 그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알기만 하면 된다.(851p)

기쁨은 짧고, 고통은 길다고 했던가?

이들의 삶이 꼭 이 말과 닮아있다.

이들이 모여서 행복하게 살았던 기간은 기껏해야 채 일 년을 채우지 못한다.

이후에 마넥을 제외한 세 명은 거지와 더부살이로 살게 된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꼭 소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의식주와 일신의 자유가 억압받는 이들의 일상이 행복하거나 축복받은 삶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앞의 삶들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평가받는 ‘건강한 삶’ 또한 그들의 것이 아님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로힌턴 미스트리는 암담한 상황 속에 있는 그들을 묘사하면서 종종 ‘건강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주인공들의 처절한 삶을 즐겁게 읽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우리는 부조리한 현실에 처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세상을 등지려 한다는 것을 안다.

무엇을 해도 더 이상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은 각박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문제 자체를 없애려고 한다.

그렇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본인도 주위사람들도 알고 있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없기에 그저 문제 지우기에 골몰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방법은 다르다.

삶은 힘겹지만 이들은 남 탓만 하고 있지 않는다.

부조리한 현실을 몰라서가 아니다.

위선적인 타쿠르 다람시의 횡포에 뒤에서 침을 뱉고 욕을 할지언정, 울며 주저앉기보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농담으로 일상을 채우고, 요리로 작은 기쁨을 만들어 낸다.

이들이 가꾸는 하루하루는 때때로 불행을 만나 일그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곧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휘어져 자라는 나무처럼 새 생활에 적응해 농담 섞인 일상이 시작된다.

이시바와 옴은 거지가 된 뒤에도 자신들의 상황을 비하하고 희망을 잃기보다 즐겁게 농담하며 웃으며 살아가는 쪽을 택한다.

보통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때에도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건강한 삶’이 아니면 무엇일까.

천대 받는 삶일지언정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건강한 삶이 작가가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인도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3. 상상하는 고통이 더 아프다

하지만 마넥은 뛰기 전에 걷는 법을 먼저 배워야 돼. 때가 되기 전인 어린애가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건 좋지 않다고.(311p)

두 사람이 옴의 신붓감을 보기 위해 시골로 가고, 말렉이 방학을 이용해 집으로 돌아갔을 때, 디나는 결국 집주인의 횡포 때문에 집을 빼앗기고 만다.

디나는 그 정도로 현실과 타협이 가능했지만 이시바와 옴에게는 비극이 줄을 잇는다.

옴은 자식을 생산할 수 없는 몸이 되었고, 이시바는 조카를 돌보며 몸의 변화를 소홀히 하다 결국 두 다리를 잘라내야 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그들의 결말은 좋지 못했다.

셋이 당한 고통과 비교하면 말렉은 부모님과 사이가 멀어지긴 했으나 경제적으로 문제없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

도심의 호텔에 숙소를 잡고 조석을 해결할 만큼 그는 자립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부정한 정치권에 항거하다 죽임당한 학생회장 이바나시와 신부 지참금을 염려한 그의 여동생들의 죽음.

디나와 이시바 옴의 이야기까지.

혼자서 잘 살아왔던 것이 미안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만 생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만다.

현실에서 생생하게 아픔을 겪은 사람은 다시 차파티를 가지고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지만, 고통을 겪지 않은 순수한 영혼은 죄책감과 생에 대한 환멸에 몸부림치며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어느 순간 현실은 말할 수 없이 참혹하다.

그러나 말렉이 거지가 된 두 친구와 차파티에 관한 농담만 나눌 수 있었더라도 결말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는 모두 알 수 없다, 직접 뛰어들어라!’ 책장을 덮으며 작가의 간절한 외침을 들은 듯한 착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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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토텀
찰스 부코우스키 지음, 석기용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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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거 미친놈 아냐?

주인공 헨리 치나스키에 대한 내 생각은 책을 읽는 내내 줄곧 이랬다.

그는 끊임없이 성관계와 술에 탐닉한다.

그는 기차를 타고 가는 일자리에서 숙소와 음식을 제공받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도 하지 않고 내린다.

그는 부모에게 의절 당한다.

그는 가끔 들어간 직장에서 유혹한 상대와 일터에서 성관계를 갖기도 한다.

물론 그 사실이 발각되면 직업을 잃는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다.

그는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청소 방법을 듣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도 감독이 말해준 것보다 자신의 생각이 중요했다.

바닥을 닦는 일이 그에게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구석에 놓인 담배꽁초 따위는 그냥 두어도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헨리 치나스키가 처음부터 미쳤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는 ‘내가 또라이라는 사실을 학창시절에 처음 알았다’(177p)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그건 따돌림을 당했을 때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는 얘기다.

어쩌면 이런 일에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며 자기를 지켰기 때문에 그가 미쳐갔을지도 모른다.

미치면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아니면 양탄자 위에 토한 벌로 토사물을 먹이려는 엄한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37p)

그가 내게 ‘미친놈’으로 정의 되는 사람이 된 이유를 하나로 정의하기는 역시 힘들다.

그는 잡역부이기도 하지만, 로스앤젤레스 시립대학에서 2년간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소설을 쓰고 있는 습작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단편소설을 쓰는 일을 꽤 꾸준히 해나갔으며 결국 그 중 「맥주에 절은 내 영혼은 세상의 모든 죽은 크리스마스트리들보다 더 슬프다」라는 단편은 여러 작가를 키워냈다는 미국 최고의 문학잡지 『프런트파이어』의 발행인인 클레이 글래드모어에게 낙점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뿐, 이후로 그가 변변한 작품을 썼다는 말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에피소드를 넣은 이유는 그가 미국최고의 문학잡지 편집장을 감동시킬만한 사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즉 아무리 이상한 말을 짓거리던 허랑방탕한 사람이라도 세상을 보는 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2. 부조리한 세상을 부조리한 사람이 이야기 한다

나는 그가 공부한 학문이 ‘저널리즘’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널리즘이란 사회의 모순점을 찾아내 고발하는 것이 아닌가?

내 생각이 맞다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시대 고발은 대개 여러 잡일거리를 나열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빵공장에서 그는 힘든 노동으로 미쳐가는 사람, 경영자만 배불리는 구조, 인간답지 못한 대우를 받는 노동자, 사회의 변화로 망하는 회사 등.

이 사실은 그가 실크 스타킹을 멋지게 신은 다리를 부모님보다 사랑하며, 싸구려 포트와인을 물보다 자주 마신다는 것만큼이나 진실하다.

그러나 이것은 저널리즘에서 흔히 사용하는 객관적 사실 전달과는 구별된다.

철저히 헨리 치나스키의 눈으로 보고 그의 머리로 생각한 주관적 이야기의 나열이다.

게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이 지독한 색광에 주정뱅이임을 독자는 잊지 않고 있다.

독자는 그의 말을 딱히 신뢰하지도 않으면서 반신반의하며 듣게 된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세상을 보게 된다.

3. ‘미친놈’의 이야기가 아닌, ‘미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이야기

역자 석기용 씨는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대답해보자. 거창하게 말해서,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소외, 수단화된 인간관계의 절망과 위선에 저항하며, 인간 본성의 실현과 진정한 인간관계의 회복을 추구하는 자유인, 혹은 아예 내친 김에 한술 더 떠서,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해 냉혹한 현실의 삶 속에서 현대인의 나아가야 할 바를 꿋꿋하게 실천하려 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인가? 글쎄, 아무리 좋게 봐줘도 그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치나스키는 그렇게 단순히 악당으로 분류해 미워할 수 있는 그런 사람도 아닌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주정뱅이 치나스키.

작가는 그를 통해 자본이 최고 덕목인 황금만능주의 사회에서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가장 낮은 자의 삶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사회의 잘못으로 돌리는 사회주의적 모순도 저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 자기계발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열심히 사는’ 인물을 넣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일부러 도덕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밑바닥에 있는 인생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일단 그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들려주는 과정 속에서 그가 얼마나 인생을 제대로 허비해 나가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넓게 깔린 그 잔디 위에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라는 꽃을 조금씩 섞는다.

잔디와 꽃이 어우러져 있는 공간은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일상의 공간이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누렇게 죽은 잔디에 초록색 페인트를 칠한 것일 뿐이며, 꽃 또한 반영구지만 향기 없는 조화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앞에서 이야기 했듯 저자는 사회의 문제점만을 꼬집지는 않는다.

역자 석기용 씨는 “치나스키는 뒤죽박죽 엉터리 같은 인간이지만, 그런 모습들에서 무엇에 주목해야 할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라는 말로 치나스키에 대한 논평을 유보한다.

솔직히 치나스키는 책임감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방탕하고 게으르다.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면 깜짝 놀랄 일을 서슴없이 한다.

그러나 그런 그도 사람이다.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

그는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한다.

잡지 출판사들의 배급총판, 신문사의 식자실, 자동차 부품 창고, 지하철 포스터 붙이기, 야간 청소 노동자, 발송계원, 건물 보수와 경비원, 미술재료 도매상 발송계원, 형광등 설비 창고일 등. 그의 방탕함이 그 일을 지속하지 못하게 한 적도 있지만, 과도한 노동이 그를 갉아먹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사람이 견디지 못할 노동은 사람을 기계화 한다.

헨리 치나스키가 그러게까지 변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는 개인의 잘못도 있지만 사회의 잘못도 무시하지 못한다.

원인을 제공한 것은 사회이니 사회의 잘못이 더 크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이 사실을 눈치 챘을 때에야 비로소 이 소설은 내가 ‘미친놈’의 이야기가 아닌, ‘미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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